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
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
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
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
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
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
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
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
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
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
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
"아 그러니까..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미디어에서는 별로 관심을 안보이는
그런 분들을 모시고 인터뷰를...."
"제가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은데..."
처음 전화를 걸어 간단하게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그는 매우 당
혹스러워 했다.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한 때 이 나라 축구의 희망으로 불리울
만큼 유명세를 치렀던 사람답지 않게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축구천재 김병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팬들이 많다는 말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그럴리가 있나요. 제가 뭘 했다고..."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던 자신감 넘치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두 다리에 남은
깊
은 수술 자욱처럼 쓸쓸한 모습일까. 그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머리 속은 온통 그의
현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인터뷰 대신 그냥 저녁이나 같이
하자
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97년 초에 팀이 해체됐어요. 귀국해서 한일 생명에 입단 계약을 했는데..."
92년 7월. 그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
었다. 수술 이후 약해진 발목 탓에 양쪽 무릎까지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리고, 93
년부터 코스모 석유에서 뛰기 시작했다.
"조건이 좋았어요. 환경도 좋았고..."
J리그도 아니고 일본실업리그 소속팀, 그 것도 만년 하위권으로 처지는 팀이었지만
그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국내 최고액 연봉 선수 못지않은 금액
이었다. 4년간 그가 출장한 경기는 대략 100여 게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70
골 이상 넣은 것 같다고 했다.
"파격적이었죠. 감독님도 저를 믿어줬고... 팀 훈련은 거의 못했어요. 하루 두시간
정도 훈련 하다가 집에 가서 쉬고, 그러다 시합 있으면 나가고..."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푸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 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솔직히 말하면 98년까진... 뭐랄까 원망 같은게 있었어요. 왜 나만..."
홍명보 서정원 노정윤 이임생 김봉수... 동년배의 고대 출신 선수들이 팬들의 뜨거
운 사랑을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이국 땅에서 쓸쓸히 지켜봐야하는
그의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그런거 없어요. 내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부인 은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채우
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단다.
그
리고, 아들 "다훈"과 딸 "사이"가 태어났다.
"생긴건 날 닮았는데 축구보다는 예능 쪽에 재능이 있는거 같아요. 재주는 엄마를
닮았는지..."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늘어났다. 그의 일본 생활은
다행스
럽게도 평화로운 것이었다.
"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천황배에 나갔을 때 나고야 그램퍼스랑
붙었
어요. 스토이코비치도 그 때 나왔는데 우리가 이겨버렸어요."
J 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경기에서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
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
었다.
"93년에 국내 복귀설이 나왔던건 사실이랑 달라요. 당시엔 한국프로축구에 별 매력
을 못느꼈어요."
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
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이 후유증은 나타나
지 않았지만 내가 김병수 입장이라도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
다.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은 많지 않다. 다행이 아들 다훈이에게 보여주려고
그가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선수들과의 경기였지만 그는 여전히 유연한 몸놀림과 정확
한 킥솜씨를 과시하고 있었다. 필름을 보며 지금이라도 몸을 만들면 프로리그에서
하프 게임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역시 그건 나의 욕
심일 뿐이었다.
"한 게임 한 게임 진통제 맞고 나가서 뛴 거에요."
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시 아시안컵
대패 이후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대표팀에 그가 기용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
적
이 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박경화 씨의
주선
으로 오이타 팀에 입단한 것이다.
"이상하게 거긴 적응이 어려웠어요. 한국 선수들도 많았는데..."
갈등 끝에 은퇴를 결심하고 짐을 꾸린 것은 98년 봄. 조용히 귀국한 그는 모교인
경
신고에 잠시 머무르다 고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됐다.
당시 고대는 94년 이후 계속된 스카우트 실패로 라이벌 연대는 물론 아주대 한양대
등에 밀려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남대식 감독이 퇴진하고
김성
남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고 있던 상황.
"좋은 후배들을 만났죠. 후배들도 저를 따랐구요."
그때 만난 선수들이 지금 올림픽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
과 부천의 이성재, 부산의 박민서 등. 하지만 장대일 서동원 이동욱 성한수 등
프로
1순위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정상남 정재곤 서기복 이승엽 같은 기라성 같은
선
수들이 버티고 있던 연대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전력이었다. 결국 그해 정기전은
2 대 0으로 연대의 승리.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
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
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접전 끝에 3 대 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와
대구대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대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를 4 대 3으로 꺽고
우승컵을 안았다.
"아이들 가르치는게 재미있어요. 체질인가봐. 하하하..."
고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 당시 고대
축구부
는 지도 체제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결국 김성남 감독도 99년 6월 뚜렷한 사유없
이 해임되고 만다.
"순호 형이 추천을 했어요. 처음엔 못믿어워 하셨죠. 감독님도 안계시니까. 지난번
대구 대회에서 우승을 하니까 이젠 학부모님들도 신뢰를 하세요. 감독님도 이제 안
심하시고..."
올해 초 프로축구 포항은 포철공고 김경호 감독의 인솔 하에 연고 고교팀의 유망
선
수들을 브라질에 연수를 보내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코치 신분으로 팀을 이끌게
된 김병수는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이다.
"페어 플레이죠. 절대로 거친 반칙 못하게 해요.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거에요."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
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
다.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
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 지
않
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
"때리긴 왜 때려요. 이해를 시켜야죠. 능력이 부족해서 노력해도 안되면 할 수
없는
거에요.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혹시 선수들이 못하면 때리기도 하느냐는 질문에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페어 플레
이와 스포츠맨쉽이 그의 교육방침 1호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했다.
"선수들도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어요. 가르쳐보니까 알겠어요. 이론이 중요해요.
한
번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을 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이해해요. 한글도 잘 못
쓰는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고 충격 받았어요."
98년 귀국한 이후 후배들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한없이 고마웠다. 능력은 나중 문제고 적어도 기본적인 마음 자세
만큼은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갖춘 셈이다. 천재답게 한국 축구의
가
장 큰 맹점을 그는 감각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요즘 살이 찌나봐요. 몸이 불어서 무릎에 조금씩 부담이 와요. 그래서, 시범을 못
보여주는게 아이들한테 미안하죠. 이거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되는데...하하하."
지도자가 선수들을 장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미련한 방법
이 폭력으로 겁을 줘서 쥐어잡는 것이고 가장 현명한 것이 실력과 품성으로 이해시
키는 것이다.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코치 김병수는 전자의 경우는
아니었다.
"공부하고 싶죠. 기회가 주어지면 유학을 갔으면 해요. 나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이론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죠."
그의 기본적인 축구 철학은 이 글 서두에 소개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하여"라는
노트에 가감없이 적혀 있다. 때마침 개막한 유로 2000에 나타난 플레이 경향은 공교
롭게도 그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러나, 우연이 결코 아니다.
"움직임을 강조하죠. 플라티니나 마라도나를 좋아했어요. 그 땐 그 선수들이 제일
잘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지났어요. 모든 선수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야해요. 기본 기술이 점점 더 강조되는 거에요."
그 또한 스페셜리스트 가운데 하나였다. 한 번에 상대 수비벽을 무너뜨리는 스루
패
스는 김병수의 특기였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스루패스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결국 공간 싸움이에요. 압박을 하는 이유가 미드필드에서 잘하는 선수를 그냥 둘
수 없으니까 미리 전방에서 끊는거에요. 그리고 그 간격이 점점 좁아져요. 그래서
공격수들의 지능적인 움직임이 중요해지는 거에요. 공간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필
요하다는 거죠."
그는 아주 진지한 자세로, 그리고 성의를 다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 나갔다. 이해
하기 쉽도록 상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선수들의 움직임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이야기할 때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 기억 속의 축구천재 김병수가 아님을
깨달
았다. 지난 시절의 영욕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포철공고와 남강고의 경기가 끝난 후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샤워를 하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포철공고 선수들은 트랙
한
켠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중요해요. 우리나라에선 거의 안하는데 90분을 뛰고 나면 어떤 선수고 근육에
무리
가 가게되요. 특히 어린 선수들은..."
교과서에는 스트레칭 후에 런닝도 해야 한다고 나와 있는데 런닝은 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운동장에서 게임 중이라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하하하... 그게 아니고. 처음엔 시켰는데 선수들이 힘들어 하더라구요. 그런데 가
만히 생각해보니까 나도 싫었어요. 경기 내내 뛰었는데 또 뛰는 게 부담스러운
거예
요. 억지로 시킬 수도 있겠지만 선수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할 필요가 없다고
생
각했어요. 하고 싶지 않을 것을 하면 효과가 없지요."
덕분에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고대에서 잠시 후배들을 지도할 때 결승에
올랐다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은 모양이었다. 우승을 했으니 높은 사
람들 앞에 도열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인사 받는 것보다 선수들이 더 중요한 거잖아요. 경기 끝나고 다시 운동을
시켰죠.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난리가 났죠. 김병
수가 대체 누구냐고..."
그의 일상은 남들과 다름없이 분주하다. 많지는 않지만 졸업반 선수들의 진로도 챙
겨야 하고 내년 시즌에 대비해 1, 2 학년 선수들 지도에도 신경 써야 한다. 감독이
부재중이라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 같았다.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기대할만 해요."
브라질로 연수를 떠난 선수들이 복귀하는 내년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포철공고는 이동국이 재학 중이던 97년 전국 대회
3관왕을
차지하며 고교 무대 최강으로 군림했지만 최근엔 부평고에게 밀리고 있다.
하지만,
승리를 위한 축구를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언제나 목표는 우승이죠. 하지만 우승은 하늘이 도와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경기장
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죠."
공식 대회는 아니지만 지방마다 도지사배 대회 같은 지역 대회가 종종 열린다.
어쩔
수 없이 출전해야 하는 경우가 새기는데 문제는 상대 선수들이란다. 정식으로
축구
를 하는 선수들이 아닌 경우 실력에서 밀리면 과감한(?) 반칙을 해오는데 대책이 없
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시키는 선생들이 더 문제죠. 우리 애들은 절대 그렇게 못하게 하는
데... 한 번은 너무 심하다 싶어서 타일렀죠. "너희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축구를
잘하는 것보다 스포츠맨쉽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라도 그런 이야기를
해줘
야 할 것 같아서... 애들은 아직 잘 모르니까요."
어쩐지 그 앞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기만
했던 선수 생활의 미련을 접고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꿈"이
반
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유럽 무대를 밟고 싶어요."
선수 시절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 또한 세계적인 리그에서 세계적인 선
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 프로리그에서
뛰
고 싶다거나 지도자로 나서면서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은 많이 봤어도 유럽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사람은
처음이었
다.
"마흔 다섯 되기 전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받는게 목표에요. 황당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노력할거예요."
그러고 보면 외국인 감독을 데려오는 경우는 많아도 우리 지도자들이 외국에 나가
외국 선수들을 지도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이
태리나 스페인 1부 리그에서 한국인 감독을 볼 수 있다면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
닐 것이다.
갑자기 우리도 젊은 사람들이 프로팀이나 대표팀 감독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성급한 이야기 같지만 네델란드의 레이카르트를 보면 꼭 허황한 생각만은 아
니지 않은가. 물론 한국적 현실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이제 머지 않은 장래에 90년대를 풍미했던 우리 대표 선수들이 하나 둘 씩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들 가운데 다시 우리 대표팀
감
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대표팀 감독은 하늘이 내리는 자리죠. 그게 목표가 될 수는 없고... 그래요. 나랑
같이 뛰었던 선수들도 언젠가 은퇴하면 지도자로 다시 만나겠죠. 하지만 굳이 의식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나는 내가 할 일이 있는 거니까..."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생계에 위협을 받을 만큼 힘든
생활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수로서 겪었던 불운의 늪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미래까지도 놓치고 있다면 그건 정말이지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도 비참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참으로 밝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이제
마지
막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은 지금 불행하십니까?"
。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시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천재" 운운하며 사탕발린 소리 늘어 놓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 그를 부상에서 지켜주는 일. 그가 부상 당하지 않게 축구 환경을 바꿔주는 일 말
이다.
그가 다시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선수가 아니니 운동장 안에서 다칠
일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의 축구 인생에서 다시는 부상으로
신음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팬들이 도와준다면 이 번에는 가능할
것이다.
"선수로서 나는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축구는 여
전히 제 꿈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흔들리고 나태해질 땐 이 말을
되새기며
의지를 다집니다.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