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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사 |
아버지께서 남기신 것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은 1998년 10월 31일(음 9월 12일), 2009년 올해의 아버지 기일은 10월 28일 밤이 된다. 벌써 11주기다.
그 동안 아버지께서 남기신 자료를 안고만 있다가 무엇인가 맺어야 할 필요가 있어「하은 고영묵의 유고집 하은집 河隱 高永黙 遺稿集 河隱集」이란 이름으로 책자를 하나 발간했다.
아버지께서는 1921년 9월 3일에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에서 나의 조부모인 고창석과 김태순 사이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22세에 충주박씨 절골 박필순 여사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으며, 어머니께서는 32세 되는 해 겨울에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는 다음해 2월 경주이씨 이종명 여사와 재혼하여 2남 2녀를 낳았으니, 자녀 아홉을 두셨다.
큰 아들 병균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아 퇴직하였으며 광주광역시에서 살고, 둘째 아들 병열은 한국전력에서 정년으로 퇴직하였고 대구광역시에 살며, 셋째 아들 병철은 한국통신(KT)에서 근무하고 있는 데,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산다. 넷째 아들 병권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다섯째 아들 병민은 충청남도 홍성군에 살면서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큰 딸 병덕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둘째 딸 혜숙은 제주도에서 살고, 셋째 딸 미란은 서울에서 살며, 넷째 딸 명애는 광주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우리 남매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지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나름대로 무척 성실하게 살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경기공업고등학교 섬유학과를 졸업하신 기술자였다. 장흥군청에 다니시기도 했고 장흥읍에서 비단 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셨다.
어떤 연유로인지는 모르나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광주로 나오셨고, 도시공장이라고 부르던 전남제사공장에서 기술직 직원으로 근무하셨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광주에 올라왔을 때에는 동명동에서 살았다. 여기서 살 때 어머니께서 세상을 하직하셨고. 우리는 도시공장 안에 있는 회사의 사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아니하여 아버지께서는 도시공장을 그만 두고 사업을 하셨다.
이때부터 우리는 셋방살이를 계속했었다. 월산동에서 살다가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아 지원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 집에서 베틀을 두 대 놓고 무명베 짜는 사업을 하셨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밑천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씀하셨다.
언젠가는 광주공업고등학교에서 강의도 하셨지만 이것도 얼마가지 아니하였다.
이러는 사이 우리는 자주 이사를 했었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많으면 방을 내 주려하지 않은 시기였기에 우리가 받는 고통은 매우 심각했었다.
이처럼 가난이 계속되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병덕이가 집을 뛰쳐나갔다.
나는 1968년 3월 군에 입대했고, 상동광업소에 취직했던 병열이도 1969년 군에 입대하였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혜숙이와 중학교를 다니던 병철이도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집을 나갔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미란이와 병권이, 아직 학교에 다니지 못한 명애와 병민이까지 가난의 고통을 겪어야 했었다.
내가 군 복무하는 중에 병덕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큰 병을 얻어 돌아온 병덕이는 나에게 집을 나간 것을 용서해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답장을 할 수 없었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이 지면을 빌어 병덕이에게 용서를 빈다.
‘병덕아, 사실은 네 편지를 받은 그 때 마음으로 용서했었다. 그러나 표현하지 못한 오빠를 용서하고 좋은 곳에 가라.’
1971년 군복무를 마친 나는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1973년 병열이도 군복무를 마친 후에 한국전력으로 옮겨 직장 생활을 했지만 집안의 형편이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장흥군 안양동국민학교에서 근무하던 때,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급히 올라간 나에게 “쌀이 없다.”고 하신 적도 있었다.
공군에서 복무하던 병철이는 기술직 4급을(옛날의 보통고시)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전역함과 동시에 금산 위성통신 지구국에서 근무하고, 몇 년 후 미란이도 체신부의 기술직에 합격하여 취직하게 되었다.
우리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병철이가 한국통신에서 시행한 미국 유학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여 미국연수를 다녀오고 미란이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아버지께서는 경기도 안양시1)로 이사를 했었다.
이곳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병균, 병열, 병철 삼형제는 주택청약예금에 가입하여 조금씩 모은 돈으로 안양시에 24평 아파트를 구입함으로써 비로소 안정된 주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이 집에서 몇 년 동안 사셨고, 이 집에서 운명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선조들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셨다.
내가 태어난 곳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고향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 하면, 우리들을 데리고 가시려 애를 쓰셨고, 추석과 같은 명절에나 제삿날이면 우리들에게 선조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얻어 먹이기 위해 형님댁에 갔다가 푸대접을 받았다는 연자시의 저자 만거 선조와 가장동 묘소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는 그의 아들 진해공 석겸 선조의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또 고려시대 9상서 12한림의 벼슬을, 그것도 한 세대에 배출한 명문거족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실 때에는 신이 나서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었다.
장흥부동면장을 역임하셨고, 부동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장흥읍장까지 역임하셨던 나의 조부 고창석高昌錫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때에는 우리들에게 소망이 되기도 했었다.
탐진강변에 500여m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상습 수해지구였던 장흥읍 예양리 일대를 홍수로부터 보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장흥읍에서 평화리까지 장장 2Km에 이르는 폭 8m의 도로를 중장비 하나 없던 시기에 순전히 인력으로 이루어냈다는 이야기,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양반과 상민 사이에 갈등을 병든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스럽게 해결했다는 이야기, 조부의 이런 업적에 대한 공적비를 세워주었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주시기도 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조부님의 지혜와 높은 덕망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친척 중에 조부의 도장을 도용해서 빚보증을 섰고, 이 일로 인하여 나중에 논을 서너 마지기를 잃었는데, 조부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하시었다는 말씀과 함께 우애하는 집안임을 강조하실 때에는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왜 자기 재산도 하나 지키지 못하셨는가?’
이런 것이 현재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원인이었구나, 하는 철없는 생각 때문에 가문에 대하여 또는 평생을 가난하게 사신 아버지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정직한 삶을 사셨고, 형제간에 우애하라고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이 아버지께서 사용한 공책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공책에 기록된 글을 읽다보니 생전에 하신 말씀이 귀에 생생하여 아버지께서 남기신 시 한편이라도 세상에 내놓아 빛을 보게 해드리는 것이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우리 가문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장흥 고씨의 시조 고을나 선조를 비롯해서 중시조 말로 선조 등 우리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온갖 지혜를 발휘한 선조들의 훌륭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었고, 임진왜란이란 비극적 국난을 당했을 때에 의병을 모집하고 나아가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60세 노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는 용기 있는 행동과 금산 전투에서 패하여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국가에 헌신한 제봉 선조와 그의 아들들의 모습은 참으로 위대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만거 선조의 연자시에서는 개인생활을 위한 가치관과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 공직자로서의 마음가짐 등 도덕규범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도 군데군데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선조의 피를 이어 받았기에 나 역시 교육자로서 충성스럽게 봉직하여 ‘회진초등학교 교사校舍 전면 개축 및 재배치 사업2)’을 확정하는 놀라운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연자시를 번역하면서 나의 실력이 참으로 부족한 것을 느꼈지만 연자시의 원문을 책자에 옮김으로 해서 언젠가는 연자시를 좀 더 명확하게 해석하고 자세하게 풀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작업을 한 것이다.
여기서「하은집河隱集」의 내용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본다.
제1부 가문家門의 기원起源
고씨 가문은 제주도濟州島에서 시작되었다. 고을나高乙羅( 高乙那로도 씀)선조께서 솟아오르셨다는 삼성혈三姓穴에 관한 내용을 시작으로 신라에 입조하여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탐라국의 성주星主로서 나라를 다스렸다는 이야기, 제주 고씨의 중시조中始祖와 10개 파조派祖의 이야기, 우리나라 문학의 태두泰斗이신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은상李殷相님이 써주신 제주고씨대동보濟州高氏大同譜서문序文과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선근李瑄根님이 써주신 대동보大同譜서문序文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공책에 필사해 놓은 것이다.
제2부 제봉전霽峰傳
제봉전은 나의 백부(고영국高永國)3)께서 번역해 놓은 것이다.
백부께서 번역한 내용 중에 현대 감각에 비추어 현격하게 벗어난 용어나 표현에 대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손질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대로 옮겼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말에 대한 해석, 글 속에 드러난 벼슬 이름 등에 대하여 간단하게 주석을 달았다.
이밖에도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소용돌이 속에서 제봉 선조의 개인적인 업적을 찬양하기 보다는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명함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제봉전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의 역사적 행적을 추가하였고, 제봉 선조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간단한 이력을 덧붙였다.
제3부 연자시 戀子詩
연자시는 만거萬擧선조께서 그의 외아들 석겸碩謙에게 보낸 오언고풍시五言古風詩 이다.
석겸 선조께서는 이 시를 항상 품에 품고 다니며 스스로를 경계하여 공직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셨으나 벼슬을 그만 두신 후 48세에 서거하시매 그 시는 낡은 대나무 상자에 넣어진 채 잊혀졌다. 이 시를 지으신 때로부터 80년이 지난 1832년(임진년)에 만거 선조의 증손자인 익진益鎭선조와 장남이신 제해 濟海선조4)께서 우연히 발견하시고 시가 쓰인 낡은 종이를 오려 다른 종이 위에 붙이는 등 시구詩句와 절節을 다시 편집하고 그에 익진, 오진五鎭, 의진義鎭 세 분께서 서문과 오언율시五言律詩를 각각 지어 [戀子詩集]이라 이름한 책으로 남기셨다.
그러나 이 시집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고, 이 시집을 필사한 책자가 144년 동안 나의 백부(高永國)가家에 음장陰藏되어 온 것을 1976년(병진년) 5월에 백부님께서 1차 번역하셨다가 다시 고쳐 번역하신 것이다.
그러나 백부님께서 번역하신 글은 선뜻 이해하기도 어렵고 시를 다시 편집했던 탓에 앞뒤가 맞지 않아서, 내가 다시 이를 직역直譯하고, 부득이 한 경우에는 본디의 의취意趣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괄호 속에 의역意譯하거나 단어의 뜻에서 부연 설명하였다.
필사본의 자체字體도 반자半字나 초서草書 또는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아서 동일한 음音이라도 맞는 자체字體를 찾아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 또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처남 강상구姜尙求5)님의 도움을 받아 번역했는데, 이 내용을 백부께서 번역하신 [번역飜譯Ⅰ] 뒤에 [번역飜譯Ⅱ]로 하여 붙였다.
만거 선조의 증손자이신 익진, 오진, 의진 3형제의 연자시 서문과 오언시 또한 백부님께서 번역하신 것[번역飜譯Ⅰ] 뒤에 원문 하나하나에 현토懸吐를 달아서 다시 번역한 [번역飜譯 Ⅱ]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연자시와 관련이 있는 인물 만거, 석겸과 신겸 선조의 가계를 간략하게 밝혔고, 백부께서 지으신 진해공鎭海公 석겸碩謙선조의 비문 내용을 그대로 추가했다.
제4부 하은河隱의 유작遺作
생활이 조금 풀리자 우리 형제들도 몇 차례 여행을 다녀왔었다. 제일 먼저 우리의 뿌리인 제주도를 다녀왔고, 다음으로 경주 불국사도 다녀왔다.
이런 여가에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을 생각하며 지은 한시를 보여 주시면서 뜻을 풀이한 일도 있었고 선조들의 내력을 담은 정형시를 나에게 주시면서 음을 붙여 노래를 만들어 보라는 요청도 하셨다.
이런 작품이 작품으로서 훌륭한 것도 아니고 그 수효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남기신 것이기에 한 곳에 모았다.
또 이 책자를 읽어 가면서 독자는 글 속에 등장한 인물 즉 선조들이 나와 어떤 관계인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승을 간략하게 밝혔다.
또 나의 조모(영광 김씨 태순)께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을 때, 당신의 재종질녀 되는 고효덕高孝德6)(예명藝名 고단高煓)이 지은 제문도 함께 실었다.
이런 작업을 하다 보니 아버지께서 세상에 매우 소중한 것을 남기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몇 편의 글을 남기셨다.
또 우리들에게 형제간에 우애하라는 가르침을 교훈으로 남기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남기신 것이다.
동생이 많다는 것 더구나 가난한 가정에서 가족이 많은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다.
아침이면 어머니께서 밥상을 차리시는데 밥을 한 그릇씩 방안으로 들이 밀었다가는 난리가 난다. 밥그릇을 먼저 받은 사람은 다른 식구의 밥이 방에 다 들어오기도 전에 먹어버리고는 상 위에 놓인 반찬 그릇도 함께 비워버리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운동화 밑창이 너덜거리면서 발가락이 들어나도록 신었다. 운동화를 실로 꿰매거나 새끼줄로 묶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헤어진 책가방 사이로 책이 빠져 나가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된 기억도 있었으며, 다 헤진 교복을 본 친구 어머니께서 자기 아들의 교복에 내 이름표를 달아주시며 갈아입으라고 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 친구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 사랑을 베풀어 주신 친구의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우리들은 그렇게도 구차한 가정에서 살아왔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8남매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도 강조하시던 일을 「하은집」이란 이름의 작은 책자에 담아내게 된 것 역시 아버지께서 세상에 자녀를 남기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이 남기는 것 중에서 자녀를 남기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것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고, 앞으로 더 잘 이어가기를 바라면서 이 책자를 발간한다.
2009년 아버님 서거 11주기에 즈음하여
아들 秉均
1) 경기도 안양시 안양2동 839-6
2) 회진초등학교 연혁지(2000학년도 ~2007학년도). pp64-65
3) 서울 약대를 졸업하셨고, 광주에서 남성약국, 장흥으로 내려가 삼성약국을 경영하시다가 실패하였고, 나중에 셋째아들 병옥의 도움으로 수강약국을 경영하셨다.
4) 이분이 우리 집안(아버지 고영묵)의 직계가 되심
5) 전남대학교 행정학 박사과정 수료, 목포, 서광주, 북광주전화국장 역임, 한문연구가. 시인이며 수필가로 등단하여 활동 중
6) 전주 김씨 종가의 종부로 시집갔으며 언젠가 대한민국 유명한 종가 종부들의 모임을 주선했다는 말도 들은 일이 있다. 문학적으로 규방가사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어서 제문의 다음에 간단한 약력과 ‘평화사시사’를 실었다.
첫댓글 나의 조모(영광 김씨 태순)께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을 때, 당신의 재종질녀 되는 고효덕高孝德6)(예명藝名 고단高煓)이 지은 제문도 함께 실었다.
위 원문 중에서
'고효덕'은 '고덕'으로
'예명 고덕'은 '예명 소고당'으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