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광주․전남지역 판소리유파
(光州․全南地域 판소리流派)
광주(光州)․전남지역(全南地域)은 전북지역(全北地域)과 마찬가지로 판소리 명창(名唱)
을 많이 낸 고장이다. 조선말기(朝鮮末期) 송흥록(宋興祿)과 박유전(朴裕全)이 전남지역(全
南地域)으로 이사를 오면서 전남지역(全南地域)은 판소리 중심지(中心地)가 되었고, 그리고
정창업(丁昌業), 김창환(金昌煥), 박기홍(朴基洪), 송만갑(宋萬甲), 유성준(劉成俊), 이날치
(李捺致), 김채만(金采萬) 등에 의해서 판소리 전성기를 이루었다. 일제(日帝)때에도 임방울
(林芳蔚), 김연수(金演洙), 공창식(孔昌植), 김봉학(金鳳鶴), 오수암(吳壽岩), 박동실(朴東實),
박봉래(朴奉來), 박초월(朴初月), 박봉술(朴奉述), 정광수(丁珖秀), 한승호(韓承鎬) 등이 활동
하였고 이들은 해방후 주로 서울에서 판소리를 하였으며,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판
소리 명창 대부분이 전남(全南) 출신(出身)이다.
전남 지역은 지금은 옛날보다 쇠한 형편이나 서울 다음으로 판소리 공연이 활발한 지역
이다.
이번 조사에서 조사된 전남거주 판소리 명창은 광주지역(光州地域)의 김성래(金成來), 박
정자(朴靖子), 방야순(房也順), 송순섭(宋順燮), 안채봉(安彩鳳), 이임례(李任禮), 전낙쾌(全
樂快), 정춘실(鄭春實), 한애순(韓愛順), 한해자(韓海子), 박옥심(朴玉心), 여수지역(麗水地
域)의 김향순(金香順), 정홍수(丁烘秀), 순천지역(順天地域)의 박미홍(朴美洪), 박향산(朴香
山), 선농월(宣弄月) 등이다.
현재(現在) 전남지역(全南地域)에서 전승(傳承)되는 판소리는 정응민(鄭應珉)의 강산제(江
山制)가 가장 많이 있고 그밖에 송만갑(宋萬甲)제, 유성준(劉成俊)제, 박동실(朴東實)제가
다소 전승(傳承)되고 있으며 김창환(金昌煥)제는 전승이 미미하다.
1. 김성래(金成來)
본 명 (本 名) : 김성래(金成來)
생년월일(生年月日) : 1929年 5月 25日 (병인생(丙寅生)․男․67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동구(東區) 학림(鶴林)1동(洞) 297-33
본 적 (本 籍) : 상 동(上 同)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칠량면(七良面) 단월리(丹月里) 358
김성래(金成來)의 증조부는 명창(名唱) 김채만(金采萬)이다. 김성래(金成來)는 13세부터
16세까지 강진(康津)에서 부친(父親) 김동욱(金東旭)에게 춘향가(春香歌)중 이별가(離別歌)
를 배웠다 한다. 부친(父親) 김동욱(金東旭)은 40세에 작고하였는데 지금 살았으면 87세가
된다고 한다. 전남(全南) 완도(莞島)에서 태어나 강진(康津)에서 살았다 한다. 김동욱(金東
旭)은 정정렬(丁貞烈)과 백부(伯父) 김채만(金采萬)에게 판소리를 배웠는데 김동욱(金東旭)
이 17․8세때 백부(伯父) 김채만(金采萬)이 작고하였다 한다.
김성래(金成來)는 17세때 일본(日本)에 가서 학교(學校)를 다니다 해방(解放)이 되자 귀
국하였다 한다.
20여세 무렵에 보성(寶城)에 가서 정응민(鄭應珉)에게 심청가(沈淸歌) 배의 밤이에서부터
모녀상봉(母女相逢)까지 배웠다 한다. 그당시 보성 정응민 문하에는 김연수(金演洙)가 심청
가(沈淸歌)를 배우고 있었고 박기채(朴基彩)도 공부하고 있었는데 주로 김성래(金成來)가
북을 쳐주었다고 한다.
박선행(朴先行)은 강진(康津)사람으로 지금 살았으면 110여세 되는데 김성래(金成來) 부
친(父親)의 외삼촌(外三寸)이라 하며 김채만(金采萬)의 수행고수로 명고수(名鼓手)이었다
한다. 북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따드락 없이 쳤다 한다. 김성래(金成來)는 13세때 박선행(朴
先行)에게 북의 기초를 배웠다고 한다.
29세때에는 광주(光州)에서 정광수(丁珖秀)에게 소리를 배우고 고수(鼓手)로 수행했다고
한다. 또 호남국악원에서 공대일, 성원목에게 고법을 배웠다고 한다. 성원목은 정원섭(丁元
燮)에게 북을 배웠다 한다.
김성래(金成來)는 그의 고법(鼓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따드락을 칠 때에는 헐렁
하게 쥐고 각을 칠 때에는 꽉쥔다고 한다. 왼손을 북에 얹을 때에는 수평으로 팔을 가깝게
뻣는다. 통을 때리는 곳은 두군데(이개타점(二個打點))가 있는데 그 하나는 따드락 치는 데
이고 다른 하나는 부칠 때 치는 데라고 한다.
진양은 본디 24박이 없었다고 한다. 6박으로 치면서 노래에 따라 풀어주기도 하고 각을
내기도 하고 달고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 박선행이 북을 가르칠 때에는 중중모리를「덩-딱, 궁-딱, 궁-딱, 궁-궁」하고 8박
(?)으로 쳤다고 한다. 이때 구음은「합-딱, 궁-딱, 궁-딱, 궁-궁」이라 했다고 한다.
중모리는「덩- -- 딱-, 궁- -- 딱-, 궁- 궁- 딱-, 궁- -- 궁-」하고 쳤고 자진모리는
「덩--, 궁--, 궁-딱, 궁--」하고 쳤다고 한다.
김성래(金成來)는 지금 자신의 음악적 안목으로 중모리는「덩- 궁-딱-, 궁-, 따드락, 딱
딱, 궁- 궁- 딱-, 궁- -- 궁-」하고 치고, 중중모리는「덩궁딱, 궁딱딱, 궁궁딱, 궁-궁」하
고 치며, 자진모리는「덩--, 궁--, 궁-딱, 궁-궁」하고 치고, 휘모리는 「덩-, 궁-, 궁딱,
궁-」하고 치며, 엇모리는「덩-궁, 딱-, 궁-딱, 궁-」하고 친다고 한다. 엇중모리는「덩-,
궁-, 딱-, 궁-, 딱-, 궁-」하고 친다고 한다.
진양은 24박으로 칠 경우에 첫째각 5․6박은「딱--, 딱--」하고 치고 둘째각 5․6박은
「따드락, 딱-딱」하고 치며 세째각 5․6박은「척--, 꾹--」하고 치고 네째각 5․6박은
「궁궁-, 궁-궁」하고 친다고 말하고 있다. 진양은 소리에 따라 반각이 나오면 박치고 온각
이 나오면 온각친다고 한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 엇모리, 엇중모리는 소리에 눈이 나
오면 부친다고 한다.
2. 박옥심(朴玉心)
본 명 (本 名) : 박옥심(朴玉心) 예 명 (藝 名) : 박춘성(朴春城)
생년월일(生年月日) : 1921年 4月 12日 (경신생(庚申生)․女․73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양(良)2동(洞) 119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보성군(寶城郡) 득량면(得糧面)
출 생 지(出 生 地) : 상 동(上 同)
박춘성(朴春城)은 본명(本名)이 옥심(玉心)으로 1921年 4月 12日生이다. 금년 나이 73세
로 경신생(庚申生)이다. 전남(全南) 보성군(寶城郡) 득량면(得糧面) 박실에서 태어났고 보성
군(寶城郡) 회천면(會川面) 영천리(永川里)로 출가(出家)했으며 현재 광주시(光州市) 서구
(西區) 양동(良洞)에 살고 있다.
그는 12세에 이진영(李進榮)에게 단가(短歌)를 배웠고 13세때부터 33세까지 보성군(寶城
郡) 회천면(會川面) 영천리(永川里)에서 정응민(鄭應珉)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그가 배운 판
소리는 정응민(鄭應珉)에게 전승(傳承)되었던 강산(江山)제 판소리이다. 박춘성(朴春城)이
정응민(鄭應珉)에게 배운 대목은 다음과 같다.
춘향가(春香歌) : 초앞∼어사출도
심청가(沈淸歌) : 초앞∼황후자탄(皇后自嘆)
적벽가(赤壁歌) : 군사(軍士)설음∼자룡(子龍)이 활 쏘는 데까지
수궁가(水宮歌) : 초비두∼수궁(水宮)에 들어가는데까지
오랫동안 소리를 않고 가정(家庭)에 들어 앉았던 탓으로 박춘성(朴春城)이 지금 기억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춘향가(春香歌) : 초앞∼광한루경개(廣寒樓景槪)
농부가(農夫歌)∼어사(御使)와 춘향모(春香母)
심청가(沈淸歌) : 초비두∼심청(沈淸)이 물에 빠지는데
수궁가(水宮歌) : 초비두∼상좌(上座) 다툼
적벽가(赤壁歌) : 군사(軍士)설음∼자룡(子龍)이 활쏘는데
박춘성(朴春城)에게 녹음(錄音)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단가(短歌) : 진국명산(鎭國名山)
심청가(沈淸歌) : 초앞∼아기 어르는데
적벽가(赤壁歌) : 싸움타령∼활쏘는데
박춘성(朴春城)이 보성(寶城)에서 판소리를 배울 때에는 박기채(朴基采), 오기석(吳基石)
이 판소리를 정응민(鄭應珉)에게 배웠고 그 뒤 김연수(金演洙), 김준섭(金俊燮), 김옥련(金
玉蓮), 조상현(趙相賢), 성우향(成又香), 안채봉(安采鳳), 성창순(成昌順), 안향련(安香蓮)이
공부했다 한다. 이들이 정응민(鄭應珉)에게 공부한 연수(年數)를 박춘성(朴春城)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박기채(朴基采) 7, 8年, 오기석(吳基石) 7, 8年, 김연수(金演洙) 3年, 김준섭(金俊燮) 5, 6
年, 김옥련(金玉蓮) 3年, 조상현(趙相賢) 10年, 성우향(成又香) 3年, 안채봉(安采鳳) 1年, 성
창순(成昌順) 7年, 안향련(安香蓮) 1年
박춘성(朴春城)은 22세때 전남(全南) 옥과(玉果) 지실이라는 곳에 있는 현금산조명인(玄
琴散調名人) 박석기(朴錫基) 초당(草堂)에서 박동실(朴東實)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다. 박
춘성(朴春城)이 박동실(朴東實)에게 간 것은 정응민(鄭應珉)이 적벽가(赤壁歌) 삼고초려(三
顧草廬)대목을 잊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박동실(朴東實)에게 이 대목을 배울 셈이었
다고 한다. 그러나 박동실(朴東實)의 바디와 정응민(鄭應珉)의 바디가 너무 달랐고 또 정응
민(鄭應珉) 소리에 젖은 박춘성(朴春城)에게는 박동실(朴東實)의 소리가 너무 애려하고 부
드러워 소리같지 않아서 3개월쯤 배우다가 중지하고 돌아왔다 한다. 그 무렵에 공기남(孔基
南), 김소희(金素姬), 박귀희(朴貴姬), 한애순(韓愛順)이 박동실(朴東實)에게 판소리를 배우
고 있었다 한다.
박춘성(朴春城)은 18세때에 전주(全州) 명창대회(名唱大會)에서 1등을 했고 21세 때에도
1등을 했다고 한다. 18세때에는 조금옥(趙錦玉), 오비취(吳翡翠), 김여란(金如蘭), 박록주(朴
綠珠) 같은 이가 출전(出戰)했고 21세때에는 박초월(朴初月), 김소희(金素姬)도 출전(出戰)
했다고 한다. 21세때 서울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입회(入會)하여 지방순회공연
(地方巡廻公演)에 참가했는데 이때 김창룡(金昌龍), 이동백(李東伯), 송만갑(宋萬甲), 정정렬
(丁貞烈), 오태석(吳太石), 임방울(林芳蔚), 김연수(金演洙), 김소희(金素姬), 박록주(朴綠珠),
박초월(朴初月), 조금옥(趙錦玉)과 같은 명창(名唱)들이 함께 다녔다고 한다. 2년쯤 다니다
가 가정(家庭)에 들어 앉아 소리를 작파했다고 한다.
1976年 강산제판소리로 전남지방무형문화재(全南地方無形文化財)로 지정(指定)되었다.
박춘성(朴春城)이 보유(保有)하고 있는 판소리제는 모두 강산제이다. 강산제라는 말은 소
리조(調)에 쓰이는 경우와 판소리의 유파(流派)에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유파
(流派)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산제유파(流派)는 조선조(朝鮮朝) 철종(哲宗)때 명창(名唱) 박유전(朴裕全)에게 유래(由
來)된다. 판소리는 동편(東便)제, 서편(西便)제, 중고제로 유파(流派)가 갈린다. 동편(東便)
제는 송흥록(宋興祿)(순조(純祖)때 명창(名唱))에서 비롯되며 서편(西便)제는 박유전(朴裕
全)에서 비롯되고 중고제는 김성옥(金成玉)에게서 비롯된다고 전해진다.
서편(西便)제는 정창업(丁昌業)에서 비롯되는 유파(流派)와 박유전(朴裕全)에서 비롯되는
유파(流派), 즉 박유전(朴裕全)제를 강산제라 한다. 박유전(朴裕全)제를 강산제라 부르는 유
래(由來)에 대하여 두가지 설(說)이 있으니 그 하나는 강산리설(岡山里說)이고 또하나는 강
산호설(江山號說)이다. 강산리설(岡山里說)은 정노식(鄭魯湜)이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서
밝힌 것으로 박유전(朴裕全)의 제를 강산제라 한다는 설(說)이며 또 하나는 김연수(金演洙),
정권진(鄭權鎭)이 전(傳)하는 정응민(鄭應珉)의 설(說)로 박유전(朴裕全)이 흥선대원군(興宣
大院君) 앞에서 판소리를 불렀는데 대원군(大院君)이 칭찬하기를 ‘네가 제일강산(第一江山)
이다’라고 말한데서 그의 호(號)가 강산(江山)이 되었고 그의 소리제를 강산(江山)제라 불렀
다 한다.
박유전(朴裕全)의 소리가 이날치계(李捺致系)와 정재근계(鄭在根系)로 각각(各各) 달리
전승(傳承)되었다.
요즈음은 박유전(朴裕全)―정재근(鄭在根)―정응민계(鄭應珉系)를 강산제라 부르고 이날
치계(李捺致系)는 강산제라 부르지 않는다.
박유전(朴裕全)제는 다른 제와 달리 소리가 매우 정교한 것이 특징인데 정재근계(鄭在根
系)는 정교하면서 성음(聲音)이 분명하며 조(調)의 변화가 많고 정대(正大)한 발성(發聲)을
하며 이날치계(李捺致系)는 성음(聲音)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교묘한 부침새를 구사하며 연
연한 발성(發聲)을 쓴다.
본(本) 조사(調査)에서 채록(採錄)한 박춘성(朴春城)판소리 진국명산(鎭國名山), 심청가
(沈淸歌)에서 초앞∼아기 어르는 대목, 적벽가(赤壁歌)에서 싸움타령∼활쏘는 대목의 특징
(特徵)은 다음과 같다.
단가(短歌)는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하여 부르는 짧은 노래를 가리키는데 지
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40여종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진국명산(鎭國名山)은 오래된 곡으
로 짐작된다. 그것은 송만재(宋晩載) 관우희(觀優戱)에 진국명산(鎭國名山)이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진국명산(鎭國名山)은 어느 가수(歌手)나 중모리 평조(平調)로 부르며 또 선율(旋律)
도 대개는 비슷하고 부르는 가수(歌手)의 전승(傳承)계보에 따라 약간의 목구성과 부침새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진국명산(鎭國名山)의 사설(辭說)은 가곡(歌曲) 편수대엽(編數大葉)에
보인다.
박춘성(朴春城)의 심청가(沈淸歌)는 정권진(鄭權鎭), 성우향(成又香) 등이 부르는 심청가
(沈淸歌)와 큰 차이는 없으나 약간씩 다른 선율(旋律)이 나오는 것은 그 학습(學習) 미숙
(未熟)인지, 변질(變質)인지 또는 정응민(鄭應珉)의 초기(初期) 소리제인지 알 수 없다.
박춘성(朴春城)이 불렀던 적벽가(赤壁歌)는 정응민(鄭應珉)제로 지금 정권진(鄭權鎭)이
부르는 것과 비슷하나 시김새가 간략하다.
┌─ 공창식(孔昌植)
┌─ 이날치 - 김채만 ───┼─ 박동실(朴東實) - 한애순(韓愛順)
│ (李捺致) (金采萬) └─ 박화섭(朴化燮) - 한승호(韓承鎬)
박유전 ──│ ┌─ 박춘성(朴春城)
(朴裕全) │ ├─ 박기채(朴基采)
│ ├─ 정권진(鄭權鎭) - 정회석(鄭會錫)
└─ 정재근 - 정응민 ───┼─ 김준섭(金俊燮)
(鄭在根) (鄭應珉) ├─ 성우향(成又香) - 김영자(金英子)
├─ 조상현(趙相賢)
└─ 성창순(成昌順)
3. 박정자(朴靖子)
본 명 (本 名) : 박정자(朴靖子)
생년월일(生年月日) : 1941年 11月 5日 (임오생(壬午生)․女․51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동구(東區) 동명동(東明洞) 57
본 적 (本 籍) : 광주시(光州市) 북구(北區) 북동(北洞) 584
출 생 지(出 生 地) : 상 동(上 同)
박정자(朴靖子)는 13세때 광주(光州)에서 정광수(丁珖秀)에게 단가(短歌)와 도막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14세때에는 광주(光州)에서 공대일(孔大一)에게 1년간 심청가(沈淸
歌)를 배웠다고 한다. 16세때에는 전남(全南) 보성(寶城)에 찾아가 정응민(鄭應珉)에게 심청
가(沈淸歌)를 배웠다 한다.
17세때에는 전북(全北) 전주(全州)에서 김동준(金東俊)에게 춘향가(春香歌)중 이별가를
배웠다고 한다. 19세때에는 전남(全南) 여수(麗水)에서 박봉술(朴奉述)에게 2년간 적벽가(赤
壁歌)를 배웠다 한다.
그뒤 공연활동을 벌이다가 40세때부터는 10여년간 광주(光州)에 국악학원(國樂學院)을 설
립하여 후진 양성에 임하였다고 한다.
1990년 3월에 남도국악단(南道國樂團)에 입단(入團)하여 지금까지 재직중이다. 1990년 7
월에 성창순(成昌順)에게 공부를 착수하였으나 몸이 아파서 잠시 중단하였다고 한다.
4. 방야순(房也順)
본 명 (本 名) : 방야순(房也順) 예 명 (藝 名) : 방성춘(房姓春)
생년월일(生年月日) : 1948年 12月 21日 (정해생(丁亥生)․女․46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귀동(龜洞) 29-13
본 적 (本 籍) : 전북(全北) 남원(南原)
출 생 지(出 生 地) : 광주시(光州市) 북구(北區) 오룡동(五龍洞)
13세때 전남(全南) 광산군(光山郡) 대촌면(大村面)(현(現)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
區))에서 박채선에게 6년간(年間) 춘향가(春香歌) 이별가(離別歌), 옥중상봉 등 판소리 여러
대목을 배웠다고 한다.
박채선은 박동실(朴東實)의 동생 박영실(朴永實)명창의 제자이며 고향이 전남(全南) 옥과
(玉果)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고 하며 당시 42세쯤 되었는데 소리를 잘 했다고 한다.
방성춘(房姓春)은 20세 무렵에 광주(光州)에서 공대일(孔大一)에게 3년간 춘향가(春香歌)
초경이경에서 끝까지 그리고 흥보가(興甫歌) 몇대목을 배웠다고 한다.
24세때에는 역시 광주(光州)에서 1년간 정광수(丁珖秀)에게 흥보가(興甫歌) 집터잡는데부
터 가난타령까지 배웠다고 한다.
26세때에는 정춘실(鄭春實)과 함께 전남(全南) 영암(靈岩) 도갑사로 정광수선생(丁珖秀先
生)을 모시고 가서 흥보가 그리고 춘향가(春香歌)의 이별가 초두 몇대목, 수궁가(水宮歌) 초
앞에서 토끼화상(畵像)까지 배웠다고 한다. 당시 소리를 배우는데 드는 학채는 당시 돈으로
1인당 100환씩을 받았는데 쌀 2∼3가마 값 되는 돈이었다 한다. 당시 도갑사에서 학습은 이
렇게 했다 한다. 도갑사옆 어느 암자에서 기거하며 소리 공부를 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즉시 산에 올라 전날 배운 것을 외우며 연습하다가 도갑사에서 공양들라고 스님이 목탁을
치면 선생을 모시고 도갑사로 내려가 아침 공양을 든다고 한다. 공양을 마치고 다시 선생을
모시고 암자에 올라가 저마다 1시간씩 선생한테 소리를 배우고 배운 이는 즉시 산에 올라
가서 점심때까지 배운 소리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어 도갑사 스님이 점심공양을
들라는 목탁을 치면 암자로 내려가 선생을 모시고 도갑사에서 공양을 들고 다시 암자로 올
라와 1시간 정도 쉰 다음 또 저마다 1시간씩 배운다고 한다. 소리를 배운 이는 또 산에 올
라가 소리를 외우며 연습하고 저녁 공양 때가 되어 도갑사 스님이 목탁을 치면 암자로 내
려가 선생을 모시고 도갑사로 가서 저녁 공양을 들었다 한다. 저녁 공양을 들고 암자에 와
서 밤에는 쉬었다고 한다.
소리 배우기 전날 사설을 미리 받아 외우는데 선생이 적어주거나 선생이 말로 불러주는
것을 제자가 받아 적거나 한다고 한다. 북 머리에서 선생한테 소리를 배울 때에는 미리 외
운 사설에 소리를 받는다고 한다. 다음 시간에 전에 배운 것을 제자에게 시켜 잘못되었으면
바로 잡아주고 제대로 되었으면 그 다음 소리를 받는다고 한다.
방성춘(房姓春)은 28세때 전주(全州) 범어사에서 오정숙(吳貞淑)을 모시고 100일 공부를
했는데 춘향가(春香歌) 초앞부터 신연맞이까지 배웠다.
29세때에는 서울에 올라가 오정숙(吳貞淑)에게 1년간 춘향가(春香歌) 전바탕을 떼었다고
한다.
30세때에는 부군(夫君) 송순섭(宋順燮)을 따라 부산(釜山)으로 이사하여 12년간 가정(家
庭)에 묻혀지냈다 한다.
1987년에 부군(夫君)을 따라 광주(光州)로 이사와서 광주(光州) 남도국악단(南道國樂團)
에 입단(入團)하여 활동하는 한편 틈틈히 오정숙(吳貞淑)에게 전에 배운 춘향가(春香歌)를
재수(再修)하였다 한다.
89년에는 광주에서 오정숙(吳貞淑)에게 배운 동편(東便)제 춘향가(春香歌) 전바탕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3년간 전주(全州)로 다니며 오정숙(吳貞淑)에게 심청가(沈淸歌)
를 배웠고 1991년에는 서울 국립극장과 광주(光州)에서 두차례의 심청가(沈淸歌) 완창 발표
회를 가졌다 한다.
그는 여러차례 전주(全州)대사습 판소리경창대회(競唱大會)에 참가하였는데 89년에 3등,
90년에 2등, 91년에 1등 장원을 하였다고 한다.
5. 송순섭(宋順燮)
본 명 (本 名) : 송순섭(宋順燮)
생년월일(生年月日) : 1939年 10月 20日 (기묘생(己卯生)․男․54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귀동(龜洞) 29-13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고흥군(高興郡) 점암면(占岩面) 신안리(新安里) 532
출 생 지(出 生 地) : 상 동(上 同)
송순섭(宋順燮)은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第5號 판소리(고(故)) 박봉술(朴鳳述)
적벽가(赤壁歌) 기예능(技藝能) 보유자(保有者) 후보(候補)이다.
송순섭(宋順燮)은 여느 판소리 명창(名唱)처럼 전문적(專門的)인 국악인(國樂人) 집안에
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판소리에 심취하여 지방 무명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우다가 1957년
부터 공대일(孔大一), 김연수(金演洙), 김준섭, 박봉술(朴鳳述)에게 판소리를 사사 받았다.
그리고 그는 부산(釜山)에 살며 박봉술(朴鳳述)에게 적벽가(赤壁歌), 수궁가(水宮歌), 흥보
가(興甫歌)를 배웠다.
6. 안채봉(安彩鳳)
본 명 (本 名) : 안채봉(安彩鳳)
생년월일(生年月日) : 1926年 10月 8日 (경신생(庚申生)․女․73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서(西)2동(洞) 1-4
본 적 (本 籍)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서동(饍) 143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나주군(羅州郡) 남평면(南坪面) 상곡리(上谷里)
안채봉(安彩鳳)은 12세때 함남(咸南) 청진(淸津)권번에서 임옥돌(林玉乭)에게 이노산이,
진국명산(鎭國名山) 등 단가(短歌) 몇마디와 수궁가(水宮歌) 토끼 용궁(龍宮)가는 대목 등
판소리 몇대목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박동실(朴東實), 안기옥(安基玉), 임옥돌(林玉乭)이 청
진에 가서 권번을 만들었는데 안기옥(安基玉)은 4촌 오라버니가 된다고 한다.
안채봉(安彩鳳)의 아버지 안영권은 상곡리에 살았고 6형제를 두었는데 딸이 넷이었는데
안채봉이 세째딸이라 한다. 영권의 장형(長兄)은 남평읍내(南坪邑內)에 살았는데 첫째 아들
이 기옥(基玉)이라 한다. 영권의 둘째형의 둘째 아들이 안기선(安基先)명창이며 안향련(安
香蓮)의 부친(父親)이라고 한다. 안기옥(安基玉)은 남평(南坪)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광주(光
州)에 살다가 서울에 올라가 활동했다고 한다. 안기옥(安基玉)의 부인은 광주(光州) 불로동
에 살다가 함흥에서 작고하였다. 안기옥(安基玉)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안영일로
부산에서 약방을 하다가 1년전에 죽었다. 안기옥(安基玉)의 제자로 남평(南坪)살던 김종기
가 있는데 광주(光州)에서 활동하였다. 안채봉(安彩鳳)이 48세쯤에 김종기에게 가야금산조
를 배운 바 있다. 김종기는 정광수(丁珖秀) 그리고 능주(綾州) 박기채(朴基彩)와는 동서가
된다고 한다.
안채봉(安彩鳳)은 청진에서 2년쯤 있다가 남평에 돌아와 14살때 광주(光州) 권번에서 박
동실(朴東實)에게 심청가(沈淸歌) 주과포혜에서부터 심청(沈淸)이 물에 빠지는 대목까지 배
웠다. 이때 박영구에게 검무(劍舞), 살풀이춤 등 춤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임옥돌(林玉乭)은 전남(全南) 장성(長城) 사람이며 당시 30여세였는데 수궁가를 잘 하였
으며 박동실(朴東實)과는 바디가 달랐다 한다. 분명치는 않으나 이날치(李捺致)에게 배웠다
고 들은 것 같다고 한다.
박동실(朴東實)은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나 광주에서 살았고 항성은 안좋으나 수리성으로
소리를 잘하였고 김채만(金采萬)의 제자라고 들은 것 같으나 분명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임
옥돌(林玉乭)과 한 또래였는데 심청가(沈淸歌)를 잘 했다 한다. 부인이 김(金)옥건인데 서도
소리를 잘했고 거문고산조, 풍류를 했다 한다.
박영구는 전남(全南) 화순(和順) 사람으로 다리를 절름거렸으나 승무, 검무, 살풀이춤, 덧
배기춤을 잘 추었는데 특히 덧배기춤은 중중모리장단으로 넘겨추어 일품이었다고 한다. 살
풀이는 수건을 들고 추었는데 잘 추었다고 한다.
안채봉(安彩鳳)은 18세 무렵에 안기선(安基先)에게 100일 공부를 하며 춘향가 사랑가부터
이별가를 배웠다 한다.
안기선(安基先)은 사촌 오라버니이고 안(安)향련의 부친인데 박동실(朴東實)의 동생 영실
(永實)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소리를 들었다 한다. 국립국악원 악사로 있는 박종선이 그의
아들이라 한다.
안채봉(安彩鳳)은 그 무렵에 조몽실(曺夢實)에게 2년간 춘향가 이별가(離別歌)를 배웠고
흥보가(興甫歌) 제비노정기에서 박타는데까지 배웠다고 한다.
조몽실(曺夢實)은 고향과 선생은 모르나 박동실과 다른 바디로 소리를 했는데 항성이 약
하고 탁성이라 난장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방안 소리는 야질야질 잘 하였다고
한다.
안채봉(安彩鳳)은 19세 무렵부터 7․8년간 가정에서 은거하다가 37세때 전남(全南) 보성
(寶城)에 가서 1년간 정응민(鄭應珉)에게 춘향가(春香歌) 박석틔에서 출도까지, 심청가(沈淸
歌) 아버지 들으시오에서 물에 빠지는데까지 배웠고 또 수궁가(水宮歌) 영덕전 뒤로에서 고
고천변까지, 적벽가(赤壁歌) 니내설음에서 자룡(子龍) 활쏘는데까지 배웠다 한다.
안채봉(安彩鳳)이 보성(寶城) 정응민(鄭應珉) 문하(門下)에 들어가니 박춘성(朴春城), 김
후섭(金後燮), 김연수(金演洙)가 이미 다녀갔고 김명환(金命煥)이 성우향(成又香)을 데리고
와서 정응민(鄭應珉)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있었고 조상현(趙相賢)이 조금 있다가 들어와 공
부를 하였다 한다.
그 뒤에 안채봉(安彩鳳)은 광주(光州)에서 국극사(國劇社)를 수행하였고 또 임방울(林芳
蔚) 단체도 다녔다 한다. 당시 국극사(國劇社)에는 오태석(吳太石), 정남희(丁南希), 조상선
(趙相鮮), 신숙(愼淑), 박귀희(朴貴姬) 등이 수행하고 있었다 한다.
조몽실(曺夢實)은 오로지 계면조(界面調)로 하며 박동실(朴東實)도 계면조로 하고 정응민
(鄭應珉)은 계면, 우조로 소리했다 한다. 판소리에서 계면조(界面調), 우조(羽調)라는 말은
나중에 났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들이 춘향가(春香歌) 박석고개를 우조라고 하는 말을 들었
다 한다. 또 임방울(林芳蔚)이 군로사령을 덜렁제라 하는 것을 들었다 한다. 선생님들이 평
조(平調)라는 말을 쓰는 것은 듣지 못하였고 또 평계면(平界面), 진계면이란 말은 최근에
쓰는 말이라고 한다.
또 성음에는 수리성, 철성, 탁성, 천구성, 양성, 수리양성, 하성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철성은 상성만 나며, 수리성은 상중하성이 나며, 천구성은 수리성에 딸려 있다고 한다. 양성
은 목구성이 없는 성음이라고 한다.
소리목에는 꾀벗은목, 와가리목 등이 있다고 한다.
판소리에는 청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기악에서 쓰는 말이라 한다.
오간청은 높은 청이며 상청, 중청, 하청이라는 말이 있는데 상청은 판소리에서 상성과 같
은 것이라 한다. 엇청이란 말은 못들었다 한다.
잉어걸이, 완자걸이, 엇부침이라 말은 들었고 괴대죽이란 말은 못들었다 한다.
본 명 (本 名) : 이임례(李任禮)
생년월일(生年月日) : 1941年 7月 3日 (신사생(辛巳生)․女․52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방림(芳林)2동(洞) 102-5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진도군(珍島郡) 진도읍(珍島邑) 동외리(東外里) 687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진도군(珍島郡) 고군면(古郡面) 지막리(芝幕里)
이임례(李任禮)는 16세부터 23세까지 진도읍(珍島邑)에서 이병기에게 심청가(沈淸歌), 유
관순전(柳寬順傳), 안중근전(安重根傳),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을 배웠다.
이병기는 전남(全南) 진도군(珍島郡) 군내면(郡內面) 출신으로 이임례가 처음 판소리를
배울 당시 40세쯤 되었는데 판소리, 가야금, 장고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의 판소리선생은 누
구인지 모르나 장월중선(張月中仙) 바디와 비슷하였다 한다. 그는 양상식(梁相植), 박보아
(朴寶娥) 등과 같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임례(李任禮)는 26세때 목포(木浦)에 가서 29세때까지 김상용(金相用)에게 춘향가(春香
歌)를 배웠다고 한다.
김상용(金相用)은 전남(全南) 장흥출신으로 당시 40여세가 되었는데 전남(全南) 보성(寶
城) 정응민의 제자라 한다.
이임례(李任禮)는 30세때 목포(木浦)에서 김흥남(金興男)에게 심청가(沈淸歌)와 흥보가
(興甫歌)를 배웠다 한다.
김흥남(金興男)은 분명치는 않으나 전남(全南) 영암(靈岩) 출신이란 말을 들은 것 같으며
누구 제자인지는 모르나 심청가는 정응민제와 비슷하고 흥보가는 박록주(朴綠珠)제와 비슷
하였다 한다. 이임례가 배울 당시 50여세이었는데 이임례가 40여세때 작고하였다 한다.
이임례(李任禮)는 33세부터 38세때까지는 쉬다가 그뒤 다시 판소리 공연활동을 벌였는데
43세때 전남(全南) 해남(海南)에 있었는데 성창순(成昌順)을 전북(全北) 부안(扶安)으로 모
시고 가서 심청가(沈淸歌)를 배웠다 한다. 45세때부터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1987년 11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한다.
1990년 11월에는 광주(光州)에서 국악경연 판소리 특장부 대상을 받았다 한다.
이임례(李任禮)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가야금산조와 춤도 배웠다 한다. 가야금 산조는 16
세때 진도에서 이병기에게 배웠고 뒤에는 성금련가락으로 바꿨다고 한다. 춤은 16세때 양태
익에게 한춤(무용기초)를 배웠고 북, 꽹과리, 장고 등 농악도 배웠다 한다. 이병기는 가야금
산조를 최일형에게 배운 것으로 보이며 한성기(韓成基)가락과 비슷하다고 한다. 진도에는
한성기(韓成基)가락 타는 이가 있다고 한다.
8. 전낙쾌(全樂快)
본 명 (本 名) : 전낙쾌(全樂快) 예 명 (藝 名) : 전명규(全明圭)
생년월일(生年月日) : 1942年 11月 3日 (경오생(庚午生)․男․63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서구(西區) 서(西)1동(洞) 264-25
본 적 (本 籍) : 전북(全北)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청량리(靑良里) 186
출 생 지(出 生 地) : 상 동(上 同)
전낙쾌(全樂快)는 12세때부터 17세때까지 전북(全北) 정읍(井邑)에서 공대일(孔大一)에게
춘향가(春香歌)를 배웠다.
18세때에는 정읍(井邑)에서 최막동(崔莫同)에게 설장고를 배웠다.
27세 때에는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 장고(長鼓) 반주악사로 수행하였다 한다. 그뒤 18년
동안 학원(學院)을 내고 후진을 양성하고 공연활동을 했다 한다.
1989년부터 광주시립국극단(光州市立國劇團) 반주악사로 봉직(奉職)하고 있다.
9. 정춘실(鄭春實)
본 명 (本 名) : 정춘실(鄭春實)
생년월일(生年月日) : 1943年 3月 15日 (갑신생(甲申生)․女․49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북구(北區) 운암동(雲岩洞) 69 운암Ⓐ 48동 104호
본 적 (本 籍) : 전북(全北) 남원군(南原郡) 운봉면(雲峰面) 권포리(權布里) 974
출 생 지(出 生 地) : 상 동(上 同)
정춘실(鄭春實)은 13세때부터 17세때까지 전북(全北) 남원(南原)에서 강도근(姜道根)에게
흥보가(興甫歌), 춘향가(春香歌)를 배웠다 한다.
18세때부터 광주(光州)에서 1967년 무렵까지 정광수(丁珖秀)에게 수궁가(水宮歌) 한바탕
과 흥보가(興甫歌), 심청가(沈淸歌) 몇대목을 배웠다 한다. 그때 정광수(丁珖秀)가 상경(上
京)하였으므로 그해(1967) 정광수(丁珖秀)에게 학습이 중단되었다 한다.
32세때에는 전주(全州)에서 오정숙(吳貞淑)선생을 모시고 100일 공부를 하였는데 이때 춘
향가(春香歌)를 배웠다 한다.
43세때에는 서울에 상경하여 정광수(丁珖秀)에게 춘향가(春香歌), 수궁가(水宮歌)를 배웠
다 한다.
46세때부터 광주시립국악원(光州市立國樂院) 수석단원(首席團員)으로 지금까지 봉직하며
창극(唱劇)을 출연(出演)하고 있다.
1990년 전북(全北) 남원(南原) 춘향제(春香祭) 판소리경창대회에 출연하여 장원을 한 바
있다.
10. 한애순(韓愛順)
본 명 (本 名) : 한애순(韓愛順)
생년월일(生年月日) : 1924年 12月 26日 (갑자생(甲子生)․女․69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북구(北區) 운암동(雲岩洞) 운암(雲岩)Ⓐ 307棟
203號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곡성군(谷城郡) 옥과면(玉果面) 옥과리(玉果里)
출 생 지(出 生 地) : 상 동(上 同)
한애순(韓愛順)의 심청가(沈淸歌)는 전라도(全羅道) 서편(西便)에서 전승(傳承)되어 오던
심청가(沈淸歌)로 순조(純祖)때 판소리 대명창(大名唱)으로 뒷날 김병익(金炳翼) 및 대원군
(大院君)의 총애를 받던 박유전(朴裕全)의 심청가(沈淸歌)를 이어 받은 것이다. 박유전(朴裕
全) 심청가(沈淸歌)는 그의 제자(弟子) 이날치(李捺致)와 정재근(鄭在根)에 의해 전승(傳承)
되었다. 이날치(李捺致)는 철종(哲宗)때 대명창(大名唱)으로 역시 대원군(大院君)의 총애를
받은 대명창(大名唱)이다.
이날치(李捺致)의 심청가(沈淸歌)는 그의 제자(弟子) 김채만(金采萬)에게 전승(傳承)되었
다. 김채만(金采萬)은 고종(高宗)때 대명창(大名唱)으로 판소리의 특이(特異)한 기예(技藝)
를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채만(金采萬)의 심청가(沈淸歌)는 제자(弟子) 박동실(朴東實)
에게 전승(傳承)되었고 박동실(朴東實)은 일정(日政) 때 명창(名唱)으로 그의 심청가(沈淸
歌)는 김소희(金素姬), 한애순(韓愛順)에게 전승(傳承)되었다. 한애순(韓愛順)은 김채만(金采
萬)제 심청가(沈淸歌)의 전바탕을 보유(保有)하고 있으며 다른 바디가 끼여있지 않고 또 한
애순(韓愛順)의 기예(技藝)는 매우 출중하여 김채만(金采萬)의 판소리의 특성을 모두 간직
하고 있다.
한애순(韓愛順)은 갑자생(甲子生)으로 1924年 12月 26日 전남(全南) 곡성군(谷城郡) 옥과
면(玉果面) 옥과리(玉果里)에서 출생(出生)하였다. 12세때 전남(全南) 창평(昌平) 지실마을
에 있는 박석기(朴錫基) 재실(齋室)로 가서 박동실(朴東實) 명창(名唱)에게 판소리를 배웠
다. 박석기(朴錫基)는 거문고 산조(散調)의 명인(名人)이다. 그는 동경제대(東京帝大) 출신
(出身)으로 고종(高宗)때 거문고산조(散調) 명인(名人) 백낙준(白樂俊)에게 거문고를 배웠던
거문고산조(散調) 명인(名人)이며 국악교육운동(國樂敎育運動)에도 참가했다. 일정(日政)때
전통문화(傳統文化)가 소멸되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그의 고향 창평(昌平) 지실마
을에 초당을 크게 짓고 명인명창(名人名唱)을 초빙하고 유능한 학도를 선발하여 국악교육
(國樂敎育)에 힘을 기울였다.
박석기(朴錫基)는 옥과(玉果) 한애순(韓愛順)이라는 소녀(少女)가 판소리에 재질(才質)이
있음을 듣고 12세때 창평(昌平)으로 불러들였다. 또 사범(師範)을 구하기 위하여 당시 여러
명창(名唱)을 불러 소리를 시키고 나서 박석기(朴錫基)가 취재하여 박동실(朴東實)을 사범
으로 정하고 한애순(韓愛順)을 배우게했다 한다.
한애순(韓愛順)은 12세때부터 16세때까지 4년간(年間) 박동실(朴東實)에게 판소리를 배웠
다. 이때 배운 것은 춘향가(春香歌)의 이별가에서 어사출도까지 배웠고 수궁가(水宮歌) 전
판, 심청가(沈淸歌) 전판과 적벽가(赤壁歌) 초앞에서 활쏘는데까지 배웠는데 수궁가(水宮歌)
는 뒷날 임방울(林芳蔚)제와 섞여졌다 한다.
17세때부터 21세때까지 박석기(朴錫基)는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에서 활동(活動)했다 한
다. 21세에 결혼했으나 24세때 파혼했다. 24세부터 3년간 임방울(林芳蔚) 창극단(唱劇團)에
서 활동(活動)했다. 29세때부터 7년간 광주국악원(光州國樂院)에서 판소리사범(師範)으로
일을 해왔고 35세 이후에는 개인강습소(個人講習所)를 설립하여 개인교수(個人敎授)로 일해
왔다.
38세때는 1년간(年間) 상경(上京)하여 박록주(朴綠珠)에게서 흥보가(興甫歌)를 사사(師事)
했다. 39세이후에는 다시 광주(光州)에서 개인교수(個人敎授)로 일하다가 1973年에 광주시
립국악원(光州市立國樂院)이 생겨서 지금까지 시립국악원(市立國樂院) 판소리사범(師範)으
로 일하고 있다.
1974年에 전라남도(全羅南道) 지방무형문화재(地方無形文化財) 보유자(保有者)로 지정되
었다.
한애순(韓愛順) 심청가(沈淸歌)는 박유전(朴裕全)―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박동
실(朴東實)―한애순(韓愛順)으로 전승(傳承)된 만큼 박유전(朴裕全)―정재근(鄭在根)―정권
진(鄭權鎭)으로 전승(傳承)되고 있는 이른바 강산(江山)제 심청가(沈淸歌)와 비슷한 점이 있
다. 박유전(朴裕全)제를 서편(西便)이라고 부르는 만큼 이 두 심청가(沈淸歌)는 서편(西便)
제 심청가(沈淸歌)라 할 수 있으며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
갑(宋萬甲)―박봉래(朴奉來)―박봉술(朴奉述)에게 전승되는 동편(東便)제 심청가(沈淸歌)와
이미 전승(傳承)이 끊어져 옛 음반(音盤)으로만 남아 있는 경기(京畿), 충청지역(忠淸地域)
의 심청가(沈淸歌)와는 많이 다른 특징(特徵)을 갖고 있을 것이나 박봉술(朴奉述)의 심청가
(沈淸歌)가 전판 채록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애순(韓愛順)의 심청가(沈淸歌)와 박봉술
(朴奉述)의 심청가(沈淸歌)와의 비교(比較)는 어렵고 다만, 정권진(鄭權鎭)의 심청가(沈淸
歌)와의 비교(比較)는 가능(可能)하다고 하겠다. 사설의 비교는 동편(東便)제 사설로 이선유
(李善裕) 오가전집(五歌全集)이 남아 있고 이창배(李昌倍) 가보집성(歌譜集成)에 실려 있는
강장원본(姜章沅本) 심청가(沈淸歌)가 있고 또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
書) 제5호(第5號) 판소리 심청가(沈淸歌)에는 정권진본(鄭權鎭本)이 실려 있다.
사설과 장단은 한애순(韓愛順) 심청가(沈淸歌)와 정권진본(鄭權鎭本), 이선유본(李善裕
本), 강장원본(姜章沅本)과 비교(比較)할 수 있으며 선율(旋律)은 오직 정권진(鄭權鎭) 심청
가(沈淸歌)와 비교(比較)할 수 있다. 김연수본(金演洙本) 심청가(沈淸歌) 창본(唱本)이 있으
나 이것은 김연수선생(金演洙先生)이 정응민(鄭應珉), 정정렬(丁貞烈), 송만갑(宋萬甲) 등
여러 판소리를 엮어 짜고 또 자신(自身)이 새로 사설을 지어 넣었기 때문에 비교(比較)대상
에서 제외(除外)되었다.
11. 한해자(韓海子)
본 명 (本 名) : 한해자(韓海子) 예 명 (藝 名) : 한송희(韓松希)
생년월일(生年月日) : 1942年 8月 22日 (기묘생(己卯生)․女․54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광주시(光州市) 동구(東區) 산수(山水)3동(洞) 516-43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강진읍(康津邑) 목리(牧里) 300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나주군(羅州郡) 세기면(細技面) 동곡리(東谷里)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59년부터 광주국악원(光州國樂院)에서 7년간 정광수(丁珖秀)에게
수궁가(水宮歌) 초앞부터 토끼 세상 나오는데까지, 적벽가(赤壁歌) 초앞에서 남방산 바람
비는데까지, 흥보가(興甫歌) 초앞에서 박두통 타는데까지, 춘향가(春香歌) 초앞에서 이별가
(離別歌)까지 배웠다고 한다.
7년후 1966년부터는 정광수(丁珖秀)가 서울로 이사하였으므로 광주(光州)에서 한애순(韓
愛順)에게 흥보가 초앞에서 끝까지 배웠고 공대일(孔大一)에게 적벽가(赤壁歌) 군사(軍士)
설음타령을 배웠고 성창순(成昌順)에게 심청가(沈淸歌) 초앞에서 끝까지 배웠다 한다.
1990년에 광주(光州)에서 심청가(沈淸歌) 완창발표회와 흥보가(興甫歌) 완창발표회를 가
졌다 한다.
현재 한해자(韓海子)는 광주(光州)에 있는 남도국악단(南道國樂團)의 단원으로 봉직하고
있다.
12. 김향순(金香順)
본 명 (本 名) : 김향순(金香順)
생년월일(生年月日) : 1955年 10月 24日 (임진생(壬辰生)․女․41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전남(全南) 여수시(麗水市) 미평동(美坪洞) 592-2
본 적 (本 籍) : 상 동(上 同)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영광(靈光)
김향순(金香順)은 전남(全南) 영광(靈光) 출신(出身)으로 여수국악원(麗水國樂院)에서 판
소리, 가야금, 무용사범으로 있다.
김향순은 12세때 2년간 전남(全南) 영광(靈光)에서 백남희에게 심청가(沈淸歌)를 배웠다.
14세때부터 7년간은 광주(光州)에서 공대일(孔大一)에게 심청가(沈淸歌)를 비롯한 판소리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그후 다시 공대일(孔大一)에게 판소리 심청가(沈淸歌) 전바탕을 사사
받았다.
13. 정홍수(丁烘秀)
본 명 (本 名) : 정홍수(丁烘秀)
생년월일(生年月日) : 1932年 9月 1日 (임신생(壬申生)․男․61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전남(全南) 여수시(麗水市) 미평동(美坪洞) 592-2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고흥(高興)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고흥(高興)
조선대학 학사출신인 정홍수는 어렸을 때 가친(家親)이 토반(土班)으로 가산(家産)이 유
족하여 명인명창(名人名唱)을 불러 연주하는 일이 많아서 이때부터 견문이 있었다.
16세때부터 6년간 고흥(高興)의 송(宋)의종 고수(鼓手)에게 판소리 기법(技法)을 배웠다.
송고수(宋鼓手)는 김연수(金演洙)의 소시적에 판소리 독공시(獨工時) 전용고수였다고 한다.
26세때부터 5년간은 벌교에서 윤(尹)석강 고수(鼓手)에게 판소리 기법(技法)을 사사받았
다. 윤(尹)석강은 법고 한량(閑良)으로 풍류(風流), 서화(書畵)에 능한 고수였다고 한다.
정홍수는 주로 윤석강 고수의 기법이론(技法理論)을 갖고 있다. 윤석강은 단가(短歌) 사
설을 많이 지었다 한다.
윤석강은 ‘일정한 장면을 읊을 때 스무장단이면 스무장단, 열장단이면 열장단 안에서 장
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장단이 한 장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또 ‘중모리에도 우조중모리, 계면중모리를 가려 쳐야 한다’고 했다 한다. 중모
리 첫박 궁은 북가죽의 한 가운데를 치고 중모리 열한박에서는 접궁을 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14. 박미홍(朴美洪)
본 명 (本 名) : 박미홍(朴美洪)
생년월일(生年月日) : 1938年 3月 7日 (무인생(戊寅生)․女․55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인제동(麟蹄洞) C지구(地區) 5통(通) 4
반 (班) 94호(號)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박미홍(朴美洪)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함께 하는 국악인(國樂人)이다.
판소리는 박봉술(朴鳳述)에게 배웠으며 판소리 다섯마당을 도막소리로 배웠다고 한다. 그
가 잘 부르는 판소리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적벽가(赤壁歌) : 초앞∼불지르는데까지
춘향가(春香歌) : 사랑가∼이별가
심청가(沈淸歌) : 전판
흥보가(興甫歌) : 집터 잡는데∼제비노정기
수궁가(水宮歌) : 토끼, 용왕(龍王)께 고하는 대목까지이다.
15. 박정례(朴貞禮)
본 명 (本 名) : 박정례(朴貞禮) 예 명 (藝 名) : 박향산(朴香山)
생년월일(生年月日) : 1925年 1月 23日 (을축생(乙丑生)․女․68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중앙동(中央洞) 2-7
본 적 (本 籍) : 전남(全南) 구례군(求禮郡)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구례(求禮)
박정례(朴貞禮)는 명창(名唱) 송만갑(宋萬甲)의 수제자(首弟子)인 박봉래(朴奉來)의 무남
독녀로 태어났다. 박봉래(朴奉來)는 박정례(朴貞禮)가 9세때 청진(淸津)에서 34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어려서부터 권번에서 가야금, 정악(正樂)을 배웠고 부친(父親)에게서는 판소리를 배웠다
고 한다. 그러나 부친(父親)에게서 배운 판소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14세때부터 17세까지는 서울에 올라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조농옥(趙弄
玉)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나 잊어버렸다.
17세때부터 구례(求禮)에 내려와 23세때까지 숙부되는 박봉채(朴奉彩)에게 판소리를 배웠
다. 박향산(朴香山)의 할아버지는 박(朴)만조이고 아버지는 5형제로 박봉래(朴奉來), 박봉채
(朴奉彩), 박삼채(朴三彩), 박봉구(朴奉九)(봉이), 박봉술(朴奉述)이었다. 박봉래(朴奉來)는
박향산(朴香山)의 아버지로 송만갑(宋萬甲)에게 판소리를 배워 대명창(大名唱)으로 꼽혔으
나 일찍 작고했고 박봉채(朴奉彩)는 한의(漢醫)로서 소리 행세는 안했으나 소리를 잘 알아
서 제자를 잘 가르쳤다. 박삼채(朴三彩)는 목이 좋아 소리를 잘했으나 빛을 보지 못했고 박
봉술(朴奉述)은 명창(名唱)으로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판소리 보유자(保有者)로 지정되었
다. 박향산(朴香山)은 구례(求禮)로 내려와 박봉술(朴奉述), 강도근(姜道根)과 함께 박봉채
(朴奉彩)에게 판소리를 공부했다. 이때 박봉래(朴奉來)가 공부하던 소리책으로 배웠는데 이
책은 박봉구(朴奉九)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박봉구(朴奉九)의 타계로 행방을 알 수 없다.
24세때는 김연수(金演洙)에게 판소리를 잠깐 배웠다.
박봉채(朴奉彩)에게는 심청가(沈淸歌) 전바탕, 춘향가(春香歌) 전바탕, 흥보가(興甫歌), 적
벽가(赤壁歌)도 대목대목 배웠다. 박향산(朴香山)은 가야금산조(散調)도 배웠다.
박향산(朴香山)이 소리한 것을 녹음한 것은 적벽가(赤壁歌)중 고당상(高堂上) 군사(軍士)
설음 대목, 심청가(沈淸歌)에서 망사대, 황성길, 눈 뜨는 대목, 그리고 가야금산조(散調) 전
바탕이다.
적벽가(赤壁歌) 중에서 고당상(高堂上)은 진양, 계면조로 되었다. 동편제 바디에 어긋남이
없다. 이 내 설음 들어라는 중중모리, 계면조로 되어 있고 심청가(沈淸歌) 중에서 망사대를
찾아서는 진양, 계면조로 되었고, 심봉사 돌아가는 대목은 중중모리, 계면조로 되었다. 뺑덕
주막 밖을 나와서는 대목은 중모리, 계면조로 되었다. 심봉사 목욕하는 대목은 중중모리장
단에 계면조로 되었다. 잔치끝에 심황후 우는 대목은 진양, 계면조로 되었다. 심봉사 아뢰는
대목은 중모리, 계면조로 되었다. 심봉사 눈뜨는 대목은 자진모리, 계면조로 되었다. 심봉사
춤추는 대목은 중모리, 계면조로 되었다. 여러 봉사 춤추는 대목은 중중모리, 계면조로 되었
다.
박향산(朴香山)이 연주한 가야금산조(散調)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구성되었고 진양은 우조, 계면조로 중모리는 계면조, 경드름(경조(京調))계면조로 중중모리
는 계면조, 평조 계면조, 자진모리 계면조, 평조―계면조, 휘모리 계면조로 구성되었다. 박향
산(朴香山)의 판소리는 박봉술(朴奉述)의 판소리에서 볼 수 있는 동편(東便)제 판소리에 가
까웠다. 그의 가야금산조(散調)는 성금연(成錦鳶) 가야금산조(散調) 바디에 가깝다.
16. 선농월(宣弄月)
본 명 (本 名) : 선농월(宣弄月)
생년월일(生年月日) : 1933年 8月 27日 (계유생(癸酉生)․女․60세(歲))
현 주 소(現 住 所) :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남정동(南亭洞) 560-16
본 적 (本 籍) : 상 동(上 同)
출 생 지(出 生 地) : 전남(全南) 순천(順天)
가(春香歌), 심청가(沈淸歌), 수궁가(水宮歌), 적벽가(赤壁歌)를 배웠는데 지금 장기(長技)는
춘향가(春香歌)의 이별가, 수궁가(水宮歌)의 토끼 용궁(龍宮)가는데, 심청가(沈淸歌)의 망사
대(望思臺)를 찾아서, 적벽가(赤壁歌)의 활쏘는 대목이다.
녹음한 것은 단가(短歌) 천하태평(天下太平), 흥보가(興甫歌)에서 흥보 집터잡는 대목이
다. 천하태평(天下太平)은 중모리 평조(平調)이나 계면조가 섞여있다.
흥보가(興甫歌)는
① 집터잡는데 박흥보가 좋아하고는 진양 우조이나 약간 계면이 섞여있다.
② 제비 날아드는데 겨울 동자(冬字) 갈거자(去字)는 중중모리 평계면조이다.
③ 흥보 제비 이별하는데 떳다 보아라는 진양 우조-계면조이다.
④ 흥보 제비 강남에 들어오는데는 중중모리-계면조이다.
⑤ 제비노정기 흑운 박차고는 중중모리-계면조로 짜여 있다.
선농월의 소리는 창(唱)도 좋고 부침새도 좋으나 성음(聲音)이 통속조(通俗調)이다. 지금
은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