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 資料 調査報告 (江原道) 一. 洪川 八峯山 堂山祭 二. 江原道 浮來說話 三. 江原道 藥水 (광천수) 四. 江原道 돌탑 五. The Seonangje (서낭제) of Fishing Villages in Kangwondo East Coast |
一. 江原道 八峯山 堂山祭
Ⅰ. 팔봉산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에서 화양강을 따라 서쪽으로 60여리쯤 가면 강변에 8개의 봉우리로 된 자그마한 산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금강산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지체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浮來說話를 지닌 팔봉산이다. 홍천군에 속하기는 해도 오히려 춘천에서 가까운 이 산은 해발 3백여 m, 둘레 4km쯤 되는 작은 산이지만 산봉이 모두 기암괴석이고, 아래로는 白石淸灘의 홍천강(화양강)이 휘감아 흐르므로 산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인근에는 龍谭과 고룡동, 산중에는 용마굴장 · 장수굴 · 백운대 · 隱仙岩 · 龜岩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어졌으나 장락사 · 성방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니 이들이 팔봉산의 멋과 예스러움을 말해준다.
이렇게 명산인 팔봉산에는 예로부터 당을 짓고 당산제를 지내왔다.
지금은 2봉에 있으나 옛날에는 8봉에 三仙堂이라는 八峯山祠가 있어서 해마다 홍천현이 주관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春秋本縣致祭)는 기록이 《신등동국여지승람》에 있는데, 이는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의 일이다. 이후로 이 당산제는 매년마다 춘추로 2회 곧 음력 3월 보름과 9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여왔으며, “일제 때도 왜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당굿을 지내왔다.” 그리고 현재는 무속단체인 대한승공경신연합회강원도지회의 춘천 및 홍천지부가 주관하여 100여명 이상의 무속인이 참여하는 대단위의 굿판을 화양강변에서 3일간 벌이고 있다.
한편 여기 팔봉산 당산제의 主神은 三夫人神이다. 2봉에 있는 3부인전에 쇠로 만든 말(馬) 형상의 神主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부인전은 서낭당이고 삼부인은 서낭神恪이다. 그들은 시어머니 李씨, 딸 金씨, 며느리 洪씨의 영혼이라고 한다. 민간전승에 의하면 3부인은 팔봉산 주변마을의 世居氏族인 李씨 · 金씨 · 洪씨인데, 이웃 혼을 하여 한 마을에 살았던 여인들이다. 이씨는 마음씨가 인자하였고, 김씨 부인은 더욱 착하고 자상하였으나, 홍씨는 너그럽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굿을 하며 빌 때 먼저 이씨가 강신하면 풍년이 들고, 김씨가 내리면 주문을 외워서 홍씨를 달랜다고 한다.
당산제는 이 3부인을 모시고 그들을 위하는 당굿을 벌이어 壽命 · 財福 · 泰平과 厄막이를 빈다. 예로부터 팔봉산 당굿을 보면 자녀를 많이 두게 되고, 산에서 굴러도 다치지 않고, 또 좋은 팔자를 누리게 된다고 해서 도처에서 너도나도 보려고 모여들었다. 또 안택 · 혼인 · 이사를 할 때, 문상이나 먼 길을 떠날 때도 팔봉산에 와서 빌고 그 날짜와 시행여부를 정했다고 할 정도로 삼부인신은 인근 마을사람들에게는 돈독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팔봉산의 이적은 최근에도 일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뭄이 들면 아낙네들이 팔봉산 앞강에서 키를 들고 나와 물에 씻으면 비가 온다고 하여 92년도에 행하였다.
팔봉리 구이장님의 여동생이 한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친정나들이를 왔는데 아이가 갑자기 없어져서 동네사람을 동원하여 찾아보니 마을에서 1km가 되는 팔봉산의 칡덩쿨 위에 있었다. (현재 36세)
팔봉산에서 87년도에 등산객의 부주의로 산불이 났는데 삼부인을 모신 신당만은 무사하였다.
인근의 용늪에서 구렁이가 멧방석만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여러 명 있다.
팔봉산당굿날 청년들이 산에 올라 술을 먹고 높이 50m의 바위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 않은 분이 현재 화천에서 63세로 살고 있다. (<팔봉산 당산제 요지집>참조)
Ⅱ. 八峯山堂과 堂神
지금 이 산의 제2봉 정상에는 瓦家인 2집의 당집이 있는데, 2칸 크기의 당은 三夫人을 모신 곳이고, 그 옆의 작은 당은 산신 · 칠성 · 후토신을 모신 칠성각이다. 원래 이 당집들은 8봉에 있었으나 2봉으로 옮겼는데, 구전상으로는 뗏목꾼들이 당쪽을 향하여 소변을 보는 것이 보기 싫은 때문이라고 하나 분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칠성각에는 제물과 함께 한지가 현납되어 있고, 중앙에 위패가 있는데 七星七君 · 八峯山后土神靈이라고 쓰여 있으며, 산신의 것은 범이 노인을 시립하고 있는 작은 山神圖로 대신하고 있다. 삼부인당에는 재단 중앙벽면에 죄로부터 홍씨부인신위 · 김씨부인신위 · 이씨부인신위라고 쓴 위패가 부착되어 있다. 그리고 제단에는 제물과 함께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작은 철마 3구가 모셔져 있는데, 제조 연대가 오래고 또 당집의 화재로 인해서인지 녹이 슬고 상하여 있다. 마루바닥에는 놋쇠로 만든 큰 馬像도 3구가 있다. 말의 형상이 사실적으로 조각된 큰 마상은 20여년부터 당을 지켜온 당직이 조정순(어유포리 거주) 보살의 제자가 봉헌한 것인데 삼부인이 싫어해서 제사 때만 올려놓았다가 평상시에는 내려놓는다고 한다. 여기서 삼부인전에 마상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호랑이를 모신 곳이 산신각이듯이 그 삼부전이 서낭당이라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팔봉산은 원래 여성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3부인신을 모신다는 것이다. 3부인의 위치는 제보자의 기억력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定說은 이씨 · 홍씨 · 김씨 부인이다. 이씨가 시어머니이고, 홍씨가 며느리, 김씨는 딸이라고 한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춘추로 年 2회 3월 팔봉산 주변의 주민들이 모여 팔봉 중 제2봉의 당집에서 행제하였다.
한편 신성성이 깃든 팔봉산 일대는 도교적인 색채도 강해서 지명에 隱仙岩 · 顯山岩이 있으며, 또 인근의 모곡리에는 老姑山이 있는데 중국의 천태산 麻姑할미봉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며, 산 밑의 도리소도와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또 이러한 도교적인 지명과 함께 후토 · 칠성 및 관운장에 대한 신앙이 그것을 대변한다.
특기할 바는 팔봉산 인근의 두미리 필곡(붓굽이) 마을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거기에는 관운장의 화상과 길이 2.5m, 무게 58kg의 청룡언월도(10여 년 전에 도난)를 모셨었다. 관운장을 잘 모시던 그 시절에는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발굽이 붙었으므로 꼭 下馬하여야 했다. 특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呂氏 성을 가진 사람이 앞을 지나가면 발이 붙어서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1칸(2평)으로 된 당집은 본래에 있던 사당이 5.16 군사혁명 후 새마을 사업 때 미신타파운동으로 헐리게 되자 춘천에 사는 분의 시주로 다시금 지은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사당은 이곳으로 피난 온, 조선 말기 고종의 왕후 민비의 총애를 받던 무당인 진령군(李씨)의 말을 듣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관우는 도교에서 군신으로 받드는 신격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1598년(선조31년)에 명군이 안동과 성주에 武廟라 하여 關帝의 묘를 세웠고, 1600여년(선조33년)에는 명나라 신종의 칙령으로 동관왕묘가 서울 동대문 밖에 세워졌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이 두미리의 관우 사당은 바로 이러한 도교적 신앙의 잔재로서 팔봉산신들과 연결되어 있다.
Ⅲ. 팔봉산 당산제
팔봉산 당산제는 그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 있었던 ‘민속경연대회’와 향토지인 《민속지》 및 《홍천군지》등을 통해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83년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원주 치악 체육관에서 거행된 제 1회 강원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민속놀이 경연종목으로 출연한 팔봉산 당굿은 3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마당은 후토신령 · 칠성칠군에게 축원을 올린다. “팔봉산신, 칠성칠군 당산지신 들으시오”로 시작한다. 2마당은 3부인신놀이로서 “당위의 이씨부인, 하늘의 김씨부인, 강남의 홍씨부인, 조선국 나오실 때 3부인이 나오시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3마당은 만신굿놀이로서 “가구 강강 얼시구 절시구나”하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놀이로 끝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제1마당 : 칠성칠군, 후토신령 축원
팔봉산신 · 칠성칠군 · 후토신령 · 당산지신 들으소서. 이네동네 동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박복자는 부귀공명, 무자자는 자손창성, 병든자즌 즉시 낫고, 농사자는 농복받고, 사업자는 제수대통 주옵소서…하고 축원한다.
제2마당 : 3부인 놀이
땅위에 이씨부인, 하늘에 김씨부인, 강남에 홍씨부인 조선국에 나오실 때 3부인이 나오시다. 조선국에 좁다는 말 들으시고 3부인이 모이시어 무쇠배를 타실려니 무거워서 못타시고, 돌배를 타시려니 갈아앉아 못타시고, 종이배를 타시려니 미어져서 못타시고, 수양버들 버들잎을 타시고 나오실 때 홍두개피를 바르시고 꽁지접어 받드시고…라고 무가를 읊으며 축원한다.
제3마당 : 만신굿놀이(따라온 여러 귀신들에게 풀어 먹이는 제차)
가구강강 얼시구나 절시구나 욕심많은 내대감 나갈 적엔 맨발이고 들어오실 적엔 찬발이라 얼시구나 절시구나 낮이면 의사들고 저녁이면 순행들고 여대감은 여디래시고 남대감은 저디래시고 재수나 소망을 섬겨줄적에 남기게 챙겨주마 쓰고 남게 챙겨주마…라는 해설을 늘어놓으면서 춤을 춘다.(《민속지》 강원도, 645-7쪽)
그런데 이보다도 앞서 팔봉산당산제를 학계에 처음으로 알린이는 지금부터 20여 년 전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강원도편, 1977)에 조사 보고한 장주근 선생이다. 그 내용을 가려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팔봉산 위에는 당집이 둘이 있다. 하나는 칠성과 산신을 모신 당이고, 또 하나는 3부인당이다. 3부인은 시어머니 이씨, 딸 홍씨, 며느리 김씨라는데 각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팔봉산을 여산이라 하며, 또 3부인 신은 욕심이 많은 신이라고 일러온다. 당집은 3부인당이 더 크다. 이 당이 5년 전에 제사를 지내고 내려오던 사람들의 담뱃불로 화재가 나서 모두 타버렸다. 그 후는 당직이 무녀도 없었으나 동네에서 의논이 되어 천원 내외씩 정성껏 돈을 12만원을 모아서 당이 재건된 것이 금년(1976)이다. 그래서 그간 4-5년간 무당굿을 못했다. 그래도 금년 1976년 3월 15일에 당은 없지만 15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산치성을 지냈다. 여기에는 외지인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며, 여자가 훨씬 많았다. 인근에 팔봉산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참가자는 동네사람들 외에도 늘 많다고 한다. 팔봉산의 山제사는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별신굿까지 해왔다고 한다. 이때는 동네에서 祭費를 걷는 일도 없었다. 굿상에 각자가 정성을 들이며 돈을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무당을 두어야 할 방향으로, 또 3월 15일의 제사는 무당이 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방향으로 여론은 지배적으로 기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재 전에는 춘천의 40대 무녀가 당직이로 있었는데, 지금은 홍천사람인 45세 정도의 무녀가 당직이로 있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전부터 팔봉산의 삼신(산신 · 칠성 · 후토)당과 삼부인(이씨 · 김씨 · 홍씨)당에서는 화재로 걸른 때도 있었으나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9일에 주변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 풍년과 안택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고 당굿을 하여왔다. 특히 1993년부터는 전국 무속인의 단체인 대한승공경신연합회 강원지부가 주관하여 봄철에만 당굿을 크게 한다. 93년에는 4월 5일(음 3월 14일)-6일(음 15일) 2일간, 94년도에는 4월 23일(음력 3월 13일)부터 4월 25일까지 3일간(오전 10시-오후 5시) 큰 굿판을 벌였다.
1993년도에 있었던 축제 때의 당굿은 팔봉산의 화양강변에서 2일간 열렸고, 주관은 대한승공경신연합회 강원도지회 및 홍천지부가 하였다.
후원은 홍천군문화원, 협찬은 巫具와 佛具를 판매하는 춘천소양만물사가 맡았다. 당제를 지낸 후 강변에서 있었던 그때의 굿 순서는 다음과 같다.
14일 : 부정굿-가망굿-터전굿(대감굿)-작두굿
15일 : 신목점지-신목하산-칠성굿-당산굿-작두두굿 두굿(3층 작두, 그네작두)
이때의 당제에 대해 당시의 상황을 언급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신연합회 강원도지부가 주관하여 팔봉산에서 음력 3월 14일(양력 4월 5일)-15일 양일간 홍천, 춘천지역 무속인 백여 명과 주민과 관객 5백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팔봉산당굿놀이>가 열렸다. 당굿은 매년 음력 3월 보름달과 9월 보름에 팔봉산 정상의 당집(서낭당)에서 민속제의의 하나로 인근 어유포 · 반곡 · 팔봉 · 두미 · 구만리 주민들이 합심하여 마을의 수호신인 3부인시니에게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축제를 벌여오고 있다. 이 축제는 4백 년 전부터 전래되어 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히 밝혀지진 않고 있다.
당굿은 하루 한마당씩 총3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마당은 당지기인 조정순 보살(63살)이 칠성칠군을 향한 기원을 시작으로 부정굿 · 가망굿 · 터전굿놀이로 펼쳐진다. 제2 마당인 둘째 날은 당산굿으로 중요한 수호의 신인 3부인신에게 빌고, 마지막 날 만신굿 대한승공경신연합회 도지회장인 최광석씨(46)는 이 당굿놀이는 팔봉산 주변 마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安過太平을 기원해온 전통 민속 행사라면서 보존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강원일보, 1993.4.8 자)
94년도의 당산제는 경신연합회 강원도지회와 홍천군지부 그리고 팔봉산 당직이 조정순 보살이 주관하여 음력 3월 13일(양력 4월 2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열렸다. 후원은 대명스키장 · 홍천군 서면사무소 · 서면지서, 그리고 협찬은 찰봉산 상인조합 · 제일만물사 · 소양만물사 등이 하였다. 본래 팔봉산 당제는 팔봉산정에 있는 당집에서 당직이가 주관하여 지내던 제의하였으나 작년부터 경신연합 강원도지회가 홍천군지부와 협력하여 활성화한 것이다. 이때의 당산굿의 집행위원회의 구성은 ➀팔봉산당직이-조정순 ➁집행위원장-최광석(도지회장), 부위원장-김경종(부회장) ➂준비 위원-신인묵 외 9 ➃지도위원-엄봉군 외 9 ➄실행위원-방삼석 외 92명이 참여하고 있으니 총인원이 117명이나 된다.
1994년도의 춘계 팔봉산 당산제는 당직이 조 보살이 삼신당에서 징을 울리며 제수소망 · 직장승진 · 공부성취 등의 축원을 하고, 이어 3부인당에서 축원하고 3부인신을 미리 보아둔 神木에다 강신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전날 밤에 차가운 강물에서 목욕재계한 3무녀가 선녀처럼 성장하고서 등장하여 흰 천에 이씨 부인, 노란 천에 김씨 부인, 붉은 천에 홍씨 부인이라고 쓴 신위를 받아서 팔짱껴 안는다. 그리고 神木을 앞세우고 하산한다. 신대잡이인 김경종씨(65세, 경신연합회강원지회 부회장)는 가파르고 험한 돌산을 내려 오면서 신목이 기울거나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물론 3무녀가 神位를 안거나 신목에 강신시키는 등의 재차는 3년 전까지 조 보살이 아래쪽의 굿당에서가 아니라 정상의 당집에서 굿을 하였으므로 없던 절차이다.
신목과 3부인 신위가 강변에 이르면 대기하고 있던 영신맞이 組가 맞으며, 행진대열을 갖춘다. 대열은 맨 앞에서부터 팔봉산신령님기-오색기-신목-홍씨 · 김씨 · 이씨 신위-장구 · 바라 · 징 · 피리 등의 악대-무녀들의 행렬 순이다. 그리고 거기서 400여 m 떨어진 주차장에 마련된 굿당까지 풍악을 울리며 행진하는데, 원색의 움직임이 화려하다.
이윽고 굿당에 이르면 산신기 · 오색기를 당에 설립하고 당직이 조보살이 축원하면서 3무녀에게 신위를 받아 굿당의 중앙에 위치한 제단에 안치한다.
제단에는 제물이 가득하고 삼색의 지화가 화려하다.
중앙의 옆 칸에는 3신을 모셨다. 역시 紙花와 제물이 놓인 위 벽에 신위를 써 붙였으니 오른쪽에서부터 天皇上帝天尊大王 · 北斗大聖七元星君神 · 五行名山靈山王大神이다.
신목은 조보살이 받아서 축원하고 각 제단에 接神시키고 나서 제단에 세운다. 굿당의 좌측 제상에는 희생물인 돼지가 놓이고, 오른쪽은 장구 · 징 · 피리 · 바라 등의 악대와 내빈의 자리이다. 이렇게 팔봉산의 푸르른 영봉을 배경으로 하여 설치된 굿당에서 1994년도 춘계 당산제의 굿판이 벌어졌다. 1994년도에 벌인 3일간의 당산제의 순서를 프로그램책자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일째 : 4월 23일(1994년, 음력 3월 13일)
삼부인전 기도-신목적지(하산)-행사 기원사-용신제-당산제-작두굿
2일째 : 4월 24일
터전굿(대감)-산신굿-작두굿(남 · 여)-그네작두굿
3일째 : 4월 24일
칠성굿-장군굿-작두굿-대신굿-한마당굿(뒤전굿)
그러나 이 순서는 굿거리의 다양성이 20여 거리를 벌이는 강릉단오제와는 달리 단순하기 때문에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실정이다. 실제로 진행된 재차는 다음과 같다.
1일째 : 3부인전기도-신목점지-부정굿-가망굿-칠성굿-산신굿-장군굿-대감굿-작두굿
2일째 : 산신굿-칠성굿-대감굿-장군굿-대신굿 신굿-정군굿-작두굿-대감굿
3일째 : 부정굿-행사기원사-당산제-청좌굿-칠성굿-산신굿-작두굿-장군굿-대감굿-한마당굿(뒷전굿)
한편 2일째는 별도로 굿당에서 2km쯤 떨어진 밤골 유원지 앞의 용늪에서 ‘키씻김’을 하였다. 이것은 예전에 가뭄이 들면 3姓氏의 과부와 여인들을 동원하여 키를 씻고 물을 퍼올려 비오는 형상을 유감시킴으로써 비를 유도하려는 기우의식을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3일째에는 아침 10시에 강변에서 용신제를 행하였다.
Ⅳ. 당산굿거리
당산제의 전체적인 진행과정을 보면 프로그램에 있는 순서와 꼭 일치하지 않거나 또 실제의 굿에서는 연희하고 있으나 나타나있지 않은 것도 있으므로 당굿의 전ㅊ네적 과정을 굿의 일반적인 재차에 따라 설정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3부인전 기도
팔봉산 당직이인 조 보살이 3신(산신 · 칠성 · 후토)당과 3부인(이 · 김 · 홍씨)에게 기도한다. 3부인이란 팔봉산 주변 마을의 世居氏族인 이씨 · 김씨 · 홍씨의 부인으로 이웃婚을 하여 한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이씨는 마음씨가 인자하였고, 김씨 부인은 더욱 착하고 자상하였으나, 홍씨는 너그럽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굿을 하며 빌 때 먼저 이씨가 강신하면 풍년이 들고, 김씨가 내리면 대풍년이요, 홍씨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고 해서 그네가 내리면 주문을 외워서 홍씨를 달랜다고 한다. 특히 홍씨는 마을 사람들이 개를 잡아 먹는 등의 심한 살생을 하거나 도박 등 부정한 일을 하였을 때 내리는 신이라고 한다. 금년에는 이씨부인이 내렸다 한다.
(2) 신목점지 및 하산
미리 점찍어 둔 나무를 베어서 거기에 3부인신과 睹神을 강신시킨다. 신대잡이가 된 김경종씨가 제신들이 하위동참하시기를 열렬히 기도하자 이윽고 강신하였음을 알리는 징조인 신목의 떨림이 온다. 그는 3부인의 신위를 받아지는 3무녀와 함께 신령을 아래의 굿당에 모시기 위해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하여 迎神맞이 組와 함께 굿당에 이른다. 비단에 쓴 3부인의 신위와 신목을 제단에 모신다.
(3) 부정굿
괘자차림의 무복을 입은 한 무녀가 등장하여 제상에 배례하고, 가무한 후에 바가지의 물을 신칼로 다스린다. 그리고 그것을 주위에 뿌려 굿당을 정화하고 부정을 가린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춤사위의 굿이 시작된다.
(4) 행사기원사
지회장인 최광석씨가 이 당제를 합심해서 성공시키자는 개회사를 하였고, 이어서 서면 면장과 서면 지서장이 감사의 축사를 하였다.
(5) 용신제
행사기원사가 시작되기 전 오전 10시부터 강가에서 용신제를 지냈다.
강물을 향해 백설기와 북어 등의 제물로 재단을 만들고, 신목을 잡았던 김경종씨가 제주가 되어 장구를 치면서 용신을 달랜다. 그리고 매 여름철마다 수 십 명의 인명이 희생되는 이곳의 강가에서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축원을 하였다.
(6) 당산굿
괘자차림으로 흰 고깔을 쓴 당직이 조정순(어유포리 거주)보살이 혼자 등장하여 연희하는 독특한 굿거리로서 경신연합회가 이 당굿을 주관하기 전에는 조 보살이 단독으로 연희하여 오던, 팔봉산당굿만의 특징이다.
그녀는 징을 울리면서 동네 할머니(이필순, 71세)를 붙잡고 있는 소나무신대(다라에 가득 담은 쌀에다 꽂혀 있다)에 3부인이 하위 동참하시라고 축원을 한다. 주위의 보살들도 강신하기를 비손한다. 이윽고 떨림이 오는데, 금년에는 이씨부인이 먼저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조 보살이 격렬하게 巫舞를 춘다. 그리고 신대로 제단과 굿당의 곳곳에 접신시키고 관중에게도 그것으로 쓸어내림으로써 신력을 감염시킨다. 이어서 수명장수를 빌기 위해 헌공한 수십필의 광목 곧 ‘명다리’를 안고서 춤을 춘다. 그것에 일일이 神力을 감염시켜 내려놓으면 여러 주민들이 잘 개어서 포개어 쌓는다.
(7) 서낭굿
여무 2, 남무 1인이 등장하여 상하좌우로 오색기를 흔들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남무가 무가를 선창하고 여무가 후창을 하는데, “아시자, 모시자, 팔봉산서낭님, 팔도서낭님, 춘천서낭님…전라도서낭님…”등의 하위동참을 축원한다.
(8) 산신굿
6명의 무녀가 붉은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전립을 쓰고, 손에는 부채와 방울을 들고 나와 원무를 춘다. 그리고 중앙의 3부인전 옆에 설치한 산신전에 절을 한 후에 우순풍조와 재화초복을 비는 축원을 한다. 산신은 통돼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돼지를 헌공한다. 그리고 돼지를 업고 춤을 춘다. 또 흔쾌히 받으셨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돼지를 삼지창에 꽂아 세운다. 그것이 성공하니 창부타령을 부르며 신바람 나게 춤을 춘다.
(9) 칠성굿
남무 1, 여무 6인이 흰 고깔을 쓰고 등장하여 먼저 칠성신의 신위에 절하고 나서 부채와 방울을 들고 원무를 춘다. 그리고 “아시자, 모시자, 칠성님을 모시자…”고 主巫가 선창하면 일행이 따라서 후창을 한다.
그리고 주무(권계숙, 홍천)가 떡시루를 이고 춤을 추고, 시루 위에 밥통을 포개는 巫藝를 펼친 후에 시루 위에서 각성받이의 수명장수, 풍년, 상업번창을 도와주겠다는 공수를 내린다.
(10) 대감굿
1인의 여무(조창순, 춘천거주)가 전립을 쓰고, 전복을 입고, 손에는 방울을 들고 등장하여 ‘산룡대감 · 용신대감 ·터주대감…’등을 부르면서 빠르게 춤을 춘다. 그리고 모자를 푸른색 천으로 묶은 후에 북어를 목에 걸고 술잔을 관중석으로 돌린다. 이때 당직이 조보살이 ‘키씻김’에서 사용하던 키를 들고 굿당을 돈다. 이윽고 주무는 모자를 벗고 치마를 뒤집어 쓴다. 그리고 ‘호구신’ 운운하면서 재수문을 열어 주겠다고 한다. 다른 날에는 5인의 무녀가 전립을 쓰고 나와 3부인전에 재배한 후 부채를 들고 춤을 추었다.
(11) 장군굿
신장굿이라고 하는 장군굿은 남무 2, 여무 3인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전복차림으로 등장하여 부채와 방울을 들어 올리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장군님을 모시자는 교술무가를 부른 후에 칼춤을 춘다. 또 오방신장기를 들고 춤을 춘다. 다른 때는 1인의 남무(노원표, 춘천)가 갑옷에 투구를 쓰고 등장하여 “사바세계는 28수, 각나라의 열두 장군, 오방장군, 도당장군, 경복궁 · 창덕궁에서는 놀으신 장군,…수궁장군, 용궁장군, 최영장군, 이괄장군……”등을 노래하며 칼과 삼지창을 들고 춤을 춘다.
그러다가 동해안 풍어굿에도 보이는 놋동이굿처럼 떡이 든 양판을 들고 춤을 추다가 입으로 무는데 입술이 양판에 딱 붙었다. 이는 신의 감응이 있다는 증거라 한다. 잘 떨어지지 않자 주위에서 비손을 하니 떨어졌다.
이어서 “지하장군, 천하장군 장군님이 아니신가, 신장님은 못오시나…”하면서 작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작두를 탄다.
(12) 작두굿
구성단계로 볼 때 작두굿은 장군굿의 일부에 속한다. 이 굿거리는 위의 노원표씨 외에도 남무의 그네작두, 여무의 작두굿이 있다. 그네작두는 19세 때 신이 내러 23년간 무업에 종사한 손병수씨(42세, 춘천 효자동)가 연희하였다. 그는 붉은 두건을 쓰고 조끼를 입고 나와 제단에 떡시루와 술을 바친 후 4방을 향해 절한다. 그리고 신이 잘 받으셨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상 위에 정종병과 사이다병을 포개어 세우고 또 그 위에 시루를 얹는 ‘병사슬’을 행한다. 그런 후에 작두칼로 온갖 재액을 다 막아달라는 뜻에서 작두굿을 하기 위해 천을 가르고 나가는 길닦음을 하고 그네줄에 달린 작두대에 오른다. 작두에 발을 얹고 간단한 춤을 추어 보이고, 이어서 그네를 탄다. 그네작두에서 내린 그는 고깔로 바꾸어 쓰고 또 괘자로 갈아입고서 긴 베에 한쪽 다리를 묶은 닭을 들고 시루 위해서 춤을 추는 ‘용사슬’을 탄다. 이윽고 닭을 내던지니 닭이 베줄을 길게 끌고 나간다.
작두굿에는 3개의 도람통 위에 작두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서 칼춤을 추는 굿놀이도 있는데, 거기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노원표(춘천)씨와 女巫 정숙희(60세, 춘천군 삼포)씨가 연희한다. 노씨는 장군복을 입고 투구를 쓰고 나와 춤을 춘 후에 작두대에 올라 칼춤을 춘다. 정 보살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붉은색의 괘자를 입고 등장하여 작두를 타면서 시주 하는 사람들에게 오색기를 뽑게 하고 그것으로 공수를 내려주기 때문에 인기가 좋다. 작두대에서 내려온 정 보살이 오색기를 당직이 조 보살의 치마에 넘겨주면 그것을 제단에 놓는다.
(13) 한마당굿
남무2, 여무 9인이 머리띠를 두르고 손에는 방울과 부채를 들고 등장하여 원을 돌면서 힘차게 춘다. 지금까지의 여러 굿거리 중에서 가장 발랄하고 적극적이며 힘차다. 이 굿은 사설 중에 ‘별상대감’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별상거리 또는 손님굿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관중과 무당 그리고 신령이 함께하는 한마당의 춤판이 벌어졌다. 이후에는 제신을 따라온 모든 수비(下位神)들에게도 제단의 음식을 풀어서 먹이는 ‘뒷전풀이’를 하였는데, 제단에 놓인 여러 음식들의 일부를 떼어와 춤추면서 함지박에 담거나 뿌린다.
(14) 소제
굿의 마지막은 뭇 신령을 본래의 곳으로 보내드리는 送神굿에 해당하는 燒祭를 행한다. 이는 굿에서 사용한 지화나 위패 등을 불태우는 것으로서, 이것이 끝나야 굿이 완전히 마무리 된다.
Ⅴ. 마무리
지금까지 조사보고한 팔봉산 당산제의 특징을 우리나라 최대 · 최고의 민속제의인 강릉단오제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 내지는 차별적 특징이 나타난다.
(1) 당산제는 그 역사와 동제로서의 성격으로 강릉단오제와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며, 단오제가 영동을 대표하는 제의라면 당산제는 영서를 대표하는 무속제의로 볼 수 있겠다.
(2) 당산제는 동원되는 구경꾼의 숫자에 있어서는 단오제에 훨씬 미치지 못하나 참여하는 무속인의 숫자는 오히려 단오제를 훨씬 능가한다.
(3) 강릉단오제는 강릉권의 民 · 官 · 商이 주관하는데 반해 당산제는 경신연합회 강원도지회 및 춘천 · 홍천지부가 주관하고 인근의 주민과 면에서 찬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단오제는 지역사회가 주도하고, 당산제는 무속인들이 주도하는 제의이다.
(4) 단오제가 남녀서낭의 성적 합위를 근간으로 하는 음양화합의 상생론에 입각하여 생산번영 · 행로안전 · 제액질병을 성취하려는 데에 비해 당산제는 삼부인의 神力을 통해 풍요를 비롯한 인간의 소망을 성취하려는 제의이다.
(5) 단오제가 유교식 · 무교식의 혼합적 제의라면 당산제는 무교식 만의 제의이다.
(6) 단오굿이 세습무들에 의해 주도되는 데 반하여 당산굿은 강신무들에 의해 주도된다.
(7) 굿거리의 가짓수에 있어서는 단오굿은 굿거리가 24거리 정도로 다양하나 당산제는 10여 거리 정도로 단순하다.
(8) 단오굿에서는 무속신화가 구송되어 문학적이나, 당산제는 신화의 구송이 없고, 축원과 공수만이 있다.
(9) 단오굿은 신화와 사설이 위주여서 춤사위가 느슨한데 비해 당제는 춤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발랄하고 역동적이다. 따라서 예술적인 면에서 볼 때 단오굿이 문학적이라면 당산제는 무용적이다.
(10) 단오제는 神판을 중심으로 하여 난장판이 형성되어 있으나 당산제는 신판만 있을 뿐 난장판이 없다.
이러한 특징을 종합하여 볼 때 팔봉산 당산제가 보다 더 민속적인 것이 되고 사람들과 함께 향유하는 굿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강릉단오제의 장점을 접목시켜 보는 작업이 필요하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인 홍천이나 춘천에서 공연되는 제전이 되도록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二. 江原道 浮來說話
Ⅰ. 머리말
이 세상에 자연현상보다 더 오묘한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그것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으며, 왜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의 구체적인 해답을 추구하려는 대신에 그것에 대한 신비의 경탄이 앞서고 나아가 그것에 대한 외경의 경지에서 神靈化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문화의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연물 형성에 관한 과학적인 해석 곧 자연물을 교체성 · 상극성 · 대칭성 등의 二元論으로써 풀이하여 보려는 첫 단계의 시도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지진파의 반사 · 감쇠 · 분산으로써 이루어진 일종의 粘性流動體로 파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지구과학이나 지질학적인식 대신에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거기에 제반 사회현상을 결부시킨 문학적 미학을 창조하여 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서 사리에 따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서 공상도 하고 망상도 한다. 이 상상력이야말로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여 정신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에너지요, 예술창조의 원동력이며, 역사창조의 동인이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은 지각변동에 의해 그 자리에서 솟아올랐거나 화산의 촉발현상으로 생긴 것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건 말건 간에 어디로부터 날아오거나 떠서 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울산바위와 같이 덩치는 크나 수려한 바위도 어디서 흘러 나왔거나 날아온 것으로 보았고, 또 사찰이 어떤 사유로 인해 폐허화됐는데 다른 곳에 同名의 절이 생겼다면 그것을 부처님의 뜻에 의해 전번의 절이 흘러왔거나 날아온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이러한 생각이 이야기로 구체화 된 결과가 이른바 부래설화이다. 다시 말해서 부래설화는 산 · 바위 · 섬과 같은 자연물과 절 · 배 · 궤짝 등이 홍수나 어떤 신령한 힘의 의지에 따라 떠오거나 날아왔다는 물체의 이동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잡아서 이르는 용어이다.
이 부래설화는 주로 자연물의 생성기원을 설명하는 고유신화(proper myth)적인 이야기로서 설화 생성의 기초적 단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설화는 생명력이 있어서 이 기초단계가 변화하고 분화하여 본격단계로 들어오게 되고 마침내는 소멸한다. 따라서 부래설화는 고유신화로서 천지창조적 신성성과 전설적 흥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화의 미학을 조감할 수 있으며, 나아가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엄숙한 서술’이라는 특질을 내포하고 있어서 향유자인 민중의 의식을 파악하여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부래설화가 구전한다. 《口碑文學大系》에는 70여 장소에 90여 편의 관련설화가 있으며, 또 강원도 것도 5곳의 장소에 관한 9편의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이 《大系》와 그 밖의 자료집에서 수집한 것 그리고 필자가 채록한 것을 합하여 총 19곳에 관련된 26편의 강원도 설화를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Ⅱ. 강원도의 부래설화
부래설화는 주체에 따라 5계열로 나눌 수 있으니 1) 절이 떠 날아간 浮來寺系, 2) 궤짝이 물에 떠서 들어온 浮來櫃系, 3) 바위가 떠서 날아온 浮來岩系, 4) 산이 이동하다가 멈춘 浮來山系, 5) 바다에 떠돌다가 멈춘 浮來島系 등이다. 여기에는 넓게 외래인이나 도래인계도 포함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를 제외한다. 그리고 위의 5)는 섬에 속하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산으로 부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부래산계에 포함시켜 다룬다.
1) 부래사계
(1) 인제-백담사
(2) 정선-벽절(여주 신륵사)
2) 부래궤계
명주군 강동면 심곡리 여서낭궤
3) 부래암계
(1) 화천-비래암
(2) 고성-매바위(응암), 괘종암
(3) 속초-울산바위
4) 부래산계
(1) 춘천-고산
(2) 원주-유실도
(3) 강릉-남산
(4) 〃 -죽도봉
(5) 〃 -고성산
(6) 영월-삼척산
(7) 홍천-팔봉산
(8) 철원-외동산
(9) 〃 -삽슬봉
(10) 삼척-해망산
(11) 〃 -덕봉산
(12) 〃 -딴산
(13) 〃 -도롱봉
(14) 〃 -도담 삼봉
1. 浮來寺系
강원도의 부래설화로서 여기에 해당하는 인제의 백담사와 정선의 벽절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제 백담사
인제의 백담사는 원래가 낭천(화천)에 있던 절인데 사람들이 인근에서 자주 사냥을 하여 살생을 하므로 못쓰겠다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인제의 북면 한계리로 가서 한계사가 되었고, 거기서는 절에 화재가 잦아서 용대리로 옮겨 오늘의 백담사가 되었다.
(2) 정선 벽절
정선의 용탄리에 벽절이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탑만이 있을 뿐이다. 옛날 여기의 절에는 한 스님이 도를 닦고 있었다. 하루는 달빝이 교교한 밤중에 멀지 않은 강변에서 웬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섬뜩하여 급히 달려가 보니 이십대의 여인이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바야흐로 강물에 뛰어들려는 찰나였다. 스님이 급히 만류하면서 사정을 물으니 청상과부로 홀로 남은 것을 한탄하여 먼저 간 남편을 따르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생명은 귀한 것이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오히려 부인의 도리임을 설파하였다. 그로부터 부인은 고인이 된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절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남녀의 관계여서 세월이 감에 따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깊어져 마침내 스님은 파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인근의 마을 사람들은 의분이 나서 두 남녀를 징계하고자 절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절은 간곳이 없고 빈터에는 다만 탑만이 덩그렇게 서 있었다. 그런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경기도 여주읍 앞산에 위치하고 있는 같은 이름의 벽절(본명은 신륵사)은 바로 정선의 벽절이 옮겨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이곳 사람들이 여주에 가서 세금을 받아왔었다. (鄕土의 傳說, 강원도, 1979, 365-6쪽)
2. 浮來櫃系
부래궤계에 속하는 명주군 강동면 심곡리의 부래궤는 민간신앙과 관련된 설화이다. 곧 부래한 배의 궤에서 칠보 · 노비와 함께 나온 석탈해처럼 부래궤에서 여인의 화상이 나와 그것을 마을의 여서낭으로 모시게 된 유래담인데,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1) 명주군 심곡리 여서낭
심곡리의 여서낭은 200년 전 영해 李氏 할아버지가 꿈속에서 한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나 함경도 길주 명천에서 왔다면서 지금 심곡과 정동 사이의 부처바위에서 표류하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가보니 궤짝이 있어서 끌어다 열어보니 거기에 꿈에 본 여자의 화상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부처바위에 안치하고 위하였더니 고기가 잘 잡히고 만사가 형통하였다. 그 후에 서낭이 외롭다고 하므로 숲속에 이전하고, 1897년에 서낭당을 개축하고 화상을 이전하여 모셨다.
3. 浮來岩系
부래암계인 (1)화천의 비래암, (2)고성의 응암과 괘종암, (3)속초의 울산바위에 관한 부래설화는 다음과 같다.
(1) 飛來岩
비래암은 화천군 상서면 구운리 만상동 마을 뒤쪽 산복판에 있는데, 높이 100m, 폭 150m이다. 이 바위는 아득한 옛날에 어디선가 날아왔는데 바위 한 가운데가 연못처럼 움푹 파여있고 거기에 맑은 물이 괴어 있어서 신선이 늘 내려와 목욕하고 놀았다. 이를 본 마을사람 하나가 그것이 부러워서 자기도 그 바위에 올랐는데, 그 때 갑자기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지며 큰 지네가 나와 그 사람을 해쳤다. 또 거기에는 절구통만한 구렁이가 지키고 있어서 그 후부터는 부정한 사람은 이 바위에 오르지 않으며, 마을 사람들은 신령한 바위로 여겨 기도처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바위 변두리를 ‘달래 모퉁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마을의 남매가 기도하러가다가 비를 맞은 누이의 몸매를 보고 욕정이 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오라비가 성기를 절단하여 죽은 ‘달래고개’ 전설이 어려있다. (華川郡誌, 1988, 630쪽)
(2) 응암과 괘종암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 천하의 명산 하나를 만들 뜻을 품고 “천하의 바위산 중 그 형승으로 내로라하는 자는 다 모이면 그 우열에 따라 금강의 구성요소로 쓰겠으니, 자신 있거든 오라”고 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형승으로 자신 있는 바위와 산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조물주는 그들을 등급에 따라 분류하여 알맞은 곳에 각각 배치하여 천하명산 금강산을 만들었다. 이렇게 골라서 배치하여 명산을 만들고 나니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곧 응모하여 온 모든 산을 다 써 주었으면 좋으련만 경색이 금강산의 일부로는 좀 부족한 것도 있고, 또 형승은 명산의 주인 역을 맡을만하나 거리가 멀어서 모든 배치가 끝나 뒤에 온 자도 있었다. 조물주는 고민을 하다가 생각하여 낸 것이 금강산 변두리에 그 특색에 따라 배치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것은 바닷가 해구산 일대에 던져 경승을 만들었다. 이 때 응모하여 온 바위 중, 매처럼 생긴 鷹岩과 종을 달아놓은 듯한 掛鐘岩이 그 경색을 뛰어나나 이미 늦었는지라 변두리에 배치하려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이만한 모습으로 금강의 주역을 못할 바에야 차라리 당초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단역 노릇은 않겠다.”면서 돌아섰다. 그러나 그들은 오느라고 너무 지친데다 조물주와 실랑이를 한 바람에 기운이 진하여 얼마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래서 결국 금강산의 단역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3) 울산바위
➀ 속초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원래 울산에 있던 바위이다. 옛날에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다가 천하의 명산 하나를 만들되 봉우리 수를 꼭 1만 2천으로 할 계획을 갖고, 자신이 있는 전국의 산봉들 중에서 응모의 뜻이 있으면 모월 모시까지 모이라고 사발통문을 보냈다. 울산바위는 이 소식을 듣고서 주위의 산봉들에게 응모하여 가는 뜻을 거만스럽게 밝히고 떠나왔다. 그러나 그의 몸이 원채 육중하여 기진맥진하였다. 그래서 외설악의 한 곳 곧 지금 자리 잡고 있는 자리에서 하루를 쉬었다가 가기로 하였다. 다음날 그는 서둘러 금강산 어귀에 이르니 다른 산봉들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봉우리 수를 다 채웠기에 물러나온다고 하였다. 심히 낙망한 울산바위는 岩山의 왕이라고 자부하는 터이라 조물주에게 늦게 온 이유를 말하고 금강산의 주역자리 하나를 만들어내라고 하였다. 조물주가 울산바위의 모습을 보고서는 안타까워하면서 이르기를 “이만하면 족히 금강산의 주역자리를 맡을 만하나 이미 자리가 다 찼으니 산록의 단역 자리나 맡을 수밖에 없노라”고 하였다. 이에 화가 난 울산바위는 홧김에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떠나올 때 큰소리를 탕탕 치고 나온 거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올 때 머물렀던 외설악으로 가서 주역노릇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찾아와 머물게 된 것이 지금의 울산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울산사람들은 바위가 금강산을 떠나간 뒤로 수소문하여 알아보니 양양의 속초에 있는 것을 알고서 양양현에서 매년마다 산세를 받아갔다. 그래서 과중한 세금에 양양현에서는 몹시 허덕이게 되었고 걱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또다시 세를 받으러 올 때가 되자 현감은 심기가 불편하여 수심에 잠겼다. 한번은 사또의 어린 아들이 근심에 쌓인 아버지의 고민에 대하여 알고자 하여 물으므로 지나는 말로 사또는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소년은 아주 쉬운 걸 가지고 걱정한다면서 자기가 해결할 것이니 세금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대면시켜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대로 그들이 오자 만나게 해주었다. 소년은 그들에게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위산이 우리 땅에 버티고 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 지금까지 받아간 세는 그만 둘 것이로되 당장에 가져가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답변이 궁한 그 사람들이 “우리가 가져갈 터이니 재로 꼰 새끼로 묶어놓으면 지고 가겠노라.”고 억지를 부리며 며칠 후에 다시 오겠다면서 갔다. 그러자 현감은 괜히 혹을 부쳤다고 더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 걱정을 말라면서 새끼를 꼬아 바닷물에 적신 뒤에 기름을 발라 바위를 묶고 나서 새끼에 불을 붙이면 된다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현감은 사람들을 시켜 그 방법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그대로 되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온 울산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문제를 빌미로 해서 세금을 받아 가려고 했었는데 그 문제가 깨끗이 풀려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더 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까 몰라서 허둥지둥 내빼었다는 것이다.
➁ 울산고을에 한 도사가 있었는데, 먹고서는 밤이나 낮이나 자는 게 일과라. 밤에는 밤대로 자고 낮에는 낮대로 자는데 개구리 우는 소리로 밤에 잘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살생을 할 수 없고 하여 도술을 부려 부적을 써서는 공중에 날렸더니, 아 이놈의 개구리들이 입이 전부 붙어 가지고 울지를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래 또 편히 잘라고 하는데 매미가 어찌나 시끄럽게 우는지 수가 없다 이거죠. 그래서 이놈들도 울지 못하게 벙어리로 만드는 수 밖에 없다고 하고 부적을 날리려고 하는데, 매미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서는 “여기 있다가는 전부 벙어리가 될 테니, 우리 전부 도망가자.” 이래가지고 도망가는데, 가자가 보니까 바위가 좋아서 무슨 바위냐고 하니까 울산에서 온 울산바위라고 해서 머물게 됐다는 얘깁니다.
“이왕이면 까마구도 내 땅 까마구가 좋다고, 울산에서 온 바위라니 우리 우리 여기서 머물자.” 이리하여 정착하게 되었는데, 매미들이 유독 많이 울어요. 그 이유를 물은즉 “현재 우리가 이렇게 자주 우는 것은 울산에서 우리가 도망 올 때 따라오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어 울지 못하는 동료들의 몫까지 울어주느라고 많이 울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흔히 매미 중에서 우는 매미가 있고 못 우는 매미가 있다고 할 때, 그 때 도사의 도술에 걸린 매미는 벙어리 매미이고 설악산으로 온 매미들은 잘 울어대서 설악산 그 매미떼 합창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거죠. (향토의 전설, 강원도, 124-5쪽)
➂ 의덕장사라는 천하장사가 금강산에 있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장사에게 봉우리 하나를 채워 놓으라고 명하였다. 장사는 산신령의 명령에 따라서 전국을 누비다가 마침내 울산에서 훌륭한 바위를 발견하고 끙끙거리며 지고 오다가 양양 고을에 이르렀을 때 한 나그네가 “뭐 하려고 그 무거운 것을 지고 가는가?”라고 묻자, 장사는 사연을 일러 주었다. 그러자 나그네는 이미 만이천봉이 확보되었으니 놓아두라고 하였다. 장사는 그 말을 듣고 바위를 지고 오느라고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서 그 자리에다 바위를 내팽개치고는 가버렸다. 그래 바우가 가만히 생각하니 괘씸하고 분해 죽을 지경이었다. 울산에 있으면 주민들이 자주 올라와 “그 참 좋은 명승지라”고 칭찬도 해주는데, 무인지경의 이곳 낯설은 곳에 와서 내팽개쳐 있으니 어찌 분하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울화가 나서 울산바우라고 합니다. (향토의 전설, 강원도, 120-1쪽)
4. 浮來山(浮來島)系
부래도를 포함한 부래산계에 속하는 설화를 소항목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춘천 孤山
➀ 춘천의 고산은 윗중도에 있는데, 춘천시와 서면 금산리 사이에 있다.
편편한 모랫벌 가운데 화강암으로 된 조그만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이 봉우리는 원래 金城郡에 있던 산이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 한 관리가 금성군에 있는 이 산에 대한 세금을 주민들에게 과다하게 거두어 괴롭혔다. 그러자 한 번은 7살의 청의동자가 나타나 관리에게 이르기를 그토록 모질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을 못살게 굴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이 분노하여 장마를 내리고 이 산을 춘천군 금산리로 옮겨버렸다. 그래서 금성고을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➁ 옛날에 아주 큰 홍수가 나서 강이 넘치고 아주 난리가 났었대. 그런데 위에서 커다란 산 하나가 떠내려 오더라는 거야. 그러다가 무엇에 걸렸는지 떠내려가지 않고 서 버렸지. 동민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게 됐는데, 이 소문이 쫙 퍼졌지. 그걸 고산이라고 부르는데 중도 위에 있는 거야. 몇 달이 지났을 때 금강산 땅 사또가 여기 춘천 사또에게 세금을 내라고 해서 달라는 대로 줬대. 그때는 춘천이 조금 약했나 보지. 아 그런데 그 다음 해에도 오고, 자꾸만 오니까 춘천 사또는 큰일 났지. 무섭긴 하지 돈은 없지. 그래서 하루는 고심하던 차에 사또가 아들에게 얘길 하니까 그런 것은 누워서 떡먹기라며 마친 돈 받으러 온 금강산 사또에게 그랬대. “저 산 이제 가져가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사또가 그냥 도망갔대.
➂ 고산은 돌산으로 홀로 우뚝 솟아 있어서 孤山臺라고 하고,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하여 鳯離臺라고 하며, 또 떠내려 왔다고 해서 부래산이라고 한다. 어느 해의 큰 장마에 자양강 곧 북한강 상류의 금성땅에서 큰 바위산이 떠내려 왔다. 그래서 금성의 관리가 찾으니 춘천에 있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세금을 걷어갔다, 해마다 과한 세금 때문에 주민의 고통이 심한 것을 안 사또는 우선 관곡으로 갚아 갔으나 더 이상 지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 고민 하던 차에 7살 박이 아들이 그 사정을 알고 해결하겠다고 하여 맡겼다. 아이는 관리가 오자 “지금까지 바위산 세금을 걷어갔다는데 그 바위산이 깔고 앉은 자릿세를 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산을 가져가시고.”하고 말하니 그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春川誌, 1317-8쪽, 昭陽의 脈,, 춘천문화원, 90-2쪽. 嚴滉이 쓴 《春川誌》에도 이 설화가 있다.)
(2) 원주 流失島
지금의 원주군 문막면의 의관리 비행장을 지나 고분다리 건너에 조그마한 동산이 하나 있다. 이 산은 원래 회성군에 있던 것인데, 옛날 어느 해 큰물이 들자 떠 내려와 지금의 반계리 앞에 걸리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없던 동산 하나가 자리 잡고 있어서 신기하게 여겼다. 한편 자기네 동산이 없어진 횡성사람들이 산을 찾아 나섰다가 이 마을에서 발견하고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다. 한번은 생돈을 해바다 뺏긴 이 마을 사람들이 도지를 내지 않자 그들은 산을 가져갈 테니 재로 꼰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근심에 젖었다. 그 때 8살배기 아이가 끼어들면서 “성한 짚으로 새끼를 꼬아 동산을 칭칭 감아 새끼에 기름을 바르고서 불을 지르면 됩니다.”고 하여 그리하였더니 그대로 되었다. 횡성사람들이 와서 보니 자기네들의 억지가 그대로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어떤 봉변이 나올지 몰라 그대로 줄행랑을 쳐버렸다는 것이다.
(3) 강릉 南山
강릉의 남쪽에 남산이 있다. 이 산은 원래는 다른 곳에 있던 산이라고 한다. 옛날에 이 산이 강릉을 향하여 밤중에 걸어오고 있었다. 이 산이 걸어오고 있는데 성산면에 사는 어느 여자가 보고,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산이 다 걸어오네.”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랬더니 걸어오던 산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이 걸어오던 산이 지금 남산이라고 한다.
(4) 강릉 竹島峰
➀ 송정동의 죽도는 용형국인데 오죽현 뒷산이 포락한 것이라 한다.
여기에 호텔을 지을 때 불도저가 함부로 산을 마구 파헤치는 바람에 사람이 많이 죽었다.
➁ 죽도는 임진년 포락에 전주에서 떠내려 왔는데 원래 삼형제봉이었다.
하나는 삼척 덕산리에 있는 덕봉산이고, 또 하나는 삼척 호산의 해명산(해망산)이다. “이것을 전라도 어데 있는 사람이 찾으러 왔는데 일단 이 동네에 심어져 있는데 마을 어른들이 줄 것 같아요? 안줘서 못 찾아갔대요. 옛날 할머니들이 그러대요.”
(5) 강릉 高城山
고성산은 정동진리의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정동진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고성산이 있어서 고성동이라 했다. 그 후 임금이 거쳐하는 한양에서 정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正東津이라 하다가 1915년 고성동, 등명리를 합쳐 정동진리라 했다.
고성산은 강원도 고성에서 떠 내려와 여기에 있게 되었다. 그 후 인심이 고약한 고성 사람들이 자기네 산이라 하여 매년 여기에 와 산세를 받아갔다.
그런데 한 해에는 가뭄이 들어 세금을 낼 수가 없어서 주민들이 지혜를 짰다. 산세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젠 돈이 없어서 못주니 산을 가져가라.”고 하면서 배짱을 부렸다. 그러니 산은 도저히 가져갈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가고 그 후부터 이곳 사람들은 땅세를 물지 않았다.
(6) 영월 삼척산
영월읍에서 10km쯤 되는 연하리에 오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개울가에 독립된 산을 이른바 삼척산이라고 한다.
아주 옛날 삼척에 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재산이 많고 인품이 유순하였다. 그런데 그 지방의 권세 있는 한 토호가 김씨의 재산을 탐내어 죄를 씌우고 빼앗으려 하였다. 김씨는 이를 피하여 영월에 와서 살았는데, 그 산이 있는 인근에 정착하면서 토지를 사들일 때 산도 겹쳐서 사놓았다.
한편 삼척에 사는 토호는 김씨가 영월에 사는 것을 탐지하고서 찾아와 그 산이 김씨의 소유인 것을 알고 삼척에서 온 산이므로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씨는 매년마다 세금을 바쳐왔다. 이렇게 납세하여 오는 동안 삼척의 토호는 늙고 병이 들어 더 이상 세금 받는 일을 못하게 되자 삼척원님을 개입시켰다. 원님은 김씨가 자기 고을의 백성도 아니고 해서 마음대로 세금을 인상하여 받아내었다. 이렇게 되자 김씨는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 그의 7살짜리 막내아들 만득이가 아비의 걱정하는 사연을 알고서 “아버님께서 세금을 물지 않고 있으면 그 쪽에서 올 것이니 그 때 제가 해결하겠으니 아무 염려 말고 기다리십시오.”하고 안심을 시키는 것이었다. 김씨는 평소에 똑똑해서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말은 믿지 않았으나 달리 방법이 없는지라 한 번 맡겨보기로 하였다. 얼마 후에 삼척의 벼슬아치가 왔다. 아이는 거드름을 피우는 그에게 “아버님이 출타하시면서 저에게 삼척에서 손님이 오시면 산을 가져가도록 이르셨습니다. 그간 그 산이 전답을 깔고 앉았기에 농사를 짓지 못해 손해가 매우 많습니다. 지금까지 손해를 무릅쓰고 세금까지 내면서보관하고 관리하여 왔으나 서로가 불편하므로 그간의 손해는 따지지 않을 것이니 가져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져가시기에 좋게 둘레에다 칡을 심어놓겠습니다. 이 소식을 삼척원님께 전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벼슬아치는 빈손으로 돌아가서 원님에게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그러자 원을 더 이상 세금을 받으러 갔다가는 아이에게 봉변을 당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없던 일로 하였다. 한편 김씨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산 둘레에 칡을 많이 심었고, 그래서 지금도 칡이 많다는 것이다. (寧越郡誌(1992), 922-3쪽)
(7) 홍천 팔봉산
홍천군 서면에 있는 八峯山은 본래 남쪽에 있던 산인데, 옛날에 여덟 사람의 힘센 장사가 이 산을 메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곳에 와서 주저앉아 쉬는데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강물이 넘쳐 잠기게 되어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산의 머리인 삼성산 면봉산의 사이가 지금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것 같이 산 허리가 잘리워져 있는데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8) 철원 외동산
철원군 서면 청양 1리에 어느 날 건장한 사람 둘이 찾아와 이 마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외동산의 주인에게 산세를 내라고 당당히 요구하였다, 그들은 그 외동산이 자기들 6대조 조상의 산인데 옛날에 갑자기 없어져 대대로 수소문하던 중 마침내 여기서 찾았으니 그동안의 세금은 그만 두고라도 지금부터 세금을 내라고 우겼다. 주인은 대대로 그 산에서 땔나무를 하여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새 주인이 나타나 세금을 내라고 하니 청천벽력이었다. 그런데다가 산의 생김새로 보아 어디서 떠내려 온 산으로 생각하여 온지라 세를 안 물겠다고 할 수도 없어 마을의 촌장에게 상의하였으나 별 수가 없어서 몇 년간 세금을 물었다. 어느 해에도 또 동지 날에 과중한 세금을 내야 하므로 주인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을 하자 열 살된 아들이 그 이유를 간청하여 물으므로 대답하여 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세금 받으러 오는 사람을 자기와 만나게 해주면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만난 아이는 “손님들, 마침 오셨으니 이번에는 제발 그 산을 떠 가지고 가시오. 우리는 그 땅에다 농사를 지어야겠소. 수백 년간 농사를 짓지 못한 손해배상을 받을 것이지만 지금 가져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금년 치 산세의 두 배를 내시오.”하면서 의젓이 맞섰다. 두 사람은 아이의 뜻밖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동안 받아간 세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도망치듯 돌아가버렸다.
(9) 철원 삽슬봉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있는 삽슬봉은 본래 중국에서 온 부래산이다. 이 봉이 중국에서 왔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꼬박 세금을 받으러 왔다. 그러다가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군수의 아들이 중국인들에게 이젠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고 하자 도망치듯 가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놈들이 와서 이 삽슬봉이 영험이 있는 산이라 그냥 두면 영웅이 태어날 것을 걱정해 정상에다 쇠막대기를 박아 혈을 끊었다는 것이다.
(10) 삼척 해망산
➀ 원덕면 호산에 있는 海望山은 강릉의 죽도봉, 근덕면 덕산의 덕봉산과 본래 삼형제봉이었는데, 전라도 전주에서 금강산의 일원이 되려고 가다가 다 찼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현 위치에서 서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신라 진덕여왕 시기에 해망산이 현몽을 해서 여기 해망산에서 국운을 비는 제사를 지내왔다. (구비문학대계, 2-3, 301쪽, 521-2쪽)
➁ 한편 해망산은 삼척군 갈람리 바닷가에 있는데, 이 섬은 호산 해수욕장에 있는 섬과 본래 바다 가운데서 형 아우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해 폭풍우가 심해서 하나가 떠내려가 호산에 머물게 되었다. 후에 바다에 안착한 섬이라 하여 해망산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제보에 의하면 막내섬은 이 마을의 포구로 드나드는 곳에 있는 작은 섬이라고 한다. (향토의 전설, 앞 책, 154쪽)
(11) 삼척 덕봉산
근덕면 맹방에서 동남향으로 근덕해수욕장 바로 및 바닷가에 있는 덕봉산은 천신이 금강산을 만들기 위해 모집한다고 해서 남쪽에서 금강산을 향해 갔다. 가던 중에 다 찼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떨어져서 머물게 되었다. 이 산에서는 밤마다 무슨 소리가 나서 선조 때 홍건이라는 사람이 올라가 그 연유를 알고자 산신에게 기도하였다. 그러자 거기에서 嗚竹이 소리를 내면서 나오는데 한 뿌리에서 다섯 대가 나왔다. 그는 그것을 베어 활과 화살을 만들어 그것으로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임진란에 공을 세웠고, 그 후손도 그 활로 합격하여 복을 받았다. 그래서 재수가 있는 꿈일 때 “명죽 꿈이다”라고 말한다. (구비문학대계, 2-3, 157-9쪽)
(12) 화천 딴산
화천읍 대이리에 있는 딴산은 병풍처럼 생겨서 병풍바위라고 부른다. 이 산은 본래 울산에 있었는데 금강산으로 가던 중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다 채워졌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게 되었다.
(13) 인제 도롱봉
인제군 한계리의 도롱봉은 충청도의 계롱산에서 온 것인데, 충청도에서 해마다 세금을 받아갔다. 어느 해에 마을의 7살 먹은 아이가 이 악습을 해결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므로 허락하였다. 아이가 세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불쑥 자기의 주먹을 내밀면서 “이게 뉘 주먹이요”하니 그 사람들이 “니 주먹이지 누구 꺼냐”고 하였다. 그러자 아이는 “자기네 마을에 있는 산이 자기네 꺼지 왜 남의 꺼야”하면서 산세를 줄 수 없다고 하니, 그들이 말을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아이는 진사가 됐다.
(14) 정선 도담 삼봉
정선면에서 부곡으로 삼마장쯤 올라가면 속칭 적거리(원명 덕거리)라는 부락이 있는데 마을 앞에는 조영강을 끼고 가지런히 세 개의 봉우리를 한 삼봉산이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13년 후 을사년에 홍수가 심하더니 졸지에 삼봉산이 없어져 버렸다. 사람들은 비가 그치자 이곳의 명산을 찾아 나섰다. 힘이 센 5명의 장정이 보름이 넘도록 강줄기를 따라 헤맸으나 보이지 않더니 홀연히 충청북도의 도담에 이르러서야 물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삼봉을 발견하였다. 홍수에 떠내려 오느라고 흙은 다 씻겨나가고 바위들만이 덩그렇게 남아있으나 틀림없는 삼봉인지라 이 사실을 정선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 뒤 수십 년간 도담으로 내려가 산세를 꼬박꼬박 받아왔다. 그러던 어느 해 도담사람들이 세금을 못내겠다고 하여 그 이유를 물은 즉, 한 동자가 나타나 삼봉이 자기네 마을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으니 당장이라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답변이 궁한 정선 사람들은 지금까지 받은 山稅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허둥지둥 돌아왔다고 한다. (향토의 전설, 강원도, 366-7쪽)
三. 江原道 藥水(광천수)
Ⅰ. 머리말
예로부터 藥水는 질병을 고쳐주는 신비의 영약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조선조의 세종과 세조도 고려 때부터 그 신비한 효험이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온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의 초정약수로 안질과 소갈증 및 피부질환을 고쳤다는 기록이 《朝鮮王朝實錄》에 보인다. 특히 세종은 그곳에 행궁을 차리고 60일에 걸쳐 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쳤다고 하였다.
《東國與地勝覽》‘淸州牧’ 條에도 초정약수에 대하여 이르기를 “초정약수는 주의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와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여기에 행차한 바가 있다. (椒水在州東三十九里 其味如椒而冷 俗則己疾 我世宗世祖嘗幸于此)”고 하였다. 또 세조는 약수로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속리산 입구의 ‘正一品 松’의 전설을 빚었고, 세조가 상원사에 갔을 때 문수동자가 약수로 세조의 몸을 씻겨서 어서 피부병이 나았다는 설화가 방아다리약수와 신약수가 있는 오대산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약수는 몸에 약이 되는 좋은 물로서 보통 자연수인 生水와, 각종의 광물질이 용해되어 있어서 탄산이나 철분 등 함유성분에 따라 독특한 맛을 내는 鐄泉水를 통칭하여 이른다. 그러나 정확히 구분하자면 약수는 생수를 제외한 광천수를 이르는 용어로서, 여기에서도 약수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다.
물은 그 기운에 따라 암물과 수물, 무게에 따라 중수와 경수, 용도에 따라 정화수 · 월침수 · 납설수 등으로 나누듯이 광천수인 약수는 함유량 중에 차지하는 양에 따라 유황천 · 탄산천 · 탄닌천 · 게르마늄천 등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그리고 마실 수 있는 광천수와 유황천수처럼 피부에 바르기는 하나 마실 수 없는 광천수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광천수는 대략 70여개에 이르고 강원도에만 30여개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각 약수터에는 곳곳마다 병을 고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고, 휴일이면 도회인들의 발걸음이 잦다. 그것은 사람들이 각종의 공해나 스트레스에 의한 질병을 앓고 있어서 약수로 병을 치유하고 또 몸에 좋다는 물을 마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약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급등하고 있는 이즈음 필자도 그에 편승하여 관심을 갖고 있던 중 거기에는 수많은 민속학적 자료가 산재하여 있음을 보고 흥미를 느껴 약수터를 답사하고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결과를 정리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는 약수에 대한 민간인의 신앙과 그 신앙의 배경이 되는 영험담으로서의 설화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다룬 자료는 강원도지역의 광천 약수로 22개소이다.
우리나라의 약수 자료는 대체로 관광명소를 소개라는 정도의 지리적 안내서에 그쳤을 뿐 그것에 대한 신앙이나 신비체험까지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이 없는 형편이어서 우선 강원도의 광천수만이라도 소개하려는 것이다.
Ⅱ. 강원도의 약수
여기에 소개하는 강원도 약수 22개소의 분포는 춘천군-2, 홍천군-2, 인제군-5, 양양군-3, 명주군-3, 평창군-2, 양구군-1, 영월군-1개소이다.
*춘천군
(1) 성산약수-신북면 용산리 산 100
국도변에서 232계단을 오르면 약왕사가 있고 그 안에 약수가 있다. 이 약수는 1968년 8월 17일 약왕사의 주지였던 유광국씨가 직접 신령님의 계시를 받고 발견하였고, 그래서 약왕사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약수의 성분은 철분 · 망간이 주성분이며, 특히 탄산성분이 강한데다가 매우 떫어서 마시기가 심히 역겨워 많이 마시면 토할 수도 있다. 이 약수는 신경통 · 위장병 · 부인병 · 관절염 등에 좋고 특히 암이나 당뇨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나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카드늄이 기준치를 초과하여 1991년에 폐쇄되었다.
(2) 추곡약수-북산면 추곡리
찾는 사람이 많아 숙박업을 위주로 하는 약수촌이 형성되어 있다. 2개의 약수 곧 상탕과 하탕이 있는데 상탕이 먼저 발견되었다. 하탕은 탄산이 더 많으나 수량이 상탕보다 적다. 보건연구소가 분석한 이 약수의 수질은 다음과 같다.
수소이온농도(PH) - 6.7 ppi 하아드로탄산(HCO3) - 400 ppi 염소이온(CL) - 3.4 ppi 황산이온(SO4) - 7.8 mg/1 불소(F) - 3.48 〃 철(Fe) - 26.5 〃 동(Cu) - 0.03 〃 | 망간(Mn) - 1.9 〃 나트륨(Na) - 37.6 〃 칼륨(Ca) - 195 〃 마그네슘(Mg) - 289 〃 경도 - 1,479 〃 규소(Si) - 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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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수는 위장병이나 당뇨에 특효가 있으며, 피부병에도 효과가 있어서 머리나 상처에 바르면 비듬이 없어지고 머릿결이 고와지며, 상처가 금방 아물고 무좀도 없어진다. 또 눈을 씻으면 안질이 없어지고 맑아진다고 한다. 이 약수는 상탕의 정자에 있는 다음의 상량문으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에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견자 김광보 1825년 출생 1845년 발견 1905년 사망, 약수 정자 기증자 김원보의 손녀 김금자 1989. 6. 1>
현지에서 채록한, 이 약수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홍천에서 약국을 하던 김씨집의 아들 김광보씨가 위장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마시면서 돌아다니던 중 여기서 쉬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때 웬 노인이 꿈에 나타나 누워있는 곳을 파면 약수가 나올 터이니 그걸로 병을 고치라고 하였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꿈대로 하였더니 과연 병이 나았다.
그는 이 사실을 춘천군의 샘밭에 사는 부친의 지우인 황성록씨에게 얘기하여 황씨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씨라는 부인이 남편(정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 마을에서 엿장사를 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꿈에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 아래에 또 약수가 있으니 거기를 파서 물을 복용하라고 하였다. 지씨가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남편의 병이 나았다. 그래서 그부부가 약수터를 관리하였었는데, 6.25가 나자 남하하여 버렸고,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금은 여인숙-9, 민박-3, 일반집-9로 총 20가구가 약수촌을 이루고 있다.
*홍천군
(3) 삼봉(실론) 약수-내면 광원리
예전에는 ‘실론약수’라 하였다. 세조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자 단종의 외숙인 권전 대감이 이곳에 은거하여 젊은이들에게 실론(實論)을 가르쳤으므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 약수의 발견자도 바로 이 권 대감이다. 하루는 권 대감이 숲을 소요하는데 갑자기 날개 부러진 학 한 마리가 비명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더니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 속에서 첨벙첨벙 물 튀기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 그 학이 멀쩡하게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었다. 하도 신기하여 대감이 그 계곡으로 내려가 보니 붉은색의 광천수가 솟아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약이 없던 그 시절에 대감은 촌민들에게 이 약수로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이 부근 일대는 권대감을 서낭으로 모신 곳이 많은데, 약수의 신효함과 결부시킨 것으로 보인다.
삼봉이라는 이름은 주위에 가칠봉(마늘봉) · 사산봉 · 대산봉이 감싸고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근래에 붙인 명칭이다. 자연 그대로의 수림이 감싸고 있어서 그런지 약수가 사이다맛을 내어 개운하다.
이 약수는 3개의 탕에서 나오는데 아무리 퍼내도 주는 법이 없을 정도로 수량이 많다. 각 탕의 물맛을 각기 다르나 여타의 약수처럼 탄산이 주성분이다. 열다섯 가지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위장병 · 신경통 · 당뇨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4) 명개약수-내면 명개리
통바람골에 있어서 속칭 ‘통바람 약수’로 부르는 이 약수는 사람의 발길을 타지 않은채 태고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개의 탕이 계곡의 물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지나쳐 버리게 된다. 물은 탄산수 맛이 진하다. 이 약수는 예전에 약초를 캐러 다니는 노인이 발견하였다는데 그 이상의 제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인제군
(5) 남전(쪽박골)약수-남면 남전1리
이 약수는 인제뱃터로 향하는 군축교 가기 전 앞 5백여m 지점의 도로가에 있는 야전군창설비 앞에서 우회전하여 200여m쯤 들어가면 있는데, 일명 쪽박골 약수라고 한다. 남(藍)이라는 쪽풀이 밭(田)을 이루고 있는 계곡에 있다고 해서 “쪽밭골-쪽박골”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발견되기는 일제때였으나 38선 이북에 있었기에 개발은 수복 후에 이루어졌다. 약수터는 시멘트로 포장하여 일대가 정결하나 반면에 자연스런 멋이 없다. 오른쪽 위에는 산신의 탱화를 그려 모신 시멘트로 된 감실이 비록 조잡하나 그것은 여기가 신성한 곳임을 말해준다.
현재 약수터를 관리하는 심덕호씨(77세)에 의하면 이 약수는 남전리에 사는 지씨(임씨)라는 분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쪽박골에 가면 인간에게 유익한 물이 있을 테니 그것을 찾아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라”면서 그 위치를 현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꿈에 본 대로 찾아가 파보았더니 과연 광천수가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물로 위장병을 비롯하여 안질 등 여러 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강원도 보건 환경연구소에서 조사한
성분함양 |
| 단위(mg/1) | 성분함양 |
| 단위(mg/1) |
이 약수의 성분은 다음과 같다.
수소이온농도 | PH | 8.0 | 나트륨 | NA | 19.6 |
하이드로탄산 | HC03 | 3.6 | 칼륨 | K | 3.9 |
철분 | F2 | 1.0 | 칼슘 | CA | 45 |
망간 | MN | 0.06 | 마그네슘 | MG | 65 |
구리 | 쳐 | ( ) | 불소 | F | 0.1 |
현재 약수터를 관리하는 심덕호씨(77세)에 의하면 이 약수는 남전리에 사는 지씨(임씨)라는 분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쪽박골에 가면 인간에게 유익한 물이 있을 테니 그것을 찾아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라”면서 그 위치를 현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꿈에 본 대로 찾아가 파보았더니 과연 광천수가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물로 위장병을 비롯하여 안질 등 여러 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강원도 보건 환경연구소에서 조사한
성분함양 |
| 단위(mg/1) | 성분함양 |
| 단위(mg/1) |
이 약수의 성분은 다음과 같다.
수소이온농도 | PH | 8.0 | 나트륨 | NA | 19.6 |
하이드로탄산 | HC03 | 3.6 | 칼륨 | K | 3.9 |
철분 | F2 | 1.0 | 칼슘 | CA | 45 |
망간 | MN | 0.06 | 마그네슘 | MG | 65 |
구리 | 쳐 | ( ) | 불소 | F | 0.1 |
한계령 정상에서 양양쪽으로 백여m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오른쪽으로 오르는 언덕길이 나타나는데, 입구에 ‘필례약수’라고 쓴 간판이 보인다.
비포장이기는 하나 잘 닦여진, 청정한 필례계곡 옆의 경사가 심한 넓은 도로를 따라 5km쯤 내려가면 분지가 나오고, 필례약수라는 간판이 또 보인다. 약수터는 주위에 무수히 쌓아놓은 돌탑들이 세속인들의 간절한 비원을 담고 있고, 거기에는 여산신께 올린 정한수 그릇이 놓여있다. 이것은 이 약수를 마시면 무병장수하고, 또 시집, 장가를 못 가 비관하는 처녀, 총각이 이 약수를 마시면 천생연분을 만나게 된다는 전설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정성의 표현일 것이다.
이 약수는 1930여 년경 인제 출신의 김모씨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는데, 마의태자가 말을 길렀던 곳이어서 ‘필(匹)네’라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그 옛날 여기에서 살았던 古老들이 들려준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풍수지리로 볼 때 여인이 베를 짜는 형국이어서 베필을 짜는 여인 곧 ‘필녀(疋女)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난리에 도처에서 피난민이 모여와 동네는 이룬 곳이라 ’피네-피례-필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7) 개인약수-상남면 미산리 개인동(대개인동) 1번지
인제의 내린천을 거슬러 현리-하남-상남에 이르러 미산1리로 가면 개인산(1324m)을 만나게 되고, 거기 해발 850m 지점에 개인약수가 있다. 약수의 맛은 방동약수처럼 탄산이 강하다. 3백여 년 전 지덕삼이라는 함경도의 포수가 사냥을 다니다가 발견하였다는 이 약수는 백내장에도 좋으며 특히 당뇨병에 효험이 있을 뿐 아니라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등 기적을 일으킨 약수로 알려져 있다.
약수는 2개가 있는데, 위쪽의 것은 여성의 음부처럼 생겨서 어떤 사람이 이를 훼손하였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데, 지금도 전설 그대로 유사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진짜 본래의 개인약수는 더 위쪽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아랫마을 지포수의 아기가 몰래 돌을 떠들고 약수를 마시고는 또 덮어놓곤 하였는데, 아기가 이 약수를 먹고 힘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아기장수가 되자 이를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죽이는 바람에 알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니, 약수의 효능성이 ‘아기장수설화’와 연결되어 있다.
모든 약수터가 그렇듯이 여기도 돌로 쌓은 산제단이 있는데, 예전에는 「1925년 경기도 개성인 김영식과 1956년 원주인 이재희가 약수로 위장병을 치유하고서 써놓은 현판이 걸려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고 했는데 오늘은 볼 수가 없다.
(8) 방동약수-기린면 방동리
이 약수는 3백여 년 전 어느 심마니가 꿈을 꾸고서 발견하였다는데, 탄산이 다소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단번에 많이 마시기가 쉽지 않다. 주위에는 이 약수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는 여러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발견 내력은 다음과 같다.
어떤 심마니 노인이 매일 산신에게 정성을 바쳐 기도하고서 이곳으로 산삼을 캐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나는 이 산의 산신이다. 너는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또 정성이 지극하니 너에게 산삼을 점지하리라” 하였다. 그는 이어서 “내가 가리켜주는 곳에서 심을 돋우고 그곳을 깊이 파면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물이 나올 것이니,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토록 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노인은 어떤 신령함이 나타날 것을 확신하고 산신에게 정성을 드린 후 산에 들었다. 그가 심을 찾아다니던 중 웬 동자가 나타나더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며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 좇아가는데 어느 곳에 이르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노인이 동자가 사라진 자리를 보니 거기에 커다란 산삼이 있었다. 그는 산삼을 정성껏 캐고 꿈속에서 산신령이 일러준 대로 그 자리를 깊이 팠다. 그랬더니 과연 약수가 솟아났다는 것이다.
(9) 명지약수-기린면 방동2리 명지동
방동2리의 아침가리(조경동) 가기 전 명지거리 마을 앞 개울바닥의 반석에서 나오는 이 약수는 발견된 해를 알 수 없으나 방동약수처럼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큰 비에 묻혀버려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양양군
(10) 오색약수-서면 오색리
이 약수는 조선왕조 중엽인 일천오백여년 무렵에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오색석사라는 절의 스님이 처음 발견하였다고 한다. 오색석사에는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으며, 오색약수라는 이름은 다섯 가지의 맛이 난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다. 3개의 탕에서 하루에 천 오백리터쯤 솟아나는 이 약수는 탄산과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위장병 · 신경통 · 빈혈증에 효험이 있으며, 가재나 지렁이를 넣으면 곧 죽어버릴 만큼 살충력이 강하여 기생충구제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아무리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으며, 이 약수로 밥을 지으면 푸른 빛깔의 윤기가 돌며, 밥맛이 좋고 소화가 잘 된다고 한다.
(11) 갈천약수-서면 갈천리
험하기로 유명한 구룡령 부근에 자리 v잡고 있는 이 약수의 명칭은 그 옛날 굶주리던 주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기려고 산에서 칡뿌리를 캐어 씻은 많은 칡가루(葛紛)가 제천으로 흘러나갔기 때문에 생겼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으며, 간질병 · 나병환자도 나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입구에는 남녀장승을 세워 놓았으며 주위에 돌탑이 많아 신성지역임을 말해준다.
(12) 불바라기(미천)약수-서면 황이리 미천골
갈천약수와 4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칠백여m의 산악에 위치한 이 약수는 특이하게 폭포 중간의 암벽에서 흐르고 있어서 받아 마시기조차 어렵다. 남한에서는 제일의 오지에 있는 것으로서 米川藥水라고도 한다. 이 미천이란 명칭은 천삼백여 년 전 여기에 천오백여명의 승려가 머문 대가람인 禪林院이 있어서 쌀 씻은 뜨물이 계곡을 따라 20여리를 흘렀다하여 붙은 것이다.
* 명주군
(13) 송천약수-연곡면 삼산4리
오대산의 동대산에 위치한 송천약수는 일제 때 근처의 송천광업소가 개설되고서 알려졌고, 지금은 진고개길이 포장되어 가기가 쉽다. 이 약수가 발견된 것은 눈이 멀게 된 어떤 소경이 현몽하여 발견하고, 이 물로 계속 눈을 씻고서 시력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물맛은 철분냄새가 강한 탄산수로, 위장병에 좋고 특히 이뇨질환에 좋아서 소변이 잘 안나오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마시면 효과를 본다고 하였다.
(14) 부연(가마소)약수-연곡면 삼산3리 부연동
이 약수는 약 30여 년 전 홍순길이라는 분이 여기 가마소계곡에서 쉬고 있는데 토종벌들이 몰려들어 구석에 고인 물을 자꾸 빨아가기에 신기하게 여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약수여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맛은 강한 산성을 띠고 있으며, 위장병과 소화에 좋다고 한다.
(15) 등명낙가사약수-강동면 정동진리 낙가사
이 약수는 등명낙가사의 경내에 있다. 월정사ml 말사로 괘방산 중턱에 있는 등명낙가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이 절은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는데 그 이유인즉 이렇다. 당시의 왕이 안질이 심하여 점술가에게 물으니 동해의 정동에 큰 절이 있어서 거기서 쌀 씻은 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므로 동해 용왕이 노하여 왕의 눈병을 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왕의 사자가 원산을 거쳐 배편으로 동해 정동으로 와 보니 과연 점술가의 말과 같은지라 등명사를 폐사하였다는 것이다.
이곳의 약수는 20여 년 전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영산전에 오백나한을 조성하여 봉안한 후에 발견되어 샘솟고 있는 약수로서 산성의 명반, 녹반천으로 사이다와 같은 맛이 아니라 감처럼 약간 떫은맛이 난다.
국립보건원에서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철분함량 - 44mg
황산염 - 500mg
유리산도 - 80mg
알루미늄 - 200mg
P.H - 4.1
온도 - 5도 C
효능에 있어서는 마셨을 때 - 빈혈증, 위황병(부인들에게 많은 빈혈증세), 만성출혈증, 말라리아에서 오는 빈혈과 비종, 만성신경증, 신경쇠약, 신경통, 소화불량, 허약체질, 위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목욕을 했을 때는 만성피부병 · 무좀 · 류마티스 신경통 · 습진 · 개옴 등 피부병 일체와, 수족에 땀이 날 때, 피부에 개기름이 흐를 때 등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정선군
(16) 晝岩약수-동면 화암리
정선군 동면 화암리의 九瑟洞골에 화암약수가 있다. 이 마을에 일찍이 살림이 극히 빈한하나 마음이 어질고 인품이 훌륭한 문명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구슬봉 바위 아래서 돌연히 청룡과 황룡이 솟아나더니 서로 뒤엉키며 몸부림치면서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잠을 깬 문씨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새벽녘에 구슬봉 밑으로 가서 꿈에 본 바위를 찾아보았더니 과연 서기에 둘러 쌓여 있었다. 그가 황급히 그곳의 땅을 파헤쳤더니 물이 거품을 뿜으며 솟아났는데, 물맛을 보니 마치 계피가루를 탄 것처럼 씁쓸하나 속이 시원하여 약수임에 틀림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문씨가 평소에 마음이 착하고 어짐으로 비록 가난하여 재물로 보지는 못할망정 하늘이 약수를 알려주어서 많은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는 은덕은 베풀게 한 것이라고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약수는 부정한 사람이 마시려 할 때는 큰 구렁이가 물 밑에 도사리고 있는 형상이 보여서 도저히 마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약수가 본래의 약수이고, 그 아래에는 최근에 생긴 ‘쌍약수’라는 이름의 약수가 있는데, 본 약수 보다는 맛이 여린 편이다.
(17) 新약수-동면 화암리
구슬동굴 입구에 있는 약수로 화암약수를 구약수라 여겨 생긴 명칭이다. 이 약수로 3번만 몸을 씻으면 어떤 피부병도 고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수터의 용마산장에는 몸을 씻을 수 있도록 욕조를 설치하고 있다. 이 약수는 한 때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하여 나병환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주민들이 약수를 묻어버린 적이 있으나 최근에 다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18) 삼내(三川)약수-남면 유평리 약수암
정선읍에서 사북방향으로 25km쯤의 심산유곡에 있는 이 약수는 약수암의 경내에 있으며, 이곳의 계곡이 세 갈래 시내가 되어 흐르므로 삼내약수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삼내약수는 약 100여 년 전 한 나병환자가 잔칫집에서 잔뜩 포식하고 삼내(삼천)계곡 언덕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주위에서 용출하는 물을 마시니 부스럼이 솟아나 딱지가 떨어지면서 깨끗이 나았으므로 소문이 퍼져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에 신심이 강한 박남수할머니에게 산신이 현몽하여 오늘의 약수암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경숙(64)보살 부부가 1963년에 정착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약수는 피부병에 좋고, 특히 풍병에 좋다고 소문이 나 있으나 마음씨가 좋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이 약수를 마시고 발라도 효험이 없다고 한다.
*평창군
(19) 방아다리약수-진부면 척천리
오대산 국립공원에 편입된 방아다리약수터는 계방산 기슭에 있는데, 영동고속도로 하진부정류장에서 북쪽 12km지점, 속사에서 8km 쯤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울창한 수림으로 꽉 차 있어서 삼림욕을 겸할 수 있는 곳으로도 훌륭한데, 이 수림은 1972년 전국조림왕으로 선정된 김익노씨가 조림한 것이다.
이 약수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이북의 삼방약수와 더불어 천연기념물 2호로 지정하였을 정도로 질이 좋은 약수로 이름이 나있다. 탄산과 철분이 주성분인 이 약수는 특히 위장병 · 신경통 · 피부질환에 효과가 있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므로 광복직후까지만 하여도 매년마다 동녘골과 서녘골의 농악대가 약수터에서 별신굿판을 벌이고, 전국에서 기생과 한량들이 몰려들어 난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방아다리란 명칭은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던 아낙네가 바위 한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다 곡식을 넣고 방아를 찧는데 그곳이 갈라지면서 약수가 솟아나왔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그런데 현지 답사하여 얻은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경상도 출신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신병으로 각처의 명의를 찾아 다녀도 효험이 없어 삶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명산이나 편력하다가 마치리라고 생각하고서는 두루 다니던 중에 산수가 좋은 오대산의 이곳에 이르러 아늑한 나무 밑에 잠자리를 정하고 노숙하는데, 꿈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 “어인 사람이 이 산중에 홀로 있는고?”하고 말하였다. 그는 꿈속이지만 이분이 산신령이 틀림없으리라고 믿고, “신령님께서는 얼마 남지 않은 이 목숨을 가련히 여겨 병을 고칠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소서.”하고 간청하자, “그렇다면 네가 누워있는 자리를 석자만 파 보아라.”하면서 사라졌다. 깜짝 놀라 깨어난 그가 급히 땅을 파헤치니 약수가 솟아났다. 그리하여 그 물을 며칠 동안 열심히 복용하자 병이 씻은 듯이 나은지라, 이곳에 산신당을 모시고 크게 제사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산신당은 목조 1칸 기와집으로 약수터 위에 있다. 이곳의 산신님은 효험이 많다고 하여 전국의 무당들이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기 위하려 모여 드는 곳이다. 그리고 약수터 바로 옆에는 약수의 신인 용신할머니를 모신 용신당이 있는데, 재작년까지는 할머니의 화상을 모셨으나 화상이 낡아 흉하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걸었는데, 두 폭의 액자이다. 오른쪽은 동자를 대동한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서 있는 모습이고, 왼쪽에는 크게 ‘北斗大聖七元星君’이라고 써있다.
(20) 신약수-속사리
영동고속도에서 소사에 이르러 이승복반공기념관쪽으로 1km쯤 가다보면 신약수라고 쓴 간판이 있는데 거기서 방아다리 약수쪽으로 2.5km쯤 가면 도로변에 바로 신약수가 있다. 약수는 하나의 혈에서만 나오는데, 그 수량마저 매우 적다. 이 약수는 1960년도에 인근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노인이 발견하였고, 그것을 최씨라는 이가 관리하다가 떠나버려서 발견할 때의 영험담 같은 것은 아는 이가 없다. 현재의 땅 주인은 서울 사람이며, 관리는 땅을 임대받아 거기에서 음식영업을 하는 장형두(64세)씨가 맡아 한다. 그는 20여 년 전에 술로 다 죽게 되어 병원에서도 가라고 해서 이판사판으로 여기에 와 물을 먹고 요양을 하자 3개월 쯤 되니 밥이 비로소 넘어갔다고 한다. 이곳의 약수는 위장병에 특효이고 눈에다 바르면 눈병이 가시고 피부에도 좋다고 한다.
*양구군
(21) 후곡약수-동면 후곡리
양구읍에서 15km, 국도에서 2km의 거리에 있는 후곡약수는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에 발견되었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한 농부가 이곳에 소를 매어 놓았는데 오랫동안 설사병을 앓아오던 이 소가 근처 계곡의 물을 먹은 뒤로 병이 나은 것을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약수가 솟아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필자가 다른 제보자를 통해 채록한 바에 의하면, 이 약수는 130여 년 전 아랫마을에 사는 예안 김씨 한 사람이 배가 붇는 병이 있어서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현재의 약수터에 올라가 보니 붉은 색을 띤 물이 나오므로 이상히 여기고 이판사판으로 마셨더니 배가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속적으로 마시고 나서 마침내 병을 고쳤다. 그 후부터 유명해져서 이름이 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약수는 불소이온을 포함해서 철 · 유리탄산 · 규산 · 칼슘 · 나트륨 등이 풍부히 함유되어 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영월군
(22) 칠랑이 약수
영월군 상동읍에서 태백 쪽으로 약 5백여m쯤 가다가 보면 칠랑이 계곡의 도로가에 ‘七娘이 약수’라고 쓴 돌비석이 있는데, 바로 여기가 이 약수터이다. 이 약수는 옛날에는 어쩐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목만 축일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적다. 맛은 철분이 적어서 사이다와 같이 톡 쏘지 않으나 명주군 등명낙가사의 약수처럼 약간 떫다. 보건원에서 검사한 약수의 성분과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철 - 0.02mg/1
불소 - 6.2 〃
산도, 알칼리성 - 6.91mg/1
맛-무미무취
옛날에 이 계곡에는 일곱 명의 딸을 둔 촌부가 이 약수를 생활용수로 사용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 좋은 물 덕에 딸들이 모두 絶世佳人이 되었고, 모두가 좋은 배필을 만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Ⅲ. 강원도 약수의 효능
강원지역의 각 약수가 지니고 있다는 효능에 대해 채록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산약수 - 암, 당뇨병
2. 추곡 〃 - 위장병, 당뇨, 피부병, 안질
3. 삼봉 〃 - 위장병, 신경통, 당뇨병
4. 남전 〃 - 위장병, 안질
5. 필례 〃 - 무병장수
6. 개인 〃 - 백내장, 당뇨병, 위장병
7. 방동 〃 - 위장병, 당뇨병
8. 명지 〃 - 위장병
9. 오색 〃 - 위장병, 신경통, 빈혈, 기생구충제
10. 갈천 〃 - 위장병, 피부병
11. 송천 〃 - 위장병, 이뇨질환, 안질
12. 부연 〃 - 위장병
13. 등명낙가사약수 - 빈형즐, 위장병, 피부질환
14. 신약수(정선) - 피부병
15. 삼내약수 - 피부병, 풍병
16. 방아다리 약수 - 위장병, 신경통, 피부질환
17. 신약수(평창) - 위장병, 피부병, 안질
18. 후곡약수 - 위장병, 피부병
Ⅳ. 藥水祭
1. 추곡약수제(춘천군)
‘山祭’로 부르는 추곡약수제는 연 2회 춘추로 지내는데 날짜는 음력 3월 1일과 10월 1일이다. 1일로 잡은 것은 부정을 탔을 경우 달을 바꾸어서 지내면 괜찮기 때문에 아예 달을 바꾼 첫 날에 지내며, 10월 1일에 지내는 것은 햇곡식으로 제수를 장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가는 항상 춘천 여인숙(함재순씨댁)에서 도맡고 있으며, 이장과 면장이 제주가 된다. 그러나 제사의 주관은 부인들이 하고 참석자도 부인들이 대부분이다.
제물은 둘로 나누어 차린다. 상탕과 하탕의 중간 빈터에 산신을 위해 큰 상을 차리고 하탕에다가는 용왕을 위해 작은 상을 차린다. 산신상에는 향초 · 돼지머리 · 나물 · 과일과 시루떡 2시루를 바치고, 용신상에는 향과 초, 나물과 과일, 흰떡 1시루를 놓는다. 산신은 시루떡을, 용신은 흰떡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르게 바친다. 정화수는 약수로 올리며, 문서화된 흘기나 축문은 없다.
1992년 가을에 행사한 제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제주에 이어 참석자 모두가 향 꽂고 절을 3번 하고, 돈을 만 원 정도로 놓는다. (도가를 돕는 비용이라 함)
(2) 불교의 천수경 염불
(3) 밥과 국 올림
(4) 3배
(5) 서낭대신 구송
(6) <반야심경> 낭송
(7) 발원(주민들의 평안무사를 기원하고, “도량에 들어오는 모든 중생들을 응감시켜주시고 들어오는 모든 손님들을 골매기서낭님이 보살펴 주시기 비옵니다.”하면서 약수를 찾아 오는 손님들의 무사를 빈다.)
(8) 소지(도가집을 위한 소지를 올리고 나서 제각기 자기 집의 소지를 스스로 올림)
(9) 음복
이곳의 제의에서 특이한 것은 산신을 부르는 대신에 ‘서낭대신’을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속신앙적인 것에다가, 3배를 하고 또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염송하는 것 등에서 보듯이 불교적인 법식으로 행사한다는 것이다. 제의를 주관하는 부녀자들이 불경을 낭송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여인들이 대체로 불교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영향에 의해서 불교적 법식이 끼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곡약수제에서는 산신과 용신을 위한 제상을 각각 별도로 차리는데, 이러한 이원화의 현상을 예전 방아다리약수제 때 약수터 사당에는 용신할머니를 모시고 용신제를 지내고, 바로 위에 있는 산신각에서는 산신제를 따로 지낸 것과 동궤이다.
2. 방아다리 약수제(평창군)
평창군 진부면의 오대산 방아다리 약수터에는 오대산신을 모신 산신각과 약수의 영험을 수호하는 용신을 모신 용신각이 있다. 산신각은 조형미가 뛰어난 1칸의 목조 기와집인데 그 안에는 산신의 탱화가 있다. 두 동자와 호랑이를 뒤에 두고 좌정한 백발과 흰 수염의 산신의 옆에는 두 명의 시녀를 거느린 여신이 후덕한 모습으로 좌정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이에는 폭포가 장엄하게 쏟아지는 그림이다.
오대산신은 여신이라는데 약수의 신도 용신할머니인지라 산신까지도 여신만으로 그려 모시기에는 마음에 걸렸던지 남녀신을 나란히 배치했으니 이것은 대관령국사서낭과 홍재동여서낭을 합위하여 모신 것이나, 또 여신과 설악산에서 왔다는 김대부신을 함께 모스는 안인진서낭당의 의례와 동궤이다.
이곳에는 각처의 무당들이 모여 자주 재를 올리는데, 이곳의 용신과 산신님이 영험해서 신령의 靈力을 많이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평시에는 관리인이 문을 닫아놓고 있다가 일만 원씩을 받고 열쇠를 내어준다.
약수터 바로 옆에 있는 용신각은 산신각보다 규모가 작은 목조로 된 기와집이다. 예전에는 용신할머니라고 해서 할머니 신을 화상으로 그려 모셨다는데, 지금은 바꾼 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은 2폭짜리 병풍이 있다.
한 폭에는 ‘北斗七聖七元星君’이라고 붉은 글씨로 크게 써있고, 다른 폭에는 용을 타고 있는 관세음보살(약병을 들고 있지 않으니 약사여래도 아니고 또 연꽃을 들고 있지 않으니 정확히 관세음도 아니지만)이 동자를 뒤에 두고 서있다. 도교와 불교가 혼효되어 있는 모습이나, 陰性인 물과 의미가 통하는 토속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는 예전의 탱화를 볼 수 없어서 아쉽다.
필자가 답사한 1992년 2월, 무당들이 용신각과 산신각에다 제물을 차려놓고 스님의 독경에 따라 절을 하고 잔을 올리는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같은 때에 홍천군 내면의 삼봉약수터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무당과 스님이 동행하여 약수터와 그 위의 바위굴에다 재물을 차리고 같은 식의 제의를 행사하였다. 이때의 스님은 행장은 스님이지만 담배를 피우고 음주하는 것으로 보아 대처스님으로 행세하는 박수무당으로 보였다.
四. 江原道 돌탑
Ⅰ. 돌 탑
山의 骨이요 土의 精이며 氣의 核이라는 돌로써 쌓은 돌탑은 제단으로서의 累石璮, 몽골의 오보(obo)와 유사한 길가나 고개 마루의 서낭당, 마을의 번창과 三災를 막아주는 造山, 절 입구에 쌓아 성역임을 알리는 寺塔 등과 같이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서 보고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돌탑들과는 달리 동민들이 마을 앞에다 세우고 제의를 하는 등 동제의 대상이 되는 돌탑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돌탑은 신앙의 기능에 있어서는 위에서 제시된 것들과 동류이지만 위치가 마을의 입구이고, 막돌을 사용하여 1基 외에도 2基를 쌓는다는 점, 축조과정에 있어서 서낭당의 돌무더기처럼 행인들이 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동문들이 한 번에 돌을 모라 정성을 기울여 쌓고 제의를 행사한다는 것, 그리고 축조 상에 있어서 예술성이 나타난다는 점 등이 다르다.
탑을 쌓을 때는 빠지는 집이 없이 모두 참여하여 가져온 막돌을 사용해서 원뿔형으로 쌓는다. 내장을 작은 돌이나 진흙 및 시멘트 등으로 채우고 돌 사이의 틈새도 메꾸어서 붕괴되는 것을 막는다. 탑의 규모는 마을의 환경이나 탑의 성별에 따라 달라서 높이 2.6m, 둘레 18m나 되는 것에서부터 작은 것은 높이 1.3m, 둘레 4-5m쯤 되는 것이 있다. 돌의 크기도 길이 20-10cm, 넓이 90-40c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탑의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서 내장물을 넣는데, 오곡단지 · 금두꺼비 · 쇠스랑 · 부적 · 숯 등을 넣었으며, 제주도의 경우는 누금(밥주걱)이나 솥을 넣었다.
누금은 솥의 밥을 담듯이 바깥의 재물을 긁어 들이라는 뜻에서 넣는다는 것이니 쇠스랑을 내장하는 의미와 같다. 또 솥은 무서운 불에도 끄떡없이 이겨내는 힘이 있으니 그처럼 재난을 이겨달라는 뜻이다. 오곡단지는 풍농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은 곡식단지이며, 금두꺼비는 지세가 제비혈인 마을의 앞에 놓은 다리(橋)가 지네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을이 피폐하는 것으로 믿어 지네를 잡아먹으라고 은으로 두꺼비를 만들어 탑 속에 봉인한 것이다. 쇠스랑은 긁어 들이는 성질을 지녔으므로 마을이 부자가 되도록 재물을 긁어 오라는 뜻에서 넣은 것이고, 부적은 마을이 잘 되게 해달라는 축원문이며, 숯을 넣는 것은 도깨비의 불장난으로 마을에 화재가 잦으니 불을 제어하라는 뜻이다. 또 간수(소금)를 넣은 것은 살림을 짭짤(알뜰)하게 하고 재앙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탑을 다 쌓으면 맨 꼭대기에다 頭狀 · 꼭지돌 · 탑선돌 · 머리돌 · 상두석 · 포석 · 怪石 등으로 명명되는 ‘탑윗돌’을 얹는다. 할아버지 탑 위에는 가늘고 길며 끝이 뾰족한 돌을 얹고, 할머니 탑에는 그리 길지 않고 가소 펑퍼짐하며 끝이 둥그스런 돌을 얹는다. 감실에다 두꺼비를 넣은 마을에서는 두꺼비형의 윗돌을 얹었다. 전북 진안군 진안면 물곡리에서는 화재를 막아주는 화재막이탑의 윗돌로 정교하게 조각한 돌거북을 올려놓고 있다.
이러한 돌탑이 세워져 있는 곳을 탑거리 · 탑선거리 등으로 부르며, 때로는 선돌을 탑이라 하고 탑을 탑장승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탑제 대상신격이 다른 신앙물과 서로 혼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복합양상은 탑-장승 / 탑-선돌 / 탑-솟대 / 탑-장승-솟대 등 넷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돌탑은 원뿔형이 기본형이지마는 할아버지-할머니탑 / 남자탑-여자탑 / 안탄-바깥탑 / 큰탑-작은탑 등으로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치 · 규모 · 성별에 따라 다소의 변형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미 서낭제에서 언급하였듯이 산간지역의 累石塔은 오가는 나그네들이 馬氏 부인의 사신을 덮어주기 위하여 쌓은 서낭당으로서의 돌탑이라면 여기서의 돌탑은 마을의 형성과 함께 동민들이 除厄招福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심에서 洞口에다 조성한 돌탑이다.
이 돌탑의 분포지역은 주로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남부 지역과 제주도 등이며, 前者의 지역에서는 장승이나 솟대보다도 오히려 돌탑이 더 많다.
제의에 있어서도 충남 금산군 일대의 마을공동체 신앙에 대한 최근의 종합조사 보고서는 《금산의 마을공동체신앙》(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990)에 의할 때 표본조사지로 선정된 79개의 마을 중 40여 마을에서 지금도 탑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行祀의 정도가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이러한 동제의 대상이 되는 돌탑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권 이남에만 존속하는 민속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필자가 답사한 결과 강원도에도 다수가 있고, 지금도 동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곳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민속신앙 분포도를 재수정해야 할 계기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는 더 북상하여 북한쪽의 돌탑까지를 찾아보는 일이다.
Ⅱ. 탑 제
마을 입구에다 막돌을 사용하여 대개 2기의 원뿔형 돌탑을 쌓고 제화초복과 풍요를 비는 탑제는 거리제의 일종으로서 탑신제 · 탑고사 · 탑거리제 혹은 거리제라고 부른다.
탑제의 神格은 탑제가 거리제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신이나 서낭신보다는 下位神이다.
탑제는 주로 정월 초사흘이나 대보름에 山神祭를 지냐고 나서 행사하는데, 제관이나 유사의 선택은 여느 동재와 마찬가지로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생기복덕을 보고 결정한다. 제관은 祭日 아침에 목욕재계하고 탑 주변을 청소한다. 그리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면 탑제를 준비한다.
제사는 농악패들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동민들이 그 뒤를 따라 탑으로 모여들면서부터 시작된다. 돌탑 앞에다 제물을 진설한 제상을 높고 헌작하며 축원하는 유교식 재차를 행하는데, 동민들은 탑뿐만이 아니라 사방을 향하여 정성으로 비손을 하면서 소망을 기원하고 소지를 올린다. 끝으로 탑의 공덕으로 복을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음복을 하면서 즐긴다. 예전에는 탑제가 끝나면 마을 회의를 비롯해서 씨름 · 횃불놀이 등을 하였으나 요즈음은 풍물을 치고 결산보고를 하는 정도로 끝낸다.
탑제의 祭日은 대체로 음력 정원 초사흘이 가장 많고 다음이 정월 대보름이다. 탑제를 주관하는 사람은 제관 1명, 축관 1명, 유사 1명 등이 주축이었으나 요즈음은 제관만으로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제관의 선출은 예전 같으면 한두 달 전에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한두 주일 전에 정하는데 사정이 있으면 3-4일 전에도 뽑으며, 특별한 부정이 없는 한 里長이 맡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사비용은 마을 공동기금의 일부와 기독교인을 제외한 집집에서 걸립하여 충당한다.
대체로 탑제는 기우제처럼 부녀자들이 깊이 관여한다. 한 때 중단되었던 제사를 부활시킨 주역도 그들이었고, 그 때문인지 일부 마을에서도 여자들이 탑제를 주관한다. 그들은 제사가 시작되면 촛불을 환히 밝히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거나 비손을 하면서 집안의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탑제는 다른 거리제와 대동소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탑은 마을의 방어 기능적 경계수호와 除厄 · 無柄 그리고 풍년을 비는 대상신격으로서 장승이나 몽골의 오보(obo)와 同系이며 蘇塗의 遺形으로 볼 수 있다.
Ⅲ. 강원지역의 돌탑
지금까지 강원도에서 천제단이나 서낭당과 같은 누석단, 조산과 寺塔으로서의 돌탑 등은 있지만 마을을 수호하고 비보하고자 하여 동민들이 정성으로 쌓은 이러한 돌탑에 대해서는 알려지거나 논의된 바가 없어서 강원도에는 돌탑이 없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래서 이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던 중에 춘천시 동면, 횡성군 공근면, 명주군 왕산면, 구정면, 삼척의 도계 등지에서 洞祭의 대상으로서의 돌탑을 만나게 되었다. 강원도의 돌탑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횡성군 공근면 초원2리(상화대) 돌탑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초원2리 상화대라는 마을 입구에는 둘레 6m, 높이 3m 쯤되는 원뿔형의 탑 2기가 있는데 할아버지탑 · 할머니탑이라고 부른다.
탑 위에는 윗돌이 있는데 그 형상은 男根形이다. 이 탑은 1880년경에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들여쌓은 것으로, 탑을 쌓고 난 후부터 마을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는 매년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한 해 건너 한 번씩 정원 대보름에 堂祭를 모신 후에 따로 제사한다. 또 8월에 도로를 닦을 때 동민들은 탑 주위의 풀을 꺾고서 탑에다 간단히 메를 올리는 의식을 행한다.
이 마을의 돌탑은 그 형성의 원인이 2가지로 전하여 온다. 하나는 마을 입구가 허전하여 가난하므로 이를 비보해서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고, 다른 것은 노적가리 형상의 태봉산을 묶어둠으로서 노적가리를 마을에 유감시켜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築塔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가) 마을 앞에는 태봉산이 있는데 이 산의 형세는 배가 노적가리를 싣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태봉산이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밧줄로 묶어두기 위해 탑을 쌓았다. 이 마을은 머슴을 두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부자로 살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돌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나) 이 마을의 홍씨 집안에 군내의 청일면에서 시집을 온 부인이 있었다. 시집을 와서 보니 땅은 나쁘지도 않은데 마을 전체가 무척이나 가난하여 죽도 끓이지 못할 지경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은즉 해마다 ‘風水’의 피해가 많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날 밤 수심에 잠긴 부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상화터로 들어오는 입구가 너무 허전해서 못하는 것이니 그곳에 둥근 돌탑을 양편에 세우면 틀림없이 풍년이 들어 부자마을이 될 것이다.”고 계시하였다. 꿈을 꾼 부인은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였고, 또 전 동민에게 알려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정성을 들여 탑을 쌓고 제사를 지내니 과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2. 명주군 완산면 돌탑
명주군 왕산면의 도마1리 · 도마2리 · 목계리에는 각각 1기씩의 돌탑이 있다.
삽당령과 강릉시의 수원지인 왕산면 저수지 사이에 나란히 이웃하여 있는 이 3마을에 있는 돌탑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쌓은 것인데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가) 도마1리 돌탑
왕산국민학교와 중학교가 있는 이 마을의 서낭당은 계곡 건너편에 있는데, 목조로 된 1칸 기와집이다. (필자가 1994년 6월에 다시 답사하여 보니 서낭당은 없어졌고, 돌탑만이 그대로 있었다.) 서낭당에는 ‘城隍之神位’라고 쓴 위패가 있으며, 제기가 보관되어 있다. 돌탑은 이 서낭당의 뒤쪽에 있는데 높이가 4m, 둘레가 15m쯤 되는 거대한 원뿔형 탑이다. 남근형의 길쭉한 동과 통통한 돌 3개가 윗돌로 얹혀있다.
타원형의 큼지막한 돌을 규격에 맞추어 정성스럽게 쌓아서 아름답게 보인다. 축탑한 연대는 하도 오래되어서 아무도 모른다. 제사는 춘추로 지내는 서낭제사 때 먼저 서낭제사를 지내고 가서 잔을 드리고 절을 한다.
(나) 도마2리 돌탑
도마2리는 탑골 또는 탑동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돌탑이 있기 때문이다.
축조의 시기를 알 수 없는 이 마을의 돌탑은 서낭당과 떨어져 동네 한 가운데 있으며, 크기는 높이 6m, 둘레 25m 정도이다. 한 개의 남근형 돌을 윗돌로 얹어 놓았다. 여기에 쓰인 돌들은 모두 외부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것은 재물을 밖에서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라고 한다. 탑은 원뿔형이지만 20여 년 전 개축할 때 빙 둘러 2개의 기단과 제단을 만들었으므로 조형미가 있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내부에서는 항아리를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탑제사는 소고기 · 돼지고기, 삼색실과와 떡 1시루를 제수로 하여 서낭제사를 드린 후에 따로 제물을 차려서 헌작 · 축원하고 절을 한다. 예전에는 춘추로 2번 제사하였으나 지금은 정월 初丁日에만 지낸다.
(다) 목계리 돌탑
이 마을의 탑은 도로변의 계천을 건너 논 가운데에 있는 원뿔형 탑인데, 높이 3m, 둘레 10m 쯤이며, 윗돌은 없어져 버렸다. 탑 둘레에 풀이 수북이 자라나 있는 것으로 보아 위의 2개 마을과는 달리 현재는 동민들의 관심 밖에 있음이 역력하다. 그래서 동짓날과 정월에 산신과 서낭에게는 제사를 지내지마는 돌탑에서는 지내지 않는다.
도마 1·2리와 목계리의 돌탑은 같은 목적을 위해 축조되었는데, 그것은 앞 초원 2리의 형성원인과 마찬가지로 풍수과 관련성을 갖고 있다.
먼 옛날에 풍수지리에 능한 어느 도승이 이르기를 3마을이 공동으로 끼고 있는 산세가 배형국이기 때문에 마을이 편안하고 부자로 살려면 배가 떠나가지 못하도록 탑을 쌓아서 눌러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배를 균형 있게 눌러주기 위해서는 배의 앞머리가 되는 도마1리, 중간이 되는 탑골, 후미가 되는 목계리에 각각 돌로 탑을 쌓아야 한다고 해서 3마을이 함께 쌓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도마1리는 명덕봉, 탑골은 입고지의 뱃등이, 목계리는 선인봉의 당바위와 각각의 돌탑을 연결하였으므로 각 봉우리에는 배를 메기 위해 파놓은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위 3마을은 지형상 공동의 운명체로서 그들의 파멸 곧 재앙과 빈곤을 방어하는 수단으로서 누석탑을 쌓았다. 그 돌탑은 배에 비하여 작은 것이기는 해도 풍수지리적으로 ‘배형국’인 3마을의 운명을 쥐고 있는 엄청나게 큰 배가 떠나가지 않고 영원히 정박하여 있도록 눌러놓는 기능을 하는 초월적 주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배의 중심이 잘 잡혀야 안전하므로 도마2리의 돌탑이 중심이요, 도마1리가 앞, 목계리가 뒷부분의 중심을 잡기 위해 쌓은 상징적 신앙체인 것이다.
3. 삼척군 미로면 고척리5반 돌탑
이 마을에는 서낭당 · 돌탑 · 진또배기(솟대)가 있는 민속적인 마을인데 돌탑은 동구에 1기, 마을 뒷산에 1기가 있다. 동구의 것은 예로부터 동제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며, 뒤의 1기는 다만 공덕을 짓는다는 의미에서 최근에 축조한 것으로 지금도 두타산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쌓아가고 있다.
동구의 돌탑에 대한 제사는 음력 5월 5일과 동짓날 11일의 서낭제 때 함께 행제하며, 제물은 중(僧)서낭이기 때문에 고기나 생선을 쓰지 않는 서낭제사와는 달리 고기를 드리고 과일이나 산나물도 바친다.
이 마을의 돌탑이 축조되게 된 원인으로는 두 가지의 사례가 전해온다.
그 하나는 「마을에 여자가 많이 나고 남자가 적으므로 탑을 쌓게 되었고, 그렇게 하자 남자가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옛날 여기에 사찰이 있어서 잡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장군님으로서 쌓았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남과 여의 수는 비슷한 법인데 남자의 숫자가 적은 것은 전란이나 질병 등의 재앙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채택된 것이 바로 돌탑을 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부리1리의 경우처럼 마을의 청년들이 자꾸 죽으므로 무당에게 물어 탑을 쌓게 되었다는 것이거나, 혹은 금산군 추부면 승덕리의 경우처럼 마을로 들어오는 괴질이나 잡귀를 퇴치하기 위해 쌓은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돌탑 위에 놓은 陽根石과도 어떤 연관성이 있을 법하다. 후자는 사찰로 들어오는 雜神을 막기 위한 장군님으로서 쌓은 것이라고 하니 사찰수호신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찰입구의 四天王의 역할을 지닌 탑이니, 철원의 심원사 석대암의 축탑의 목적 곧 암자가 형성되면서 예배의 대상으로 쌓은 것과는 다르지마는 사찰과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이다.
4. 명주군 구정면 구정리 서낭당 돌탑
이 마을의 돌탑은 도마1리의 돌탑과 마찬가지로 마을 입구에 있는 서낭당 바로 뒤에다 쌓은 累石塔이다. 목조 기와집인 서낭당의 돌담과 이어져서 자연스런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 탑은 가꾸지 않아서 풀이 우거져 있으나 塔上에는 두어 개의 탑윗돌이 얹어있는데 男根 형상이 분명하다.
제의는 서낭제사로 대신할 뿐 따로 지내지 않는다. 그리고 탑의 형성원인도 아는 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마을에서는 탑신앙이 소멸된 것으로 여겨진다.
5. 동해시 삼화동 돌탑
(가) 삼화동 10통 척빈탑
삼화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1928년에 쌓은 것이라는 거대한 돌탑이 있는데 둘레 40m, 높이 5m 쯤 되는 원뿔형의 누석탑이다. 정상에는 큰 윗돌이 얹혀있고, 안에는 간수(소금)를 항아리에 담아 내장하였다. 탑의 명칭은 ‘척빈탑’이라고 하는데, 이 탑을 쌓고서부터 쌍용양회공장이 들어서고 또 무릉계곡도 개발되어 부자촌이 되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동안 돌보지 않아 황폐하게 된 것을 1982년에 복원하였고, 1992년 7월에는 대리석에다 ‘斥貧塔記文’과 복원사항을 새겨 세웠다. 복원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립자 : 삼화동장 홍순칠
협 찬 : 쌍용자원개발주식회사, ㈜유창기업
울타리 : 쌍용양회동해공장 협찬
복 원 : 최종갑.이인학.이성재.박재청.박길성 삼화동10통주민
1982년 11월 24일
탑제는 특별히 날을 정하여 지내지 않으나 동네에 행사가 있을 때 동민들이 농약을 치고 탑에다 술잔을 올린다.
먼저 이 척빈탑은 이름 그대로 가난을 물리쳐준 탑이니 곧 부자가 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탑비에다 새긴 비문(척빈탑기문)에 나타나 있으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탑은 1982년(단기4261년) 이곳(紅桃村) 주민들이 정성 들여쌓은 석탑이다. 그 때 이 고장에는 약40여 호에 인구 250명 정도의 조용하고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재해로 인하여 온 마을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빈촌이었기에 지나는 걸인들이 죽(粥) 동네라고 불렀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노승(老僧)이 딱한 사정을 보고 도와서 이르기를 “여기에 석탑을 쌓아서 저 파구(波口)를 막으면 부촌이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곧 뜻을 모아 탑을 쌓아 이룩하니 그 후부터는 점차 재해도 줄어들고 잘 사는 마을로 변모하여 지니 저 자연의 풍수(風水) 불합리(不合理)를 인력으로 합리화 이룩함은 곧 성심과 노력과 근면의 소치이다. 탑 중심 바닥에 간수(苦監) 1말을 항아리에 담아서 묻었으니 이는 살림살이를 짭짤(알뜰)하게 하라는 또 재해를 방지하는 예방책이다. 이리하여 이 탑을 척빈탑이라 한다. 오늘날 이 고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1992.7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척빈탑의 형성은 앞에서 제시한 횡성군 초원2리의 축조 원인과 똑같은 유형으로서 마을의 풍수적인 결함을 비보하기 위하여 탑을 쌓은 것이다. 첫째 초원2리가 배형국이므로 배가 더 나가지 않게 탑을 쌓아 고정시킨 것이라는 것처럼 이 마을도 배형국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波口’라는 용어 때문이다. 波口라면 물의 파도가 치는 곳이니 배가 파도에 휩쓸려 떠나갈 수 있기 때문에 탑을 쌓아 방지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둘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것인데, 이 마을에 재해가 들고 가난이 오는 것은 마을이 열려있기 때문이므로 ‘守口’하기 위해서는 안전장치가 요구되고 그것이 곧 築塔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 삼화동 8통 돌탑
척빈탑에서 무릉계곡을 향해 버스로 두 정거장쯤 가면 예전에 삼화1리인 8통의 서낭당이 나오는데, 탑은 이 서낭당을 둘러싼 뒤편의 돌담에 솟아있다. 이 탑의 형태는 서낭당 주위를 돌탑으로 쌓은 것 이라던가 또 당의 뒤편에다 쌓은 것 등이 앞에서 소개한 명주군 구정리의 돌탑과 똑같다.
이 탑은 재앙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마을 서낭당을 지을 때 동민들이 각각 돌 하나씩을 들고 와 쌓은 것이라 한다. 현재 탑제는 행사하지 않고 단지 서낭제사만을 지낼 뿐이다.
서낭제는 예전에는 연3회 곧 4.10.12월에 지냈으나 지금은 섣달 그믐전만 지낸다.
8통의 돌탑에 대한 축조의 원인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긴다는 것으로 보아 역시 波口를 把守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척빈탑이 이웃마을에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척빈탑과 같은 의도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 춘천군 동면 월곡리 돌탑
월곡리는 아랫건드리, 윗건드리라 부르는 2개 마을로 되어있는데, 요즈음은 春川玉鑛山이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현재 윗마을은 25가구, 아랫마을은 15가구 정도로 작으나 옛날에는 60여 호가 넘는 避難之地의 마을이었다. 돌탑은 이 마을 입구에 있다. 둘레가 8m, 높이가 3m 쯤 되는 탑인데, 윗돌이 매우 크다.
아 탑의 역사는 하도 오래되어서 자세히 아는 이가 없으나, 탑을 쌓게 된 내력은 世居氏族인 이 마을의 安씨가 알봉에다가 묘를 쓰고서 군수가 났기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쌓았다는 것이다. 알봉은 산으로 빙 둘러쳐진 이 마을의 중앙에 있는 알처럼 생긴 동산이다.
이 탑은 20여 년 전에 밭둑을 치다가 무너져서 정성껏 다시 쌓은 것이다. 현재 탑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7. 명주군 사천면 사기막리 돌탑
사기막리에는 동제의 대상이 되는 신격으로서의 돌탑이 하나 있다. 높이 3m, 둘레 15m 정도의 이 탑에도 윗돌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두굴범이 무너뜨린 것을 다시 쌓은 것이다. 현재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8. 기타의 강원도 돌탑
동제의 대상 신격으로서가 아닌 돌탑은 도처에 산재하여 있다. 그것은 행로의 안전과 수재수복의 대상신인 고개마루 서낭당처럼 행인이나 장사꾼이 쌓은 것이거나, 개인으로서의 등산객이나 산도들이 절 주위와 산에다가 신앙심과 정성으로 오가면서 돌을 하나씩 하나씩 얹어서 쌓은 것이다.
그중에는 전북 진안 마이산 탑사의 돌탑처럼 사찰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또는 절을 수호하는 신격으로 축조한 듯 한 돌탑도 있다. 삼척군 하장면 도릉사의 돌탑과 철원 심원사 석대암의 누석대가 그것이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는 “사찰 경내에 여타의 석탑이나 탑재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람에 배치된 탑 곧 암자가 형성되면서 예배의 대상으로 쌓은 탑이라”는 견해(강원대 역사교육과 신종원교수)가 발표된 적이 있다. 그리고 명주군 성산면 보광리 절골의 산길에 있는 돌탑도 위의 경우에 가깝다.
치악산 아랫마을인 원주시 행구동의 동구에는 1993년 9월에 민족통일대동장승굿추진위원회와 민족예술인총연합민족굿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세운 거대한 남녀장승(민족통일대장승 · 민족평화여장승)과 2基의 솟대 옆에 새로이 3基의 돌탑이 서있다. 이는 한 개인이 10여 년 동안 정성을 들여쌓았다는, 치악산 정상 시루봉의 돌탑을 모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