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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곡/가사방 스크랩 시조 시조에 나타난 조선후기 風俗圖 - 李鼎輔 시조를 중심으로-
화랑수 추천 0 조회 64 15.01.30 2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시조에 나타난 조선후기 風俗圖

 

- 李鼎輔 시조를 중심으로-

 

 

김 상 진

 

 

Ⅰ. 시작하는 말

Ⅱ. 도시에서의 유흥적 분위기

Ⅲ. 향촌에서의 소박한 생활상

Ⅳ. 탈권위의 진솔한 표현

Ⅴ. 맺음말 : 조선후기 풍속화와의 관계

 

 

<국문 요약>

 

이 논문은 시조를 대상으로 삼아 조선후기의 풍속도를 고찰함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문학은 삶의 미메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을 통하여 어떤 시대와 사회를 가늠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후기는 사상, 제도, 문물 등에서 전기사회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학양식인 시조에도 나타나게 된다. 본고에서는 후기시조 가운데 대표격인 이정보 시조를 중심으로 시조에 나타난 조선 후기의 풍속도를 조망하였다.

 

연구에 있어서 이정보, 또는 이정보의 시조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닌다.

우선은 다수의 작품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따른 결과로 다양한 내용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대부 작가로서 손꼽히는 多作 작가인 이정보는 약 백 여수의 시조를 남기고 있으며 그것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다음은 시조시인으로서 그가 지니는 다층성이다. 그는 신분으로는 전기시조의 작자층과 동일한 사대부계층으로 전기시조와 동일한 범주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조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 그러면서 후기적 특성을 아우르는 작품을 동시에 창작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으로써 전기시조에서 후기시조로 변화해 가는 변모 양상과 함께, 후기적 특성을 추찰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정보 시조를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후기의 풍속도는 크게 세 가지로 범주화 할 수 있다.

 

첫째는 도시의 유흥적 분위기이다. 조선후기에는 상업도시의 발달과 함께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도시에서의 유흥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도시적 삶의 모습이 후기시조에 나타나게 된다.

 

둘째는 향촌에서의 소박한 생활상이다. 조선전기의 자연이 道의 공간이 되면서 강호시조를 탄생시켰던 것과는 달리, 후기의 자연은 생활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전원 또는 전가시조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정보의 시조 또한 이러한 후기적 모습을 그려낸다.

 

셋째는 탈권위적인 표현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세태의 경계 및 풍자와 성적 욕망의 팽배로 나눌 수 있다. 경계와 풍자뿐만 아니라 성적 욕망을 다룬 시조들이 조선전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등장하는 어휘라든지 어조가 무척 적나라하고 직설적인 것으로 변모되어 전기시조와는 전혀 다른 미의식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이들을 사설시조의 형식에 얹음으로써 그것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정보 시조를 비롯한 후기 시조에서 보이는 이러한 모습은, 전기시조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편 후기시조에서 발견되는 조선후기의 풍속도는 비슷한 시기의 풍속화에서도 발견되는 양상이기도 하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문학과 예술의 상동성을 가늠케 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 모든 것이 삶의 미메시스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제어 : 미메시스, 이정보시조 , 조선후기, 풍속도, 도시유흥, 경화사족, 향촌, 탈권위, 풍속화, 상동성

 

 

Ⅰ. 시작하는 말

 

모든 문학이나 예술은 삶의 미메시스이자 거울이다. 시조 또한 예외가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 여타의 문학보다 더욱 강하게 삶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반영한다. 그것은 문학을 단순한 창작물로 보기보다는 道를 표현하는 載道之器나 貫道之器의 도구로 보는 성리학적 문학관으로 말미암는다. 그만큼 시조는 한 개인의 내적 가치를 형상화 하는데 유용한 장르이며, 그러한 내적 가치는 시대적 이념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성리학적 이념이 강했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러한 가치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후기적 변화는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기시조와 후기시조는 담당계층이나, 내용, 형식, 미의식 등 여러 방면에서 변별된다. 후기 작가 가운데 三洲 李鼎輔(1693~1766)는 신분으로만 본다면 사대부로서 전기시조의 담당계층과 동일하면서도 여타의 부분에서는 후기시조의 특성을 담은 시조를 다수 창작함으로써 주목된다.

 

이정보 시조가 주목받는 이유는 백 여수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대부시조의 시적 대상이나 형식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1] 즉 일반적인 사대부시조가 忠孝나 性情美學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이정보의 시조는 애정과 같은 개인적인 정서를 발화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성적 욕망을 담은 사설시조도 포함하고 있다.2] 주지하다시피 조선 후기는 문화의 주 담당층이 사대부에서 서민계층으로 이동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사대부 중심의 문학이던 시조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그것이 지향하는 미학 또한 사대부적인 것에서 서민적인 것으로 변모되거나 그러한 것이 포함되었다.

 

요컨대 이정보 시조는 조선사회의 후기적 변화양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는 명문대가 집안의 자손으로 명실공이 사대부 계층의 문인이다. 물론 그의 시조가 전적으로 서민적 미학에만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충효를 비롯한 사대부적 관념이나 미의식을 노래한 작품 또한 다수 존재한다.3] 말하자면 이정보 시조는 한편으로는 사대부시조가 중심이 되었던 전기적 특성을 수용하면서, 서민 중심의 후기적 변화에도 반응한 것이라고 하겠다.

 

시조 작가로서 이정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4] 이는 다작의 시조 작가들, 이를테면 松江 鄭澈(1536~1593)이나 孤山 尹善道(1587~1671) 등에 대한 관심과는 대조적 이다.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는 官人으로서의 위치나 작가적 역량에서 이 정보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다는데서 비롯되겠지만, 그의 시조에서 보이는 남다른 행보라든지 사대부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문집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연구를 어렵게 하는데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근자에 이르러 시조에서 보이는 독특함이 개성으로 여겨지고, 沈魯崇 (1762~1873)의 <桂纖傳>에서 이정보에 대하여 언급한 이야기가 소개되면서,5] 조선후기 시조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정보 시조를 중심으로 조선후기의 풍속도 6] 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1]박노준, ?李鼎輔 時調와 退行 속의 進境?, 『古典文學硏究』8집, 한국고전문학연구회, 1993, 138~172쪽 에서는 이정보 시조의 특성을 ‘문제성’이란 용어로 함축하며 정통 사대부시조로 보이는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이 논문은 후에 박노준,『조선후기 시가의 현실인식』,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98, 58~91쪽에 ?李鼎輔와 士大夫的 思惟 극복?이란 제목으로 부분 보완되어 재수록 되었다.

2]정흥모, ?이정보의 애정시조 연구?, 『어문논집』42집, 안암어문학회, 2000, 94~104쪽과 김성면, ?이정보 애정류 사설시조의 구조 고찰?, 『시조학논총』 21집, 한국시조학회, 2004. 271~294쪽에서는 이정보 시조가운에 이러한 방면의 시조를 주 텍스트로 삼고 있다.

3]진동혁,?이정보 연구?, 『어문논집』14?15합병호, 고려대 국어국문학회, 1973, 334~351쪽에서는 이정보의 시조를 懷古, 脫俗, 愛情, 無常嘆老, 醉樂, 禁戒, 遊興, 農夫, 太平, 孝道, 戀君, 雄志, 佛敎, 物性의 15항목으로 분류하였고, 구수영, ?이정보의 시조연구?, 『論文集』2권6호,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1975, 1509~1525쪽에서는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구분하여 故事懷古, 江湖閑情, 相思, 寄託諷刺, 人生無常, 懷疑, 悠悠自適, 太平閑民, 遊樂, 訪水尋山戀君孤節, 哀傷, 農村生活, 自然禮讚, 修養, 豪氣와 故事懷古, 男女關係, 神仙, 離別哀傷, 安分知止, 太平頌祝, 民俗, 寄託諷刺 등으로 분류하였다. 양자 차이는 있지만 효도와 연군, 태평, 탈속, 태평, 안분지족, 웅지, 호기 등 다수에서 사대부적 관념이나 미의식을 노래한다.

4]이정보 시조에 대한 연구는 1990년 즈음부터 본격화되었다. 각주 1), 2)에서 거론된 연구업적과 함께 김용찬, ?이정보 시조의 작품세계와 의식지향?, 『우리문학연구』12집, 우리문학회, 1999, 137~154쪽. 남정희, ?이정보시조 연구?, 『한국시가연구』8집, 한국시가학회, 2000, 233~252쪽. 이상원,?이정보 시조 해석의 시각?, 『한국시가연구』12집, 한국시가학회, 2002, 165~193쪽. 조태흠, ?이정보 시조에 나타난 도시시정의 풍류?, 『한국문학논총』38집, 한국문학회, 2004, 91~142쪽. 전재강, ?이정보 시조의 성격과 배경?, 『우리말글』36, 우리말글학회, 2005, 179~207쪽. 김상진, ?政客 이정보와 시조, 그 逸脫의 의미?『시조학논총』27집, 한국시조학회, 2007. 143~174쪽 등을 꼽을 수 있다.

5]김영진, ?효전 심노숭 문학론』, 고려대 석사논문, 1996, 37~42쪽.

6] 풍속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시대의 세정과 풍습을 그린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그 시대의 유행시대의 유행과 습관 따위를 나타내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것이다. 본고는 두 번째 .의미이다.

 

 

Ⅱ. 도시에서의 유흥적 분위기

 

조선 전기사회와 후기사회가 제도와 문물, 사상, 가치관 등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의 중심에는 화폐 유통을 비롯한 상업의 발달이 자리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사회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소비적 유흥문화가 형성되었다. 다음의 시조는 이러한 당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⑴ 노??치 조코 조흔 거슬 벗님?야 아돗던가

春花柳 夏淸風과 秋月明 冬雪景에 弼雲昭格 蕩春臺와 南北漢江 絶勝處에 酒肴爛漫?듸 조은 벗 가즌 ?笛 알릿?온 아모가이 第一 名唱드리 ?례로 안? 엇거리 불너 ?니 中大葉 數大葉은 堯舜禹湯 文武?고 後庭花 樂戱調? 漢唐宋이 되여잇고 騷聳이 編樂은 戰國이 되야이셔 刀?劍術이 各自騰揚?야 管絃聲에 어?엿다 功名도 富貴도 ? 몰?라.

男兒의 豪氣를 나? 됴하 ?노라. (작자미상, 『甁窩歌曲集』1092)

 

 

위 시조는『甁窩歌曲集』에 수록7] 된 것으로,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8] 노래와 함께 계절마다의 좋은 경치와 勝地, 술과 안주, 악기, 명창 등등을 나열하며 堯舜禹湯의 시절과도 같은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것을 주지로 삼는다. 봄의 꽃과 버들, 여름에 부는 맑은 바람, 가을과 겨울의 밝은 달과 눈 내린 경치와 弼雲臺 ? 昭格臺 ? 蕩春臺9] 를 비롯한 한강 남북의 절승지, 술과 안주는 흐드러지고 해금과 피리 소리는 좋은 친구와도 같다. 그런 가운데 아름다운 명창들이 부르는 중대엽과 삭대엽, 후정화와 낙희조의 즐거움을 각각 태평성대라 불리는 堯舜時代와 격조 있는 문학과 문화를 자랑하던 漢唐宋 시대에 견준다. 또 소용과 편락은 戰國時代가 되어서, 칼을 다루는 솜씨가 관악기와 현악기의 소리에 어우러진다고 노래한다. 중장에서 묘사된 이러한 내용으로써 풍류남아의 豪氣 넘치는, 질탕한 유흥의 현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즐거움에 탐닉한 화자는 부귀공명도 마다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지명이라든지 술, 악기, 명창 등의 등장으로 시조 ⑴은 도시의 유흥 공간, 즉 妓房과 같은 장소에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10] ⑴에서 보이는 이러한 광경은 조선후기의 기방에서 펼쳐지는 유흥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11] 이러한 도시의 유흥문화는 중인계층에 의하여 주도되었다.12]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확산됨에 따라 사대부계층까지도 가담하게 되었고, 그 계층은 주로 京華士族이었다.13] 경화사족 가운데 대표적인 문인으로 꼽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정보로, 도시풍류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7]작품의 인용은 박을수, 『한국시조대사전』(상?하) (아세아출판사, 1992.)에서 주로 하였으며, 심재완, 『역대시조전서』(세종문화사, 1972)를 참조하였다.

8]이 노래가 연행될 때 編數大葉으로 불렸으며 작품이 수록된 가집의 연도, 『海東歌謠』(周氏本)에 金壽長의 소작으로 기록되어 있는 정황 등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9]필운대는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白沙 李恒福의 집터이며 양춘대는 삼청동에 있는 누대이다. 이 가운데 필운대는 한양에서 가장 이름난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허경진,『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랜덤하우스, 2008, 37~42쪽).

10]고동환,?18세기 서울의 상업구조 변동?, 이태진외, 『서울상업사』, 태학사, 2000, 240쪽에 따르면 이 시기 도시를 중심으로 色酒家가 본격적인 유흥업의 성격을 띠게 된다. 강명관, ?조선후기 서울의 중간계층과 유흥의 발달?,『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165~171쪽에서도 조선후기에 와서 妓房이 발달후기에‘기방문화’가 형성되기에도시 유흥의 한 부분을 담당후고 있음을 설명한다. 이후 박애경,?조선 후기 시조에 나타난 도시(都市)와 도시적(都市的) 삶?, 『시조학논총』16집, 한국시조학회, 2000, 386~387쪽. 등에서도 도시유흥은 공개된 장소 문학 예다양한 공간에서 발달후였는데 기방 또한 그 하나라고 지적한다. 특히 가곡과 중심으 기방과 풍류방을 중심으로 수용층을 넓혀갔다고 본다.

11]특히 이 노래는 『병와가곡집』과 함께『靑丘永言』?『해동가요』의 주요 가집을 비롯한 8개의 가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 그만큼 당시에 많이 불리던 노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재완, 『역대시조전서』, 세종문화사, 1972, 219쪽 참조.

12]강명관, 앞의 책, 171~188쪽.

13]조태흠, 앞의 논문, 5~11쪽.

 

 

⑵ 佳人이 落梅曲을 月下에 빗기 부니

樑塵이 ?리는듯 남은 梅花 다 지거다

내게도 千金駿馬이시니 밧고와 볼가 ?노라.

   (李鼎輔, 『甁窩歌曲集』417)

 

⑶ 가을밤 ?은 달에 반만 ?온 蓮곳인 듯

東風細雨에 조오? 海棠花? 듯

아마도 絶代花容은 너?인가 ?노라.

 (李鼎輔, 『甁窩歌曲集』(周氏本) 321)

 

 

위의 두 시조는 모두 이정보의 작품이다. 풍류의 현장에는 기녀와 음악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두 시조 또한 이들을 노래한 것으로, 一瞥하는 것만으로도 풍류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⑵와 ⑶은 모두 여성을 詩的 대상으로 삼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⑵에서는 여성의 미색을 두고 佳人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⑶에서는 한 송이 꽃에 비유를 한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화자의 흥취를 돋아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써 기녀임을 알 수 있고 그 공간은 妓房임을 짐작케 한다. 시조 ⑵에서는 佳人으로 묘사된 기녀가 달빛 아래서 피리로 <落梅曲>을 연주한다. 가인의 연주는 매화 꽃잎을 떨어뜨릴 정도로 훌륭하고, 화자는 그 연주솜씨에 매료된 듯, 자신의 천금준마와 맞바꾸겠다고 농조 어린 칭찬을 한다.

 

시조 ⑵는 기녀의 연주솜씨에 대한 찬탄을 주지로 삼으면서도 ‘가인’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기녀의 용모에 대한 칭찬을 아우른다. 즉 가인이 연주하는 <낙매곡>이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는 ⑶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때 좀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⑶은 여성의 아름다운 용모를 꽃에 비유하게 되는데, 그 묘사가 매우 섬세하다. 단순하게 연꽃, 또는 해당화라고 하지 않고 꽃이 피어있는 배경과 그 상태를 함께 묘사한다. 달 가운데서도 가을 달은 더욱 밝고 빛난다. 밝은 달빛 아래, 연꽃은 만개한 것이 반만 피었다고 하여 마치 수줍어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해당화 또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바람[東風]과 가는 비를 맞고 졸고 있다고 하여 가녀린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⑶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어여쁜 여성의 美色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두 시조에서 보이는 이러한 모습은 조선후기의 유흥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여성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 또한 다분히 희롱적이다. 이는 다음의 시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⑷ ???튼 저 閣氏 남의 肝腸 그만 긋소

몃 가지나 ?야쥬로 비단장옷 大緞치마 구름갓튼 北道다? 玉비녀 竹節비녀 銀粧刀 金粧刀 江南셔 나온 珊瑚柯枝?? 天桃 금가락지 石雄黃眞珠당게 繡草鞋를 ?여쥬마

저 님아 一萬兩이 ??리라 ??치 웃?드시 千金? 言約을 暫間 許諾 ?시소.

(李鼎輔, 『甁窩歌曲集』1012)

 

앞서 기녀를 꽃에 견주어 희롱했던 화자는 ⑷에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생매’에 비유한다. 화자가 여성을 생매에 비유한 것은 남성인 화자의 애간장을 녹이기만 할 뿐, 호락호락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을 사로잡기 위해 화자는 비단으로 만든 호사스런 옷이며,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비녀, 은장도 ? 금장도, 금가락지 등 온갖 장신구를 다 동원하며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작자는 ‘생매같은’ 각씨와 미래를 기약하고 사랑을 다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잠깐의 허락’ 만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시적 분위로 봤을 때, 시조⑷ 역시 기방에서 기녀와 수작하며 희롱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정보 시조에서 이와 같은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는 것은 그의 삶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어서 음악과 기생과 더불어 즐기었다는 기록도 전한다.14]

 

이상의 시조에서 보이는 모습은 전기시조와는 확실히 차별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화폐경제의 등장이다. 즉 경제력을 갖춘 도시가 형성되었고,15] 경제력을 갖춘 도시에는 ‘소비적 ? 유흥적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16]  이러한 유흥을 주도한 것은 주로 중인계층이지만 사대부 계층인 경화사족으로까지 확대 되었다. 따라서 대표적인 경화사족이었던 이정보의 시조를 비롯한 일련의 시조에서는 이와 같은 후기도시의 모습을 반영하게 된다. 17]

 

14]沈魯崇, 『孝田散稿』<桂纖傳> : “태학사 이정보가 늙어 관직을 그만두고 음악과 기생으로 자오하면서 지냈는데, 공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남녀 명창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도 계섬을 가장 사랑하여 늘 곁에 두었는데, 그의 재능을 기특히 여긴 것이요, 사사로이 좋아한 것은 아니다 太史李公鼎輔 老休官 聲伎自娛 公妙解曲度 男女諸先唱者 多出門下. 最愛纖 常置左右 奇其才 實無私好.”(심노숭, 『눈물이란 무엇인가』, 김영진옮김, 태학사, 2001, 81쪽, 252쪽)

15]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최기숙,?도시, 욕망, 환멸 : 18?19세기 ‘서울’의 발견?,『고전문학연구』, 한국고전문학회, 2003, 421~426쪽. 정인숙, ?조선후기 시가에 나타난 도시적 삶의 양상과 그 의미?,『어문학』103집, 한국어문학회, 2009, 281~289쪽 참조.

16]강명관, 앞의 책, 160~163쪽.

17]정인숙, 앞의 논문, 289~301쪽에서는 조선후기 시가에 나타난 도시적 삶을 ‘상업의 발달과 물질세계의 관심표출’ ‘화폐경제의 정착과 치신 문제의 대두’ ‘도시 유흥의 확산과 새로운 도시 공간의 등장’이란 세 가지로 범주화 하였다.

 

 

Ⅲ. 향촌에서의 소박한 생활상

 

조선 후기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중인 서민계층이 향유층이나 작자층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즉 문학의 주 담당층이 사대부계층에서 서민계층으로 바뀌게 된 것인데, 사대부의 관념적 구상물이었던 시조 또한 서민의 정서에 부합되는 작품을 노래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작자층의 변화로 말미암게 되는데, 전기사회와 동일한 사대부계층의 작품에서도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된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시대에서부터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다.

 

 

⑸ 崔行首 쑥다림 ?? 趙同甲 곳다림 ??

? ? 개 ? 오려 點心 날 시기소

每日에 이렁셩 굴면 므슴 시름 이시랴.

(金光煜, <栗里遺曲> 제17수, 『甁窩歌曲集』1004)

 

이는 竹所 金光煜(1580~1656)의 <栗里遺曲> 17수 가운데 마지막 수다.18] 이정보 시조 보다 앞선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崔行首와 趙同甲을 등장시키며 화전놀이 하는 광경을 노래한다. 이는 서민적인 생활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사대부적 권위나 무게는 상당히 떨쳐버린 채 향촌에서의 흥겨운 모습을 담고 있다.19] 조선 전기사회에서 향촌은 주로 隱處地의 개념으로 등장하곤 하였다. 이 경우, 주로 江湖自然을 의미하게 되어 생활의 공간이 아닌 道를 실현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랬던 강호자연이 ⑸에서 보듯이 17세기 말엽부터도 이미 조금씩의 변화를 보이게 되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좀 더 적극적인 삶의 공간으로 변화하게 된다. 20]

 

19]신영명,?시골로 내려온 서울, 서울로 내려온 시골?, 『시조학논총』26집, 한국시조학회, 2007, 78~79쪽 에서는 이 작품을 논의하며 작자인 김광욱에 대하여 ‘재경사족’이라는 다소 생경한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그가 재지사족이 아님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아울러 위의 시조를 ‘시골로 내려온 서울’이란 범주 속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논의는 官人이란 김광욱의 신분과 함께 <율리유곡>의 작품적 성격을 가늠케 한다.

20]강호인식에 대한 17세기적 변화에 대해서는 김흥규,?16,17 세기 강호시조의 변천과 전가시조의 형성?, 『어문논집』35집, 안암어문학회, 1996, 217~242쪽)을 비롯하며 신영명 ?우응순 외,『조선중기 시가사와 자연』(태학사, 2002.) 제2부에 수록된 이상원의?17세기 시가사의 시각?, 신영명의 ?17세기 강호시조에 나타난 ‘전원’과 ‘전가’의 형상?등을 비롯한 일련의 연구와 박연호,?장르론적 측면에서 본 강호가사의 추이?, 『어문논집』45집, 민족어문학회, 2002, 155~193쪽, 이상원, ?17세기 시조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8. 권순회, ?田家時調의 미적 특질과 사적 전개 양상?, 고려대 박사논문, 2000. 등을 참조할 수 있다.

 

 

⑹ 山家에 봄이 오니 自然이 일이하다

압?? 살도 ?고 올미? 외씨도 ?코

來日은 구름 것거든 藥을 ?라 가리라. (李鼎輔, 『甁窩歌曲集』414)

 

시조⑹은 이정보의 시조이다. 자연이 道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며, 자연에 대한 玩賞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던 전기의 사대부시조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음은 김광욱의 <율리유곡>으로서도 알 수 있었다.

⑹에서 펼쳐지는 자연 또한 道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율리유곡>과 일치하지만, <율리유곡>에서의 자연이 놀이의 공간으로 인식된 것과는 달리 ⑹에서는 일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화자는 山家의 생활에서 봄이 되니 ‘일이 많다’고 하여 현실적인 생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이어 중장과 종장에서는 그 많은 ‘일’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앞내에는 살을 매고, 울 밑에 오이씨도 뿌리고, 또 약초도 캐러 가야한다. 예시한 것은 세 가지에 불과하지만 앞내와 울 밑으로 대표되는 집의 안팎, 혹은 멀리 산속에 이르기까지 농사일로 바빠지는 향촌의 봄을 노래한다. ⑹에서 보이던 향촌의 모습은 다음 시조에서도 계속된다.

 

 

⑺ 오려논 물 시러 놋코 綿花밧 ?오리라

울 밋? 외를 ?고 보리 능거 點心?소

뒷집의 비즌 술 닉어거든 ??남아 가져 오?.

(李鼎輔,  『海東歌謠』(周氏本) 371))

 

⑻ ?? 打作 다? 後에 洞內 모하 講信??

金風憲의 메더지에 朴勸農의 되롱츔이로다

座上에 李尊位? 拍掌大笑 ?더라.

(李鼎輔, 『甁窩歌曲集』1063)

 

시조 ⑺과 ⑻은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계절 동안 농촌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⑺의 화자는 이른 아침부터도 분주하다. 올벼를 심은 논에 물을 대고 목화밭도 매어 놓고 또 울 밑에서 오이도 딴다. 그렇게 오전 일을 마치고는 점심에는 보리밥으로 식사를 한다. 뒷집에서 빚은 술이 익으면 비록 외상술이라도 가져오라고 하여21]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며 한 잔의 술로서 고단함을 잊고 흥취에 빠지고자 한다. 이처럼 초?중?종장을 통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향촌에서의 하루를 묘사한다.

 

시조 ⑺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면 ⑻은 시간성은 배제된 채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묘사한다. 여기서의 시간은 ‘가을 타작을 마친 후’라는 계절만이 주어졌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앉아 새롭게 신의를 다진다. 물론 거기에는 술도 함께 한다. 사람이 모이고 또 거기에 술이 함께 하니 風憲이나 勸農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노래[메더지]를 하고 춤을 춘다. 이렇듯 한 바탕 풍류의 마당이 펼쳐진 광경 앞에서 동네 어르신들도 박장대소하며 그 흥겨움에 동참한다. 22]

 

21]‘??’는 ‘借資’ 즉 외상을 뜻하는 것으로 ‘??남아’란 ‘외상술이나마’이라고 해석한다 (박을수,『한국시조대사전』(상권), 아세아문화사, 1992, 807쪽 참조).

22]흥취를 즐긴다는 면에서는 시조 ⑻과 <栗里遺曲>이 서로 유사하지만, 여기서는 일을 마쳤다는 전제하에 놀이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이상에서와 같이 ⑹과 함께 ⑺과 ⑻은 봄에서 가을에 걸쳐 농사를 짓는 향촌의 어디에서든지 쉽게 볼 수 있는 삶의 풍속도를 노래한다. 물론 여기서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노동에 참여하는 서민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농사에는 땀과 노동의 수고로움은 제거된 채 ‘흥취’만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이정보의 시조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작품인 魏伯珪(1727~1793)의 <農歌九章>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때 좀 더 분명해 진다.

 

 

⑼ 둘러 내쟈 둘러 내쟈 긴 ?골 둘너 내쟈

바라기 역고를 골골마다 둘너 내쟈

쉬짓튼 긴 ?래? 마조 잡아 들너 내쟈.

(魏伯珪, <農歌九章> 제3수, 『三足堂歌帖』 )

 

⑽ ?은 듣? 대로 듯고 볏슨 ??? 대로 ?다

?풍의 옷깃 열고 긴 파람 흘리 불 제

어?셔 길 가? 소님? 아? ?시 머무?고.

(魏伯珪, <農歌九章> 제4수, 『三足堂歌帖』)

 

시조 ⑼와 ⑽은 농촌에서 실제적인 농사의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먼저 제3수는 ‘김매기’하는 광경을 노래하였다. 매 장마다 ‘긴 ㅊ골’ ‘골골마다’ ‘긴 사래’ 등을 등장시키며 삼장 모두에 걸쳐 시종일관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이정보의 시조에서보다 노동의 강도가 훨씬 강하게 느껴지며 화자가 실질적으로 노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에서 보이는 이러한 노동의 결과는 제4수에서 ‘땀’을 노래하기에 이른다. 골골마다 김매기를 하다 보니 땀은 흐를 대로 흐르고 있는데 햇볕마저 강하게 내리쬐고 있다.23]

 

두 시조에서 묘사하는 광경은 이정보 시조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러한 차이는 시기적인 것에서도 비롯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이정보와 위백규가 처한 위치가 다르다는데서 오는 차이일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즉 이정보는 경화사족으로 官人의 위치에 있었던 데 반해서 위백규는 전형적인 향촌의 재지사족이다.24] 이런 차이가 향촌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론된다. 향촌, 또는 자연에 대한 이정보의 시각은 다음 시조로써 확인할 수 있다.

 

23]위백규 및 <농가구장>에 대해서는 김석회, ?존재 위백규 문학 연구?, 이회출판사, 1995,를 비롯한 김석회의 일련의 연구와 함께 권순회, ?농요로 읽는 <농가구장>의 세계상과 표현 미학?, 박노준편, 『고전시가 엮어 읽기』하, 태학사, 2003, 133~148쪽 등이 있다.

24]이에 대해 김창원, ?17~8세기 서울 및 近畿 일대 전가시조 형성의 사회사?『고시가연구』17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6, 118~122쪽에서는 아울러 이정보 시조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낭만성’으로 표현하고, 이는 ‘재경양반’과 지방의 재지사족과 차별되는 요소라고 지적한다.

 

 

⑾ 大丈夫 功成身退後에 林泉에 집을 짓고 萬卷書를 싸아두고

종?여 밧갈니며 보?? 길드리고 千金駿馬 셔여두고 絶代佳人 겻?두고

錦樽에 술을 노코 碧梧桐 거문고에 南風詩 노??며 太平烟月에 쥐?여

누어시니 아마도 男兒의 ?올 일은 이?인가 ?노라.

(李鼎輔, 『甁窩歌曲集』880)

 

⑾에서 화자, 또는 작자는 향촌을, 관직을 물러난 후에 머무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밭일은 종에게 시키고 스스로는 만권서와 함께 천금준마와 절대가인, 술과 가악 등과 더불어 생활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야말로 대장부로서 마땅히 표방해야 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결국 ⑾에서 볼 수 있는 화자의 인식은 향촌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땀과 노동의 수고로움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종의 차지이며, 스스로는 거기서 획득되는 삶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거기에 반해 <농가구장>에서는 스스로 땀을 흘리고 농사에 참여함으로써 차별된다.

 

하지만 <농가구장> 역시 농사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고달픔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을 시원하게 여기며 노동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농가구장>에서 보이는 화자의 태도는 다음 사설시조에 등장하는 화자의 모습과도 또 다시 구분된다.

 

 

⑾ 압 ?나 뒤 ?나 中에 소먹이? 아희놈들아

압 ? 고기와 뒷 ? 고기? 다 몰속 ?아? 다락기에

너허 쥬어든 네 소 궁둥치헤 걸쳐다가 주렴

우리도 밧비 가? 길히오? 傳?동 말동 ?여라.

(작자미상, 『靑丘永言』六堂本) 974) 25]

 

대화체로 이루어진 위 시조는 초 ? 중장에서 연령이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화자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종장의 화자인 아이들은 자신들도 일이 많음을 핑계로 퉁명지게 상대의 청을 거절한다. 여기에 나타난 문면의 진술, 즉 아이들이 자신들보다 연령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長幼有序를 중시하던 전기사회의 사회적 질서가 깨진 표징으로 볼 수 있다.26] 그런데 그것의 핵심에 ‘노동’이 자리한다. ‘아희’들에게 있어서 일은 더 이상 흥겨움이 아닌 힘겨운 노동일뿐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봤을 때 이정보를 비롯한 조선후기 사대부 시조에서 묘사된 향촌의 모습이 서민들의 현실적인 생활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시대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한계일 수 있다. 27] 농사의 현장을 보고 노동의 수고로움, 또 그로 인한 현실의 고달픔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자연이 더 이상 도를 실현하는 공간이 아니며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인식하였다는 변화 또한 하나의 성과일 수 있다.28]

 

25]『詩歌』594에서는 이 시조의 종장 첫구 “우리도”가 “牧童이 對曰 西疇 일이 만하”로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 ‘일’에 대한 의미가 좀 더 부각된다.

26]김학성, 『국문학의 탐구』, 성균관대 출판부, 1986, 191쪽.

27]김창원, ?17~8세기 서울 및 近畿 일대 전가시조 형성의 사회사?, 『고시가연구』17집, 2006, 103~130쪽에서는 이정보를 비롯한 ‘재경양반’의 전가시조에 대하여 논의하며 ‘지역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아울러 이정보 시조에서 느껴지는 ‘낭만성’은 지방의 재지사족과 차별되는 요소라고 지적한다.

28]물론 이정보 시조에서 ‘山家’라고 표현된 향촌의 모습이 여전히 사대부적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본고의 취지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지 않고, 이정보 시조에서 조선 후기의 풍속을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에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Ⅳ. 탈권위의 진솔한 표현

 

조선 후기시조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풍속도는 형식과 언술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전기시조가 평시조를 중심으로 관념적인 내용이 주로 등장했다면, 후기시조에서는 사설시조가 성행하며 愛慾이나 세태에 대한 풍자와 경계 등의 주제가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조선 전기사회와 구분되는 후기의 표징가운데 하나가 性 풍속도이다.

전기사회는 사회 전반에 걸쳐 儒學 가운데서도 性理學의 이념이 팽배하여 성적 욕망을 표면화하는 것을 금기시함으로써 문학이나 문화 전반에 걸쳐 이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 어려웠다. 그러나 후기사회로 접어들며 사회전반에 걸쳐 근대의 개념이 형성되고 性에 대한 가치 또한 변화 되었다.

 

 

⑿ 간밤의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이져라

瓦얏놈의 아들인지 즌흙에 ??드시 沙工놈의 뎡녕인지 沙於?로

지르드시 두더쥐 녕?인지 곳곳지 뒤지드시 平生에 처음이오

흉증이도 야롯?라 前後에 나도 무던이 격거시되 ? 盟誓?지

간반 그 놈은 ?아 못니저 ?노라.

(李鼎輔, 『甁窩歌曲集』 943)

 

⒀ 님으란 淮陽金星 오리남기 되고 나? 三四月 ?너출이 되야

그 남개 그 ?이 낙거미 나뷔 감듯 이리로 츤츤 저리로 츤츤 외오 푸러 올이감아 얼거져 틀어져 밋부터 ??지 죠곰도 ?틈업시 찬찬 구뷔나게 휘휘감기 晝夜長常에 뒤트러져 감겨 이셔

冬 섯달 바람비 눈셔리를 아모리 마즈들 풀닐 줄이 이시랴.

(李鼎輔, 『甁窩歌曲集』958)

 

성적 욕망을 노래한 이정보의 사설시조이다. ⑿는 작중 화자가 여성작중 화자가 여성으로 설정되고 작품에서 환기하는 내용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과연 이정보의 작품인지에 대한 논쟁이 따르기도 한다.

작자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가집에 따라 작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9] 사대부의 신분으로 사설시조를 창작하였다는 것 또한 이례적이지만, 과연 이렇듯 淫談을 섞어가며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하는 외설스런 작품을 과연 지었겠냐는 것이다. 30] 더욱이 ⑿는 작자미상으로 전하는 ⒁와도 변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29]이 작품은 세 개의 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병와가곡집』에는 이정보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海東歌謠』(주씨본)와 『靑丘永言』(육당본)에는 失名氏로 되어 있다. 심재완, 앞의 책, 1972, 33쪽.

30]실제로 사설시조는 사대부계층에 의해 처음 제작되었고 그 기원이 조선 후기보다 훨씬 올라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만큼 본고에서 또 다른 설명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것이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며, 전기의 사설시조는 내용적으로는 평시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 만을 환기한다.

 

 

⒁ 얽고 검고 ? 크고 구레나룻 제것조? 길고도 넙다

졈지 아닌 놈이 밤마다 ?에 올라 조고만 구멍에 큰 연장 너허 두고

흘근할적 ? 제? 愛情은 ?니와 泰山이 덥누로? 듯 ? 放氣 소?에 젓 먹던 힘이 다 ?이노?라

아모나 이 놈을 다려다가 백년 동주?고 영영 아니 온들 어? 개?년이 ?앗 새옴 ?리오.

(작자미상, 『甁窩歌曲集』1101)

 

⒁는 『병와가곡집』을 비롯하여 『진본 청구영언』등 다수의 가집에 전하고 있다.13] 여성화자가 등장하여 하룻밤 인연을 맺었던 남성, 또는 그 남성과의 성행위를 못내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이정보의 시조와 유사하다. 다만 위의 시조는 초장부터 남성의 신체 일부분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다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초장에서일 뿐, 성행위를 묘사한 중장에서는 서로의 우위를 논할 수 없을 만큼 두 작품 모두 지극히 외설스럽기 짝이 없다.

실명씨의 작품으로도 가히 충격적일 만한 내용이 사대부 작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심노숭의 <계섬전>의 기록 등을 근거로, 그가 노골적으로 성을 노래한 사설시조를 지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연구에서 확인하였다.

 

시조 ⒀ 또한 임과 화자의 관계를 오리나무와 칡넝쿨에 견주어 노래한다. ⒀에서는 화자의 성별이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詩的 어조라든지 상대를 ‘임’으로 표현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여성화자로 볼 수 있다. 많은 나무 가운데 화자가 임을 굳이 오리나무라고 설정한 것은 그것이 지니는 속성으로 말미암는다. 오리나무란 과거 길가에 ‘五里’마다 심어 이정표로 삼았던 나무로서 암수 한 몸을 이루는 나무이다. 즉 암수 한 그루인 오리나무처럼, 자신 또한 임과 한 몸을 이루고픈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중장에서는 역시 상황의 묘사이다. 즉 오리나무와 칡넝쿨이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있는가를 묘사함으로써, 임과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화자의 성적 욕망을 표현한다. 그리고 종장에서 그 욕망의 강렬함을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래서 비바람과 같은 극한 상황이 오더라도 임과 결코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결의를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임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임의 몸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음을 의미한다. 주야장상으로 ‘한 몸’을 이루고자 하는 성적 욕망을 표출함으로써 성리학적 권위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인다. 32]

 

31]심재완, 앞의 책, 712쪽에 의거하면 총 15 종류의 가집에 전하고 있다.

32]사설시조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욕망에 대하여 김흥규,?사설시조의 愛慾과 性的 모티프에 대한 재조명?, 『한국시가연구』13집, 한국시가학회, 2003, 190~200쪽에서는 ‘인간 탐구의 진정성’이란 용어로 긍정한다. 본고 또한 사설시조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란 측면에서는 아직 판단을 유보하나, 인간의 내재적 욕망을 표출하고 이것이 긍정적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탈권위적 모습의 언술은 애욕을 노래한 것 이외에도 시대를 경계하거나 당시 사회를 풍자한 일련의 시조에서도 발견된다. 다음의 시조를 먼저 보기로 한다.

 

⒂ 뭇노라 부나?야 네 ?을 내 몰래라

?나비 죽은後에 ??나? ?아온이

암울이 프세엣 즘?인들 너죽을? 모르는다.

(李鼎輔, 『海東歌謠』周氏本 368))

 

? 狂風에 ?린 梨花 가며오며 ?리다가

가지예 못오르고 걸리거다 거?줄에

저 거? 낙화?줄 모르고 나? 잡듯 ?도다. (李鼎輔,『甁窩歌曲集』408)

 

⒂와 ?에서는 불나비와 거미를 등장시켜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⒂의 불나비는 走光性의 생물로 불을 보면 본능적으로 뛰어들지만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잠시 후에 일어날 자신들의 죽음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본능에 이끌려 불속으로 뛰어 드는 불나비에 빗대어, 결과가 뻔한 데도 화를 자초하는 인간을 풍자하며 동시에 경계한다. ?은 당쟁에 대한 구체적인 풍자이다. 宣祖 때부터도 발발했던 당쟁은 이정보 시대로까지 이어졌고,33] 이정보는 그러한 현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34]

 

?은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에서부터 풍자시조의 전형을 이룬다. 狂風, 梨花, 거미줄, 거미 등이 그것인데 이는 각각 당쟁, 희생자, 함정, 모함자를 의미한다. 즉 광풍에 떨어진 이화가 당쟁으로 인해 희생된 선비를 뜻한다면, 먹지도 못할 꽃잎을 나비인줄 알고 잡아가는 거미는, 사리분별이 없는 어리석은 고위관료에 해당된다.

 

그런데 ⒂와 ?에서 보이는 내용이나 정서는 조선 전기의 시조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도 士禍와 黨爭 등의 政爭이 있어왔고 그러한 정쟁을 대상으로 삼은 시조 또한 있어 왔다.35] 따라서 주제적인 측면만 본다면, 이정보의 시조는 근본적으로 이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다만 전기의 시조들보다는 語調가 다소 적극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이정보 시조가 지니는 후기적 모습은 이러한 주제적 측면이 아니라 형식을 포함한 어휘나 언술에 있다.

 

33]성낙훈, ?한국당쟁사?, 『한국문화사대계 2』,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221~290쪽.

34]이정보의 성격에 대해 黃景源은 “공의 사람됨이 씩씩하고 과감하며 엄하고 곧아서 꾸밈에 힘쓰지 않으며, 임금을 섬김에 충실하여 아첨의 기색이 없었다(公爲人 莊毅?直 不矜飾 事上忠實 未嘗有阿之色).”고 적고 있다 (黃景源.『江漢集』권 17, <墓誌銘>).

35]松江 鄭澈의 “어와 버힐시고 落落長松 버힐시고 / 져근덧 두던들 棟樑材 되리러니 / 어즈버 明堂이 기울거든 므서스러 바티려뇨”라는 시조나 白沙 李恒福(1556~1618)의 “냇?에 ?오라비 므스 일 셔 잇?다 / 無心한 저 고기를 여어 무? ?려?다 / 아마도 ?믈에 잇거니 니저신들 엇?리” 등은 당쟁에 대한 소회를 노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一身이 사자?니 물것계워 못 살니로다

피겨?튼 가랑니 보리알?튼 슈통니 줄인니 갓?니 잔벼록 굴근벼록

강벼록 倭벼록 긔는놈 ?는놈에 琵琶?튼 빈? 삿기 使令?튼 등에어이

갈?귀 ?무아기 센박휘 누른 박휘 바금이 거저리 부리?족? 모긔 다리 긔다? 모긔 살진 모긔 야윈 모긔 그리마 ?록이 晝夜로 뷘틈 업시

물거니 쏘거니 ?거니 ?거니 甚? 唐비루에 어려왜라

그듕에 ?아 못견될슨 五六月 伏더위에 쉬?린가 ?노라.

(李鼎輔, 『甁窩歌曲集』1106)

 

? ?놈이 ?은 사당년을 어뎌 ?父母? 孝道 긔 무어슬 ?야갈고

松肌? 갈松편과 더덕片脯 ?椒佐飯 뫼흐로 치다라 辛甘菜라 삽쥬 고사리 굴언 묏?물과 들밧트로 ?이?아 곰?틔라 물쑥 게우목 ??지와 씀박위 쟌다귀라 고들?이 두로 ?야 바랑국게 너허 가지 무어슬 타고 갈?

어화 雜말 ?다 암쇼 등에 언치 노하 새삿갓 모시長衫 곳갈에 念珠 밧쳐 어울 타고 가리라.

(李鼎輔, 『甁窩歌曲集』949)

 

탐관오리의 수탈을 각종 ‘물것’에 비유한 ?은 풍자시조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은 대화체로 이루어진 시조로써 조선후기 승려들의 타락상을 풍자한다.

 

시조 ?에서는 ‘이, 벼룩, 빈대, 등에, 깔다구, 바퀴, 모기, 파리’ 등 각종 해충들을 일일이 나열하는가 하면 그 해충들이 하는 행위 또한 ‘물거니, 쏘거니, 빨거니, 뜯거니’라고 직접적으로 묘사하여, 탐관오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현전하는 시조를 통틀어서도 ?만큼 온갖 해충을 나열한 경우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사대부로서 사설시조란 형식과 함께 형이하학적이랄 수 있는 소재들을 등장시켜 신랄하게 세태를 풍자함으로써 후기적 변모를 여실히 드러내게 된다.

 

?은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대화체를 이룬다. 일견 ‘효도’를 노래한 듯 포장하고 있는 시조에서 작자가 실제로 적시하려는 사실은 승려들의 타락상이다. 승려계층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놈’이라는 초장 첫구의 표현으로도 감지할 수 있다. 승려가 젊은 사당년을 아내로 취했다는 것으로도 이미 감지되던 타락상은 중장, 종장으로 이어진다. 제1화자인 목격자의 질문과, 제2화자인 승려의 답변으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승려와 사당년은 효도를 위해 자신들이 마련할 수 있는 떡이나 나물 등 갖은 음식을 바랑 속에 챙겨 넣었는가 하면, 새 삿갓에 모시 장삼 고깔로 한껏 단장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이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폭로하게 되고, 이로써 그들의 타락상을 노래하게 된다.

 

이처럼 평시조가 아닌 사설시조로써 발화한다든지, 성적 욕망을 노래하거나 세태를 경계하거나 풍자를 한 경우, 작품에 표현된 언술은 조선전기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상당히 파격적이다. 서민계층도 아닌 사대부계층의 시조에서 이와 같은 언술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정보라는 작가의 개인적 성향의 탓도 있겠지만, 그 만큼 또 조선후기라는 사회가 이전시대에서 중하게 여겼던 권위를 내려놓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36]

 

36]김학성, 앞의 책, 196쪽에서는 사대부 계층의 미의식과 변별되는 서민계층의 미의식을 ‘작은 것, 좀스러운 것, 비속한 것, 평범한 것, 일상적, 세속적인 것, 무절제한 것, 불완전, 미완성, 불구, 병신, 추한 것, 우둔, 보잘 것 없는 것, 희화적인 것, 싱거운 것, 장난스러운 것’ 등으로 설명한다. 본고에서 인용한 이정보의 사설시조 역시 이러한 요소를 지니며 서민적 미의식을 지향한다.

 

 

Ⅴ. 맺음말

 

‘조선후기’라는 시기는 ‘조선’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조선이라고 하면 조선사회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 되지만, 실제로는 전기사회에 집중되는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사대부 중심의 사회로,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된 관념적인 사회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에 반해 조선후기에는 ‘근대성’이란 용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와 맥을 함께 하여 변화의 바람이 불며 사회 전반에 걸쳐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던 시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조선후기 시조 또한 근대성, 변화의 바람에서 예외적이지 않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정보의 시조를 중심으로 시조에 나타난 조선후기의 풍속도를 조망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도출할 수 있었다. 우선은 이전 시기의 강호시조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한 결과이다. 조선 초?중기의 시조가 전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도시문화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에서의 유흥적 분위기를 노래한 것이 그 첫째이며, 동일한 강호라 하더라도 道의 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이 되며 이로써 향촌에서 벌어지는 소박하고 흥겨운 서민적인 생활상을 노래한 것이 그 둘째이다. 셋째는 시조 자체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이전 시기의 작품에서 느껴지던 무게와 권위에서 벗어나 경계나 세태 풍자 또는 애욕의 주제가 등장하고, 그것을 사설시조의 형식에 얹어 거침없는 언술로 노래한다는 점이다.

 

시조에서 보이는 후기사회의 풍속도는 한 시대의 반영인 만큼 시조의 영역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문화 양식에서도 유사하게 표현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風俗畵를 꼽을 수 있다. 풍속화란 한 시대인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을 소재로 삼아 그린 그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후기에 성행하였다. 풍속화의 시초를 인물화라고 했을 때 그것의 기원은 . 이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적인 개념의 풍속화는 규장각의 差備待令畵員의 綠取才畵科로 제정된 1783년부터 순조년간(1801~1834)까지의 기간에 발달되었다.37] 요컨대 풍속화는 것으로 文人畵와는 대칭개념으로 ‘士農工商 四民의 생활모습, 즉 東國風俗을 田野風俗과 城市 ? 市井風俗, 官衙風俗과 歲時風俗 등의 장면에 담아 나타낸 것’ 38] 을 의미한다. 풍속화의 정의와 범주를 이렇게 구체화시켰을 때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金弘道(1745~1806?)와 申潤福(1758~?)이다.

 

두 화가는 이정보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활동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풍속화를 비롯한 조선후기 풍속화 또한 시조에서의 풍속도와 유사성을 지닌다.39] 예컨대 신윤복의 화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되어 있는 그림 가운데 <遊廓爭雄> <雙六三昧> <舟遊淸江> 등에서는 도시의 여항이나 기방을 배경으로 삼아 향락적 이미지를 묘사함으로써 도시의 유흥적 분위기를 나타낸다. 40] 그런가 하면 김홍도의 <씨름도> <벼타작> 등에서는 향촌에서의 소박한 생활상을 담아내기도 한다. 성 풍속도 또한 조선후기 풍속화의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미인도>로 유명한 신윤복은 물론 조선의 삼대화가 41]로 불리는 김홍도 역시 일명 ‘春畵’라고 불리는 도색적인 그림을 남기고 있다.42] 이처럼 후기시조에서 발견되는 일단의 모습들이 비슷한 시기의 풍속화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은 시조에서 그려진 모습이 한 시대의 풍미했던 당대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편 논의의 출발이 시조로부터 시작된 만큼 본고의 관심은 시조, 또는 그것과 유사한 의미망 속에 있는 문화영역에 있다. 즉 이들 시조로 대표되는 문학, 또는 문화 양식이 어떻게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43]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한 시대의 모습이 시조로 대표되는 예술작품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일 수도 있다. 이들이 관계가 일방향성이 아니라 상호 영향관계에 놓이는 것은 양자 모두 인간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되는 삶의 집적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37]강관식,?조선후기 화원 회화의 변모와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제도?,『미술사학보』17집, 미술사학연구, 2002, 8~14쪽. 한편 이 논문에서는 ‘풍속화’ 대신 ‘俗畵’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38]홍선표,『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308쪽.

39]김현주,『고전문학과 전통회화의 상동구조』, 보고사, 2007. 216쪽~224쪽에서는 이러한 상동성의 배경으로 소비 도시의 형성과 함께, 중인계층의 浮上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40]김나연,?신윤복의 풍속화 연구 :『蕙園傳神帖』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08,36쪽

41]김홍도는 <夢遊桃園圖>로 유명한 전기의 安堅(?~?) 및 말기의 천재화가로 吾園 張承業(1843~1897)과 더불어 조선의 삼대 화가로 일컬어진다.

42]서정걸,『韓國의 春畵』(도서출판 에이앤에이, 2000.)에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각각 10점씩 수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밖에 근대화가인 鼎齊 崔禹錫(1899~1965)의 그림 10점도 포함되어 있다.

43]향후 繪畵에 대한 공부가 좀 더 이루어지면 시조와 회화의 상동성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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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Cultural landscape(風俗圖) of the Latter Joseon-Dynasty appears in Sijo

- Focusing on the Lee, Jeong-bo's Sijo- /

 

Kim, Sang-jean

 

The purpose of this paper sijo study is focused on the Cultural landscape of the Late Joseon-Dynasty. Literature is an mimesis of life. Therefore, as a literary society in a particular time and can be estimated. The Latter Joseon-Dynasty at the idea, institution, culture etc different from the former Joseon-Dynasty. These changes appear to Sijo. In this paper, Lee, Jeong-bo's Sijo Focused Cultural landscape of the Latter Joseon-Dynasty to be examined. He's leading the Latter Joseon-Dynasty poet sijo.

Lee, Jeong-bo or Lee, Jeong-bo's Sijo target has several advantages. First of all, a lot of work. So, Includes Sijo of the contents is various. He left about one hundred of Sijo. And the subject is very various. The next about his status is the thing. He is the high official classis. This is identical with the former Joseon-Dynasty Sijo author classes. By the way several works created shown on the Sijo in latterly characterize. Therefore, there is a possibility of trying to observe the Latter Joseon-Dynasty is various from his work.

These results can be categorized into the following three. First is a pleasures atmosphere of the city. The Latter Joseon-Dynasty and the commercial development of the city, and the city high official(京華士族) was developed focusing on urban culture. Second is the simple life in the villages. The former Joseon-Dynasty nature of the 'Tao(道)' was the space, but the latter Joseon-Dynasty of the nature of the space was transformed into a living. So in this period was the advent of Jeonwon-Sijo(田園時調), or Jeonga-Sijo(田家時調). The third is the honest expression outside the authority. This is subdivided into satire and eroticism. These subjects had previously. However, The Latter Joseon-Dynasty was a more realistic representation. So also the aesthetic sense made change. Especially in the form of Sasel-Sijo(사설시조) was to maximize effectiveness. This is seen in the previous work is far from Confucian authority.

The latter-sijo appear on a cultural landscape of the Latter Joseon-Dynasty is the same time can be seen in the genre piece(風俗畵). This means that the homology of the literature and the arts. In addition, everything in the world mean that life will mimesis.

 

 

Key words : Mimesis, Lee, Jeong-bo's Sijo, Latter Joseon-Dynasty, Cultural landscape, Pleasures atmosphere of the city, City high official, Villages, Outside the authority, Genre piece, Homology.

 

 

 

 

 

 

온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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