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6월8일
마음만 분주한 일상, 어느 한 순간 가슴이 텅 비어버린 듯할 때가 있다. 이런 날은 무턱 산이 그리워진다. 孤山은 마음 속 까마득히 높은 곳에 독락당을 지었다. “맞아 드리지 않아도 청산이 절로 문안으로 들어오고, 온 산에 핀 꽃들이 단장하고 찾아온다”고 한 곳, 대월루에 앉아 고고한 절의를 날 세웠고 자연과 벗하며 세상에 휩쓸리지 않아 청정한 자연에 몰입한 곳, 온갖 세상의 소음도 들리지 않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조금도 시끄럽지 않은 곳, 그런 곳에 산은 묵묵히 앉아 있다.
회색빛 도시의 나른한 시간을 훌훌 털고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안겨주는, 그런 산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오락가락하던 비는 끝내 장마처럼 쏟아져 출발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툭하면 오보를 내던 기상청 예보가 빗나가기를 바라는 심정 오죽했겠는가. 날씨가 말썽을 부리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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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출발 시간에 몇몇 산우들은 보이질 않았다. 6시 전부터 나와 기다리던 홍보 이사가 우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출발했다. 시원한 아침을 가르며 버스는 영동고속도를 접어들었다. 오늘은 시간을 아껴야 한다. 산행 시간도 길고 연휴 뒷 끝이라 귀경 시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문막 휴게소에 잠간 들리고 곧장 출발했다. 차창을 스치는 산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지난 달 보았던 들이 아니다. 논엔 모가 뿌릴 내린 듯하고, 간혹 누런 보리밭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 여간 정겹지 않다. 마침 오늘이 단오절 아니던가.
오월이라 중하(仲夏)되니 망종(亡種) 하지(夏至) 절기로다
남풍은 때맞추어 맥추(麥秋)를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빛이 밤사이 나겠구나
문 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打麥場) 하리로다.
농가월령가 아니라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보리타작하던 유년의 기억이 새롭다. 꽃댕기 팔랑이면서 그네 타던 그 처녀애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미 고인이 되진 않았겠지...
향촌(鄕村)의 아녀들아 추천(鞦韆)은 말려니와
청홍상 창포비녀 가절(佳節)을 허송마라
노는 틈에 하올 일이 약쑥이나 베어 두소
상천이 지인하사 표연히 작운(作雲)하니
때 미쳐 오는 비를 뉘 능히 막을 소냐
조금만 더 있으면 부지깽이마저도 집에 있을 날이 있겠는가. 저녁이면 모깃불 둘러앉아, 내일 얘기로 쉴 틈이 없던 향촌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오우버랩 된다.
뒷논은 뉘 심으고 앞밭은 뉘가 갈꼬
도롱이 접사리며 삿갓은 몇 벌인고
모 찌기는 자네 하소 논 심기는 내가 함세
들깨모 담배모는 머슴아이 맡아내고
가지모 고추모는 아기 딸이 하려니와
맨드라미 봉숭아는 네 사천 너무 마라
아기 어멈 방아 찧어 들바라지 점심 하소
보리밥과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를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
버스는 어느새 진부 나들목을 나서고 있다. 월정사 쪽으로 접 어들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들판이 일손을 부르고 있다. 6번 국도로 굽이굽이 진고개로 오르는 길목엔, 우거진 녹음이 일상의 마음 속 먼지를 다 씻어내리는 것 같다. 10시쯤 진고개 휴게소 도착, 단체 사진 한 장 찍고, 곧바로 산행 시작, 들머린 등산로 아닌 농로였다. 언덕을 올라서니 오른편으로 오갈피 밭이 넓게 펼쳐 있다. 전엔 고랭지 채소를 기르던 곳이란다. 일손이 모자라 약초 재배로 돌아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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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밭을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급해진다. 여기도 역시 계단이 잘 정비되 었다. 앞선 산우들 따라 부지런히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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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옮기나 벌써부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천둥을 동반한 비가 온다더니 햇볕이 오뉴월 뙤약볕처럼 뜨겁다. 월출산 산행에 동참했던 이경주 산우가, 계속 산행 속도를 조절하면서 우리와 보조를 같이해 주었다. 조금 오르니 숲속이라 한결 수월했다. 조금 가다 보니 숲속 여기저기에 괭이 자국 같은 흠집이 눈에 거슬렸다. 어떤 작자가 뭘 캐느라 저렇게 파헤쳤나. 지각없는 소행에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다. 그냥 두고 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데까지 와서 알량한 욕심을 부리다니... 무거운 다리로 쉬다가다를 반복하다 보니 1시간은 족히 걸었나보다. 왼쪽에 안내판 하나가 보였다. 무심코 읽다가 산돼지들의 출몰지란 사실을 알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한 사람들을 질책하다니...
가파른 등로가 거의 끝나갈 때쯤 노인봉과 소금강계곡의 갈림 지점에 표지판이 서있다. 30분이면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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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분들과 연락해 정상에서 조우했다. 해발 1.338m의 노인봉 정상에 오르니 정오를 조금 지났다. 북으로 비로봉, 상왕봉, 동대산이 그림처럼 다가오고, 남동쪽으론 황병산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정상은 화강암으로 된 바위가 오뚝 솟아 있다. 멀리서 보면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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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머리처럼 보여 노인봉이란다. 모처럼 모여 점심을 하기로 하고 되짚어 표지판 서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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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무릉계곡까지 13km, 꽤나 지루한 행로가 될 것 같았다. 오다보니 잠수정님 배낭은 조왕제님 어깨에 있는 게 아닌가. 발목을 삐끗해 걷기 불편하단다. 걱정되었다. 우리는 산을 오르면서, 산을 오르는 고통만 생각하지 말고 내 삶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 비가 올까 하늘만 볼 게 아니라, 내 삶에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릴 때가 있으리란 것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산은 오른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지만, 오늘은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멀다. 마음 다잡아야겠다. 북쪽 계곡으로 조금 내려서니 대피소가 왼쪽 언덕에 자리했다. 성남에서 온 등산객들은 이미 자릴 펴고 점심을 하는 걸 보고, 우린 좀더 내려 펑퍼짐한 곳을 골라 자릴 폈다. 김회장이 이슬 두 병, 또 신동화 부회장은 막걸리를 펴놓아 정상주 한 잔씩하고 서둘러 자릴 떴다. 꽤나 가파른 내리막길을 1시간쯤 걸었을 때 해발 820m의 낙영폭포에 닿았다. 제법 물줄기가 시원스레 쏟아지는 걸 보니, 飛流直下三千尺이라 읊었던 李白의 싯귀가 문득 떠올랐다. 역시 중국 사람들의 과장은 대단했나 보다.
숲길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냇물이 희어...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햇볕 어린 가지 산새 쉬고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냇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 신 석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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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폭포, 삼폭포, 백운대를 거쳐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만물상, 아홉 물줄기가 내려꽂히는 구룡폭포, 마의태자의 전설이 얽힌 상팔담, 귀면암, 일월봉, 詩女가 풍운을 찬미해 천 년을 음률이 이어온다는 탄금대를 이른 동안 숫한 소와 담 그리고 폭포가 어우러진 청학 소금강의 비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난 번 다녀온 흘림골에서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재작년 폭우의 흔적이 말끔이 가신 듯 잘 정비가 되어 산행엔 아무 불편이 없었다. 펀펀한 바위인 식당암에서 잠시 쉬었다. 잠시 계류에 발을 담그니 얼음물이 따로 없다. 내려오던 중 무릎에 통증이 있어 내가 걷기 불편한 걸 눈치체고 이 경주님이 내 배낭을 받아 주어 무척 고마웠다.
내려오는 동안 잠수정님은 배낭에 고이 간직했던 맥주 캔으로 목을 축여주어, 천 근 무게로 무거운 발걸음을 한결 수월하게 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계곡을 내려오는 데만 4시간이나 걸렸다. 계곡을 몇 번씩 건너고 돌길을 오르고 내리면서도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소금강의 절경이 감탄을 절로 나게 한다. 예상과 달리 아기자기한 경관에 매료된 듯 지루한 줄 몰랐다. 왼쪽으로 금강사가 아담하게 자리했다. 강릉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난 이 율곡은 여기 이 절에서 머물기도 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산구곡가를 읊기도 했다.
一曲(일곡)은 어디고 冠巖(관암)에 해 빗쵠다.
平蕪(평무)에 내 것거든 近(원근)이 글림이로다.
松間(송간)에 綠樽(녹준)을 놓고 벗 온 양 보노라.
-율곡-
만약 소금강 계곡에서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면 어떤 감회를 노래했을까. 십자소 앞에서 진정 술잔을 벗인 양 술회했을까?
주차장에 도착하니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동화 부회장 일행이 도착하는 대로 바로 출발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산행을 마감하는 시간에 맞춰...
몇 달 동안 견비통으로 고생하던 김무섭 부회장이 오랜만에 동참 더욱 반가웠으나, 윤 용성 부회장 그리고 반가운 면면들이 보이지 않아 좀 거시기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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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꽃마다 향기가 있듯이 사람도 향기가 있다. 구수한 누룽지의 냄새가 배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향수에 젖게 하는 낙엽 타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처음 만나도 남 같지 않은 사람, 스치기만 해도 꽃향기가 배인 사람, 또 어떤 이는 너그러운 웃음이 배어 있고 쳐다만 봐도 호수처럼 내 맘까지 평화로움을 주는 사람, 사람은 몇 줄의 글만으로 상쾌함이 전해지고, 한 마디 말만으로도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살면서 문득문득 사람 냄새가 그리운 날, 그런 날 나는 미림의 산우들을 생각한다.
- 목 어 백 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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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즐거웠습니다 아직두 생생 ~~
너무 잘표현해 주셔서 감명깊게 감상하고 갑니다~~꾸벅~~~
가슴을 적시는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