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의 역사와 함께
하정숙
1. 출생과 가정배경
나는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에서 1960년 4월 25일에 1남 7녀 중에 4째 딸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삼촌 등 14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아버지께서 건축자재 판매업을 하셨다. 유리, 시멘트, 합판 등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재들을 취급하였는데 장사가 잘 되었다. 그 시절은 경제적으로 모두 어려웠기에 우리집과 인연이 있는 친척이나 지인의 자녀들이 가게 일꾼으로 들어와 함께 지내었다.
지금 그 때의 아버지가 얼마나 힘겹게 사셨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아버지로만 살 수 없는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고모와 삼촌은 결혼해서 분가하였다. 아버지는 동생들의 공부와 살 집까지 마련해 주어 오빠와 형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애쓰셨다. 가까운 친척들이 돈이 필요할 때 아버지를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빌려가서 잘 갚지도 않았다. 고모와 고모부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보증과 사업자금을 요구하여 우리 가족을 힘든 상황으로 내몰았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하였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만을 위하는 아버지이길 원했는데 환경이 그렇지 못했다.
2. 모녀협조와 입교
나는 엄마의 영향으로 통일교회에 입교하였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너무나 힘들고 고되었다. 할머니가 며느리인 우리 엄마를 심하게 시집살이 시켰다. 고된 시집살이로 엄마는 화병이 들었고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집 길 건너에 살고 계시는 이차남 권사님께서 엄마를 살려보겠다며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허락받은 권사님은 엄마에게 참부모님을 소개하고 믿겠다면 치료해주겠다고 하셨다. 엄마의 친정은 모두 예수를 믿는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살겠다는 의지로 믿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차남 권사님은 매일 우리집을 방문하시어 신령으로 치료하며 말씀을 전하셨다. 그 결과로 엄마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하나님 뜻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하셨다. 엄마는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셨다. 아침 일과를 마치면 이차남 권사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그날의 목적지로 가셔서 사람을 만나고 말씀을 전하였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니 아버지로부터 핍박이 심하였다. 그렇지만 엄마는 흔들림 없이 걸어서 50분 거리에 있는 전북교구 본부교회에 다니며 새벽기도와 정성을 들였고 가정에 충실하였다.
엄마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크셨기에 가족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도 외로운 길을 홀로 가셨다. 매일 가정 방문하며 말씀을 전하였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위해 저녁을 차리셨다. 나는 그러한 엄마가 안됐고 안타까웠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하면 엄마의 힘을 덜어드릴까?’ 하는 생각에 집안 청소를 하였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쌀을 씻어놓아 저녁밥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엄마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정리하고 저녁 밥상을 차리도록 도왔다.
엄마는 밤낮으로 기도를 하셨다. 나는 엄마의 기도 소리에 잠을 깨곤 하였는데, 하늘을 향한 흐느낌이 이어지는 기도였다. 우리 형제는 엄마 따라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그래서 모두 성화시절을 보냈다. 나는 기전여자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1972년 3월 2일 교회에 입회원서를 제출하였다.
3. 영적 역사와 체험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큰언니가 많이 아파서 전주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을 3번을 받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해결할 수 없기에 퇴원을 하여 집에 머물게 었다. 큰언니가 집에서 “예쁜 우리 정숙이 내가 얼른 회복되어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해야 될 텐데.” 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새벽에 언니가 저세상에 가게 되었다. 엄마는 언니가 눈을 감기 전 엄마에게 “정숙이 얼굴 한번 보고 싶다” 하기에 “정숙이는 자고 있단다.”고 하니 그길로 눈을 감았다고 전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넷째 딸에서 셋째 딸이 되었다.
아침이 되어 엄마의 통곡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 언니의 관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언니가 ‘정숙이 보고 싶다’ 하였으니 마지막으로 너만 보도록 해라.”고 하시어 관을 열었다. 반듯하게 누워있는 언니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언니는 집을 떠났고 화장을 하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왔는데 아버지가 하염없이 우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엄마는 언니가 한 번 입었던 꽃이 달린 하얀 니트 반팔티를 주며 입으라 하여 내가 받았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다. 집에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화장한 언니가 합판더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온 몸 여러 곳이 타서 거뭇거뭇했고, 머리는 평상시의 긴 머리였고, 손톱은 타서 까맣고 길었다. 정말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 문 열고 들어서지 못하고 뒷걸음질 쳐서 도망갔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구불구불 달려 친구 집의 철문을 마구 두들기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언니가 따라오다가 친구 집에서 사람이 나오니 순식간에 없어졌다.
잠이 깨어 너무 생생하여 “엄마”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가 달려와 왜 그러냐고 묻기에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엄마는 단호하게 언니 영혼에게 꾸중하였다. 다시는 오지 말라 하시며 기도하셨다. 그 다음날 밤에도 또 꿈에 언니가 나타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도망을 다니다가 깨어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삼일 째 되던 날 밤에도 꿈에서 언니가 “같이 가자.”라고 하기에 싫다고 하며 도망가니 계속 따라왔다. 또다시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렇게 큰언니는 사흘간 나타나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평온한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였다. 이차남 권사님께서 내 배를 만져보셨는데 뭐가 단단한 돌처럼 굳어 있다고 하셨다. 영계에 간 언니 증상과 똑같았다. 권사님이 하나님만이 이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살고 싶으냐?”고 나에게 물으시기에 살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권사님이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를래?” 하시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권사님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다짐하여라.”하시기에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더니, “하나님과의 약속이니 꼭 지켜라.”고 하셨다.
권사님이 매일 오셔서 안수와 기도로 치료하였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자 돌처럼 딱딱한 위가 부드러워지면서 밥도 먹게 되고 회복이 되어 정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그러면서 엄마와 심정 일체가 되었고 하늘 길을 가시는 엄마를 더욱 협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이 자랑스러웠는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셨다.
나는 한국무용을 전공하여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전주의 집을 떠나 광주에서 하숙을 하다가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게 되었다. 자취방으로 이사한 날 자기 위해 누웠는데, 방문에 시커먼 그림자가 보이며 그 물체가 방으로 쓱 들어왔다. 아직 눈을 감고 있지 않았는데 꿈도 아닌 현실에서 이 집에 머물고 있는 영인과 대면하게 되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힘으로 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 순간 참부모님이 떠올라 “아버지!”하고 부르는데 소리가 안 나왔고, 또 불러보지만 소리가 안 나왔다. 그래도 또 세 번째로 부르는데 목소리가 나오면서 그 영인에게서 풀려났다.
다음날 밤이 되어 자려고 하니 또 그 상황이 일어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찬송을 하고 원리강론을 읽고 기도를 하였다. 불을 끄고 누우면서 원리강론을 가슴에 품었다. 그런데도 시커먼 그림자가 내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다시 아버지를 세 번 부르고 풀려났다.
셋째 날에도 같은 현상이 반복될 것 같아 목에 원리강론을 놓고 누우니 영인이 머리를 감싸고 짓누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세 번 부르고 다시 풀려났다. 넷째 날에는 원리강론을 옆에다 두고 누웠는데 사람 몸을 한 영인이 나를 덮쳐 성적 행위를 하였다. 그 순간 ‘이건 영적 타락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에 비비고 있는 영인의 머리를 잡아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자 풀려났다. 해와가 영적 타락을 하였다고 들었는데, 이 경험으로 영적 타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무섭고 징그러웠다. 그날 밤은 불을 끄고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밤새 불을 켜고 있었다.
다음 날에는 더 이상 자취집에서 있을 수 없어 저녁에 축복가정 친구의 집에 갔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성염으로 성별해야한다 했다. 그날 밤은 친구 집에서 보내고 성염을 받아와 온 방을 구석구석 성별하니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새벽 정성을 들여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는데 누군가 나를 못 일어나게 계속 방해하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 시도하니 풀려나서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에 멈춰있었다. 시간을 알 수 없으니 바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로 향하였다. 교회에 가는 길은 가장 번화가인 길을 통과해야 되는데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가는 중에 누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소리를 크게 질렀다. 잠시 후 호루라기를 부르며 순찰하고 있는 경찰이 달려와서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어느 날 지도교수가 부르기에 갔더니, 법과대학의 전임강사가 내가 마음에 든다고 우리학과 교수에게 찾아왔었다고 했다. 자기 여자로 택하였으니 잘 부탁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너무 놀라고 황당하였다.
그 후 그 전임강사가 내게 찾아왔다. 어느 날 나를 봤는데 첫눈에 반하여 나에 대한 신상을 알아보고 마음을 정하였다고 했다. 연속극에 나오는 남자친구처럼 온갖 정성을 다하며 다가왔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시험 기간에는 어려운 과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개인지도를 하였다. 집을 떠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도와주니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일과를 점검하며 나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졌다. 나는 통일교인이고 참부모님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기에 그에게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자기는 교회에 다닐 것이고 나와 축복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그 교수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고 구렁이보다 더 징그러워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날마다 문 앞에 와서 받아주라며 애원하곤 하였다. 인간적으로는 안 되었지만 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문을 잠그고 나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대학 4년 동안 학업과 원리연구회 활동을 충실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쩌다 친구의 미팅 주선에 참가하여 남학생을 만나기도 하고 파티장에 파트너로 가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영계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대가 나를 향해 흑심을 품게 되면, 내가 길을 갈 때 구두굽이 부러지거나 남학생을 만나더라도 내 목소리가 안 나와 벙어리가 되기도 하였다. 함께 식사를 하면 체하여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럴 때에 집에 가게 되면 엄마는 이미 알고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셨다. 내가 “엄마, 나 아파”하면 방으로 들어와라 하셨고, 하나님께 다 고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다. 그때, 내가 다 고백하고 잘못하였다고 빌고 진심을 다하여 뉘우치면, 그때에야 엄마는 하나님께 용서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하셨다. 엄마와 내가 눈물로 회개하며 다시는 세상 놀음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하면, 엄마의 말씀이 이어지고 안수를 하셔서 치료가 되었다. 대학 4학년 때에 약혼하기 전까지 여러 남자들이 나에게 호감을 보였었는데, 그 때마다 영계가 역사하여 나를 지켜주었다. 그렇게 대학시절에는 영계가 어린 나를 보호한다는 느낌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였다.
4. 약혼과 축복
나는 1981년에 약혼을 하였다. 나의 약혼과 축복은 엄마의 협조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4학년 1학기에 중학교에서 교생실습 중이었다. 구리시의 수택리 수련소에서 매칭이 있으니 서둘러 가라는 황철하 학사장의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실습하는 중학교의 허락을 받아 수련소로 향했다.
매칭이 이루어지는 첫날 참아버님께서 목회자를 중심으로 짝을 맞춰주셨다. 그리고 국제 매칭도 하셨는데 나는 키가 작아 국제매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었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국제 매칭을 원하는 사람 일어나라 하셨다. 여러 명이 일어났는데 나를 보시는 아버님은 기뻐하시며 나의 양 어깨를 잡고 반갑게 힘을 주어 흔들며 “어디 갔다 이제 왔냐?” 하시며 “너, 참 좋다, 좋다!”고 하셨다. 나를 알아보시는 아버님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내 신랑은 원리연구회 학사장이었다. 약혼을 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신랑을 소개하여야 하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알 수 없어 염려하며 3일 금식기도 정성을 들였다. 금식 3일째 되던 날 꿈에서 아버지가 마음의 문을 조금 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엄마와 이차남 권사님은 잔치상을 차려놓고 신랑을 아버지에게 소개하였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4학년 2학기에 원리연구회에서 주말 1박 2일 캠프를 구상하였다. 광주시내의 원리연구회 학사에 모여 계획을 세우고 다음날 출발하게 되었다. 학사에서 나와 버스를 타려하는데 갑자기 눈이 안 떠지고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서연숙 언니를 붙들고 같이 버스를 타고 자취집에 왔다. 언니는 걱정이 되었는지 그날 밤을 함께 보내줘서 다행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눈이 회복되지 않고 눈을 뜰 수 없어서 캠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월요일에 눈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학교에 갔다. 학교에 들어섰을 때 캠프에 가지 않은 후배 회원을 만났다. 그가 나에게 소식 들었냐며 회원들이 캠프에 가는 도중에 트럭을 얻어 탔는데 그 트럭이 전복되어 2명이 죽고 다른 회원들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였다. 병원에 가보니 모두 누워있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새롭게 영계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잠시 내 눈을 멀게 하여 사고를 피하게 하는 영적 역사에 감사드렸다.
4년 동안 영계의 협조를 받아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후 원리연구회 6기 순회전도단에 입단하였다. 원리연구회 6기 순전단에는 전국에서 모인 인원 28명으로 출발하였다.
1982년 8월에 6기 순전단을 수료하고, 9월에 발령받은 임지가 협회 교육부였다. 6000가정 축복을 받은 여성들은 이미 임지에서 전도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순전단 수료 후에 전도대원으로 합류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본부교회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가끔 한남동 공관에 가서 청소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참부모님께서 쓰시는 물품보관 공간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축복식 때에 쓰신 금색 왕관이 놓여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버님 왕관도 써보고 어머님 왕관도 써봤는데 엄청 커서 머리 전체가 쑥 들어갔다. 왕관을 벗어 제자리에 놓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청소를 하였는지 마무리하고 교회에 돌아왔다. 머리 통증이 너무 심하기에 그냥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실에서 정성들이는 권사님을 찾아갔다. 전후 사정을 말씀 드리니, 감히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왕관을 쓴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셨다. 권사님이 3일 금식을 해야 풀릴 것이라고 하셨다. 잘못을 회개하며 3일간의 정성 기도로 통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참부모님의 위대하심을 크게 체험하게 된 놀라운 역사였다.
본부교회의 전도사로 있다가, 세종문화회관 뒤에 비디오선교센터가 생기면서 그곳으로 발령받았다. 협회 본부 교육부에 있었던 순전단 동료 2명도 함께 일하게 되었다. 전도대원들이 전도대상자를 인도하여 센터에 오면,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비디오로 원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매일 청파동에서 비디오 센터로 출근하게 되었고 전도대원 활동기간을 수료하게 되었다.
5. 조상의 협조와 출산
1983년 11월 말의 수료를 앞두고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하여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시골집의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었고 안방 앞쪽에는 마루가 있었다.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백발에 상투를 틀었고 흰 수염이 달린 노인들이 안방에 가득 앉아있었다. 대청에는 조금 젊은 분이 한 쪽에 누워있었다. 마루에는 사과와 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내가 과일을 보고 깜짝 놀라니 신랑이 이 과일은 당신 것이니 다 먹으라고 하였다. 그 때 내가 왜 저분은 누워있느냐고 물으니, 그 분이 “난 아파.”라고 하였다.
그 꿈을 꾸고서 비디오선교센터에서 근무하는 분 중에 꿈을 잘 풀이하는 분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 분이 “아들 낳겠어. 태몽이야.”라고 하였다. 아직 가정을 출발하기 전인데 태몽을 벌써 꾸느냐고 물으니 미리 꾸기도 한다고 하였다. 1983년 12월에 신랑과 함께 살림을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하게 되었고, 남편의 시골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꿈에서 봤던 집의 구조와 꼭 같은 집이었다. 그리고 아프다며 누워있던 분은 시아버지였고 남편이 7살이었을 때 돌아가셨음을 알았다. 조상님들께서 큰 아들을 점지해 주신 것이었다.
신혼살림은 잠실에 있는 석촌호수 옆 아파트에서 출발하였다. 그곳에서 5년을 전세 살고 목동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게 되었다. 아파트 분양 신청 당시 접수자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있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우리가 당첨되기 쉽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당첨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정말 당첨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1988년 올림픽 경기장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그 이후로 둘째가 만삭일 때 입주하였다. 꿈에 넒은 들판에 꽃이 무수히 피어있는데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꽃을 꺾어 손에 들고 있었다. 깨어나서 이것이 태몽이고 하늘이 딸을 허락했음을 알았다. 딸을 갖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1988년 12월 2일에 딸을 충무로 있는 제일병원에서 출산하였다.
둘째로 태어난 딸은 순한 양처럼 누가 있든 없든 혼자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며 자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숨 쉬는 것이 힘들어 보였고 보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였다. 아이에게 큰 탈이 났다고 여기며 병원에 갔는데 선천적으로 심장이 나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기를 안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어떤 할머니가 경상도 억양으로 “어디가노?” 하고 묻기에 소아과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병원에 가봐야 소용없다.”고 하였다. 별 이상한 할머니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어제와 다른 병원에 갔는데 똑같은 의사의 소견이었다.
아기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애처롭고 불쌍했다.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시 다른 병원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제 그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같은 질문을 하여서 똑같이 병원에 간다하니, 할머니가 가봐야 소용없는데 가지 말라고 하셨다. 답답한 심정이었기에 “할머니 이야기 좀 해요.”라고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는 통일교인이 아닌 영통인을 좋아하지 않아서 우리집으로 가자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옆집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자기 집에서 원인을 들어보자고 하였다. 그 할머니가 향주를 만져보더니 아기가 종이를 많이 먹어 목에 종이가 부풀어 다 내려가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할머니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하기에 희망이 생겨서 기뻤다.
할머니는 신내림을 받고 정성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정성들이는 동안에 부정타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의 병도 고치면 안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철을 탔는데 간질 환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할머니는 벌을 받아 몸이 오르라들어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 몸으로 7년을 살고 풀려나서 생계를 위해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청소부로 들어왔던 것이다. 자신의 임무는 병 고치는 신을 모시고 있는데, 첫 환자는 남자를 봐야한다고 하였다. 우리 아이는 여자이기에 두 번째로 보기로 하고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우리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다시 건강을 찾은 우리 딸을 대하니 정말 좋았다.
할머니에 대한 믿음이 생겨 우리가족을 맡기게 되었다. 매일 청소일을 하시면서 집에 들러 병을 고쳤다. 나는 오후가 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과 몸의 염증이 낫지가 않아 많이 힘들었는데, 할머니의 지시대로 그 원인을 찾아 해결을 보니 그 또한 기적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을 살피시고 할머니를 보내주셔서 우리가족의 건강을 회복하게 해주셔서 감사했다. 두 달 정도 우리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나들었으니 주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청소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어 미안했다.
그 때에 남편은 미국의 통일신학대학원에 유학을 가야하는데 망설이며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 할머니께서 단호히 가야한다고 하시며 그래야 우리가족 모두 좋아진다고 하였다. 남편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유학과 출국을 준비하였다. 우리 부부는 헤어져있어야 되는 아쉬움에 진한 사랑을 나누었고 남편은 출국하였다. 남편이 일요일에 떠나고 월요일에 나는 피임기구를 병원에 가서 제거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이 덜커덩 하였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기에 아니기를 바라며 의사에게 문의하였더니, 정자는 사정 후 1주일까지 살아있어 수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걱정하며 잠을 잤는데 꿈에서 할머니가 쓱 들어오시기에 배를 보이며 “여기에 아기가 있는지 만져보세요.”라고 하니, 나의 배를 만지며 “여기 아기 있다.”고 하는 꿈을 꿨다. 꿈이 현실이 되었다. 할머니가 방문하시어 “흥선 엄마 임신하였나?” 하시며 들어오셨다. 그러면서 꿈에서 어느 집으로 아기씨가 쏙 들어오는 것을 봤다고 하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당신의 며느리들에게 물어보고 아니라고 말하기에 우리집을 확인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나도 꿈 이야기를 하며 아기가 진짜 있는지 궁금했다. 할머니가 내 배에 손을 대보더니 아기가 있다고 하였다.
내가 아기를 낳지 않기 위해 피임을 했었는데, 나의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 할머니는 조상님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내가 아기를 가지지 않으려고 하니 조상님들이 총동원하여 역사하여 이 아이를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상님들이 주셨다니 이 아이가 이 세상에 나와야하는 뜻이 있으리라고 여기며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정부가 산아제한을 강조하였다. 자녀를 셋째까지 낳는 것을 세상은 환영하지 않던 시대였다. 더구나 나는 첫째와 둘째를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하였으므로 셋째를 원하지 않았는데, 임신이 된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 모두 미리 성별을 가르쳐주셔서 이름을 지었다. 셋째도 궁금하여 하나님께 성별을 알려주시라고 기도하니 남자 성기를 크게 보여주셔서 사내아이임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떨어져 있으면서 많이 외롭고 힘들었는데 셋째아이가 생겨 낳고 키우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남편 유학 중에 홀로 아이 셋을 키우기가 힘들었고 교회에서도 소외되는 느낌이어 외로웠다. 그런 마음을 하늘도 아셨는지 꿈에서 참부모님께서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우리 자녀 셋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시고 손도 잡아주셨다. 참부모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어 그 뒤로 외롭지 않았다.
6.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해원
나는 어려서부터 예시적인 꿈을 잘 꾸었다. 첫 아이를 낳고 돌이 지난 시점에 꿈을 꾸었는데 우리집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면서 새까만 까마귀 떼들이 집으로 무섭게 들어왔다. 거실에 시어머니가 서계셨는데 온전한 모습이 아니어서 놀라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 후로 시어머니와 갈등이 고조되었고 함께 사는 것이 숨이 막혔다. 친정엄마가 왜 첫째 아들이면 절대 만나지 마라는 당부의 이유를 실감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홧병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우리집을 방문하였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부탁이 있어서 오게 됐다고 하였다. 시아버지에게 드릴 상을 차리라고 하여서 상을 준비하였다. 할머니가 시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드리라고 하여서 그대로 했다. 시아버지는 할머니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다. 영계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까워 당부하러 왔다. 며느리가 착한 것 같은데 조금만 참으면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며 잘 참아주기를 당부하셨다. 만일에 여전히 변화가 없으면 무서움을 주겠다고 겁을 주셨다.
그 이후로 노력을 하였지만 시어머니를 마주대하기만 하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몸부림쳤고 남편에게 애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결국은 모든 고통은 나의 몫이었다. 시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기지 못하는 나는 무서운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지옥처럼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암흑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1995년 청평 역사가 시작되면서 지상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빛이 보였다. 친정 엄마가 먼저 대모님을 뵈었는데 대모님께서 이르길 빨리 딸을 청평으로 데려오라고 하셔서 청평 수련소에 수련을 받으며 대모님을 뵙게 되었다. 대모님께서 나를 대하시더니 “너 그동안 어떻게 견디었니? 도저히 너의 의지로는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그 고통을 해결해줄게께.”라고 하셔서 나는 놀라웠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를 몸서리치게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기에 괴로웠는데, 대모님께서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셨을 때 큰 위로가 되었다.
대모님은 조상의 얽힌 사연을 들려주셨다. 시어머니에게 와있는 영은 사대부 안방마님이었고 며느리인 나에게 있는 영은 마님 집에서 종살이하던 하녀였는데, 서로 원한이 깊어 후대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만난 것이라고 하셨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물로 회개하며 열심히 청평역사에 참여하여 타락성을 씻어내고자 노력하였다.
청평수련원에서 제2차 40일 수련에 참여하였다. 이기심과 악령을 씻어내기 위해 열심히 수련에 임하였다. 어느 날 새벽 눈을 떴는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둘러쓰고 있었다. 꿈도 아닌 눈뜬 상태에서 내 몸에서 개미알처럼 작은 것들이 무수히 빠져나가 냇물 흐르듯이 흘렀다. 그러더니 온갖 흉측한 형상을 한 인간들이 줄지어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때에는 화장실이 숙소에서 한참 떨어져있었다. 새벽 2시 정도에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영인이 화장실 문을 여기저기 부서져라 두드리는 것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뛰었는데 더 크게 두드렸다. 캄캄한 밤에 혼자 다니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초창기 청평이었다.
시어머니는 84세로 돌아가셨다. 남편의 고향에서 장례식을 치르는데, 친척 한 분이 꿈에서 시어머니가 나타나 가방을 열어보라고 하셨다고 전하였다. 시어머니 방에서 낡은 가방을 찾아 열어보니 150만원이 들어있는 저금통장이 있었다. 은행에서 그 돈을 찾아 청평에 가서 조상해원을 해드렸다. 조상해원을 해드린 날 밤 꿈에 시어머니가 나타나셨다. 남편의 고향 산소에 어머니를 모셨는데, 묘 자리에 풀 먹인 옥양목 솜이불을 깔아드리며 “여기에서 편히 누우세요.” 하니 고맙다고 하시며 누우셨다.
7. 친정 부모님의 성화와 해원
친정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3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문안을 드려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조금 나아져 퇴원하여 3년을 치매로 생활하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친정에 갔는데 그때에는 엄마의 정신이 온전하였다. 엄마가 방에 들어오라고 하여 둘이 마주보고 앉았다. 엄마는 “정숙아” 부르시며 동산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1절부터 4절까지 다 불렀다. 엄마는 다 기억하고 계셨고 잘 부르셨다. 엄마는 “내가 하나님 곁으로 갈 수 있을까? 하나님께 못가면 어떻게 하지?”라고 하시며 우셨다. 나는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꼭 하나님께 갈 수 있을거야.”라고 하며 안심시켜드렸다. 그러자 바로 “너 누구냐” 하시며 나를 못 알아봤다. 6년 만에 엄마의 본 모습을 잠시 대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청평수련소에서 조상해원역사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청평수련소에 가서 조상 해원을 해드렸다. 청심탑 헌금을 하여 부모님 이름을 탑 내부에 새겨 넣게 되었다. 조상 해원도 하고 헌금도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서 엄마를 많이 사랑하신 모양이라고 여겼다. 엄마의 소망대로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고 생각하니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꿈에서 엄마를 뵈었다. 40대의 엄마 모습이었고 연분홍 모시 한복을 입고 계셨다. 환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 곁으로 잘 가신 것 같다.
친정 부모님은 1988년에 3만쌍 기성축복을 받았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는 엄마에게 감사할 줄을 모르셨는데 엄마가 병원생활 3년을 보낼 때 지극정성으로 엄마 곁을 지키며 간호하셨다. 퇴원하면 엄마가 편하게 지내야 한다며 불편한 한옥을 철거하고 양옥 2층집을 지어 엄마를 돌보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하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여기며 행복해하셨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엄마는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워 아버지가 준 간식을 받아 드시고 그냥 눈을 감으셨다. 엄마나이 69세였다.
하늘은 종종 꿈에서 엄마가 생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엄마가 초대한 손님들이 엄청나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려는가?”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았고 음식이 순식간에 놓이더니 모든 사람이 음식을 먹었다. “저 많은 그릇을 어떻게 치우지?”하고 생각하는데 순식간에 치워졌다. 이렇게 영계에서는 마음을 먹은 대로 다 이루어졌다. 하늘은 엄마가 지상에서처럼 천상에서도 하나님 뜻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3년이 되었다. 아버지 생신 전날 밤에 꿈을 꾸었다. 친정 부모님이 지내시던 방이 보였다. 아버지 취미는 바둑을 두는 것인데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바둑판이 보였고 그 방은 지상의 것이 아닌 영계의 방의 모습이었다. 친정 부모님의 방인데 지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구가 놓여있었다. 너무 놀라서 이 방이 아버지 방이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그렇다고 하셨다. 방문 밖 거실에서는 오빠 목소리도 들렸다.
생신날 우리 형제들이 모여 점심을 함께하였고 아버지는 그때 참석한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셨다. 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허허하시며 기분 좋게 웃으셨다. 그리고 3일 뒤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새언니의 이야기로는 우리 형제들이 귀가하고 3일 동안 아버지가 설사를 엄청 하셨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병원을 가시는 분이 아니기에 ‘이러다가 좋아지겠지’하고 3일을 보냈는데 그래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서 병원에 가려고 속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다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연세가 73세였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청평에서 해원해드리고 40일이 지났는데 꿈에 나타나셨다. 생전에 자전거를 주로 타셨는데 영계에 가신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와서 멈춰서는 것이었다. 격자무늬 양복을 차려입으셨고 젊었을 때의 그 잘 생긴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바라보셨다. 난 아버지를 보고 놀라며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물으니 잠시 멈춰 섰다가 바로 가셨다. 참 평온한 모습으로 보여 아버지도 하늘나라에 잘 가셨음을 믿게 되었다.
8. 갱년기의 영적 역사
어느덧 세월이 흘러 50세가 되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대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모두 하게 되어 집을 떠났고 남편과도 주말 부부로 살았기에 텅 빈 집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 날 마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더니 무서운 공황장애가 일어났다. 나는 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무섭게 요동치는 마음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어두움을 걷어내기 위해 정성을 다하여 하늘 앞에 매달렸다. 한 달을 그렇게 보낸 어느 날 새벽 5시에 의식이 깨어나면서 사지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기 시작하였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되었다.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낼 수 없음을 알고 매주 주중에 수련회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두 달 동안 정성을 다하여 수련에 임하였지만 매일 한 시간도 잠을 잘 수 없었고 누워서 쉴 수도 없었다. 밤에는 뜬눈으로 지내다 보니 심장소리가 쿵쿵하며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우울증이 날로 심해졌고 소변에는 피가 섞여 나왔으며 위에서는 위산이 심하게 나와서 약을 먹어야했다. 우울증약도 전혀 효과가 없었고 수면제를 먹으면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안수 시간에는 온몸을 얼마나 두들겼는지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하늘 앞에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몸부림쳤다. 수련 중의 그 외 시간에는 앉거나 누워서 쉬지도 못하게 하는 영적인 힘이 배후에 있었다.
수련원 국장님이 상담을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여 손을 번쩍 들며 “저요.”라고 했다. 국장님과 상담하여 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모님을 대하기가 두려웠다. 잘못 살아와서 이런 벌을 받는다고 꾸중을 들을 것이라고 여겼다. 대모님과 마주하였는데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참 열심히 안수하였다고 하시며 칭찬해주셨다. 내 안의 영을 들여다보시며 영과 대화를 하셨다. 그동안 무던히도 나를 괴롭혔던 영에 관해 대모님께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응애’하고 울 때에 들어온 영이 있다고 하셨다. 그 영은 여자이고 내 안에 살면서 자기 성격대로 나를 유도하면서 살다보니 너무 좋아서 그 여자의 딸이 죽자 여기 들어와서 함께 살자하며 그 딸도 내 몸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나이 50이 되고 갱년기에 맞물려 그 여자의 본색이 드러나서 내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대모님은 영을 설득하여 내 몸에서 나오라고 하였지만 엄마 영은 깊이 숨어버렸고 그 딸은 설득되어 내 몸에서 나오게 되었다. 대모님은 엄마 영은 쉽게 나오지 않을듯하니 3주 더 수련하고 다시 해보자고 하였다. 기도실을 나와 호수를 바라보고 벤치에 앉아 두 달 만에 2시간 동안 잠을 자고나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처음으로 맛보는 평온한 마음이었다.
대모님과 약속을 한 3주가 지나 기도실에 들어갔다. 대모님이 짧은 시간에 엄마 영을 분립하여 주었다.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마음이 얼마나 평온한지 어찌 이런 마음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감격이었다. 수련회에 참여했던 기간은 봄부터 초여름인 4,5,6월이었으니 청평 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영이 분리되기 전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고 슬픔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그 영들을 분립하고 나서 이렇게 아름다움이 있었음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캄캄한 어두움에서 한 줄기의 희망을 가지고 간절하였던 나의 심정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붙들어 주셨던 것이다.
이런 역사가 있기 전에는 문제를 남의 탓으로 여기며 괴로워하였었다. 이제는 모든 원인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나로 인하여 힘들었을 남편과 자녀에게 미안하였다. 청평을 다녀도 어느 때부터인가 믿음보다 의무로 다녔었다. 직계의 조상해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 50에 중심 영을 분립하면서 영계의 역사를 더욱 믿게 되었다. 그때 청평 직원들이 선령당을 모시기 시작하였기에 우리가정도 모시었다. 그리고 모계의 조상해원도 하게 되었다.
대모님이 당부하시길, “한 달에 한 번은 꼭 영 분립을 해줘야 한다.”고 하시며 “약속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 후로 10년을 매달 주말 수련에 참여하였는데 코로나로 청평 주말수련회에 가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다.
9. 430가정 축복활동
2018년 경기남부교구 수원교회에 부임한 이승일 교구장님은 예배에서 430가정 축복을 강조하셨다. 내가 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막막하였다. 예배시간이 부담스러워지니 마음도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어느 날 오후 오래된 식구와 통화를 하며 부정적인 이야기를 또 하였다. 통화하고 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무섭게 내 가슴이 조여지면서 답답하였다. 너무 무서움이 들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어 그동안의 내 생각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주말 청평수련회에 참여하여 중심 영을 분립 신청하고 회개하는 주말 수련시간을 보냈다. 빛을 가렸던 어두움을 씻어내고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소원성취서를 쓰며 430가정 축복을 완료하게 해달라는 간청을 하였다. 사탄은 언제나 틈을 노리고 있다가 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마음을 사로잡는 경험을 누누이 했으면서도 또 그렇게 사탄의 농간에 사로잡혀 하늘의 뜻을 저버릴 뻔 했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새로운 용기가 생겼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활동방식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여 일찍 시작하였던 권사님께 부탁하여 날짜를 정하고 함께 축복활동을 했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다른 식구에게도 부탁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남편과 고심하다가 남편의 고향에 있는 당진교회를 찾아가 우리가 활동할 임지를 부탁하기로 하였다. 바로 당진교회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일요일이 식구들에게 임지를 배정하는 날이라고 하였다. 더 늦게 갔더라면 축복활동을 할 구역이 없어 막막하였을 것이다. 영계에서도 아시고 나를 쳐서라도 역사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고향인 당진시 고대면과 그 옆 지역인 석문면을 배정받았다. 하나님은 꿈으로 앞날을 보여주셨다. 버스를 타고 어느 곳에 내렸는데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가 펼쳐졌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반질반질한 흑소 세 마리와 소를 지휘하는 건장하고 멋진 남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공중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앞으로 이뤄질 영계의 협조가 있을 것을 보여주셨다. 영계의 협조를 받기 위해 더욱 청평을 방문하여 정성을 들였다.
출발 전날 밤에 또 꿈을 꾸었다. 내가 곤돌라를 타고 출발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가는데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장애물을 내가 다 걷어내면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엄청 통쾌함과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축복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출발하게 되었다. 꿈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가는 곳마다 협조하는 분들이 있었다. 영계가 총 동원되어 축복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물론 곳곳에 사탄의 방해 역사도 있었지만 하늘이 지혜를 주셔서 잘 피해갈 수 있었다. 남편은 선문대학에 근무하면서 협조하였다. 내가 축복장소와 인원을 확보하면 남편은 대학교회나 천안교회의 목회자를 섭외하여 보내주었다. 부부가 합심하면 못 이룰 것이 없도록 하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됨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이러한 작은 조건을 통하여 하늘은 축복을 해주시고자 하시는 뜻을 알고 깊이 감사드렸다. 지속되는 영적 역사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주의를 집중하였다. 예민한 영감을 유지하며 우리가정과 동생가정의 축복활동을 완료하였다. 이후 천보가정이 되면서 긴장에서 벗어나 해방감과 승리감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