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던 좌충우돌 할리우드 도전기
<로스트>의 세 번째 시즌 촬영을 막 마친 그녀는 잠시 짬을 이용해 3년 전과는 전혀 달라진 위상으로 영화 <세븐데이즈> 촬영차 한국으로 돌아왔다. <세븐데이즈>에서 그녀는 유괴당한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한 살인범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6월의 일기> 이후 2년 만이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지 못하지만 이번처럼 오래 머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도전기를 다룬 에세이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가 6월 초 발간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지금 그 옛날, 꿈에 불과하던 상상을 현실로 실현한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말은 “운명은 내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사실 김윤진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아무도 그녀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다. 2002년, 영화 <밀애>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윤진은 어느 날 갑자기 충무로에서 자취를 감춘다. 한국 무대에서의 안정된 미래를 스스로 던져버리고 더 높은 목표에 도전하기 위해 홀로 태평양을 건넌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밀애>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꿈을 위해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마침 전 소속사와의 소송 건으로 잠시나마 공백기를 가진 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 진출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녹록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고, 일이 없어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안 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할리우드 성공 직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힘들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혼자 차를 빌려서 운전하고 다니며 여기저기 제 프로필을 넣었어요. 하지만 생각만큼 일이 안 풀리더군요. ‘이번에 될까’ 싶다가도 마지막에 번번이 기회가 날아가고. 서른이란 나이도 할리우드에선 환영받기 힘든 나이였죠. 혼자 스케줄을 체크해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 지치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그냥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할리우드 진출한다더니 뭐냐’고 다들 그럴 거 아니에요. 뭔가 보여줘야겠다, 내 힘으로 꼭 해내야겠단 생각에 정말 신인의 자세로 도전했어요. 그러던 중에 운 좋게도 드라마 주인공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의 제안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김윤진이 미국 진출에 성공한 배경에는 적당히 자신을 포장한 것이 주요했다고 한다. 또한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라온 탓에 언어 장벽이 없었다.
“남자친구와 연애하듯이 그렇게 한 것이 성공 비결인 것 같아요. 연애할 때 남자들은 집에만 있는 여자를 싫어하잖아요. 한국에 일이 없는데도, 미국 방송 관계자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나 촬영 때문에 한국 들어가니 언제부터 언제까지 연락 달라고 바쁜 척 인기 많은 척 튕겼죠. 그랬더니 늘 그 시간에 맞춰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더군요.”
스트레스로 인한 안면 마비 증세로 한때 좌절
그러나 기쁨에 취한 것도 잠시 ABC와의 전속 계약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침,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한 충격에 휩싸인다. 얼굴에 안면 마비 증세가 와 입이 돌아간 것이다. 병원으로 달려간 그녀는 의사로부터 더욱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완치가 되지 않아 마비 증상이 영구히 남을 수 있다는 것.’ 그녀는 너무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의사에게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선생님, 저는 배우예요.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세요?”
눈물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녀를 더욱 무너뜨린 건 심리적인 절망감이었다. 밥상 앞에 앉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스스로를 추슬렀다. 그리고 “내 몸에 들어온 그깟 바이러스 때문에 내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결심으로 눈물겨운 노력을 시작한다. 병원 치료로도 소용이 없자 절실한 마음에 인터넷에서 좋다는 민간요법을 써보기도 했다.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결국 그녀의 노력에 하늘이 감복했는지, 안면 마비가 온 지 한 달 반 만에 그녀의 얼굴은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의사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지가 결국 승리한 것이다.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ABC에서 가장 기대하던 드라마 <로스트>의 오디션에서 여유 있는 자기소개와 에너지 넘치는 연기로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열정적인 모습에 반한 감독이 대본에도 없던 배역 ‘선’이라는 인물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녀는 꿈에 그리던 할리우드와 진짜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처음 전속금으로 30만 달러를 받았다. 미국에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굉장히 큰 금액을 받게 된 것이다. 출연료는 점점 늘어나 지금은 <로스트> 편당 10만 달러를 받는다. 재방송할 때도 회당 수천 달러씩 받는다. 그런데 수입의 40%나 세금으로 떼인단다.
처음 할리우드에 입성한 그녀는 전혀 다른 드라마 제작 방식과 스케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테스트를 위해 시험 제작하는 데만도 수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 붓는가 하면, TV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블록버스터보다 거대한 규모의 로케이션 현장, 철저한 배우 관리 등등…. 할리우드와의 첫 만남은 그녀에게 상상 이상의 놀라움과 기대 이상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삶은 늘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촬영에 돌입하자 그녀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어려움을 견뎌내야 했다. 포스터 촬영 때 유색 인종만 뒷줄에 서게 하는 등의 인종 차별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박하사탕>에 출연하고 싶어 했을 때 “이국적인 분위기가 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상처와 오버랩되어 그녀는 자신이 완전한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라는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된다.
또한 매번 스태프들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발음으로 부르는 것이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참다못한 그녀는 스태프들에게 “내 이름은 ‘유진’이 아닌 ‘윤진’이다. 또다시 기억을 못하거나 잘못 부르면 촬영장에 안 나간다”고 단호하게 얘기했더니 다음부터는 절대 실수가 없었단다.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존법을 터득한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문제도 자신은 한국과 미국, 두 무대에서 활동이 가능한 유일한 여배우라는 수식어를 스스로 붙이며 극복해나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성공한 여배우로 남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