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설교> 주님께 쓰임받는 사람 - 이영훈 목사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
이영훈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마가복음 11장 1-10절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생략)”
설교 한눈에 보기
1. 주님께 나귀 새끼를 드린 주인
나귀 주인은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2. 주님께 쓰임 받는 나귀 새끼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것은 겸손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신을 나타내지 말고 예수님만 높여야 한다.
3.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군중들
군중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영광의 메시아만 바라보았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예비되어 있다.
● ● ● 핵심 메시지
순종과 겸손으로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자.
● ● ●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나는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있는가?’
오늘은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생을 가장 의미있고, 보람되고, 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종려주일은 약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양하며 주님을 맞이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말합니다.
4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이 마지막 일주일을 굉장히 비중 있게 다루고 있고, 특별히 그 중에 마가복음은 전체의 3분의 1의 내용이 마지막 일주일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중요하고, 그 기간 중에서도 금요일에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사역에 정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주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주님께 나귀 새끼를 드린 주인
먼저 주님께 나귀 새끼를 드린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동네에 가서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 11:2)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그 나귀 새끼를 왜 가져 가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을 전해라.”
제자들이 가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귀 새끼가 매어 있었고, 그것을 풀어 끌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본 주인이 제자들을 향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는 거요?”라고 물었습니다(눅 19:33).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여 주신대로 “예, 우리 주님이 쓰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그 나귀 새끼를 내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막 11:6)
나귀는 당시 짐을 지어 나르기도 하고, 나귀를 통해서 필요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백성들의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아무런 반대의 표시나 이유를 묻지 않고 선뜻 주님께 내어 드렸던 것입니다. 주인은 순종을 통해 주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무조건 “예”,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길입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복이 임하고,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죄짓고 방탕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100세 때 얻은 약속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며 미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삭을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은 그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향하여 아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마침내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올라가 그 아들을 잡아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시고 예비해 놓으신 숫양을 통하여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삭이 아니라 그의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다른 길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이러한 순종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종 너머에는 축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은 순종으로 차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아멘”, “네”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머리로 따지면서 이것, 저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고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구원의 길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순종을 본받아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아 주님 앞에 희생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옆을 가보면 그들의 자녀들, 어린아이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가 그때 당시 마땅한 치료약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전염병과 풍토병으로 죽어 갔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병든 아이를 치료하고 돌아와 보니 자기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적인 희생 위에 우리 한국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130년 만에 이렇게 선교의 대국을 이룬 나라가 없습니다. 그것은 많은 희생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종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만 그 순종을 이루기까지는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릅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메콩강 빈민촌의 물새 선생님’으로 불리었던 김연희 선교사님의 두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캄보디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빈민촌 따뜰락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님입니다. 늘 아이들을 생각하며 하도 울어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젖어있는 새처럼 우신다고 하여 아이들이 ‘물새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녀가 대학교 2학년 때 단기선교로 잠깐 캄보디아 땅을 밟았는데 돌아오고 나서도 그곳의 불쌍한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1년을 계획하고 그곳으로 선교를 떠났고, 2006년도부터 지금까지 8년째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가보니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먹지 못해 굶주려 죽어가고, 여기서는 간단하게 약하나 먹고 치료받으면 고침 받을 수 있는 병이 들어도 아이들이 그냥 죽어갑니다. 그럼 매일 그 아이들을 끌어안고 울기만 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열심히 영어, 중국어, 캄보디아어를 공부해서 아이들에게 말과 글을 가르치고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워낙 위생적으로 불결한 지역이기 때문에 본인도 각종 질병에 걸렸습니다. 아토피성 피부병이 걸려 손가락이 다 갈라지고 피가 나고 또 폐결핵으로 숨쉬기조차 힘들고 옆구리가 아프고, 두 눈이 실명 할 위험에도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와서 치료받고 또 돌아가서 그들을 품에 안고 그들을 위해서 주의 사랑을 베풀고 나눕니다. 그래서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 따뜰락 마을이 지금은 행복한 마을로, 희망이 넘쳐나는 마을로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렇게 희생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 선교사님은 이와 같이 고백을 합니다.
“흙먼지를 날리며 교회로 달려오는 아이들은 오늘도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영양실조에 걸렸던 아이들의 볼살이 통통하게 오르면 그들에게서 절망 가운데 피어나는 희망을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물새 선생님입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렇게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몸이 병들고 약해진 것에도 조금도 염려하지 아니하고 온몸을 던져 헌신하며 주님을 위해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여러분 자신을 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나를 통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순종하고 쓰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삶 가운데 놀라운 일을 베풀어주십니다.
2. 주님께 쓰임 받는 나귀 새끼
둘째로, 주님께 쓰임 받는 나귀 새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막 11:7)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왕들처럼 말을 타고,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입성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쓰임 받는 나귀 새끼의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순수하고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있는 탐욕, 미움, 세상적인 생각과 교만을 내려놓고 죄의 모습을 제거해야 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여러분, 주님 앞에 준비된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싼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음식 찌꺼기가 있고 곰팡이가 슬어 있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아도, 깨끗이 씻겨 있을 때 그 안에 음식을 담고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주님 앞에 정결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린아이 같이 마음이 순수하고 순결하여 주님 앞에 준비된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또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처럼 호화로운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겸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왕이면서도 가장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의 일생은 겸손의 일생, 섬김의 일생, 희생의 일생, 낮아짐의 일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어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우리나라에 많은 일꾼들이 세워질 때 예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낮아져서 우리 국민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지도자들이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망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탐욕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탐욕이 들어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죄 짓고 방탕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토록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이 탐욕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가진 것에 관심을 갖다보면 더 많이 갖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시되 나누어 주는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움켜쥐고 쓰지 못하는 부자가 되면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삶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중앙일보에서 어느 교장 선생님의 집에 돈 17억이 숨겨져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밭에 100억이 넘는 돈을 묻어두었던 기사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것은 나누기 위해 주신 것이지 탐욕으로 더 끌어 모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섬겨야 됩니다. 예수님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러한 섬김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막 11:7)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등에 태운 나귀 새끼같이 그저 묵묵히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 일을 할 때 칭찬도 받고 대접도 받고 영광도 받게 되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서 받는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착각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갈 때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마치 자기를 환영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우쭐대고 어깨를 들먹거렸다면, 등에 타고 있던 예수님은 흔들려 잘못하면 떨어지게 되고 나귀는 쓰임받지 못하고 매를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할 때 여러분 모습을 나타내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여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에는 취미 없고 춤만 추다가 마음을 고쳐 미국의 명문 스탠포드대학에 장학생으로 졸업했던 조현영 형제가 두 번째 책 「나는 하나님의 가능성이고 싶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첫 번째 책「나는 한국의 가능성이고 싶다」로 유명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초청을 받아 TV에도 나가고 강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조현영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게 됐는데,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들이 “그 책을 절판해라. 당신이 당신 이름을 너무 나타내고 주님 이름을 나타내지 않는다”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자꾸 자기가 ‘내가’, ‘내가’하며 자기 자랑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를 하고 군대에 들어갑니다. 군대에서 보낸 시간은 낮아짐의 시간, 겸손해지는 시간, 깨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갔다가 진짜로 은혜를 체험하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일본에 가니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그 문화에 제가 당할 것 같아서 하나님을 더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학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문서답일 수 있는데, 구원을 경험한 후에는 먼저 자신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유학을 가든 어떤 삶을 살든 그 끝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모습들이 없다면 모두 허사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세요. 하나님의 빛이 통과하는 통로로 사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꿈꾸어야 할 참된 성공입니다.”
그가 겸손을 배울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날마다 넘치는 감사로 겸손히 나아갈 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군중들
셋째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군중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8-10)
예수님께서는 온 백성의 열렬한 환호성 속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즉 로마제국의 압제 속에서 해방시켜주고 참된 해방을 가져다 줄 그런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고난받는 메시아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 중에 승리로 오실 메시아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영광 가운데 승리로 오시는 메시아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메시야인 그분이 신적인 권능으로 로마를 무찌르고 승리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누리게 될 다윗의 나라와 그 영광을 기대하고 ‘다윗의 나라여!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은 십자가 고난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무리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을 생각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며칠 후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우리가 볼 때는 죽음을 향해가는 입성이요, 결국은 실패로 가는 입성 같았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죽음을 통하여 부활과 영생을 가져오는 위대한 승리의 입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러분, 지금 어떠한 길을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한 십자가의 길,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겸손과 희생과 낮아짐과 선교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의 만족, 나 자신의 기쁨, 나 자신의 성공, 나 자신의 축복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의 축복이 참된 축복이요, 예수님 안에서의 성공이 참된 성공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이 아닌 고난의 길을, 지배가 아닌 섬김의 길을, 자기의 이익이 아닌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절대로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아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고 기쁨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존경하고 가깝게 지내는 대구 동신교회 담임목사로 계신 권성수 목사님이 책을 한권 보내오셨습니다.「고통의 은총」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 책 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고통의 백화점이 은총의 백화점이 되다.’ 본인은 가난한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자랐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어 어린 시절 산에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다녔고, 죽으로 끼니를 연명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고향땅을 처분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판잣집 전세금만 남겨놓고 개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판자촌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러 나르고 꽁보리밥을 먹어가면서 허기진 배를 붙잡고 살았는데 결국 등록금이 없어서 고등학교도 못 다녔어요. 그리고 신문을 돌리면서 낮에는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면서 검정고시 학원을 다닙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가 늘 자기들을 위해서 새벽에 산에 올라가 기도한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대 갔다 와서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신학교에 가서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화장품 외판원을 하고, 또 서적을 판매하면서 그렇게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권성수 박사님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아주 열심히 공부하던 그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한국에 와서 총신대학교 교수로 기획실장까지 하다가 대구 동신교회로 갔는데 그분이 담임하고 나서 교회가 일곱 배로 성장했습니다. 고난 후에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때, 가난과 질병과 싸우면서 사모님이 아이를 낳지 못해서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하면서 ‘주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하고 주님께 항의 하듯이 기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결국 욥의 고백이 진리 중의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삶의 고비마다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에, 저의 인생은 ‘고통의 백화점’이 아니라 ‘은총의 백화점’입니다. 고통을 뒤집으면 주님의 은총만 보입니다.”
여러분,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 후에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내일의 모습, 축복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십자가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겸손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리고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들어간 그 모습 같이 우리의 모습이 감추어지고 예수님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닮아가고, 예수님의 귀한 일을 이뤄나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놀라운 일들이 우리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위에 넘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내가 일생 다 가도록 오직 예수님 위해 살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신앙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훈 목사
연세대학교 신학과(Th.B.) 연합신학대학원(Th.M.) 졸업
한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석사과정(Th.M.)
미국 템플대학교대학원(Temple University) 종교철학 석사(M.A.),
미국 템플대학교대학원 종교철학 박사(Ph.D.)
워싱턴순복음제일교회 및 순복음동경교회, LA나성순복음교회 담임
일본순복음신학대학 학장
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장
한세대학교 교수 및 기획실장/ 신학연구소장
미국 베데스다대학교 총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신학위원장
아시아태평양신학협의회(APTA) 신학위원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부회장
사단법인 국민희망실천연대 공동대표
한국교회희망봉사단 공동단장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직전회장
현 교회성장연구소 대표이사
현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