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사전 - 바 2 -
♣ 백육회[百六會]106년마다 맞게 되는 액운(厄運)의 시대를 말한다. 《漢書 谷永傳 注》
♣ 백은탄[백銀灘]평양 대동강 능라도(綾羅島) 바로 아래 있는 여울. 중국의 사절들이 돌아갈 때 흔히 대동강에 선유(船遊)했다.
♣ 백의[白衣]구름이 일어나는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가탄(可歎)’에, “하늘에 뜬 구름은 흰옷 같더니만, 어느새 변해 푸른 개 같아라.[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하였다.
♣ 백의[白衣]백의는 동복(僮僕)을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천한 심부름을 맡은 자는 백의를 입었으므로 이르게 된 것이다. 진(晉)의 도잠(陶潛)이 9월 9일 술이 없어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백의 입은 사람이 오고 있었다. 이른 다음 보니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도잠은 즉시 따라 마시고 취하였다. 《續晉陽秋》
♣ 백의[白蟻]주 목왕(周穆王)의 8준마(駿馬)의 하나.
♣ 백의객[白衣客]이필(李泌)을 가리킨다. 이필은 소년 시절부터 재민(才敏)으로 이름나니 현종은 태자인 숙종과 함께 포의교(布衣交)를 맺게 하였으므로 태자는 언제나 선생이라 불렀다. 뒤에 영양(穎陽)에 살고 있었는데, 마외(馬嵬)에서 숙종이 부르므로 영무(靈武)로 가 뵙자,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밖에 나갈 때에는 말을 함께 타고 잘 때에는 탑(榻)을 마주하여 태자로 있을 때처럼 대우하고 그의 말이면 모두 따랐다. 《新唐書 李泌傳》
♣ 백의공백타[白衣供白墮]백타(白墮)는 진(晉)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유백타(劉白墮)를 이른 말로, 전하여 좋은 술을 가리키는데, 도잠(陶潛)이 음력 9월 9일에 술이 없어 실망하고 있던 차에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백의 사자(白衣使者)를 시켜 술을 보내왔던 데서 온 말이다.
♣ 백의대사[白衣大士]33관음(觀音) 가운데 하나인 백의관음을 말하는데, 항상 흰 옷을 입고 흰 연꽃에 앉은 관음보살이다.
♣ 백의래[白衣來]도잠이 9월 9일에 술이 없어 울타리 가에 나가 바라보니 국화를 손에 따들고 흰 옷 입은 사람이 오는데,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내온 것이었다.
♣ 백의사자[白衣使者]술을 가져온 하인을 가리킨 말이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9월 9일에 술이 떨어져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차,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흰 옷 입은 사환(使喚)을 시켜 술을 보내준 데서 온 말이다.
♣ 백의유령[白衣踰嶺]벼슬하려고 새재 넘는다는 말이다. 새재[鳥嶺]는 경상북도 문경군과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위치하여 서울과 지방을 통하는 길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서울 나들이하던 영남 선비들은 으레 이 재를 넘었었다.
♣ 백의인[白衣人]도연명이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마실 술이 없자 울타리의 국화를 따면서 앉아 있노라니 흰 옷 입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바로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병을 들려서 보낸 사람이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續晉陽秋 恭帝》
♣ 백의재상[白衣宰相]유생으로 있던 사람이 단번에 재상의 벼슬에 오른 사람.
♣ 백의종군[白衣從軍]흰옷(白衣)을 입고 군대(軍)를 따라(從) 전장에 나감,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에 나간다는 뜻의 고사성어.
♣ 백의창구[白衣蒼狗]끝없이 뒤바뀌는 인간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두보(杜甫)의 “하늘에 뜬구름 백의 같더니, 어느새 푸른 개로 모습 바꿨네.[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21 可歎》
♣ 백의천사[白衣天使]흰옷을 입은 간호사를 일컫는 말.
♣ 백의탄[白衣嘆]세상 일의 빠른 변천을 한탄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가탄시(可嘆詩)에 “하늘에 뜬구름이 금방 백의와 같더니 어느새 변하여 푸른 개가 되었구나[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成蒼狗]”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이[百二]1백분의 2.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말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진(秦)나라는 땅이 험고하여 2만 명만 있으면 족히 제후(諸侯)의 백만 군사를 당할 수 있다.” 하였다. 백이산하(百二山河), 백이관산(百二關山)의 준말.
♣ 백이[伯夷]백이는 중국 은(殷) 나라의 처사로서 주 무왕(周武王)이 은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자 주 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아우인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인(仁)을 이루었다고 칭찬하였고, 맹자(孟子)는, “성인으로서 청렴한 자이다.[聖之淸者]”라고 하였다. 《史記 卷六十一 伯夷列傳, 孟子 萬章下》
♣ 백이산하[百二山河]산천의 형세가 아주 험고하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秦) 나라는 지형이 아주 험고한 나라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똑같이 1백만의 군사가 있으면 2백만의 군사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 백이숙제[伯夷叔齊]형 백이와 아우 숙제는 은(殷)나라 고죽군의 아들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쳐 천하를 손 안에 넣자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러이 여기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살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고 한다.
♣ 백이양기[伯夷讓夔]순(舜)이 사악(四岳)에게 물어 삼례(三禮)를 맡을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을 때 모두 백이(伯夷)라는 신하를 적격자로 추천했는데 이때 백이는 그것을 기(夔)와 용(龍)에게 양보하였음. 《書經 舜典》
♣ 백이전[伯夷傳]백이(伯夷)의 전기를 말함.
♣ 백이지청[伯夷之淸]백이의 청렴함.
♣ 백이채미사[伯夷採薇死]백이는 상(商) 나라 때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데, 주 무왕이 상 나라를 치자 이를 간(諫)하였고, 무왕이 천하를 차지함에 이르러서는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의리상 주 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가 굶어죽었던 고사이다.
♣ 백이청절[伯夷淸節]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聖人) 가운데 청(淸)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가운데 자임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가운데 화(和)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인 자이다.” 하였다.
♣ 백이추정[伯鯉趍庭]공자가 일찍이 혼자 서 있는데, 이(鯉)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뜰앞을 지나가니 공자가 불러서, “시(詩)와 예(禮)를 배우라.” 하였다. 논어(論語)
♣ 백이협착[伯夷狹窄]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백이는 협착하고 유하혜(柳下惠)는 불공(不恭)하니, 협착함과 불공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 백익[伯益]백익은 옛날 요순(堯舜)의 신하인데 백예(柏翳)라고도 한다. 그는 순(舜) 임금을 도와 새와 짐승들을 길들였다. 공로가 있어 영씨(嬴氏) 성을 받았는데, 이가 바로 진(秦) 나라의 시조(始祖)이다. 《史記 卷五 秦本紀》
♣ 백인[百忍]당(唐) 나라 때 9대(代)를 동거(同居)하며 화목하게 사는 장공예(張公藝)의 집을 덕종(德宗)이 친히 찾아가 그 비결을 물으니, 그가 지필(紙筆)을 청한 뒤 참을 인(忍) 자를 일백여 번 썼다는 ‘백인성금(百忍成金)’의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孝友傳 張公藝》
♣ 백일가성사십년[白日佳城四十年]40년 만에 다시 무덤을 열고 개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가성(佳城)은 묘지의 별칭이다. 옛날 등공(滕公)이 땅속에서 “답답했던 가성이 3천 년 만에 태양을 본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석곽(石槨)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다. 《西京雜記 卷4》
♣ 백일계견경류안[白日雞犬輕劉安]신선이 되는 것도 하찮게 여김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이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 할 적에 먹다 남은 선약(仙藥) 그릇을 정중(庭中)에 두었는데, 그의 개와 닭이 이 선약을 핥아먹고 쪼아 먹은 후 개와 닭도 모두 승천을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神仙傳》
♣ 백일몽[白日夢]대낮에 꿈을 꾸는 꿈으로 헛된 공상.
♣ 백일산정곡임수[白日山精哭林藪]산도깨비[山精]는 사람 모양의 괴수(怪獸)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나온다고 하는데, 산속의 보물이 없어졌으므로 대낮에도 원통해서 통곡한다는 뜻이다.
♣ 백일시[百一詩]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 백일장[白日場]글 짓는 시험의 옛 제도.
♣ 백일황계[白日黃鷄]세월이 빠름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취가(醉歌)에 “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축시에 울고, 백일은 해를 재촉하여 유시에 넘어가누나.[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자선[柏子禪]당(唐) 나라 승려 조주(趙州)를 이름. 중이 조주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고 묻자, 그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 하였는데, 이를 가리킴.
♣ 백장[白藏]가을의 별칭.
♣ 백장[百丈]배를 끄는 동아줄을 말함.
♣ 백저[白苧]가곡(歌曲)의 이름으로 백저(白紵)라고도 하며, 오(吳) 나라의 무곡이라 함.
♣ 백저가[白紵歌]백저무가(白紵舞歌)라고도 하는데 옛날 악부(樂府)의 가곡(歌曲)으로 춤추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어서 좋은 계절에 즐기기에 알맞은 악곡이라 한다. 《樂府古題要解》
♣ 백저가[白紵歌]중국 강남(江南)에서 유행하던 민간의 무곡(舞曲)을 말한다. 악부(樂府)에 전해 오는 오(吳) 나라의 춤 음악 이름이라고 한다.
♣ 백저사[白紵詞]오(吳) 나라의 무곡(舞曲) 이름으로, 고사(古詞)의 뜻은, 무자(舞者)의 아름다움을 성대히 칭찬하고, 또 좋은 시절에 즐겨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한 것이다.
♣ 백적[百適]백적은 백적(百讁)으로, 한(漢) 나라 때 백 번 견책을 받으면 면직되는 고사가 있었다. 공부(公府)의 연리(掾吏) 진준(陳遵)이 날마다 밖에 나가 술에 취해 업무를 폐한 나머지 백 번 견책을 받은 끝에 면직될 운명에 처했는데, 대사도(大司徒) 마궁(馬宮)이 “이 분은 대도(大度)의 인사인데, 어떻게 자잘한 법규로 문책할 수 있는가.” 하고 우대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游俠傳 陳遵》
♣ 백전[白戰]백전은 맨손으로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 백전[白戰]백전은 무기가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으로,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 백전[柏殿]백전은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세운 백량대(柏梁臺)로, 이곳에서 군신(君臣)이 연회를 베풀고 시를 읊으면서 칠언시(七言詩)를 잘하는 사람만 대(臺) 위로 올라가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輔黃圖 卷5 臺榭》
♣ 백전노장[百戰老將]여러 차례 큰 싸움을 치루었던 늙은 장군이란 뜻으로 세상일에 경험이 많아 당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
♣ 백전백승[百戰百勝]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김.
♣ 백전시[白戰詩]상투적인 단어를 빼고서 독특한 표현으로 짓는 시를 말한다.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영주 태수(潁州太守)로 있을 때 눈 내리는 날 빈객들과 술을 마시면서 옥(玉), 월(月), 이(梨), 매(梅), 은(銀), 무(舞), 백(白) 등등의 글자를 빼고서 시를 짓도록 한 고사가 소식(蘇軾)의 ‘취성당설시병인(聚星堂雪詩並引)’에 소개되어 있다.
♣ 백전장[百錢杖]진(晉) 나라 완수(阮修)가 막대기 끝에다 백 전(百錢)의 돈을 꿰어 매고 걸어가다가 주막이 보이면 문득 들어가 혼자서 질탕하게 마시며 즐겼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 백전차중강육경[百戰車中講六經]광무제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전쟁하는 여가에 군중(軍中)에서도 육경(六經)을 강론하였다.
♣ 백전하인병촌철[白戰何人屛寸鐵]옛날 특정한 어휘의 구사를 금하고 시를 짓게 했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읊어 본다는 뜻이다. 백전(白戰)은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서, 예컨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을 경우 눈과 관련이 있는 학(鶴)ㆍ호(皓)ㆍ소(素)ㆍ은(銀)ㆍ이(梨)ㆍ매(梅)ㆍ로(鷺)ㆍ염(鹽)ㆍ동곽(東郭) 등 어휘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소식(蘇軾)이 빈객들과 함께 이를 회상하며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시 가운데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 준수하라. 손으로만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안 될지니.[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4 聚星堂雪》
♣ 백절불굴[百折不屈]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음. 아무리 꺾으려고 해도 굽히지 않음.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이겨냄
♣ 백절불요[百折不撓]백번 꺾어도 굽히지 않음.
♣ 백접리[白接䍦]백접리는 두건(頭巾)의 이름. 진(晉) 나라 때 풍류로 이름이 높던 산간(山簡)이 술을 좋아하여 매양 원지(園池) 가에 나가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돌아오므로, 당시 아동(兒童)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는고, 고양지로 가는구나. 날 저물면 있는 술 다 마시고 돌아와 곤드레가 되어 아무 것도 모른다오. 때로는 말을 타고 오면서 백접리를 거꾸로 쓰기도 하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時時能騎馬 倒著白接罹].” 하였다 한다. 《晉書 卷四十二》
♣ 백정[白挺]옛날 백성들이 반기(叛旗)를 들 때 무기로 사용했던 몽둥이를 뜻하는데, 뒤에는 무장한 반란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백정[白珽]원(元) 나라 때 사람으로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시(詩)ㆍ서(書)에도 모두 뛰어났다.
♣ 백정왜[屠子倭]임진왜란 때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던 왜병을 일컫던 말. 당시 구미 지역에 주둔했던 왜병은 조총이 없이 칼과 활만으로 무장을 했는데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생을 하였으므로 ‘백정왜’라 불렀다.
♣ 백제[白帝]옛날의 신화 속에 나오는 다섯 천제(天帝) 가운데 하나로, 서방(西方)을 맡은 신이다.
♣ 백제성[白帝城]백제성은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백제산(白帝山)에 있다.
♣ 백제소언[白隄蘇堰]송 나라 문장가 백거이(白居易)가 쌓은 제방과 소식(蘇軾)이 쌓은 제방을 가리킨다. 소식은 광동(廣東)혜주(惠州)로 좌천되었을 때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고 그것을 사들여 방생지(放生地)로 삼았다 한다.
♣ 백제재[白帝栽]흰 매화가 일찍 핀 것은 봄을 맡는 신을 억지로 먼저 끌어 온 것이나, 빛깔이 흰 것은 백제가 심었기에 그렇게 흰 것이라 하였다. 원래 백제는 가을을 맡은 신이지만 그 백제의 백(白)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 백족[白足]세속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수도승(修道僧)을 말한다. 위(魏) 나라의 승려 담시(曇始)는 발이 얼굴보다도 깨끗했는데 흙탕물을 걸어가도 발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으므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렸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琅琊代醉篇 白足》
♣ 백족사[白足師]위(魏) 나라 때의 고승 담시(曇始)를 이름. 그는 발이 워낙 희어서 진흙탕을 건너도 발에 더러운 물이 묻지 않았으므로, 그를 백족선사(白足禪師)라 부른 데서 온 말이다.
♣ 백족화상[白足和尙]도력(道力)이 높은 승려라는 뜻이다. 후진(後秦)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인 담시(曇始)의 발이 얼굴보다 희었는데 진흙탕을 밟고 다녀도 더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족화상’이라고 불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高僧傳 神異 下 曇始》
♣ 백종처[伯宗妻]백종(伯宗)의 아내가 아침마다 백종을 경계하기를,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들이 임금을 원망하는 세상인데, 그대가 바른말을 좋아하다가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것이요.” 하였으나 백종은 그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난을 당하였음. 《左傳 成公 十五年》
♣ 백좌칭관포[伯佐稱管鮑]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가 환공을 보좌하여 패업(霸業)을 성취하였다.
♣ 백주[柏舟]백주는 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篇名)이다. 위(衛) 나라 태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처(妻) 공강(共姜)이 재가(再嫁)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므로 친정 어머니가 개가(改嫁)시키려 하니, 공강이 백주(柏舟)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절조를 지켰다 한다.
♣ 백주[柏酒]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하여 설날에 마시는, 측백나무 잎을 넣어 빚은 술 이름.
♣ 백주[白洲]이명한(李明漢)의 호이다.
♣ 백주갱봉반승일[栢酒更逢頒勝日]인일(人日)을 가리킨다. 새해가 되면 백엽주(栢葉酒)로 서로 하례를 하고, 인일엔 또 화승(華勝)을 만들어 서로 보내주고 높은 언덕에 올라 시를 읊는 풍습이 있었다.
♣ 백주시[柏舟詩]백주는 시경(詩經) 용풍(鄘風) 백주(柏舟) 시이다. 이 시는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남편이 죽은 뒤에 재가(再嫁)에 불응하고 지은 시로, 미망인(未亡人)이 죽은 남편에 대해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읊은 내용이다.
♣ 백주지조[栢舟之操]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백주(栢舟)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절개를 지킨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가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 백주편[栢舟篇]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이다. 위(衛) 나라 세자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남편이 죽은 뒤에 친정 부모가 개가(改嫁)시키려 하자, 이 시를 지어 절개를 지킬 뜻을 다짐하였다는 데서 남편이 죽은 뒤에 개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 백주풍[柏舟風]남편을 여의고 굳게 수절(守節)하는 것을 비유한 말. 백주는 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인데, 이 시는 위(衛) 나라 세자(世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아내 공강(共姜)이 수절을 하고 사는데 그의 친정 모친이 억지로 그를 재가(再嫁)시키려 하므로, 그녀가 죽어도 재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 백중[伯仲]백중은 형제를 가리킨다.
♣ 백중구혹차[百中彀或差]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명사수인 예(羿)의 사정거리 안에서 노니는 자 가운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는 적중되기에 꼭 알맞다고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살을 맞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 然而不中者命也]”라는 말이 있다.
♣ 백중숙계[伯仲叔季]백(佰)은 맞이, 중(仲)은 둘째, 숙(淑)은 셋째, 계(季)는 막내라는 뜻으로 네 형제의 차례를 일컫는 말.
♣ 백중지간[伯仲之間]둘의 우열에 차이가 없이 어금버금 맞서는 사이. 난형난제(難兄難弟)
♣ 백중지간[伯仲之間]백중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로 형제는 비슷하고 닮았기에 비교 평가하여 우열을 각리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비슷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사이를 가리킴.
♣ 백중지간[伯仲之間]서로 어금버금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사이. 백중지세(伯仲之勢)
♣ 백중지세[伯仲之勢]형제인 장남과 차남의 차이처럼 큰 차이가 없는 형세. 우열(優劣)의 차이가 없이 엇비슷함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에 형제의 순서를 백(伯)ㆍ중(仲)ㆍ숙(叔)ㆍ계(季)로 일컬었었다.
♣ 백지애매[白地曖昧]까닭 없이 죄를 받아 재앙을 입음.
♣ 백착가[白著歌]백착은 일정한 조세(租稅) 이외에 불법으로 더 징수하는 것을 이름. 옛날 고운(高雲)의 백착가에 “상원의 관리는 백성 벗기기만을 힘써서 강회의 백성들에겐 백착이 많다오[上元官吏務剝削 江淮之人多白著]”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창[伯昌]주의 문왕.
♣ 백창경[白彰卿]창경은 백광훈(白光勳)의 자(字)이다.
♣ 백척간두[百尺竿頭]백 척 길이의 대가지 위에 서 있는 상태.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 이름을 뜻한다.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더욱 분발함을 뜻.
♣ 백척난간[百尺欄干]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
♣ 백척루[百尺樓]백척루(百尺樓)는 높은 누각으로, 전하여 높은 좌석에 비유한 것이다. 삼국(三國) 시대에 유표(劉表)가 유비(劉備)와 함께 천하의 인물을 논평할 적에 허범(許氾)이 말하기를 “일찍이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 원룡(元龍)을 만나 보니, 그는 호해의 기백이 있는 선비라, 주객(主客)의 예의가 전혀 없어, 한참동안을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은 큰 와상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은 아래 와상에 눕게 하였다.”고 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가 만약에 당신을 소인으로 간주했다면 자기는 백척루 위에 높이 눕고 당신은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니, 어찌 위와 아래 침대의 차이뿐이었겠는가.[如小人 欲臥百尺樓上 臥君於地 何但上下牀之間耶]”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三國志 卷七 陳登傳》
♣ 백첩[白疊]무명[木棉]을 가리킨다.
♣ 백첩[白帖]서명(書名)인 백공육첩(白孔六帖)의 준말로, 이는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육첩(六帖) 30권과 송(宋) 나라 공전(孔傳)의 속육첨(續六帖) 30권을 합해서 이를 1백 권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데, 곧 많은 분량의 서물(書物)을 의미한다.
♣ 백첩[白帖]인이 없는 첩을 말함. 상급관사에서 백첩으로 해당 관할 각사에다 영을 내리면 아전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간사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금하게 되었음.
♣ 백첩건[白疊巾]무명으로 만든 두건
♣ 백초[白草]변새(邊塞)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가리킨다. 백초는 서역(西域)의 목초(牧草)로서 다 자라면 희게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장적(張籍)의 시 양주사(涼州詞)에 “봉림관 물 하염없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백초와 황유는 예순 해를 넘겼도다.[鳳林關裏水東流 白草黃楡六十秋]”라는 구절이 있다.
♣ 백치[白雉]백치는 곧 흰꿩으로 상서로운 새[祥鳥]라 한다. 소왕이 백치를 구하러 남으로 갔다는 고사가 있다.
♣ 백치[百雉]성 위의 조그마한 담[女墻]을 치(雉)라 함. 《文選 鮑照蕪城賦》
♣ 백치금성[百雉金城]길이 1 백 장(丈), 방(方) 5 백 보(步) 규모의 견고한 성곽을 이름이니, 1치는 높이 1장(丈), 길이 3장이다. 일설에는 길이가 5장이라고도 한다. 《禮記 坊記》
♣ 백치성[百雉城]큰 성을 말한다. 1치(雉)는 높이가 1장(丈), 길이가 3장이라 한다.
♣ 백타[白墮]백타(白墮)는 진(晉)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유백타(劉白墮)를 이른 말이다.
♣ 백타전[白打錢]제기 놀이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는 돈을 말한 것인데, 제기 놀이를 백타라 한다.
♣ 백탁타[白橐駝]당(唐) 나라 때의 재상 가서한(哥舒翰)이 일찍이 청해(靑海)를 진무할 적에 서울과 거리가 워낙 멀었으므로, 항상 사자(使者)에게 흰 낙타를 주어 일을 주달(奏達)하게 한 데서 온 말인데, 흰 낙타는 하루에 5백 리씩을 달렸다고 한다.
♣ 백탑[白塔]요양(遼陽)의 구요동성(舊遼東城) 광우사(廣祐寺)에 있는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는 탑인데,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요동을 경략할 때 울지경덕(尉遲敬德)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신들이 경유하던 곳이다.
♣ 백태부[白太傅]백거이(白居易)의 벼슬 칭호. 그가 소나무를 사랑하여 벗으로 불렀다.
♣ 백토공[白兎公]팽조(彭祖)의 제자라고 전해지는 선인(仙人)의 이름이다.
♣ 백판[白板]하얀 판자로 만든 쟁반을 말한다.
♣ 백팔[百八]다리가 여덟 개 달린 게를 말한다. 《淸異錄 黃大》
♣ 백팔반[百八盤]본디는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험난함을 형용하는 말인데, 흔히 고달픈 인생길을 비유한다.
♣ 백팔번뇌[百八煩惱]108가지의 번뇌. 눈, 코, 입, 귀, 몸, 뜻의 육근(六根)에 각각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거기에 탐(貪), 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것을 다시 현재, 과거, 미래에 풀면 108가지가 됨.
♣ 백팔음중지일심[百八音中只一心]불가(佛家)에서는 인간 세상의 뭇 번뇌를 모두 108가지로 정리하고서, 이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108번씩 염주를 돌리고 종을 치는 의례가 있다.
♣ 백패[白牌]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인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는 흰 종이의 증서.
♣ 백패[白牌]일을 알리기 위하여 미리 보내는 공문.
♣ 백편지서[百篇之序]한(漢) 나라 때 공안국(公安國)의 고문상서(古文尙書) 서(序)에 “상고의 글을 상서라 하는데, 백 편의 뜻을 세상에서 들을 수가 없다.[以其上古之書 謂之上書 百篇之義 世莫得聞]"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포[白袍]거인(擧人)을 말함. 당(唐) 나라 때 선비들이 과거(科擧)를 볼 적에 모두 흰 도포를 입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 백하[白下]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서북에 있는 성(城) 이름. 이곳은 백석(白石)이 많고 지대가 험고(險固)하여 외적(外賊)을 방어하기에 매우 좋은 요새라 한다.
♣ 백하[柏下]묘지(墓地)를 가리킨다. 옛날 묘소에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백하골[柏下骨]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이른 말로, 두보(杜甫)의 촉상(蜀相) 시에 “승상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꼬, 금관성 밖에 잣나무가 늘어선 곳이로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栢森森]" 한 데서 온 말인 듯하다.
♣ 백학[白鶴]후한서(後漢書) 왕교전(王喬傳) 주(注)에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晉)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과 숭산(崇山)에서 놀기도 하였다. 죽은 지 10년 뒤에 다시 그 산 위에 와서 환량(桓良)에게 ‘우리집 사람들에게 7월 7일 구씨산(緱氏山)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하라.’ 하였는데, 과연 그날 백학을 타고 왔다.” 하였다.
♣ 백학귀[白鶴歸]단구(丹丘)는 우인(羽人)이 죽지 않고 산다는 선경으로, 사람이 득도(得道)를 하면 몸에 모우(毛羽)가 돋아난다는 전설이,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遠游)’의 주(註)에 소개되어 있다.
♣ 백향산[白香山]향산(香山)은 백거이(白居易)의 별호. 당(唐) 나라 사람. 자(字)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섭유옹(囁嚅翁), 시호는 문(文). 한림(翰林)에 들어가 학사(學士)가 되고, 좌습유(左拾遺)로 옮겼다가 뒤에 죄를 받아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함. 만년에 뜻을 시주(詩酒)에 붙여 취음선생이라 칭하고, 또 향산(香山)의 중 여만(如滿)과 향화사(香火社)를 맺어,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음. 문장과 시가 정교하였고, 특히 시는 평이한 것이 특색이었음.
♣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의 호로, 이경석은 인조 24년(1646)에 사은 겸 진주 정사로 청나라에 갔으며, 이때 김육은 부사로 갔다.
♣ 백호[白琥]백호는 호형(虎形)으로 된 백옥(白玉)으로 제사(祭祀)에 쓰는 옥임.
♣ 백호[白毫]불가(佛家) 용어로서 부처의 32상(相)의 하나. 부처의 미간(眉間)에 있어 빛을 발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비춘다는 흰 털을 말한다. 부처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 백호관[白虎館]궁전 이름. 후한 장제(後漢章帝) 때에 박사(博士)ㆍ의랑(議郞)ㆍ제생(諸生) 등을 여기에 모아 놓고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논의하여 바로잡게 했었다.
♣ 백호광[白毫光]석가 삼십이상(三十二相) 중의 하나인 호상(毫相)인데 발산하면 밝은 빛이 나온다 함.
♣ 백호담경긍수정[白虎談經肯數丁]한 나라 때에 백호전에서 불경을 강론하는데, 정봉(丁封)이라는 사람도 참례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 백호부[白虎符]옛날 임금이 외방의 장수에게 주던 호랑이 모양의 병부(兵符)로, 반쪽은 조정에 보관해 두었다.
♣ 백호수[白虎宿]28수(宿) 중 서쪽 일곱 별인 즉, 규(奎)ㆍ누(婁)ㆍ위(胃)ㆍ묘(昴)ㆍ필(畢)ㆍ자(觜)ㆍ삼(參)의 총칭, 백호는 범[虎]으로 나타내며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함.
♣ 백호준[白虎樽]백호의 형상을 새긴 술그릇을 말하는데, 이는 곧 언관(言官)이 거리낌없이 백호처럼 용맹하게 직언을 하도록 상징한 것이라 한다. 송서(宋書)에, “신정(新正) 원회(元會)에 백호준(白虎樽)을 전정(殿庭)에 설치하는데 뚜껑 위에다 백호를 만들었다. 만약 곧은 말을 아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에 든 술을 먼저 마시게 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맹렬하기 범과 같아서 겁냄이 없으란 뜻이다.” 하였다.
♣ 백호통[白虎通]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찬한 책으로 모든 고증의 근본이 된다.
♣ 백혼무[伯昏瞀]춘추 때 사람으로 백혼 무인(伯昏無人)이라고도 하는데 초(楚) 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스승이었다. 《莊子 德充符 列禦寇》
♣ 백홍관일[白虹貫日]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는 “옛날에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의 의리를 사모하여 길을 떠났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白虹貫日] 일이 성사되지 않을 줄 알고 태자가 두려워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 백화[白花]끓여낸 차에 뜬 거품을 말함. 노동(盧仝)의 다가(茶歌)에 “碧雲引風吹不斷 白花浮光凝碗面"이라 하였음.
♣ 백화[白華]시경(詩經)의 편명. 효자의 결백을 노래한 것인데, 본시(本詩)는 없어졌다.
♣ 백화난만[百花爛漫]온갖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게 흐드러짐.
♣ 백화제방[百花齊放]많은 꽃이 일제히 핀다는 뜻으로 갖가지의 예술이나 학문이 함께 활발하는 것을 비유함.
♣ 백화향[百和香]여러 가지 향(香)을 합해서 제조한 향을 말한다.
♣ 백후[伯厚]김육(金堉)의 자(字)이다.
♣ 백휴[伯休]후한(後漢) 한강(韓康)의 자(字)이다. 장안(長安)의 저잣거리에 몸을 숨기고 30년 동안 똑같은 값으로 약을 팔아 생활하였는데, 아녀자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것을 알고는 패릉(霸陵)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後漢書 卷113》
♣ 백희[百戱]갖가지 곡예, 잡기
♣ 번간몽[墦間夢]번간은 무덤 사이를 말한 것으로, 즉 남에게 주육(酒肉)이나 얻어먹는 것을 비유한 말임. 옛날 제(齊) 나라의 한 천부(賤夫)가 날마다 동곽(東郭)에 나가 무덤에 제사지낸 주육들을 배가 부르게 얻어먹고 다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 번경리간[煩鏡裡看]두보(杜甫)의 시 ‘강상(江上)’에 “훈업 세울 일 생각하며 자꾸만 거울보고, 진퇴(進退) 결정하느라 홀로 누대에 기대섰네.[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 번계[翻階]사조(謝朓)의 ‘직중서성(直中書省)’이라는 시에 “붉은 작약 섬돌 아래 펄럭이고, 푸른 이끼는 돌층계 따라 올라오네.[紅藥當階飜 蒼苔依砌上]”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 번계약[翻階藥]사현휘(謝玄暉)가 중서성(中書省)에 입직(入直)하여 지은 시에, “붉은 작약은 뜰에 펄럭인다[紅藥當階飜].”라는 구(句)가 있다.
♣ 번롱[樊籠]짐승이 갇혀 있는 목책(木柵)과 새가 갇혀 있는 동우리를 말한 것이다.
♣ 번문[番文]한자 이외의 소수 민족이 쓰는 문자를 말한다.
♣ 번문욕례[繁文縟禮]번거롭고 까닭이 많으며, 형식에 치우친 예문(禮文).
♣ 번번[幡幡]경솔한 모양, 박 잎이 나부끼는 모양
♣ 번번[旛旛]깃발이 펄럭이는 모양
♣ 번복[飜覆]변하는 세태(世態)를 말한 것이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다시 젖혀 비 내리네[翻手作雲覆手雨]”라는 표현이 있다.
♣ 번복수[翻覆手]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으면 구름 되고 손 엎으면 비가 된다[翻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세인들의 교정(交情)의 변화 무상함을 비유한 말이다. 《杜少陵集 卷二》
♣ 번상[樊上]지금의 서울 번동(樊洞)인데 권돈인(權敦仁)의 별장임.
♣ 번상[飜觴]추양(鄒陽)의 주부(酒賦)에, “술을 실컷 먹고 미쳐서 사발을 쏟고 잔을 뒤엎는다.” 하였다.
♣ 번상격양림[繁商激楊林]상성(商聲)은 오음(五音) 가운데 하나로 음조가 굳세고 경쾌한 것으로서 사시(四時)로 말하면 가을에 해당하고, 양림(楊林)은 버들 숲으로서 봄에 해당하니, 즉 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뜻하는데, 전하여 사람도 젊은 시절이 다 지나가고 늙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 번성[繁聲]음조(音調)가 복잡한 음악을 이른 말이다.
♣ 번소[樊素]중국 중당(中唐)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첩(侍妾)으로, 소만은 춤을 잘 추고 번소는 노래를 잘했었는데 백거이가 늙고 병들었을 때 빚에 의하여 부득이 번소를 놓아주게 되어 서로 이별을 매우 아쉬워했다 한다. 백거이의 작품에 “앵두 같은 번소의 입이요 버들 같은 소만의 허리로다.”라는 시가 있다.
♣ 번수[樊須]공자(孔子)의 제자 이름이다. 언젠가 공자에게 농사일을 물어보자, 공자가 자기는 늙은 농사꾼보다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論語 子路》
♣ 번수작상로[翻手作霜露]권세와 위엄이 대단함을 비유한 말이다.
♣ 번수작운우[翻手作雲雨]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을 짓고 손 엎어 비를 짓는다[翻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세인(世人)들의 변화무상한 교정(交情)을 비유한 말이다. 《杜甫詩集 卷二》
♣ 번승[幡勝]입춘일(立春日)에 머리에 꽂는 채색(彩色) 조화(造花)를 가리킨다.
♣ 번승완불사[樊蠅]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오가는 쉬파리 무엇을 찾는지 울타리에 많이들 붙어 있다.” 했는데, 이욕에 휩쓸리는 소인들을 비유한 시이다.
♣ 번안[飜案]옛사람의 시문(詩文)을 원안으로 하여 이리저리 고침.
♣ 번약[繁弱]번약은 옛날 하후씨(夏后氏)가 썼다는 명궁(名弓)의 이름이다.
♣ 번여[煩拏]어지럽다. 번거롭다.
♣ 번여[璠璵]노(魯) 나라의 보옥(寶玉)으로, 일찍이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번여여! 멀리서 바라보면 광휘가 찬란하고, 가까이서 보면 곱기도 하구나.” 하였다. 보통 미덕(美德)을 지닌 현재(賢才)를 지칭한다.
♣ 번연삼빙[幡然三聘]이윤이 처음에는 출세할 생각이 없었다가 은(殷)의 임금 탕(湯)이 세 번이나 사자를 보내어 초빙한즉 그는 맘을 돌려서, “나는 장차 이 백성들을 요순(堯舜)의 백성으로 만들겠다.” 하고 나왔다.
♣ 번영[繁纓]번(繁)은 말의 배대끈이고 영(纓)은 굴레인데, 제후의 말 장식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 번옹해사[樊翁解事]번옹은 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지칭한 말로 그의 호가 번천(樊川)이다. 그가 양주(楊州)에서 회남(淮南) 절도사우승유(牛僧孺)의 막료로 있으면서 몰래 기루(妓樓)를 출입할 때 지은 견회(遣懷)란 시에, “십 년에 한 번 양주 꿈을 깨니, 청루에서 박정하다는 이름만 실컷 얻었네.[十年一覺楊州夢 嬴得靑樓薄倖名]”하였다.
♣ 번운복우[飜雲覆雨]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을 만들고 손 엎어 비를 만든다[飜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쉽게 잘 변하는 세상 인정을 비유한 말이다.
♣ 번원[煩寃]귀찮음, 우울함. 회오리 바람이 부는 모양
♣ 번유[藩維]번국(藩國). 나라와 조정을 수호하는 사람에 비유한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개인(价人)은 울타리며 태사(太師)는 담장이다.” 하였고, 대아 판(板)에 “덕이 많은 사람은 번병이다.” 하였다
♣ 번음[繁淫]번잡하고 음탕한 악(樂)을 이름인데, 즉 정위(鄭衛)의 속악을 의미한 것임.
♣ 번절[藩節]’藩’은 ‘藩屛’의 뜻으로 왕성(王城)을 옹위하는 제후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나라의 도백(道伯)에 해당함.
♣ 번중[樊重]후한(後漢) 때 사람. 온후한 천성에 법도가 있었다. 《後漢書 樊重傳》
♣ 번지[樊遲]공자 제자이다. 번지가 공자에게 벼를 심는 방법과 채마밭 가꾸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그것이라면 내가 그 방면에 늙은 사람만 못하다.”라고 대답하고, 이어 그가 예를 힘쓰지 않고 세쇄한 일에 힘쓰는 것을 나무랐었다. 《論語 子路》
♣ 번지모경운[樊遲慕耕耘]공자의 제자 번지가 농사일을 배우고 싶어하자 공자가 “나는 노련한 농사꾼보다 못하다.”고 한 내용이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실려 있다.
♣ 번질[反作]조선후기 환곡(還穀)의 법이 문란해지자 아전들이 곡식은 나누어 주지도 않고 창고에 그냥 두고서 농간을 부려 이득을 취하는 것.
♣ 번천[樊川]번천은 당나라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그는 인물 잘 생기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번천집(樊川集) 권2의 독작(獨酌) 시에 ‘옹로개주항(擁爐開酒缸)’이라는 구절이 있다.
♣ 번쾌[樊噲]한(漢)나라 패현(沛縣) 사람으로 유방(劉邦)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많이 세웠다. 홍문(鴻門)의 모임에서 항우(項羽)가 유방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몄을 때 문지기의 저지를 뚫고 들어가 항우를 맹렬히 꾸짖고 유방을 탈출시켰다. 《史記 卷九十四 樊噲傳》
♣ 번쾌용순옹[樊噲龍楯擁]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홍문에서 잔치를 할 때 항우가 유방을 죽이려고 하자, 번쾌(樊噲)가 칼과 방패를 들고 춤을 추면서 막은 고사를 말한다. 사기(史記) 제7권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유방이 진의 서울인 함양(咸陽)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파견하여 함곡관(函谷關)을 지켰는데, 얼마 뒤에 항우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와서 홍문(鴻門)에 주둔하였다.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화해시키자 유방이 직접 홍문으로 와서 항우를 만나보았다. 이에 항우와 유방이 술을 마셨는데, 연회 도중에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에게 명하여 유방을 죽이려고 하자, 항백이 일어나서 칼춤을 추면서 몸으로 유방을 가렸다. 최후에는 번쾌가 칼을 들고 방패를 잡고서 뛰어들어가자, 유방이 그 틈에 탈출하였다.” 하였다.
♣ 번풍[番風]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함.
♣ 번형[薠蘅]향초(香草)
♣ 번호[藩胡]북쪽 변경에 사는 오랑캐들을 말한다. 조선시대 때 함경북도의 오랑캐로서 두만강 건너 변보(邊堡) 가까이 살며 조선과 무역을 하고 공물을 바쳤음. 백두산 북쪽에 살면서 조선에 친부(親附)하지 않은 오랑캐인 ‘심처호’가 변방에 침입하려 할 때면 번호가 즉시 조선에 연락하거나 이들을 막거나 구원을 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조선초기부터 번호들을 우대해 왔다. 그런데 명종ㆍ선조 연간부터 변방의 방어가 점차 소홀해져 번호가 차츰 강성해지는데도 이들을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게 되자 심처호와 함께 자주 조선에 반기를 들었음.
♣ 번화[繁華]성대하고 화려함.
♣ 번후[樊侯]주(周)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인 중산보(仲山甫)의 작호(爵號). 나무심은 일은 미상.
♣ 벌가[伐柯]시경(詩經) 빈풍 벌가(伐柯)에 “도끼자루를 찍음이여 그 법칙이 어이 멀다 하리.[伐柯伐柯 其則不遠]"하였는데, 즉 그 자르는 나무의 길이는 손에 쥔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아야 하므로, 그 표준이 바로 눈 앞에 있음을 이른 말로서, 곧 도(道)가 멀리 있지 않음을 뜻한 것이다.
♣ 벌단[伐檀]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篇名)인데, 조정의 관원이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국록(國祿)만 축내면서 현자(賢者)의 벼슬길을 막고 있는 것을 풍자한 시이다.
♣ 벌단편[伐檀篇]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으로, 탐학스러운 자가 시위소찬(尸位素餐)하고 어진 자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것을 풍자한 시인데, 그 시에 “저 군자여, 소찬하지 않는구나.[彼君子兮 不素餐兮]”하였다.
♣ 벌목[伐木]벌목은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서로 벗을 찾는 새들의 울음소리로 흥을 일으켜 사람 사이의 우정을 노래하고 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서(伐木序)에 의하면, 벌목편은 친구간에 연락(燕樂)하는 노래로서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서로 친목하며 저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 벌목구우[伐木求友]빈객을 초청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쩡쩡 나무를 찍거늘, 새가 앵앵 울도다. ……저 새를 보니, 새도 벗을 부르는데, 더구나 우리 사람들이 벗을 찾지 않을쏜가.[伐木丁丁 鳥鳴嚶嚶……相彼鳥矣 猶求友聲 矧伊人矣 不求友生]" 한 데서 온 말이다.
♣ 벌목시[伐木詩]친척과 벗들을 모아놓고 연회할 적에 부르는 시임. 친구에 대한 그리운 생각.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무를 벰이여! 새들이 우는구나. 새들이 움이여! 그 벗을 부르는 소리구나[伐木丁丁 鳥鳴嚶嚶 嚶其鳴矣求其友聲].” 하였음.
♣ 벌목장[伐木章]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친구간의 우정을 읊은 시이다.
♣ 벌목편[伐木篇]친구간의 우정을 노래한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그중에 “저 새들을 보게나, 저들도 벗을 찾지 않나. 하물며 사람인 우리들이 벗을 찾지 않을손가.[相彼鳥矣 猶求友聲 伊人矣 不求友生]”라는 표현이 있다.
♣ 벌무[伐武]武勇을 뽐냄.
♣ 벌봉전[罰捧(俸)錢]관인이 지은 죄가 파직될 정도가 아니어서 송서(送西)하는 자에게 그의 녹을 죄과의 경중에 따라 차등있게 징수하는 것으로, 김안로가 건의하여 중종30년 10월에 법으로 제정됨.
♣ 벌성지부[伐性之斧]생명 해치는 도끼. 특히 여색(女色)을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 벌수[伐樹]벌수의 화는, 공자가 제자들과 나무 밑에서 예(禮)를 익히고 있을 때, 송(宋) 나라 환퇴(桓魋)가 나무를 뽑아 공자를 해치려고 했던 것을 말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 벌제위명[伐齊爲名]실속은 없는 데도 명분만을 위해 제(齊)나라를 친다. 뭔가를 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을 일컬는 말로 쓰인다.
♣ 벌주[罰籌]벌로 마시는 술잔의 숫자를 말한 것으로, 즉 벌주(罰酒)를 의미한다.
♣ 범[凡]범나라. 창범(刱凡)과 같다.
♣ 범간[帆竿]물가에 세워둔 배의 돛대.
♣ 범경[泛梗]물에 뜬 나무 장승[木梗]. 즉,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을 말한다. 전국(戰國) 때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이 진(秦) 나라에 가려 하자 문객(門客)이 들어와 “제가 올 때 치수(淄水)를 지나오다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목경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목경은 흙허수아비에게 ‘자네는 원래 흙으로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큰 비가 와 홍수가 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하자 흙허수아비는 ‘나는 허물어지면 나의 참모습을 되찾는다. 그러나 자네는 동원(東園)의 복숭아 나무로 목경이 되었으니, 장마로 홍수가 나면 반드시 자네는 끝없이 떠내려 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戰國策 齊 第三》
♣ 범공오매[范公烏昧]범공은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키고 오매초(烏昧草)는 풀 이름이다. 송 나라 인종(仁宗) 명도(明道) 2년에 범중엄이 “굶주린 백성들 가운데는 오매초를 먹는 자가 있으니, 그 풀을 뜯어다가 진어(進御)하소서. 그리고 이를 육궁(六宮)의 귀척들에게 보이어 그들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경계시키소서.” 하였다. 《續資治通鑑 宋仁宗 明道 2年》
♣ 범공징청[范公澄淸]후한(後漢)의 범방(范滂). 그는 지방 수병들의 탐오(貪汚)를 적발하는 임명을 받고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며 개연(慨然)히 천하를 맑힐 뜻이 있었다.
♣ 범관[范寬]송(宋) 나라 때의 화가이다.
♣ 범관설보[范寬雪譜]범관은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했다. 그의 저서 중에 설보(雪譜)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곧 두보(杜甫)의 열(熱) 시에 “궁전 북쪽의 쌓아둔 눈에 바람 부는 문이 서늘하게 열렸음을 상상하노라.[想見陰宮雪 風門颯沓開]" 한 고사에 비유하여, 설보만 보아도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杜詩批解 卷十七》
♣ 범국[泛菊]음력 9월 9일 즉 중양절(重陽節)에 국화를 술잔에 띄워 마시는 잔치를 말한다.
♣ 범국진[泛菊辰]음력 9월 9일, 즉 중양절(重陽節)에 국화를 술잔에 띄워 마시는 잔치가 있으므로 이른 말이다. 범국회(泛菊會).
♣ 범노[范老]범로는 소범 노자(小范老子)의 준말로,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그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있다가 섬서 경략사(陝西經略使)로 나가 수 년 동안 변방을 지킬 때에, 강족(羌族)이 그를 존경하여 용도 노자(龍圖老子) 혹은 소범 노자(小范老子)라고 부르면서, “그의 흉중에 수만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했던 고사가 있다.
♣ 범도화[泛桃花]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고사(故事)를 연상한 것인데, “어부(漁父)가 냇물에 복사꽃이 떠 오는 것을 보고 물을 따라 올라가서 선경(仙境)을 발견하였다.” 한다.
♣ 범두선[犯斗仙]한(漢)나라 장건(張鶱)이 대하(大夏)에 사자로 갈 때, 떼[槎]를 타고 하(河)의 근원까지 갔는데, 전설에 그가 은하수에 올라 직녀(織女)를 만나서 지기석(支機石)을 받아 엄군평(嚴君平)에게 보였더니, 그가 말하되, “아무날 객성(客星)이 두우성(斗牛星)을 범하더니 그대가 은하에 올랐었군.” 했다 한다.
♣ 범람[氾濫]물이 흘러 넘친다. 여기서는 뜬구름이 뭉게뭉게 떠가는 모양을 말한다.
♣ 범래무[范萊蕪]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범염(范冉)이 내무(萊蕪)의 장관으로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고, 그 뒤 누차 태위부(太尉府)와 시어(侍御)로 임명받았어도 나아가지 않은 채, 적빈(赤貧)을 감수하며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시루 속에 먼지 나는 범사운이요, 솥 속에 물고기 헤엄치는 범래무로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라고 노래하였다 한다. 사운(史雲)은 범염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111》
♣ 범려[范蠡]춘추 시대 월(越)의 대부로 자는 소백(少伯). 월왕 구천(越王句踐)을 도와 적국인 오(吳)를 멸망시키기 위한 계획으로 서시(西施)라는 미인을 오왕 부차(吳王夫差)에게 바치니, 부차는 서시에게 고혹되어 정치를 돌보지 않다가 끝내 월에게 망하였다. 공을 이룬 다음 “큰 명예 밑에는 오래 있기 어렵다.” 하고는 오궁(吳宮)에 있던 서시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배를 띄워 제(齊) 나라에 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변성명하고 많은 돈을 벌었다. 제 나라에서는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승상(丞相)을 삼으려고 했지만, 그는 재물을 흩어버리고 다시 제 나라를 떠나 도(陶)란 곳에 머물러 살며,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는 도에서도 많은 돈을 벌어 큰 부자로 살다가 그 곳에서 천명으로 죽었다 한다. 《史記 范蠡傳》
♣ 범려주[范蠡舟]범려(范蠡)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인데, 일찍이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서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월(越) 나라를 떠나 미인 서시(西施)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떠 놀았다 한다.
♣ 범련[泛蓮]훌륭한 막료(幕僚)로 등용됨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유고지(庾杲之)가 재상 왕검(王儉)의 막료가 되었을 적에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보낸 편지에 “성부(盛府)의 원료(元僚)는 실로 잘 가려야 할 자리인데, 유경행(庾景行)은 마치 푸른 물에 떠서 연꽃에 의지한 것[泛綠水依芙蓉]과 같으니, 어쩌면 그리도 화려하단 말입니까.”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庾杲之傳》
♣ 범련인[泛蓮人]상부(相府)의 막료(幕僚)를 이른 말.
♣ 범로[范老]송(宋)의 범중엄(范仲淹)을 말한 것. 중엄이 재주가 높고 뜻이 원대하여 늘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삼아왔으며, 이미 현달한 뒤에는 더더욱 선을 좋아하고 베풀기도 좋아하여 의전(義田) 제도를 만들어 두고 주위의 겨레붙이들을 돌보아 모두 요부하게 만들었음. 《宋史 卷314》
♣ 범로요주[范老饒州]범로는 북송(北宋) 시대의 범중엄(范仲淹)을 높여 이른 말. 범중엄이 일찍이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여이간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나 지요주(知饒州)로 좌천되었었다. 《宋史 卷三百十四》
♣ 범로흉리갑[范老胸裡甲]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토벌에 나섰을 때, 원호(元昊)의 반란군들이 “뱃속에 수만의 갑병이 들어 있다.[腹中自有數萬甲兵]”고 하면서 무서워했다고 한다. 《名臣傳 范仲淹》
♣ 범망[凡亡]춘추 시대에 범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는데, 초왕(楚王)과 범군(凡君)이 서로 만난 자리에서 초왕의 신하가 ‘범 나라는 망한다.’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하자, 범군이 말하기를 “범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의 존재는 잃게 할 수 없다. 범 나라가 망하여도 나의 존재를 잃게 할 수 없고 보면, 초 나라의 존재함도 존재함이 되기에 부족하다. 그렇다면 범 나라는 애당초 망한 것이 아니요, 초 나라도 애당초 존재한 것이 아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田子方》
♣ 범방비[范滂轡]난세(亂世)에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열전(黨錮列傳) 범방(范滂)에, “이때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범방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안찰하게 되었다. 범방은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고쳐 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다.” 하였다.
♣ 범범[氾氾]물에 둥둥 뜨는 모양. 널리 대중을 사랑하는 모양
♣ 범범[汎汎]물에 표류하는 모양, 물이 넓게 차란차란 흐르는 모양
♣ 범범[泛泛]표류하는 모양, 가득 차는 모양, 들떠서 침착하지 못한 모양
♣ 범범[渢渢]중용의 소리, 알맞은 소리
♣ 범부무곤[范婦無褌]범씨는 진(晉) 나라의 은자 범선(范宣)을 가리킨다. 그는 집이 무척 가난하였는데, 한번은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많은 비단을 보내 주었으나 하나도 받지 않았다. 태수가 두 길쯤 되는 비단을 끊어주면서 “어찌 부인으로 하여금 속옷이 없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자 그는 그제야 웃으며 받았다.
♣ 범부생진[范釜生塵]범염(范冉)의 솥 안에 먼지만 쌓이다.
♣ 범비[范轡]후한(後漢) 때 지사(志士)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로 기주(冀州)에 내려갈 적에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는, 흐린 세상을 한번 징청(澄淸)시키려는 개연(慨然)한 뜻을 두었다.
♣ 범석호[范石湖]범성대(范成大). 석호는 호(號). 송(宋) 나라 오현(吳縣) 사람. 문장으로 유명하고 34권의 석호집(石湖集)이 전해짐. 임금이 ‘석호(石湖)’ 두 글자를 친필로 써주니,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가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 범성대[范成大]송(宋) 나라 시인. 자는 치능(致能), 호는 석호 거사(石湖居士). 시에 능하여 양만리(楊萬里)와 병칭됨. 저서에 석호집(石湖集)ㆍ오선록(吳船錄)이 있음.
♣ 범수[范睢]전국 시대 위(衛) 나라 사람으로 진 소왕(秦昭王)을 섬겨 승상(丞相)이 되고, 응후(應侯)의 봉작(封爵)까지 받았다가, 자기와 가까운 왕계(王稽)가 죄를 져 죽음을 당하자, 채택(蔡澤)을 추천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음.
♣ 범숙[范叔]전국 시대의 위(魏) 나라 사람 범수(范睢)를 이른다. 범수는 수가(須賈)의 고자질로 매를 맞고 진(秦)으로 망명하여 뒤에 진의 재상이 되었다. 뒤에 수가가 진에 오자 범수는 복수할 마음을 갖고 일부러 한미한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수가를 만났는데, 수가는 그의 한미한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두꺼운 옷 한 벌을 그에게 주었고, 그로 인하여 범수도 수가를 달리 대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 범숙한편고[范叔寒偏苦]전국 시대 위(魏) 나라 범수(范睢)의 자(字)가 숙(叔)이다. 그는 중대부(中大夫)수가(須賈)를 섬기다가 진(秦) 나라로 도망하여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고 재상이 되었다. 그 후 수가가 위 나라 사신(使臣)으로 진 나라에 갔는데, 범수가 낡은 옷을 입은 누추한 모습으로 찾아가자 수가가 동정하여, “범숙은 늘 추위에 떠는 것이 이와 같은가.” 하면서 제포(綈袍)를 주었다 한다. 《史記 范睢傳》
♣ 범십삼[范十三]범 십삼은 범씨(范氏)로서 자기 배항(輩行) 가운데 13번 째에 해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범씨당감[范氏唐鑑]당감은 송(宋)의 범조우(范祖禹)가 찬한 것으로 모두 24권인데, 당 고조(唐高祖)에서부터 소제(昭帝)ㆍ선제(宣帝)까지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한 다음 아울러 평론을 가하였다.
♣ 범씨주[范氏舟]송(宋) 나라의 명상(名相)인 범순인(范純仁)을 가리킨다. 범순인은 범중엄(范仲淹)의 아들로, 자가 요부(堯夫)인데, 일찍이 기근이 들자 위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을 풀어 배로 운반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314 范純仁列傳》
♣ 범양이가[范楊二家]범양 이가는 송(宋) 나라 때에 특히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높았던 범성대(范成大)와 양만리(楊萬里)를 합칭한 말이다.
♣ 범염[范冉]후한(後漢) 때 지사(志士)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시루에서는 티끌이 일고 솥에서는 물고기가 산다는 노래까지 지었다.
♣ 범영시[泛潁詩]소동파(蘇東坡)가 조정에서 쫓겨나 영수(潁水)에서 뱃놀이하면서 지은 시로, 그의 시집 34권에 ‘범영(泛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 범옹[范翁]범옹은 이수준(李壽俊)의 별호임. 이제신(李濟臣)의 아들로 자는 태징(台徵), 호는 용계(龍溪)ㆍ지범재(志範齋)이며 성혼의 문인이다. 이수준은 동지사(冬至使)로 명 나라에 다녀오던 중 3월에 봉산(鳳山)에서 죽었는데, 이때 48세였다.
♣ 범옹[泛翁]신숙주(申叔舟)의 호이다. 신숙주는 세종 24년(1442)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으며, 이때 본 것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하였다.
♣ 범왕가[梵王家]불교 사찰을 말한다.
♣ 범왕궁[梵王宮]사바 세계를 지키는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대범천왕(大梵天王)의 궁전인데, 여기서는 절을 뜻한다.
♣ 범장소거[范張素車]소거는 흰 천을 씌운 수레이며, 범장(范張)은 후한(後漢) 때 사람인 범식(范式)과 장소(張劭)이다. 범식과 장소는 친하게 지냈는데, 장소가 죽어 장사 지낼 때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式》
♣ 범조[凡鳥]봉(鳳) 자를 분해하면 범상한 새[凡鳥]가 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서로 친하여 언제나 생각만 나면 천리라도 달려가곤 했었다. 어느 때 여안이 혜강을 찾았으나 집에 있지 않고, 그 아들 희(喜)가 나와 맞이하자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문 위에다 봉(鳳) 자를 써놓고 갔는데 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좋아했다.” 하였다.
봉이 아니라 범조, 곧 보통 새라는 뜻으로, 혜희를 폄하하는 말인데 친구 방문의 고사로 흔히 쓰인다.
♣ 범존초망[凡存楚亡]옛날 강대국인 초(楚) 나라 임금이 약소국인 범(凡) 나라 임금과 함께 앉아있을 때, 초왕의 신하가 “범 나라는 망한다.”는 말을 세 번이나 하므로, 범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범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의 존재를 잃게 하지는 못한다. 범 나라가 망하여도 나의 존재를 잃게 하지 못한다면, 초 나라의 존재하는 것 또한 계속 보존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범 나라가 애당초 망한 것도 아니요, 초 나라가 애당초 존재한 것도 아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외형적인 존망(存亡)은 진아(眞我)와는 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莊子 田子方》
♣ 범중엄[范仲淹]한기와 쌍벽을 이루었던 송조의 명신. 자(字)는 희문(希文). 《宋史 卷三百十四》
♣ 범지화[梵志華]불법을 구할 뜻을 지닌 자에게 설법하는 것.
♣ 범채[范蔡]범수(范睢)와 채택(蔡澤)으로 전국시대 인물들이다.
♣ 범초[凡楚]춘추 시대 강대국인 초 나라와 그의 속국인 범 나라를 합칭한 말.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초왕(楚王)이 범군(凡君)과 함께 앉았을 때 초왕의 좌우에서 ‘범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자, 범군이 말하기를 ‘우리 범 나라가 망한다 해도 내 자신의 존재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초 나라가 존재하는 것도 결국 존재하는 것이 되지 못하니, 이것으로 본다면 범 나라가 애당초 망한 것이 아니요 초 나라도 애당초 존재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원 뜻은 즉 존망(存亡)의 진리를 판정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강자와 약자, 또는 나아가서 온 세상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 범초개호래[凡楚皆蒿萊]춘추 시대 강대국인 초(楚) 나라 임금과 약소국인 범(凡) 나라 임금이 사생존망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즉 강자와 약자의 뜻으로 쓴 것이다. 《莊子 田子方》
♣ 범초존망[凡楚存亡]초왕(楚王)과 범군(凡君)이 마주 앉아 사생 존망의 진위(眞僞)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데서 온 말인데, 자세한 것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나타나 있다.
♣ 범택부가[泛宅浮家]배를 집으로 삼아 물 위를 떠돌며 사는 생활을 말한다. 장지화가 안진경(顔眞卿)에게 “나의 소원은 배를 집 삼아 물 위에 살면서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願爲浮家泛宅 往來苕霅間]”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新唐書 隱逸傳 張志和》
♣ 범파정[泛波亭]강원도 홍천현(洪川縣) 동남쪽의 남천(南川)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 범패[梵唄]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 양고승전(梁高僧傳) 경사편론(經師篇論)에, “天竺方俗 凡歌詠法言 皆稱爲唄 至於此土 詠經則稱爲轉讀 歌讚則號爲梵唄”라고 보임.
♣ 범포한[范袍寒]전국 때 위(魏)의 범수(范睢 范叔)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고자질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쫓겨나서 진(秦)에 간 뒤에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그때에 수가가 진(秦)에 사신(使臣)으로 왔다. 범수는 남루한 옷으로 수가를 찾았다. 그가 보고 가엾게 여겨, “범수 몹시도 춥겠구나.” 하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도포[綈袍]를 벗어 주었다. 《史記 范睢傳》
♣ 범한[范韓]송 나라 때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가 변방에 나가 서하(西夏)를 막으니 군중에서 그들을 칭송하여 노래하기를, “군중에 한 범이 있으니, 서적이 듣고 놀래어 간담이 깨어지네. 군중에 한 한이 있으니 서적이 듣고 마음과 간담이 서늘하리.[軍中有一 范西賦聞之驚破謄軍中有一韓 四賦聞之心膽寒]”하였다.
♣ 범희문[范希文]범희문(范希文)은 송(宋) 나라의 명상(名相)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희문은 그의 자이다. 범중엄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옛날 어진 사람은 사물(事物)로써 기뻐하지 않고 자신의 일로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江湖)의 먼 곳에 있을 적에는 임금을 걱정하는 것이라, 조정에 나아가도 근심이요 물러나와도 근심이니, 그렇다면 어느 때에 즐거울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천하의 근심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남보다 뒤에 즐긴다.’는 것이다.”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법가[法家]관자(管子)⋅한비자(韓非子)⋅상앙(商鞅) 등.
♣ 법가[法駕]어가(御駕)의 이칭. 임금이 거둥할 때 타는 수레로, 문묘(文廟)ㆍ단향(壇享)ㆍ전시(殿試) 등에 나아갈 때 사용한다.
♣ 법국은사[法局隱士]은사이기는 하지만 조정에서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은사를 말함. 법국은 ‘뻐꾹’이라는 말인데,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적에 술래가 오래도록 못찾으면 ‘뻐꾹’하는 소리를 내어 빨리 자기를 찾으러 오게 하는 놀이를 빗대어 한 말.
♣ 법궁[法宮]경복궁의 별칭(別稱).
♣ 법라[法螺]불교에서 수험도(修驗道)에 쓰는 일종의 악기. 사미라(梭尾螺)의 껍데기에 금속(金屬)으로 만든 취구(吹口)를 달았는데 경행(經行)ㆍ법회(法會) 때에 사용한다.
♣ 법랍[法臘]불교에서는 중이 된 뒤 연수(年數)를 헤아려서 법랍(法臘)이 몇 살이라고 한다.
♣ 법뢰[法雷]불법(佛法)을 우레에 비유한 말.
♣ 법뢰음[法雷音]여기선 범패(梵唄), 옥명(玉明)이 취라(吹螺)에 능(能)했으므로 나화상(螺和尙)의 별명이다. 《金馹孫, 釣賢堂記》
♣ 법륜[法輪]부처의 교법(敎法)을 이름. 불법(佛法)의 힘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산악(山岳)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보륜(寶輪)의 힘에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수레바퀴가 부딪치는 것을 갈아서 부수듯 불법이 모든 번뇌(煩惱)를 굴려서 부순다는 뜻인데, 대개 설법(說法)하는 것을 법륜을 굴린다고 말한다.
♣ 법문[法門]원래 불가(佛家)의 용어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준말인데,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독보적인 경지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으로 되었다.
♣ 법부[法部]법곡(法曲). 당(唐) 나라 때 사원(寺院)에서 연주하던 악곡(樂曲)의 이름. 법곡이 당(唐) 나라에서 일어났는데, 당 명황(唐明皇)은 법부곡을 몹시 좋아하여 좌부기(坐部伎) 자제(子弟) 3백 인을 선발하여 이원(梨園)에서 법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 곡 중에 파진악(破陣樂)ㆍ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ㆍ장생악(長生樂)ㆍ적백도리화(赤白桃李花)가 있다. 《唐書 禮樂志》
♣ 법부주함소[法部奏咸韶]궁중의 정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함지(咸池)는 요(堯) 임금의 음악이고 소호(韶頀)는 순(舜) 임금의 음악이다. 법부는 원래 법곡(法曲)으로서 악곡(樂曲)의 이름인데, 여기에서는 음악을 담당하는 부서(部署)의 뜻으로 쓰였다.
♣ 법부현[法部絃]아름다운 음악을 말한다. 법부는 당 현종(唐玄宗) 때의 이원성(梨園省)을 말한다. 현종은 법곡(法曲)을 무척 좋아하여 이원성을 두어 전적으로 법곡을 익히게 하였다.
♣ 법사[法事]법사는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공양(供養) 등의 행사를 말한다.
♣ 법삼장[法三章]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통일을 한 후 제정한 삼장(三章)의 법률. 진(秦)나라의 가혹했던 법률을 모두 폐지해버리고, 살인, 상해, 절도에 대해서만 지극히 간략하게 삼장으로 제정하여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 법성퇴사[法星退舍]법성은 곧 형혹성(熒惑星)을 가리키는데 이 별이 형법을 맡았다 하여 법성이라 이른다. 이 별이 나타나면 재앙이 생긴다고 하는데, 춘추 시대 송 경공(宋景公) 때에 형혹성이 나타나자 경공이 자위(子韋)에게 물으니, 자위가 “재앙이 임금에게 내렸습니다. 그러나 재상에게로 옮길 수는 있습니다.” 하였다. 경공이 “재상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니 안 된다.” 하자, 자위가 “백성에게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백성이 죽어버리면 내가 누구를 데리고 임금노릇을 하겠는가.” 하였다. 자위가 “해[歲]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하자, 경공이 “흉년이 들면 백성이 굶어죽으리니, 백성 죽인 사람을 누가 임금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자위가 “임금께서 덕 있는 말씀을 세 번 하셨으니, 하늘이 반드시 임금에게 세 번 상을 내리시어 형혹성이 반드시 세 자리[三舍] 옮길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어 무사했다 한다. 《呂氏春秋傳》
♣ 법식[法食]불가어인데 불법에 일중식(日中食)을 말함. 삼매경(三昧經)에 “佛與法惠 菩薩說四時食 午時爲法食"이라 하였음.
♣ 법안[法眼]불교에서 말하는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 보살이 중생(衆生)에서 벗어나 일체의 법문(法門)을 비추어 보는 눈을 말한다.
♣ 법언[法言]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논어(論語)를 모방하여 지은 책. 내용은 학행(學行)ㆍ수신(修身)ㆍ문신(問神) 등 총13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공자를 높이고 왕도(王道)를 담론한 것임. 그 주석서에는 진(晉) 나라 이궤(李軌)와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주가 있음. 이 말은 문신(問神) 편에 보임.
♣ 법연[法筵]예식을 갖추고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자리로서 조정을 뜻함.
♣ 법온유하[法醞流霞]법온(法醞)은 궁중에서 만든 술이고, 유하주(流霞酒)는 신선의 술이다.
♣ 법왕[法王]절에서 받드는 부처를 말한다.
♣ 법운[法雲]불법(佛法)이 일체(一切)를 두루 덮는다는 뜻인데, 전하여 승려를 가리킨 말이다.
♣ 법유[法乳]불가(佛家)의 용어인데 정법(正法)의 자미(滋味)로 도를 배우는 자의 법신(法身)을 기르기를 마치 모유(母乳)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한다 해서 이른 것임. 곧, 스승에게 불법(佛法)을 받는 것이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젖을 받아먹음과 같다는 말이다.
♣ 법의[法衣]임금의 예복을 말한다.
♣ 법전[法殿]궁금(宮禁)의 별칭. 국법이 나오는 곳이므로 한 말임.
♣ 법종[法從]임금의 수레를 수행하는 사람. 임금의 행차에 호종(扈從)하는 일을 말한다.
♣ 법좌[法座]본디 부처가 설법하는 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제왕이 있는 자리를 뜻한다.
♣ 법해[法海]법해는 불법(佛法)을 말한다.
♣ 법희[法喜]법열(法悅), 불법을 듣고 희열을 느끼는 것. 즉 진리에 도취되어 일어나는 기쁨을 말한다. 유마경(維摩經)에 “법희를 아내로 삼고, 자비를 딸로 삼는다[法喜以爲妻 慈悲以爲女]”라고 하였으며, 소식(蘇軾)의 시 가운데 “室空惟法喜 心定有天游”라는 구절과 “雖無孔方兄 顧有法喜妻”라는 구절이 있다.
♣ 벽[壁]별 이름인데 천하의 문서(文書)를 주관한다고 한다.
♣ 벽강[辟彊]임금의 호칭이다.
♣ 벽계[碧雞]벽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물(神物)이다.
♣ 벽계금마[碧鷄金馬]한선제(漢宣帝)가 왕포(王褒)를 촉(蜀)나라에 보내어 벽계(碧鷄)ㆍ금마(金馬)의 신(神)을 맞아 오게 하였다.
♣ 벽계방[碧鷄坊]벽계방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度)시내의 동네 이름이다. 현종의 안녹산의 반군을 피해서 사천으로 가서 성도에 있었다.
♣ 벽곡[辟穀]도술의 하나로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ㆍ대추ㆍ밤 등을 조금씩 먹고 사는 방법. 논형(論衡) 도허(道虛)에 “세상에서는 곡식을 먹지 않는 이를 도술하는 사람이라 한다.” 하였다. 또는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생식(生食)만 하는 것을 말한다.
♣ 벽골[碧骨]벽골은 김제(金堤)의 고호이다.
♣ 벽골제[碧骨堤]백제(百濟)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김제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대의 관개용(灌漑用) 고대 저수지이다.
♣ 벽기가[癖嗜痂]옛날 유옹(劉邕)이 부스럼 딱지를 즐겨 먹었는데,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다 기호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한다. 특이한 기호를 뜻한다. 《宋書 劉穆之傳》
♣ 벽라[薜蘿]담쟁이나 칡덩굴 따위 또는 칡덩굴로 짠 베를 가리킨다. 전하여 은자(隱者) 또는 은자의 의복을 말한다.
♣ 벽라[薜蘿]벽(薛)은 줄사철나무이고 라(蘿)는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식물인 여라(女蘿)인데 그 잎과 줄기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흔히 은자(隱者)의 행색을 뜻한다.
♣ 벽라의[薜蘿衣]벽(薜)은 줄사철나무이고 라(蘿)는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식물인 여라(女蘿)인데 그 잎과 줄기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흔히 은자(隱者)의 행색을 뜻한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산귀(山鬼)의 “벽려로 옷 해 입고 여라의 띠를 둘렀도다.[若有人兮山之阿 披薜荔兮 帶女蘿]”라 한 데서 온 말이다.
♣ 벽락[碧落]벽락은 하늘이라는 뜻의 도가(道家) 용어이다.
♣ 벽락관조차시랑[碧落官曹借侍郞]안연(顔淵)과 복상이 지하(地下)에서 수문랑(修文郞)이 되었다 하고, 당 나라 이장길(李長吉)은 천상(天上)에서 백옥루(白玉樓) 기문(記文)을 지으려고 불러 갔다는 말이 있으므로 여기서도 이렇게 말한 것이다.
♣ 벽락시랑[碧落侍郞]진(晉) 나라 심희(沈羲)가 백성을 위해 재해(災害)를 없애주고 병을 고쳐 주면서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자, 천신(天神)이 감동한 나머지 그를 하늘로 영접하여 벽락시랑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神仙傳 沈羲》
♣ 벽려[薜荔]만목과(蔓木科)에 속하는 상록수(常綠樹)인데, 은자(隱者)의 옷을 말한다. 초사(楚詞)에 “벽려를 입고 여라를 띠었다[被薜荔兮帶女蘿]" 하였다.
♣ 벽려의[薜荔衣]벽려는 향기 나는 나무 덩굴 이름으로, 은자(隱者)가 입는 옷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벽려의 떨어진 꽃술 꿰어 몸에 두른다.[貫薜荔之落蘂]”고 하였다.
♣ 벽력수[霹靂手]공무 처리에 비상한 능력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배염지(裵琰之)가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수백 통의 문건들을 순식간에 처리하여 끝내버리자 사람들이 벽력수(霹靂手)라고 불렀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舊唐書 裵漼傳》
♣ 벽력화선[霹靂火仙]송 나라는 화덕(火德)의 운을 탔다 하는 음양설이 있으므로, 여기서 벽력화선은 송 나라를 대표하는 신령이요, 금(金) 나라가 송 나라를 빼앗았으므로 화(火)를 이기는 수덕진군은 금나라를 대표하는 신령이다.
♣ 벽릉풍[稫稜風]빽빽이 들어선 벼논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을 이름. 박삭풍
♣ 벽립만인[壁立萬仞]세설신어(世說新語)에, “王公目太尉 巖巖淸峙 壁立千仞”이라는 것이 보임. 절벽이 만길이나 된다는 뜻으로 즉 사람의 기개를 비유함.
♣ 벽문[璧門]한 무제가 지은 건장궁(建章宮)의 정문인데 임금의 궁문을 뜻한다.
♣ 벽보[璧堡]욋가지를 세우고 그 안팎에다 벽 모양으로 진흙을 발라 놓은 보루(堡壘)를 말한다. 본격적인 성(城)을 쌓지 못할 경우 간단하게 이것을 쌓고 성 대신으로 썼는데, 설비가 워낙 약하기 때문에 자주 무너져서 개축을 해야 하는 등 문제가 많았었다.
♣ 벽복[薜服]벽라(薜蘿)로 엮어 만든 옷을 이르는데, 전하여 은자(隱者)의 옷을 의미한다.
♣ 벽사[甓社]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벽사호(甓社湖)를 이름. 벽사호 속에는 크기가 주먹만한 구슬이 있어 빛이 10여 리를 비춘다는 전설이 있다. 송(宋) 나라 손각(孫覺)이 벽사호(甓社湖)에서 밤에 찬란히 빛나는 큰 구슬을 보고 그 해에 등제(登第)하였으므로, 흔히 과거 급제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게 되었다. 그 구슬을 인재(人材)에 비유하기도 한다.
♣ 벽사[碧紗]당(唐) 나라 때 왕파(王播)가 빈궁하여 양주(揚州)의 혜소사(惠昭寺)에서 얻어먹고 있을 적에 중들이 그를 싫어하여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종을 치곤 하므로, 그가 시를 한 수 지어 벽에 붙여 두고는 그곳을 떠났다가, 뒤에 그가 재상이 되어 다시 그 절을 찾아가 보니, 자기가 지어 붙여 놓았던 시를 푸른 깁에 잘 싸서 보관하고 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벽사롱[碧紗籠]무언(撫言)에 “왕파(王播)가 젊어서 반고(盤孤)하여 양주(揚州) 목란원(木蘭院)에 붙여 있으면서 중과 함께 재식(齋食)하니 중이 싫어했다. 뒤에 왕파가 이 땅을 진수(鎭守)하게 되어 옛날에 노니던 곳을 찾아가 보니, 지난날 읊은 시(詩)들이 모두 벽사(碧紗)로 감싸져 있으므로 왕파는 다시 시를 짓기를 ‘삼십년이 지나도록 먼지가 가득터니, 이제야 비로소 벽사로 감쌌구려.[三十年來塵撲面 而今始得碧紗籠]’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벽사롱[碧紗籠]척언(摭言)에 “왕파(王播)가 외롭고 가난하여 일찍이 양주(揚州) 목란원(木蘭院)의 객이 되어 중을 따라 재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중이 싫증을 내어 마침내는 재가 파한 뒤에야 종을 쳤다. 그 후 20년 뒤에 왕파는 중한 지위로부터 양주 태수(揚州太守)로 나가 지난날 지은 시의 ‘上堂已散各西東 慙愧闍黎飯後鐘’이라는 글귀를 찾아보니 벌써 푸른 비단으로 감싸놓았다. 그래서 왕파는 끝구를 지어 달기를 ‘二十年來塵撲面 而今始得碧紗籠’이라 하였다.” 하였음.
♣ 벽사창[碧紗窓]얇은 청색 깁을 바른 창, 즉 여인의 침실을 말한다.
♣ 벽사천록[辟邪天祿]두 짐승의 이름이다. 집고록(集古錄) 후한천록벽사자(後漢天祿辟邪字)에 “종자(宗資)는 남양(南陽) 안중(安衆) 사람인데, 그의 무덤에 돌로 만든 짐승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천록이라 하고 하나는 벽사라 한다.” 하였다.
♣ 벽사홍수[碧紗紅袖]송(宋) 나라 때 위야(魏野)가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절에 가 놀면서 똑같이 시를 써 붙여 놓았다가, 뒤에 다시 함께 그 절을 찾아가 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관하고 있고, 자신의 시는 먼지가 잔뜩 낀 채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을 따라갔던 관기(官妓)가 붉은 소매로 그 먼지를 털어 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벽산거[碧山居]한가로이 물러나 책이나 읽고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백(李白)이 벽산(碧山) 아래에서 독서하였는데, “問余何意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이라는 산중문답(山中問答) 시의 구절은 특히 유명하다.
♣ 벽상사[壁上蛇]동진(東晉) 때,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나눌 적에 벽에 뱀모양을 조각하여 칠해 놓은 각궁(角弓)을 놓았는데 그것이 친구의 잔 속에 비치자 친구는 뱀이 잔 속에 든 줄 알고 마음이 섬뜩하여 병이 들었다 한다. 《晉書 卷四十三 樂廣傳》
♣ 벽선[碧鮮]대나무를 가리킨다. 그 색깔이 벽옥(碧玉)처럼 선윤(鮮潤)한 데에서 나온 이칭(異稱)이다.
♣ 벽성[碧城]김제(金堤)의 옛 이름이다.
♣ 벽송정[碧松亭]서울 성균관(成均館) 북쪽에 있었던 정자. 소나무가 울창했다.
♣ 벽수[璧水]벽수는 물이 빙 둘러 있는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원래 주대(周代) 귀족 자제들의 교육 기관으로서 보통 성균관을 뜻하기도 한다.
♣ 벽수[壁宿]벽수는 28수의 하나로 현무(玄武) 7성(星)의 끝 별이다. 관상현점(觀象現占)에 “벽성(壁星)의 두 별은 동벽 도서지부(東壁圖書之府)로서 도서를 맡은 별이다.” 하였다.
♣ 벽안[碧眼]고승(高僧)은 벽안(碧眼)이 많다 한다.
♣ 벽안도리[碧眼闍梨]달마대사(達摩大師)를 벽안호승(碧眼胡僧)이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 벽양묵지광란[闢楊墨之狂瀾]이단(異端)의 학문을 말한다. 양주는 위아설(爲我說)을, 묵적(墨翟)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여 유학자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다.
♣ 벽양후[辟陽侯]벽양후는 심이기(審食其)의 봉호로 여씨(呂氏)와 친분이 깊은 그를 육가(陸賈)가 주선하여 평원군(平原君)과 교제를 갖게 하고 도와준 것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七 酈生陸賈列傳》
♣ 벽여[薜荔]줄사철나무인데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상록 만목(常綠蔓木)이다. 산과 들에 자생하는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 벽온단[辟瘟丹]섣달 그믐날 밤 벽온단을 술에 타서 마시면 다음해 일 년 동안 온역(瘟疫)을 피한다는 전설이 있다.
♣ 벽온단[辟溫丹]정월 초하루 새벽에 벽온단(辟溫丹)을 먹으면 일 년간 온역(瘟疫)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 벽옹[辟雍]주(周) 나라 때 천자(天子)가 도성(都城)에 세운 태학(太學)으로, 주위가 벽(璧)과 같이 둥글고 물이 둘러 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 아, 즐거운 벽옹이여.”라 했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는 “소학(小學)은 공궁(公宮) 남쪽 왼편에 있고, 태학은 교외에 있는데, 천자는 벽옹, 제후는 반궁(泮宮)이다.”라고 하였다.
♣ 벽용[碧筩]연잎으로 만든 술잔을 뜻한다.
♣ 벽용배[碧筩杯]연엽(蓮葉)을 맞붙여 만든 술그릇이다. 《酉陽雜俎 酒食》
♣ 벽우대어선[碧藕大於船]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그곳의 연꽃은 큰 배 만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벽운[碧雲]시승(詩僧) 혹은 시승의 작품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 송(宋)의 시승인 혜휴(惠休)의 시 중에 ‘일모벽운합(日暮碧雲合)’이라는 명구(名句)가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벽운가구[碧雲佳句]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강엄(江淹)이 지은 ‘혜휴 상인 원별시(惠休上人怨別詩)’에 “해 저물녘 푸른 구름 서로들 만나는데, 그리운 님 왜 이다지 오지를 않나.[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라는 구절이 있다.
♣ 벽운모[碧雲暮]육조(六朝) 때에 시승(詩僧) 혜휴(惠休)의 시에, “해 저물고 푸른 구름 합했는데 가인이 오지 않네[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 하는 명구(名句)가 있다.
♣ 벽운편[碧雲篇]강문통집(江文通集) 권4 휴상인원별시(休上人怨別詩)의 “저물녘 푸른 구름 뭉쳐 있는데 고운 사람 오히려 아니 오누나[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에서 나온 말로, 멀리 헤어져 있는 정겨운 사람을 그리는 뜻으로 지은 글을 뜻한다.
♣ 벽운하[碧雲騢]벽운하는 송 태종(宋太宗)의 어마(御馬)로 입가에 푸른 구름무늬가 있었으므로 명명하였는데, 하루에 천 리를 달렸고 태종이 죽자 따라 죽었다. 《玉壺淸話》
♣ 벽운합[碧雲合]친구를 그리워하는 말이다. 강엄(江淹)의 시에 “해 저물어 푸른 구름 모이는데, 가인은 자못 오지를 않누나[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 하였다.
♣ 벽유[碧油]청유막(靑油幕)과 같은 말로, 대장군의 막사를 뜻한다.
♣ 벽유거[碧油車]청록색의 기름을 바른 수레로, 호화로운 수레를 뜻한다.
♣ 벽유당[碧油幢]군막(軍幕)에 쓰이는 벽색 유막(碧色油幕)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군막을 말한다.
♣ 벽유재자[碧油才子]막부(幕府)의 종사관(從事官)이라는 뜻으로, 감사를 수행하여 따라가는 이 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벽유는 청유(靑油) 혹은 유막(油幕)으로도 쓰는데, 막부를 지칭한다.
♣ 벽의[薜衣]은자(隱者)의 옷을 뜻함.
♣ 벽제고[鷿鵜膏]벽제는 농병아리과에 속하는 물새. 이 새의 기름을 도검(刀劍)에 바르면 녹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 벽진[碧珍]성주(星州)의 고호임.
♣ 벽체[碧砌]푸른 섬돌.
♣ 벽통[碧筒]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정각(鄭慤)이 삼복중(三伏中)에 피서(避暑)하면서 연잎[蓮葉]에다 술 서되를 담아서 잠(簪)으로 연잎의 줄기를 찔러서 마시면 술 향기가 맑고 시원하였는데, 그것을 벽통주(碧筒州)라 하였다.
♣ 벽통배[碧筩桮]벽통배는 여름에 연잎으로 만든 술그릇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각(鄭慤)이 한창 더운 여름에 역성(歷城)의 북쪽에 있는 사군림(使君林)에서 손님들과 어울려 피서하면서 줄기가 달린 커다란 연잎에 술 두 되를 담고 잎과 줄기가 서로 통하게 비녀로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줄기를 코끼리의 코처럼 잡아 올려 여러 사람이 서로 돌려가며 빨아마셨다 한다. 곧 풍류가 넘치는 술자리를 말한다. 《酉陽雜俎 卷七 酒食》
♣ 벽파정[碧波亭]울산(蔚山) 팔영(八詠)의 하나로, 정포(鄭誧)와 이곡(李穀)의 시가 특히 유명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蔚山郡》
♣ 벽한서[辟寒犀]한기(寒氣)를 없애주는 나무의 이름. 유사(遺事)에 “당 현종(唐玄宗) 때 교지국(交趾國)에서 벽한서 한 그루를 진상해 왔다. 그 사신(使臣)의 말대로 금반(金盤) 위에 올려 전내(殿內)에 놓아두었는데, 빛은 황금같이 누렇고 따뜻한 기운이 사람에게 접근해 왔다. 임금이 그 까닭을 묻자 벽한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그 사신에게 상(賞)을 후히 내렸다.” 하였다.
♣ 벽한진[辟寒珍]추울 때에 그것을 집 안에 두면 추위를 모른다는 보물(寶物)이다.
♣ 벽허[碧虛]창공이나 강물을 뜻하는 시어이다.
♣ 벽혈[碧血]주(周) 나라 경왕(敬王)의 대부였던 장홍(萇弘)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한스럽게 여겨 자결을 하였는데, 그 피가 맺혀 벽옥(碧玉)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莊子 外物》
♣ 벽혈[碧血]충신 열사 등 정대한 이들이 흘린 피를 말한다. 주(周) 나라 장홍(萇弘)이 진(晉) 나라 범중행(范中行)의 난에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보관해 두니 나중에 푸른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莊子 外物》
♣ 벽환[碧環]푸른 바다가 산주변을 감돌고 있다는 것. 소식의 과내주설후망삼산시(過萊州雪後望三山詩)에 “동녘바다 푸른 고리 같으니 서북의 등주 내주를 감싸도다.[東海如碧環 西北卷鄧萊]"라 하였음.
♣ 변가상여채[便可償汝債]범성대(范成大)의 범석호집(范石湖集) 매치애사(賣癡獃詞)에 “노인께서 사신다면 돈은 아예 필요 없소, 백 년 천 년 동안 외상으로 드릴테니[兒云翁買不須錢 奉賖癡獃千百年]”라는 구절이 있다.
♣ 변계량[卞季良]조선조 초기의 문신. 세종 때 20여 년간이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면서 대부분의 국가 중요 문서를 도맡아 처리했으며 과시(科詩) 체제를 처음으로 정비했다고 함. 《世宗實錄》
♣ 변두[籩豆]제사에 쓰는 제기(祭器)이다. 예의 범절을 뜻한다.
♣ 변모[弁髦]쓸모가 없어져서 내버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동자(童子)가 관례(冠禮)를 할 때 잠깐 썼다가 관례를 마치고는 즉시 버렸다.
♣ 변발[辮髮]오랑캐를 말한다. 변발은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가운데만 남겨 뒤로 길게 늘이어 땋는 북방 민족의 풍습을 말한다.
♣ 변병비오[辨竝飛烏]시비를 가리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모두가 제가 옳다고 하나니, 누가 까마귀의 자웅을 알아낼꼬.[具曰予聖 誰知烏之雌雄]" 한 데서 온 말이다.
♣ 변복[邊腹]글을 잘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변소(邊韶)는 문학(文學)으로 매우 이름이 높았는데, 하루는 그가 낮잠을 자는 척하고 누워 있자, 그의 제자(弟子)가 혼잣말로 “변효선(邊孝先)은 배[腹]는 비대(肥大)해 가지고 글은 안 읽고 낮잠만 자는군.” 하고 조롱하므로, 변소가 그 말을 듣고는 즉시 응답하기를 “변효선의 비대한 배는 곧 오경(五經) 상자이다.” 하였다.
♣ 변상[變相]불가의 말로 초상화를 가리킨다.
♣ 변상벽[卞尙璧]변상벽은 숙종 시대의 화가로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는데, 특히 닭ㆍ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다.
♣ 변성[邊聲]오랑캐족이 부르는 노래 또는 변방 진영 군사들의 소리를 말한다.
♣ 변수[卞隨]은자(隱者)로서, 탕(湯)임금이 천하로써 양보하였으되 거절하고 주수(椆水)에 투신 자살했음.
♣ 변어로[辨魚魯]어(魚)와 노(魯)의 글자가 비슷하여 무식한 자가 잘 분별하지 못한다.
♣ 변풍[變風]시경(詩經) 대서(大序)의 국풍(國風) 가운데 패(邶)에서부터 빈(豳)까지의 13국(國)에서 지어진 시 작품을 말하는데, 시경(詩經) 대서(大序)에 “왕도(王道)가 쇠하고 예의가 없어지고 정치가 잘못되면서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였다.
♣ 변풍지호예의[變風止乎禮義]시경(詩經)에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의 구별이 있는데, 변풍은 음란하고 원망하는 시가 많다. 그러나 그것도 뜻이 마침내는 예의(禮義)에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 한다.
♣ 변하금람[汴河錦纜]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변하(卞河)에 배를 띄워 광릉으로 놀러가면서, 많은 배에 비단 뱃줄을 늘이고 갖은 호화를 부리면서 백성을 못살게 괴롭혔으므로,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하였다.
♣ 변화[卞和]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형산(荊山)에서 옥돌을 발견하고 초(楚) 나라 왕에게 바쳤다는 사람이다. 이 옥돌을 가공한 결과 보옥(寶玉)을 얻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화씨벽(和氏璧)으로 일컫게 되었다 한다. 《韓非子 和氏》
♣ 변화무쌍[變化無雙]더없이 변화가 많음.
♣ 변화삼헌[卞和三獻]참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당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산속에서 옥돌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다가 왼쪽 발을 잘리고, 무왕(武王)에게 바쳤다가 다시 오른쪽 발을 잘린[刖] 뒤, 세 번째로 문왕(文王)에게 바쳐 진가(眞價)를 인정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 변화읍[卞和泣]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서 초 문왕(楚文王)에게 바쳤는데, 문왕이 옥공(玉工)을 불러서 보였더니, 돌이요 옥이 아니라 하므로 변화에게 형벌을 주었더니 변화는 옥을 안고서 형산에서 울었다.
♣ 변화헌옥삼견월[卞和獻玉三見刖]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산중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가 좌우의 발목을 모두 잘리고 원통해서 울었다는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 변흑초[變黑貂]전국 시대에 소진(蘇秦)이 진왕(秦王)에게 열 차례나 글을 올렸으나 설득시키지 못한 채 흑초구(黑貂裘)가 헐고 백근의 황금이 다 떨어져서 일단 되돌아온 것을 빗대어 인용한 것이다.
♣ 별[鷩]꿩과에 속하는 새 이름. 목은 푸르고 등은 노랗고 배는 붉고 색깔이 매우 선명함.
♣ 별가[別加]벼슬의 자급을 올리는데 있어 나라에서 은상(恩賞)이 있어 주는 것을 별가(別加)라 한다.
♣ 별부[別付]북로(北路) 연변의 기생들이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원들과 동침하는 것을 말한다.
♣ 별서왕유[別墅王維]당 나라 사람으로 망천(輞川)에 별장이 있었는데,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그 풍경을 노래한 왕유의 시로도 유명하다.
♣ 별세[別歲]송년(送年)과 같음.
♣ 별승[別乘]태수(太守)의 다음 자리인 별가(別駕)의 별칭이다. 즉 조선(朝鮮) 시대 판관(判官)에 해당한다.
♣ 별시[鼈廝]소식(蘇軾)의 동파집(東坡集) 광리왕소(廣利王召)에, “내 일찍이 취하여 누워있는데 꿈에 어두귀신(魚頭鬼身)으로 생긴 자가 해중(海中)으로부터 와서 광리왕(廣利王)이 부른다고 말하여 내가 따라서 수정궁전(水精宮殿)에 나아갔었다. 광리는 패검관복(佩劍冠服)으로 나오고 뒤이어 동화진인(東華眞人) 및 남명부인(南溟夫人)이 나와 한 발 남짓한 교초(鮫綃)를 내놓으면서 나에게 명하여 시를 쓰라고 하기에 나는 부(賦)하기를 ‘天地雖虛廓 惟海最爲大 聖王皆祀事 位尊河伯拜 祝融爲異號 怳惚聚百怪……若得明月珠 可償逐客債’라 하여 써서 올리니 광리 제선(廣利諸仙)이 보고 모두 묘(妙)를 칭(稱)하는데, 옆에 한 관잠자(冠簪者)가 있어 별상공(鼈相公)이라 이르며 진언(進言)하기를 ‘객(客)이 기휘(忌諱)를 피할 줄 모릅니다. 축융(祝融)이란 글자가 왕(王)의 휘(諱)를 범했습니다.’ 하자, 왕이 대로(大怒)하였다. 나는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가는 곳마다 상공(相公)의 시괴(廝壞)를 당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음.
♣ 별재위체[別裁僞體]두보(杜甫)의 희위육절(戲爲六節)에 “위체를 구별하여 제거하니 풍아에 가깝구나. 갈수록 많은 스승 이것이 너의 스승이네[別裁僞體親風雅 轉益多師是汝師]" 한 데서 온 말로, 진체(眞體)가 아닌 위체(僞體)를 제거하여 선현(先賢)의 풍아(風雅)에 가까워짐을 뜻한다.
♣ 별재집[別裁集]청(淸) 나라 학자 심덕잠(沈德潛)이 찬(撰)한 오조시별재집(五朝詩別裁集)을 이름이다.
♣ 별족아권[鱉足兒拳]고사리의 모양이 마치 자라의 발이나 어린애의 주먹과 같이 생겼으므로, 고사리를 비유한 말이다.
♣ 별천지[別天地]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시에 “복사꽃 아득히 물에 떠서 흐르는 곳,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펼쳐졌네.[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다.
♣ 별파[撇波]서법(書法)의 별과 파를 말하는데 별은 왼쪽으로 삐친 것이고 파는 파임임.
♣ 별학[別鶴]악부(樂府)의 금곡(琴曲) 이름이다. 상릉목자(商陵牧子)가 아들을 두지 못해 장차 개취(改娶)하려 할 적에 아내가 슬피 노래하는 것을 듣고서 지었다고 한다. 《古今注 卷中 音樂》
♣ 별학조[別鶴操]별학조는 악부(樂府) 금곡(琴曲)의 이름으로, 상릉(商陵)의 목자(牧子)가 장가든지 5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그의 부형(父兄)이 그를 다시 장가들이려 하자, 그의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 밤중에 일어나 문에 기대어 휘파람을 슬피 불므로, 목자가 그 소리를 슬피 여겨 거문고를 가져다가 노래한 것을 후인이 취하여 악장(樂章)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 병[病]매우 피곤하다.
♣ 병[邴]병 땅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山東) 비현(費縣)지방이다.
♣ 병가상사[兵家常事]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보통의 일. 실패는 흔히 있는 일이어 낙심할 것이 없다는 뜻.
♣ 병간공작[屛間孔雀]당(唐) 나라 두 황후(竇皇后)의 아버지 의(毅)가 일찍이 비범한 자기 딸을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하여, 병풍 사이에 공작(孔雀) 두 마리를 그려놓고 청혼자(請婚者)들에게 화살 두 개씩을 쏘아서 공작의 눈을 맞힌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던바, 수십 명의 청혼자가 모두 그 눈을 맞히지 못했는데, 당 고조(唐高祖)가 최후에 활을 쏘아 각각 눈 하나씩을 맞힘으로써 마침내 두 황후가 고조에게 시집을 가게 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竇皇后傳》
♣ 병간금작[屛間金雀]당 고조(唐高祖)의 후비인 두 황후(竇皇后)의 아버지 의(毅)가 일찍이 자기의 비범한 딸을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 하고, 병풍 사이에 공작(孔雀) 두 마리를 그려 놓고 청혼해 온 자들에게 화살 두 개씩을 쏘아 공작의 눈을 맞힌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수십 명의 청혼자가 모두 활을 쏘았으나 다 맞히지 못했는데, 최후에 활을 쏜 당 고조가 두 눈을 쏘아 맞힘으로써 마침내 두 황후가 당 고조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병경치뢰[甁罄恥罍]시경(詩經) 대아(大雅) 육아편(蓼莪篇)의 “병술은 언제든지 항아리에서 공급되는 것이므로 병술이 완전히 없어짐은 항아리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甁之罊矣 維罍之恥]"라는 대목에서 인용된 문자다.
♣ 병곡[並轂]함께 달리다.
♣ 병길[丙吉]병길은 노국(魯國)사람으로 자는 소경(少卿)인데, 한 나라 때 선제(宣帝)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조부 위태자(衛太子)의 일로 하옥되었을 때 정위감(廷尉監)으로 있으면서 그를 살려내었고, 소제(昭帝)가 죽자 대장군 곽광(霍光)에게 건의, 선제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박양후(博陽侯)에 봉해지고 승상을 지냈다.
♣ 병덕[秉德]그 독립의 덕을 잡고 있어 사사로운 마음에 흔들리지 않음.
♣ 병두국[幷頭菊]줄기 하나에 두 송이 꽃이 핀 국화.
♣ 병란[兵欄]무기(武器)를 걸어두는 틀. 한서(漢書) 흉노전에, “矢四發 棨戟十……”라고 보이고, 그 주에, ‘棨戟 有衣之戟也 棨音啓’라 하였음.
♣ 병롱승재물정참[病聾丞在勿停參]한(漢) 나라 때 황패(黃霸)가 영천태수(潁川太守)로 나갔을 적에, 허씨(許氏) 성을 가진 아전이 늙어 귀가 어두웠으므로, 독우(督郵)가 그를 쫓아내자고 황패에게 말하자, 황패가 말하기를 “허승(許丞)은 청렴한 아전으로, 비록 늙었으나 빈객 접대도 잘하니, 내보내지 말고 그를 잘 도와주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九》
♣ 병만용[邴曼容]만용(曼容)은 한(漢) 나라 병단(邴丹)의 자(字)이다. 항상 자신의 덕을 닦으며 관직 생활을 하는 중에 6백 석 이상의 자리에는 결코 몸담으려 하지 않다가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바로 사직을 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漢書 卷72》
♣ 병몽[帲幪]장막으로 차일과 휘장 등을 말한다. 위에 치는 것을 병, 덮는 것을 몽이라 한다.
♣ 병무[騈拇]변무는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과 합해져서 완전히 하나처럼 되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莊子 騈拇》
♣ 병문원[病文園]병든 효문원령(孝文園令). 한(漢) 나라 때 효문원령이 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소갈증(消渴症)을 앓았으므로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천자(天子)를 따라 장양궁(長楊宮)에 이르러 사냥을 하였던바, 이 때 천자가 한창 스스로 웅시(熊豕) 등의 야수(野獸)를 쫓아 잡기 좋아하였으므로, 사마상여가 상소(上疏)하여 천자를 간(諫)하였다. 《漢書 卷五十七》
♣ 병문졸속[兵聞拙速]용병(用兵)할 때는 졸렬하여도 빠른 것이 좋다는 뜻의 고사성어.
♣ 병발[甁鉢]중이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
♣ 병부[秉桴]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내가 떼를 타고 바다에 뜨고자 하노라.”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章)
♣ 병불염사[兵不厭詐]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서라도 적을 이겨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병사[甁史]원굉도의 저서로 병화(甁花)에 대한 기록인데, 병화의 삽법(揷法)을 논한 것이다.
♣ 병사경한로[丙舍驚寒露]병사(丙舍)는 사당을 가리키니, 곧 사당에 의지하여 조상을 생각함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가 내려 초목이 영락(零落)하면 이것을 본 군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조상을 생각하며 놀라고 슬퍼한다.” 하였다.
♣ 병사지야[兵死之也]전쟁은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해야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병상여[病相如]상여는 한나라 때의 문인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키며, 문인(文人)이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을 뜻한다. 사기(史記) 제117권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상마상여가 평소에 소갈증(消渴症)을 앓았는데, 탁문군(卓文君)과 결혼하고는 재산이 많아졌다. 이에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공경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병들었다 핑계 대고는 한가롭게 지내면서 관작을 흠모하지 않았다.” 하였다.
♣ 병석[甁錫]승려들이 사용하는 병발(甁鉢)과 석장(錫杖)으로, 곧 승도(僧徒)를 뜻한다.
♣ 병성[帲箵]병성은 수레 위에 먼지를 막는 대자리임. 후한(後漢) 때 공순(孔恂)이 주(州)의 별가(別駕)로 있었는데, 별가의 수레에는 본디 병성이 있었던바, 이 때 자사(刺史)가 마침 부(部)를 순행하려면서 날이 저물자 자사가 노하여 별가의 수레에 있는 병성을 제거하려 하므로, 공순이 말하기를 “명사군(明使君)께서 스스로 늦게 출발하면서 국가의 제도인 병성을 제거하면 되겠는가. 별가는 버릴 수 있어도 병성은 생략할 수 없다.” 하며 완강하게 거부하니, 자사가 마침내 사과하고 병성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 병수[甁水]인도(印度)의 풍속에 손님을 맞으면 이쑤시개[楊枝]와 향수(香水) 등을 내놓기 때문에 중들이 수도할 때도 손님이 오면 그렇게 하는데, 이것을 양지정수(楊枝淨水)라 한다.
♣ 병수복수[甁收覆水]엎지러진 물 병에 담는다는 말로 강태공(姜太公)의 전처(前妻)가 일찍이 강태공이 미천했을 때 태공을 버리고 갔다가 태공이 부귀한 뒤에 다시 합하기를 원하자, 태공이 엎지러진 물은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다는 뜻으로 그를 거절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병안시[病眼詩]백거이(白居易)의 병안화시(病眼花詩)를 이르는데, 백낙천시후집(白樂天詩後集) 권10에 나타나 있다.
♣ 병야비위빈[病也非爲貧]공자 제자 원헌(原憲)이 너무 청빈했는데, 어느 날 자공(子貢)이 성대한 차림으로 그를 찾았다. 원헌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와 자공을 맞이하자 자공은, 선생께서 어찌 그리 병이 들었느냐고 하였다. 이에 원헌이 대답하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재물이 없으면 그를 일러 가난하다고 하고, 배우고도 그대로 실천을 못하면 그를 일러 병들었다’고 한다는데,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니오.” 하여 자공이 부끄러워했다고 함. 《莊子 讓王》
♣ 병예[屛翳]바람 귀신, 즉 풍사(風師)의 이름이다. 일설(一說)에는 풍신(風神), 뇌신(雷神), 우신(雨神)의 총칭이라고도 한다.
♣ 병예현명[屛翳玄冥]병예는 풍백(風伯), 현명은 우사(雨師)를 말한다.
♣ 병위[丙魏]병길(丙吉)과 위상(魏相)인데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 명재상이다. 《漢書 卷 74 魏相丙吉傳》
♣ 병유마[病維摩]석가(釋迦)와 동시대 사람인 유마(維摩)가 병을 이유로 석가가 설법(說法)하는 곳을 가지 않고 석가로 하여금 여러 비구(比丘)ㆍ보살(菩薩)을 시켜 자기 병상으로 문병을 보내도록 하였음. 《維摩經 方便品》
♣ 병일취[倂日炊]날마다 밥을 짓지 못하고 이틀, 사흘 만에나 한 번씩 밥을 짓는 것을 이른 말로, 즉 양식이 없어서 끼니를 늘 거르는 것을 의미한다.
♣ 병입고황[病入膏肓]병이 고황에까지 들었다. 고황(膏肓)은 심장과 격막 사이의 부분. 신체 부위 중에서 고황에 병이 들면 침이나 약으로도 치료할 가망이 없었다 해서, 병이 위중하여 치료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고치기 어려운 오류(誤謬)에 비유하기도 한다.
♣ 병장[屛障]병풍을 말하는데, 호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晉書 卷四十九 院籍傳》
♣ 병절[幷節]합절(合節). 절주에 맞추다.
♣ 병조[兵曹]조선 시대 병조에서는 무관(武官)의 전형(銓衡)을 맡았음.
♣ 병종구입[病從口入]병은 입으로 들어옴. 禍從口出과 대구.
♣ 병주[幷州]병주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현(太原縣) 부근인데 전국 시대 조(趙)의 명장(名將) 이목(李牧)이 여기에 있으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수비를 잘하여 명성을 떨쳤다.
♣ 병주[幷州]옛날 중국의 구주(九州) 중 하나로, 북방의 변지(邊地)를 뜻하는 말이다.
♣ 병주고향[竝州故鄕]오랫동안 살던 타향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길 때 하는 말.
♣ 병주도[幷州刀]병주의 가위(剪刀)가 유명하다.
♣ 병주쾌전도[幷州快剪刀]날이 예리한 가위를 말한다. 병주는 지명으로, 여기에서 생산되는 가위는 날이 예리하기로 유명하다.
♣ 병체[病遞]벼슬아치가 신병으로 인해 관직에서 체직되는 일.
♣ 병초공색[倂超空色]공색(空色)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 병촉[秉燭]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부생(浮生)이 꿈과 같으니, 즐길 날이 얼마런가. 옛 시인이 촛불 잡고 밤에 논다던 것이, 참으로 까닭이 있구나.” 하였다.
♣ 병촉[秉燭]춘추 때 사광(師矌)의 말에, “소시(小時)에 공부하는 것은 뜨는 해의 밝음과 같고, 늙어서 공부하는 것은 밤에 촛불을 켜는 밝음과 같다.” 하였다.
♣ 병촉고인유[秉燭古人遊]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옛날 사람들은 봄이면 촛불을 잡고 밤에 놀았다.” 하였다.
♣ 병촉유[秉燭遊]고시(古詩)에 “낮은 짧고 밤이 몹시도 기니, 왜 촛불 잡고 놀지 않으랴.[晝短苦夜長 何不秉燭遊]"한 데서 온 말로, 밤에 술 마시며 흥겹게 논다는 뜻이다.
♣ 병편작목[秉鞭作牧]채찍을 잡고 목자가 되다.
♣ 병풍[屛風]수규(水葵)로 행채(荇菜)인데 줄기는 보라색이다.
♣ 병향란[秉香蘭]향란(香蘭)을 잡았다는 말은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진수와 유수는 바야흐로 넘실거리는데 남녀들은 모두 난초를 손에 잡았도다.[溱與洧方渙渙兮 士與女方秉蘭兮]"란 데서 보이는데, 그 집주(集註)에 의하면 “정(鄭) 나라 풍속은 3월 상사일(上巳日)이면 남녀들이 모여 물 위에서 난초를 캐어 불상(不祥)을 불제(祓除)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 병혈[丙穴]가어(嘉魚)가 나는 동혈(洞穴)의 이름. 중국 섬서(陝西) 약양현(畧陽縣) 동남쪽에 있는 대병산(大丙山)의 동혈(洞穴)이다. 좌사(左思)의 촉도부(蜀都賦)에 “좋은 고기가 병혈에서 난다.” 한 주(註)에 “병(丙)은 지명인데, 여기에 고기가 나는 두 개의 동혈이 있다.” 하였다.
♣ 병혈어[丙穴魚]잉어 비슷한 맛 좋은 가어(嘉魚). 면수(沔水) 남쪽 병혈(丙穴)에서 잡힌다고 한다. 《本草 嘉魚》
♣ 병협군[騈脅君]갈비뼈가 붙은 임금이란 진문공(晉文公)을 말한다. 진 문공이 개자추 등과 망명했다가 돌아와 왕이 된 후에 개자추에게만 상을 내리지 않자, 용사지가(龍蛇之歌)를 지어 용은 문공에, 뱀은 자신에 비유하여 부르며 면산(綿山)에 숨었다. 문공이 뒤에 깨닫고 불렀으나 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질러 나오게 했는데도 나오지 않고 타죽었으므로 해마다 그날이면 찬밥을 먹으며 애도하였다.
♣ 보[簠]바깥이 모나고 안이 둥근 것을 보(簠)라 하는데, 여기에는 도량(稻粱)을 담는다.
♣ 보각공첨용도비[寶閣恭瞻龍圖祕]송사(宋史) 신종기(神宗紀)에 “보문각(寶文閣)에 학사(學士)ㆍ직학사(直學士)ㆍ대제(待制)를 두었다.” 했고, 문헌통고(文獻通考) 직관고(職官考) 직학사(直學士)에 “송(宋) 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때에 용도각(龍圖閣)을 회경전(會慶殿) 서쪽에 세워 태종(太宗)의 어서(御書)ㆍ어제(御製)ㆍ문집(文集)과 전적(典籍)ㆍ도화(圖畫)ㆍ보서(寶瑞)를 간직하게 했다.” 하였다.
♣ 보거상의[輔車相倚]불가분(不可分)의 밀접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과 같은 말이다.
♣ 보거상의[輔車相依]보(輔)는 협보(頰輔) 곧 볼, 거(車)는 아거(牙車) 곧 아래턱뼈,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에, “속담에 이른바, ‘볼과 턱뼈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말을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 보건[補蹇]서로 의지함을 말함. 공공은 공공거허(蛩蛩巨虛)라는 잘 달리는 짐승이고 궐(蟨)은 앞발은 쥐의 발 같고 뒷발은 토끼의 다리와 같아서 잘 달리지 못하므로 공공이 늘 궐을 위해 먹이를 구해주고 급한 일이 있으면 업고 달아난다고 함. 《淮南子 道應訓》
♣ 보경원[輔慶源]경원은 주자(朱子)의 문인인 보광(輔廣)의 본관(本貫). 자는 한경(漢卿), 호는 잠암(潛庵).
♣ 보곤[補袞]곤직(袞職)은 임금의 직책으로 임금의 결점을 바로잡아 나간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대아 증민(烝民)에 “곤직에 궐실(闕失)이 있으면 중산보(仲山甫)가 메꾸어 나간다.” 하였다.
♣ 보곤견거[補袞牽裾]보곤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는 일이고, 견거는 임금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직간(直諫)하는 것을 의미한다.
♣ 보광[普光]부처가 보광명장(普光明藏)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설하였다. 보광명은 부처의 덕이 두루 밝다는 뜻이다.
♣ 보광[葆光]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떠내도 다하지 않아서 그 소유래를 알 수 없는 것을 ‘빛을 감추는 것[葆光]’이라고 한다.” 하였다.
♣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함
♣ 보궐습유[補闕拾遺]임금을 보좌하여 임금의 직책의 소루한 점을 보충하고 임금의 언행의 유실을 바로잡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보통 대간(臺諫)의 책무를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이다.
♣ 보궤[簠簋]보궤는 주 나라 종묘에 쓰는 그릇이니 그릇 중 가장 귀한 것이다.
♣ 보덕왕[報德王]고구려의 종실인 안승(安勝)을 가리킨다. 일찍이 고구려(高句麗)가 당 나라에 멸망당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의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新羅)에 귀부(歸附)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안승을 금마(金馬)에 살게 하여 보덕왕(報德王)으로 삼고, 이어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 보력[寶曆]황제의 지위를 가리킨다.
♣ 보련소학사[步輦召學士]유사(遺事)에 “명황이 편전(便殿)에서, 요원숭(姚元崇)의 시무론(時務論)을 깊이 음미하고 있었다. 마침 칠월 십오일이었다. 궂은비가 계속 내려 진흙이 신발을 덮었는데 임금이 근시에게, 보련을 메고 가서 학사를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때 요원숭이 한림학사로 있었다. 조야(朝野)가 다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겨 부러워했으니, 예부터 어진 이를 대우하는데 이러한 예는 없었다.” 하였다.
♣ 보렬성[步列星]헤아리다.
♣ 보로[寶璐]아름다운 옥을 말함.
♣ 보록[寶籙]보록은 도가(道家)의 부록(符籙)을 가리킨다.
♣ 보류일단[報劉日短]진(晉) 나라 이밀(李密)이 조모의 손에서 자랐고 조모가 90여 세가 되었는데, 조정에서 밀을 벼슬로 불렀다. 밀이 조모를 모시기 위하여 사양하여 올리는 글에, “신이 폐하께 절개를 다할 날은 길고, 조모 유(劉)를 갚을 날은 짧습니다.” 하였다.
♣ 보리[甫里]당(唐) 나라 때의 시인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호칭한 육귀몽(陸龜蒙)을 말한다. 항상 배에다 책과 다기(茶器)와 낚시 도구를 싣고서 강호(江湖)를 떠돌아 노닐었다.
♣ 보리[甫里]보리(甫里)는 당(唐) 나라 때의 은사 육귀몽(陸龜蒙)의 호임. 육귀몽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지어서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전답 수백 묘(畝)는 모두 아주 낮은 지역에 있었으므로, 장마가 지면 곡식이 다 떠내려가서 항상 굶주렸다고 한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보리[甫里]보리는 소주(蘇州)에 있는 진명(鎭名)인데, 산수의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당(唐) 나라 때의 시인 육귀몽(陸龜蒙)이 여기에 거주하였다.
♣ 보리수[菩提樹]인도(印度)에서 나는 나무인데, 석가(釋迦)가 이 나무 아래서 득도(得道)하였다 한다.
♣ 보리자[菩提子]1년생의 풀. 열매가 둥글고 단단한 껍질이 있다. 세속에서 염불하는 구슬로 삼는다. 여기서 인용한 뜻은 보리자가 결실하는 것처럼 불법을 닦으면 복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다.
♣ 보망[補亡]시경(詩經)에 제목(題目)만 있고 글이 없는 것이 두어 편 있다. 그것을 진(晋) 나라 속석(束晳)이 보충하여 지었는데 이것을 보망시(補亡詩)라 한다.
♣ 보명쟁전[普明爭田]전지(田地)를 가지고 형제간에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제(北齊) 때 소경(蘇瓊)이 남청하 태수(南淸河太守)가 되었는데, 을보명(乙普明) 형제가 전지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이에 소경이 그들 형제를 불러서 타이르기를, “하늘 아래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이고 구하기 쉬운 것이 전지인데, 전지를 얻었더라도 형제를 잃는다면 어떻겠는가.” 하니, 두 형제가 잘못을 빌면서 분가하여 산 지 10년 만에 합쳐서 살았다. 《小學 卷6 實明倫》
♣ 보문[普門]불법을 깨닫도록 열어 놓은 문
♣ 보문장실[普門丈室]한 문속에 모든 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문이라 하는데, 장실은 그 장로가 있는 곳이다.
♣ 보백[甫白]당 나라 때 시와 문장으로 유명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 보벌[寶筏]불교에서 깨달음의 길을 뗏목의 항해에 비유하여 보벌(寶筏)이라 한다.
♣ 보병[步兵]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낸 적이 있는 위(魏) 나라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위 나라와 진(晉)나라의 교체기에 살면서 현실이 불만스러워 세상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술을 즐겨 마시며 노장(老莊)의 설에 심취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였는데, 산수를 유람하러 나갔다가 길이 막히면 언제나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晉書 卷四十九 阮籍傳》
♣ 보보[步步]한걸음 한걸음, 걸음마다
♣ 보본[報本]보본은 근본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조상 숭배를 말함.
♣ 보부금성비[寶符金星祕]옛날 우(禹) 임금은 부적을 갖고 산에 들어가니 잡귀(雜鬼)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한다.
♣ 보불[黼黻]보불은 관복(官服)에 수놓은 무늬이다. 전하여 유창하고 화려한 문장(文章)의 비유로 쓰임.
♣ 보불문장[黼黻文章]보불은 옛날 예복(禮服)의 화려한 문채로 지극히 아름답고 격조 높은 문사(文辭)를 뜻한다.
♣ 보산[寶山]보산은 보배가 쌓여 있는 산으로 불가의 말인데, 심지관경(心地觀經)의 “사람이 만일 손이 없으면 보산에 간다 하여도 끝내 아무런 소득이 없다.” 하였다.
♣ 보살만[蓄薩蠻]옛 사패 이름. 일명 자야가(子夜歌) 또는 무산일편운(巫山一片雲)이라고도 하며 44자로 되어 있음. 《詞律 卷四》
♣ 보삽[黼翣]옛날 출상(出喪)할 때 사용했던 도끼 모양 그림의 관(棺) 장식이다.
♣ 보서삼조[報書三鳥]세 마리의 새.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삼조에게 말을 붙이려 해도 빨리 가버려 잡을 수 없다.” 한 주에 “첫째는 기러기, 둘째는 학, 셋째는 제비이다.” 하였다.
♣ 보소[寶蘇]보소는 청 나라 때 금석학자(金石學者)의 옹방강(翁方綱)의 실명(室名)이다.
♣ 보솔[普率]넓은 하늘[普天] 아래 닿는 데까지의 땅[率土]의 백성이 모두 황제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 보순상[補舜裳]신하가 임금을 돕는 것을 곤직(袞職)의 궐실(闕失)이 있는 것을 깁는다[補] 하는데 곤상(袞裳)은 임금이 입는 옷으로 순(舜)이 처음 만들었다.
♣ 보시[布施]깨끗한 마음으로 법(法)이나 재물을 아낌 없이 사람에게 베품. 스님에게 베풀어 주는 금전이나 물건. 포시(布施)
♣ 보압[寶鴨]오리의 형태로 만든 향로에 대한 미칭. 고대(古代)에는 오리 모양의 향로가 많았으므로 보압 또는 금압(金鴨)이라 하였다.
♣ 보염사[補艶司]취홍원(聚紅院)과 뇌영원(蕾英院)에 뽑혀 들어온 여인들의 의복을 만들던 곳이다.
♣ 보왕[寶王]불타(佛陀)에 대한 존칭이다.
♣ 보요[步搖]부인(婦人)의 머리에 올리는 장식품인데, 걸어다닐 때 매달린 구슬이 흔들리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보우[普愚]고려말의 중. 그가 일찍이 삼각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지었다.
♣ 보우지탄[보羽之嘆]너새 깃의 탄식이라는 말로, 신하나 백성이 전역에 종사하여 부모님을 보살피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는 것을 비유하는 뜻의 고사성어.
♣ 보원이덕[報怨以德]원수 갚기를 덕으로써 하라. (老子 道德經)
♣ 보은단[報恩段]비단의 이름. 조선조 선조 때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중국으로 사신가는 길에 통주(通州)의 청루(淸樓)에 들려 부모의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창관(娼館)에 나온 어느 고관의 딸을 3백 금으로 구해 주었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예부시랑(禮部侍郞) 석 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어 자기를 구해 준 은혜의 보답으로 손수 짠 비단 끝에 ‘보은(報恩)’이란 글자를 수놓아서 은인인 홍순언에게 준 것이라 함. 홍순언이 귀국하자 사람들이 비단을 사러 그의 집에 모여드니 그가 살던 동네를 또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 하였다 한다.
♣ 보은오대[報恩五臺]명 나라 성조(成祖)는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를 위하여 보은사를 세웠다. 《世宗實錄》 고제후(高帝后)를 위해서는 오대산 등지에 대재(大齋)를 베풀었다. 《明史 卷331 西域列傳》
♣ 보의[黼扆]자루가 없는 도끼를 그린 빨간 비단 병풍을 말함. 천자(天子)의 어좌(御座) 뒤에 치는데, 도끼는 위엄을 상징한 것이고, 자루가 없는 것은 이것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전하여 천자를 가리킨다.
♣ 보이경[報以瓊]시경(詩經)에, “나에게 목도(木桃)를 주는데 경요(瓊瑤)로써 갚으리라.” 하는 구절이 있다.
♣ 보이국사[報以國士]남을 국사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로서 대접을 받는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의 은혜에 감동하는 말로 쓰인다.
♣ 보장[保障]백성을 위해 조세를 경감하고 너그러운 정사를 펴는 일.
♣ 보장[步障]옛날 귀족들이 밖에 나가 머물 때 바람과 먼지 같은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하던 병풍 같은 행막(行幕)으로 대나무를 세워 간살을 만들고 붉은 비단을 드리워 길 양쪽에 치던 것이다. 진(晉) 나라 때의 석숭(石崇)은 귀족들과 서로 사치를 경쟁하였는데, 왕개(王愷)가 자주빛의 비단 보장 40리 길이를 마련하자, 석숭은 붉은 비단 보장 60리 길이를 마련하였다 한다. 《晉書 石崇傳》
♣ 보장풍상[保章馮相]주대(周代)의 관직을 맡은 보장씨(保章氏)ㆍ풍상씨(馮相氏). 둘 다 춘관(春官)에 소속되어 천체(天體)의 운행을 관측하여 인간의 길흉(吉凶)을 미연에 알아내는 직책을 맡았음. 《周禮 春官 保章氏ㆍ馮相氏》
♣ 보전[寶篆]전(篆)은 피우는 향(香)을 말한 것이다. 전반향
♣ 보정[報政]지방관이 임기를 만료하고 조정에 돌아가 자기의 정적(政績)을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지방장관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 보정[寶鼎]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맨 처음 구주(九州)의 쇠를 한데 모아서 이 보정(寶鼎)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은(殷)ㆍ주(周) 시대까지 전해 오다가, 진 시황 때에는 없어졌으므로 한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진 시황 28년에 사수(泗水)에서 주정(周鼎)을 꺼내고자 하여 천여 명의 인부를 물속에 투입시켜 찾아내도록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 보정귀전지[寶鼎貴顚趾]솥이 엎어지면 솥발도 뒤짚히는데 그리 되면 솥 안에 있던 오물들이 다 쏟아져나와 새로운 물건을 앉힐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임. 《周易 鼎卦》
♣ 보좌[寶座]금강좌(金剛座)ㆍ사자좌(獅子座) 등 불(佛)ㆍ보살(菩薩) 등의 상을 모시는 상좌(床座)를 말한다.
♣ 보좌[黼座]도끼 무늬 병풍 앞에 설치된 임금의 좌석을 말한다.
♣ 보주[甫州]예천(醴泉)의 고호임.
♣ 보지선사[寶誌禪師]양(梁) 나라 때의 고승.
♣ 보천[補天]보천은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옛날에 사극(四極)이 폐해지고 구주(九州)가 갈라져서 하늘이 덮어주지 못하고 땅이 실어주지 못하였다. 이때에 여와(女媧)가 오색(五色)의 돌을 정련해서 보천(補天)하고, 자라의 발을 잘라서 사극을 세웠다.” 하였다. 전하여 임금을 보좌하여 국가에 큰 공로가 있음을 비유한다.
♣ 보천입극[補天立極]상고 시절의 여제(女帝)였던 여와(女媧) 때 그의 제후(諸侯)인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워 싸움에 패하자, 화가 나서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받아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하늘 기둥이 부러지고 지구를 매놓은 끈이 끊겼는데, 이때 여와씨가 오색돌을 녹여 기둥을 만들어서 하늘을 고이고, 큰 자라 등에 얹혀 흔들거리는 지축을 고정시키기 위해 자라의 네 발을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서남북의 위치를 고정시켰다고 함. 《司馬貞 補史記 三皇本紀》
♣ 보천지수[補天之手]중국 신화(神話)에 옛날 하늘 기둥이 꺾어지고 땅이 이지러졌을 때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단련하여 하늘을 기웠다 한다.
♣ 보천탄[寶泉灘]보천탄은 해평현(海平縣) 서쪽 5리쯤에 있는데, 바다의 장사치들이 봄가을마다 이곳에 배를 대고서 물건을 팔아 가지고 돌아간다.
♣ 보춘휘[報春暉]맹교(孟郊)의 시에, “한 치 길이 풀잎의 마음으로, 봄날의 포근한 햇살에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 했는데, 부모의 사랑에 비하여 자식의 정성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말.
♣ 보취[步驟]진보(進步)가 빠름.
♣ 보타권[寶唾卷]타인의 시집(詩集)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欬唾成珠”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 보필[輔弼]충신의 보좌.
♣ 보허곡[步虛曲]악부잡곡가사(樂府雜曲歌辭)의 이름. 중선(衆仙)의 표묘 경거(縹緲輕擧)의 미(美)를 읊은 것으로, 도관(道觀)에서 창(唱)한다.
♣ 보허술[步虛術]도사(道士)가 공중을 걸어다니는 술법으로, 즉 신선술(神仙術) 일반을 가리킨다.
♣ 보현[普賢]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의 협사(脇士)로 유명하며,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진 보살. 보현보살.
♣ 보후[甫侯]보후는 보국(甫國)의 후(侯)임. 시경(詩經) 大雅 崧高에 “거대한 사악의 명산 하늘 높이 우뚝한데 그 산들이 신령 내려 보후(甫侯) 신백(申伯) 탄생했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하였음. 숭(崧)은 총(蔥)과 상통함.
♣ 복[復]일체의 무역과 세금을 면제하는 것이다.
♣ 복거부[卜居賦]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들어 있는 시편(詩篇)이다.
♣ 복거지계[覆車之戒]먼저 간 수레가 엎어졌음을 보고 경계함. 앞사람의 실패를 뒷사람이 교훈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 복고여산[腹高如山]배가 산같이 높다는 뜻으로 임심한 여자의 부른 배를 형용하거나 혹은 돈 많은 부자의 교만스러움을 형용하기도 한다.
♣ 복곡[伏鵠]복곡은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의 “월 나라 닭은 홍곡(鴻鵠)의 알을 품을 수 없는 법이다.[越鷄不能伏鵠卵]”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복곡란(伏鵠卵)이 닭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 복과재생[福過災生]복이 너무 지나치면 도리어 재앙이 생긴다는 말.
♣ 복관[服官]벼슬하여 정사를 행한다는 뜻.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50에 대부에 임명되어 정사를 행한다.” 하였다.
♣ 복구[覆甌]복구는 금구복명(金甌覆名)의 준말로,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정하여 그의 이름을 써서 금사발로 덮어 가려놓고 신하에게 알아맞추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복금와리[宓琴臥理]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마루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없이 거문고만 연주했는데도 잘 다스려지며 교화가 이루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察賢》
♣ 복납[伏臘]여름철의 삼복(三伏)과 겨울철의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 이름인데, 보통 이날 술을 마시기 때문에 다정한 술자리를 말할 때 시어(詩語)로 많이 쓰인다.
♣ 복노[伏弩]복노는 매복(埋伏)된 쇠뇌를 이르는데, 자획(字畫)이 힘차서 기세가 충천함을 비유하기도 한다.
♣ 복도[複道]아래와 위 이중으로 나 있는 길이다.
♣ 복랍[伏臘]복랍(伏臘)은 여름의 복(伏)과 섣달의 납향(臘享)을 말함인데 복은 한여름이요, 납은 깊은 겨울이므로 여름 제사[夏祭] 겨울 제사[臘祭]를 말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삼복(三伏)과 납일(臘日).
♣ 복래경자[鵩來庚子]문인(文人)이 불행한 일을 당하였다는 뜻이다. 복조는 올빼미를 말한다. 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이 된 지 3년이 되던 해 4월 경자일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가의의 곁에 앉았는데, 올빼미는 불길한 조짐의 새였다. 이에 가의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 복래일[鵩來日]한 나라의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이 된 지 3년 만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가의의 곁에 앉았는데, 올빼미는 불길한 조짐의 새였으므로 가의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 복력[伏櫪]말이 마판에 엎드려 있다는 말로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비유한다. 환온시(桓溫詩)에 “늙은 기마가 마판에 엎드렸어도 뜻은 천리 길에 있다.[老驥伏櫪志在千里]" 했다.
♣ 복력기[伏櫪驥]천리마가 늙어서 마구간에 매여 있다는 뜻으로, 나이는 늙었으나 장한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말한다.
♣ 복력사천리[伏櫪思千里]좋은 말은 하루 천 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이미 늙어서 마굿간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만은 천리 가는 데에 있다고 한다.
♣ 복렵지재[卜獵之載]사냥하여 잡은 짐승을 싣고 돌아옴.’복렵’은 사냥하기 전에 점을 친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문왕(文王)이 장차 사냥을 떠나려 하여 점을 치니 ‘곰도 아니요, 용도 아니며……패왕(霸王)을 보좌할 인재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문자이다.
♣ 복령[茯苓]땅속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균류(菌類)의 하나로 한약재로 쓰인다. 사기(史記) ‘귀책열전(龜策列傳)’에 “천 년 묵은 복령을 복용하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 복례위인유극기[復禮爲仁由克己]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사욕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 하루라도 사욕을 이기고 예로 회복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신에 달린 것이지 남에게 달린 것이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顔淵》
♣ 복로[服老]고봉의 숙부(叔父)인 복재(服齋) 기준(奇遵)을 말함.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하였음.
♣ 복로[茯老]조선 영조ㆍ정조 때의 문신인 이기양(李基讓)의 호가 복암(茯菴)이므로 그를 높이어 이른 말이다.
♣ 복리진편[腹裡陳編]가슴속에 품고 있는 학문을 말한다. 한 나라 때 변소(邊韶)가 뱃속에다가 오경(五經)을 모두 품고 있었다고 한다.
♣ 복백[復魄]사람이 죽었을 때, 높은 데에 올라가 포백(布帛)을 가지고 죽은 이의 넋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의식을 이른 말이다.
♣ 복번운우[覆翻雲雨]반복 무상한 인정 세태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이요 다시 뒤쳐 비로세.[翻手作雲覆手雨]”라는 구절이 있다.
♣ 복복[卜卜]딱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
♣ 복비[宓妃]복비는 본래 복희씨(伏羲氏)의 딸인데 낙수(洛水)에 익사하여 수신(水神)이 되었다 한다.
♣ 복비[虙妃]복희씨(伏羲氏)의 딸로서 물에 빠져 죽은 다음 하(河)의 귀신이 되었음.
♣ 복비말생진[宓妃襪生塵]복비는 복희씨(伏羲氏)의 딸로서,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 수신(水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일찍이 들으니 복비의 버선이, 물을 건너면 먼지가 나는 듯했다 하네[嘗聞宓妃襪 渡水欲生塵].” 한 데서 온 말이다.
♣ 복사[蝮蛇]복사는 독이 있는 큰 뱀을 말하는데,, 염토(炎土) 지대에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많이 해친다는 뜻으로,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복사가 쌓여 있고 봉호는 천리에 우글거린다[蝮蛇蓁蓁 封狐千里].” 하였다.
♣ 복사[鵩舍]한 문제(漢文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어 있을 때 흉조로 알려진 올빼미가 가의의 집으로 날아들어왔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귀양살이하는 집을 뜻한다. 《史記 卷八十四 賈誼傳》
♣ 복삼임[腹三壬]귀상을 말한다. 위지(魏志) 관로전(管輅傳)에 “내가 ‘이마 위에 나온 뼈가 없고 배에도 삼임(三壬)이 없으니 장수하지 못할 징조이다.’했다.” 하였다.
♣ 복상맹[卜商盲]복상은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하(子夏)인데, 일찍이 아들을 잃고 울다가 실명(失明)을 하였다 한다.
♣ 복상비[卜商肥]복상은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의 성명임. 자하가 일찍이 증자(曾子)를 만나 보았는데, 자하가 한번은 수척했다가 한번은 살쪘으므로, 증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자하가 대답하기를, “나와서는 부귀(富貴)의 즐거움을 보고서 그것이 하고 싶고, 들어가서는 선왕(先王)의 도를 보고 또 그것을 좋아하니,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싸우므로 몸이 수척해지고, 끝내는 선왕의 도가 이겼으므로 살찐 것이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淮南子 精神訓》
♣ 복상비척[卜商肥瘠]복상은 자하(子夏)인데, 자신의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자하가 증자를 만났는데, 증자가 ‘어찌 그리 살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하므로, 증자가 ‘무슨 뜻이냐?’ 하니, 답하기를 ‘내 마음 속에 선왕(先王)의 의(義)와 부귀의 즐거움이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말랐었는데, 이제 선왕의 의가 이겼기 때문에 살쪘다.’ 했다.” 하였다.
♣ 복상상간[濮上桑間]망국(亡國)의 음악으로,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상간은 지명(地名)이다. 《禮記 樂器》
♣ 복상생송[腹上生松]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정고(丁固)가 배 위에 소나무가 난 꿈을 꾸고서 송(松) 자를 분석해 보니 십팔공(十八公)이 되므로, 18년 후에 공(公)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해몽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 복상승진[鵩上承塵]하마터면 유배지에서 죽을 뻔하였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고 장사(長沙)로 쫓겨났을 때, 죽음을 예고하는 복조(鵩鳥)가 승진(承塵)에 모여든 것을 보고는 ‘복조부(鵩鳥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史記 賈生列傳ㆍ西京雜記 卷5》
♣ 복생[伏生]복생은 곧 복승(伏勝)을 이름.
♣ 복성[復性]그 심성(心性)을 회복함을 이른 것임. 당(唐) 이고(李翶)의 복성서(復性書)에 “誠者 聖人性之也 復其性 聖人脩之"라 하였음.
♣ 복성[福星]목성(木星), 또는 세성(歲星)이라고도 하는데 그 별이 비치는 곳에는 백성이 복을 받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복성[福星]복성은 희망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란 뜻으로,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직책을 말한다. 산당사고(山堂肆考) 신직(臣職) 전운사(轉運使)에, “철종(哲宗)이 선우신(鮮于侁)을 동경 전운사(東京轉運使)로 삼자,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복성(福星)이 내려가게 되었다. 어찌하면 선우신과 같은 사람 백 명을 얻어서 천하에 배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다시 선우신을 전운사로 삼은 것은 참으로 마땅치 않은 듯하다. 그러나 동쪽 지방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면 선우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되니, 이 사람은 일로의 복성이다.’ 하였다.” 하였다.
♣ 복성동[福城東]화엄경(華嚴經)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두루 다니다가 복성 동쪽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났다.
♣ 복성서[復性書]당(唐) 나라 이고(李翶)가 지은 글로서 총 3편인테, 내용은 대략, ‘사람의 성(性)은 착하지만 칠정(七情)이 착한 성품을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情)을 이기면 본래의 성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들이다.
♣ 복소무완란[覆巢無完卵]후한(後漢) 때 공융(孔融)에게 9세와 8세의 두 아이가 있었는데, 공융이 조조(曹操)로부터 체포되어 갈 적에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나 혼자만 죄를 받기 바란다. 내 두 아이는 면할 수 있겠는가?" 하자, 그 아이가 여쭙기를 “아버지께서는 엎어진 새집 아래 완전한 새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하였는데, 과연 그들도 체포되어 화를 당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言語》
♣ 복소완란[覆巢完卵]멸족(滅族)의 화를 당한 가운데에서도 어린 자손 하나만은 다행히 살아 남았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공융(孔融)이 사형을 당할 때 8세와 9세 된 두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기를 원했는데, 이때 두 아들이 “둥지가 깨질 때 알이 무사했던 적이 있었습니까?[大人豈見覆巢之下 復有完卵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 복소완아[覆巢完兒]아버지는 화를 당했으나 자식은 온전함을 비유한 말.
♣ 복송생[腹松生]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정고(丁固)가 배 위에 소나무가 난 꿈을 꾸고서 송(松) 자를 분석해 보니 십팔공(十八公)이 되므로, 18년 후에 공(公)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해몽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복상생송(腹上生松)의 고사이다.
♣ 복수[濮水]복수는 중국 하북성(河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강이다.
♣ 복수[覆水]엎질러진 물. 한번 결과가 저질러진 것은 복구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신중을 기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음. 한번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음. 강태공(姜太公)의 부인이 어려운 시절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다가, 강태공이 재상(宰相)이 되자 돌아왔다. 강태공이 물을 엎지르며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릇에 물을 도로 담아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번 결과가 저질러진 것은 복구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신중을 기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 복승[伏勝]복승은 진 시황(秦始皇)이 분서(焚書)할 때 백 편의 상서를 벽 속에 감춰 두었다가 한 나라가 일어난 뒤에 이 글을 찾아보니, 다 없어지고 29편만 남았으므로 이를 가지고 후진을 가르친 결과, 구양생(歐陽生)ㆍ공안국 등에게 전수되었다 한다 《漢書 卷八十八》
♣ 복신[茯神]식물 이름. 산 속의 소나무 뿌리 밑에서 기생하는 식물로 겉은 검고 속은 희거나 혹은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괴구상(塊球狀)이며 속에 소나무 뿌리의 심이 박혀있는 것을 복신(茯神)이라 하고, 심이 없는 것은 복령(茯苓)이라고 함. 《本草 茯苓》
♣ 복양초세[濮陽超世]춘추 시대 장주(莊周)가 복수(濮水)에서 낚시질할 때, 초왕(楚王)이 사신을 보내어 장주에게 초 나라 정승이 되어달라고 하자, 장주가 돌아본 체도 않으면서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살아서 저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나 역시 벼슬자리에 속박되지 않고 산 거북처럼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련다.” 하였다. 《莊子 秋水》
♣ 복억[鵩臆]가의(賈誼)가 지은 복부(鵩賦)에 말하기를, “복(鵩)은 불길한 새인데 집에 들어왔으므로, 주인이 점을 쳐보고 복에게 물은즉, 복은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하였다.
♣ 복유오거서[腹有五車書]독서를 많이 하여 지식이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천하(天下)에 나오는 혜시(惠施)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 복일양[復一陽]동지가 된 것을 뜻한다. 동지가 되면 음기는 다 사라지고 양기가 다시 생긴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복자[覆刺]복자는 곧 복자구서(覆刺具書)의 준말로, 즉 글을 갖추 써서 명함을 다시 들여보낸다는 뜻이다.
♣ 복자구서[覆刺具書]글을 갖추 써서 명함을 다시 들여보낸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때 고표(高彪)가 마융(馬融)을 찾아보러 갔으나 만나주지 않자, 고표가 명함을 다시 들여보내면서 “옛날에 주공(周公) 같은 이는, 문왕(文王)의 아버지요, 무왕(武王)의 형이요,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는 귀한 이로서 목욕 한번 하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머리를 움켜잡고 나왔으며, 밥 한 그릇 먹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고 나와서 선비들을 맞았으므로 천하가 그의 덕에 감복하였지만, 지금 그대야말로 보지 못한 것이 타당하다.”고 글을 써 보내니, 마융이 크게 부끄러이 여겨 사람을 보내 사과를 하고 만나기를 청하였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卷八十 文苑傳 高彪》
♣ 복자일금[宓子一琴]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란 사람인데, 단보(單父)라는 지방의 현령으로서 거문고를 타서 백성의 인심을 화평하게 만들었다.
♣ 복자하[卜子夏]복자하는 공자의 제자. 복자하가 삼년상을 마친 뒤 공자를 보고 거문고를 타며 절절하게 슬퍼했던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
♣ 복장[覆醬]아무 가치도 없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 유흠(劉歆)이 태현경(太玄經)을 보고는, 공연히 고생만 하였다고 양웅에게 말하면서, 뒷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간장 항아리를 덮는 데[覆醬]에나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얘기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揚雄傳下》
♣ 복장부[覆醬瓿]자운(子雲)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이다. 양웅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에 대해서 유흠(劉歆)이 비평하기를 “오늘날 학자들은 역(易)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태현경(太玄經)을 어떻게 또 알겠는가. 뒤에 가서는 사람들이 장독을 덮는 데에나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하였다. 《漢書 揚雄傳 贊》
♣ 복재적선화재적악[福在積善禍在積惡]복(福)의 근원은 선(善)을 쌓는 데 있고, 화(禍)의 근원은 악(惡)을 쌓는 데 있다.
♣ 복조[鵩鳥]올빼미와 비슷하게 생긴 새로서 상서롭지 못한 요조(妖鳥)로 일컬어져 온다.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장사(長沙)로 유배된 뒤 그 열악한 풍토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복조부(鵩鳥賦)’를 지었었다.
♣ 복조부[鵩鳥賦]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장사(長沙)로 귀양가서 있을 때에 하루는 복조(鵩鳥)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자리의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가의는 그것을 불길하게 여겨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 복조비[鵩鳥飛]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참소를 입고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쫓겨나 있을 적에, 하루는 복조(鵩鳥)가 거처하는 집에 날아들어 오자, 복조가 날아드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스스로 복조부(鵩鳥賦)를 지어 자신을 위로했는데, 그후 오래지 않아서 가의가 과연 요절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十八》
♣ 복주[卜晝]신하가 임금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여는 것을 복주(卜晝)라 한다. 안자(晏子)가 임금을 초대하였더니 해가 저물었는데도 즐거워하여 그대로 계속하자 하니, 안자는, “신(臣)이 낮 연회를 하기를 점쳤을 뿐 밤 연회는 점쳐 보지 않았습니다.” 하고, 사절하였다.
♣ 복주[福州]안동(安東)의 옛 이름.
♣ 복중금갑[腹中金甲]복중서(腹中書)와 같은 말로 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이 풍부함을 말함.
♣ 복중사[腹中笥]속에 품고 있는 학문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한 나라 때 변소(邊韶)가 뱃속에다가 오경(五經)을 모두 품고 있었다고 한다.
♣ 복지[福地]복지는 신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 복지[鵩止]수명(壽命)이 길지 못함을 알리는 흉조(凶兆)라는 뜻. 문선(文選) 가의(賈誼) 붕조부서(鵬鳥賦序)에 “가의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부엉이가 날아와 가의의 자리 옆에 앉자 자신의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을 알고 비감에 젖어 붕조부를 지었다.” 하였다.
♣ 복지[福地]신선이 산다는 명산승경(名山勝境)을 이른 말이다. 도교(道敎)에 72복지의 설이 있다. 보통 도관(道觀)을 가리키는데, 사찰의 뜻으로도 쓰인다. 중국 천태산(天台山)에 신선이 사는 복지(福地)가 있었다 한다.
♣ 복지곤괘[復之坤卦]복지곤괘란 곧 복괘와 곤계가 합한 괘상으로서 매우 길한 괘상이다.
♣ 복지부동[伏地不動]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음. 가만히 앉아서 시키는 일만 하고 월급만 받음. 나태한 공무원의 행동을 비유
♣ 복차지계[覆車之戒]먼저 간 수레가 엎어졌음을 보고 경계함. 앞사람의 실패를 뒷사람이 교훈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 복천[福川]동복(同福)의 고호(古號)이다.
♣ 복천존장[福川尊丈]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있던 김부륜(金富倫)을 가리킨다.
♣ 복철지계[覆轍之戒]앞의 수레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가 이를 보고 경계함
♣ 복파[伏波]복파는 화란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 복파[伏波]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마원은 건무(建武) 연간에 변경 지방을 정복하여 한 나라의 국경을 넓혔다.
♣ 복파거안[伏波據鞍]나이가 많이 들었으면서도 젊은이 못지 않게 기운이 왕성한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늙은 몸으로 안장에 걸터앉아 자신의 기력을 과시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54》
♣ 복파귀[伏波貴]복파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복파장군 마원(馬援)임.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 각종 전투에서 매번 승리하여 무제의 신임을 받아 복파장군이 되고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지는 등 죽을 때까지 존귀함을 누렸다. 《後漢書 卷二十四 馬援傳》
♣ 복파동주[伏波銅柱]서역(西域)을 정벌한 후한(後漢)의 복파 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이르러서 한 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하기 위해 세운 구리 기둥이다. 《後漢書 馬援傳》
♣ 복파취미[伏波聚米]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 제장(諸將)의 의견이 엇갈리자, 농서(隴西)에서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자문을 구했는데, 마원이 쌀을 모아 쌓아 놓고 산과 골짜기 등 지형을 그림처럼 만들어 보여 주자,[聚米爲山谷 指畫形勢] 광무제가 “오랑캐가 내 눈 안에 들어왔다.”고 기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傳》
♣ 복포[伏蒲]한 원제(漢元帝) 때에 황제가 병이 난 것을 기화로 태자(太子)를 폐하려 하였는데, 이때 사단(史丹)이란 신하가 청포 위에 엎드려 간함으로써 그 일을 막았다. 이로부터 올바르게 간하는 것을 “복포(伏蒲)"라 부르게 되었다. 《漢書 卷八十二 史丹列傳》
♣ 복피[襆被]낭관(郞官)의 별칭이다. 진(晉) 나라 위서(魏舒)가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무능한 낭관을 도태시킨다는 소문을 듣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고 곧장 행장을 정리해서 떠난[襆被而出]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魏舒傳》
♣ 복피이출[襆被而出]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을 떠나는 행동을 취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위서(魏舒)가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낭관을 도태시킨다는 말을 듣고는 자진해서 행장을 꾸려서 나갔던[襆被而出] 고사가 있다. 《晉書 魏舒傳》
♣ 복행장[卜行藏]굴원(屈原)이 복거사(卜居辭)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점치는 정첨윤(鄭詹尹)에게 가서 어떻게 처세할까를 물은 것인데, 행(行)은 출세하는 것이요, 장(藏)은 몸을 감추어 숨어사는 것이다.
♣ 복형[復亨]운수가 회복되면 다시 형통하게 됨.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괘사(卦辭)에 “복(復)은 형(亨)하니 출입(出入)에 나쁜 것이 없다.”란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한 정전(程傳)에 ‘복형은 이미 회복되면 형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 복홀생송[腹忽生松]높은 작위(爵位)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장발(張勃)의 오록(吳錄)에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누가 이르기를 ‘송(松) 자를 파자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 틀림없이 공작(公爵)이 될 것이오.’ 했다.” 하였다.
♣ 복희선천[伏犧先天]복희씨가 임금이 되자 용마(龍馬)가 그림을 지고 하수(河水)에서 나왔다. 복희씨는 이 그림을 보고 법받아서 팔괘(八卦)를 그었는데, 이것을 ‘복희선천(伏犧先天)’이라 한다.
♣ 복희심[伏羲心]복희씨가 팔괘(八卦)를 그었다.
♣ 복희씨[伏犧氏]복희씨는 중국 상고 시대의 임금이다.
♣ 본각[本覺]현상계의 제상(諸相)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궁극의 깨달음.
♣ 본궁[本宮]그 궁. 옛 궁. 특히 출계(出繼)하여 즉위한 임금이 본디 살던 궁. 곧 여느 사람에 있어서 본가(本家)를 뜻하는 말.
♣ 본말전도[本末顚倒]일의 근본과 지엽적인 것이 거꾸로 됨. 즉, 일의 주가 되는 중요한 것과 대수롭지 않은 것을 뒤바꿔 잘못 이해하거나 처리한다는 말로, 일의 원줄기를 잊고 사소한 부분에만 사로잡힘
♣ 본병[本兵]병조(兵曹)의 별칭.
♣ 본초경[本草經]신농씨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이름으로, 약초 3백 65종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 봉[蓬]봉(蓬)이란 풀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에 비유한다.
♣ 봉[封]하늘에 제사지내는 단(壇).
♣ 봉가[鳳駕]왕의 수레. 봉련(鳳輦).
♣ 봉가[鳳歌]초광(楚狂) 접여(接輿)가 공자의 문을 지나가며 부른 노래. “봉이여 봉이여, 어찌 이리 덕이 쇠하노.[鳳兮鳳兮 何韓之衰也]”하였다. 《論語 微子》
♣ 봉각[鳳閣]중서성(中書省)을 봉각(鳳閣)이라 한다.
♣ 봉간[封干]비간(比干)은 은 나라의 포악한 임금 주(紂)에게 간(諫)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인데, 주 무왕이 주를 쳐서 멸하자 비간의 무덤을 봉해 주었다.
♣ 봉개[鳳蓋]천개(天蓋)가 달린 수레로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 봉거[鋒車]임금이 신하를 급히 부를 때에 내리는 경쾌한 수레를 말한다.
♣ 봉격[捧檄]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벼슬하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효자 모의(毛義)가 집안이 빈한하여 모친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다가 현령(縣令) 임명장을 받들고서[奉檄] 그지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관직을 그만두고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9 劉平等傳 序》
♣ 봉격희동안[奉檄喜動顔]벼슬길에 나아가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모의(毛義)가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긴다고 소문이 나자, 장봉(張奉)이 그의 이름을 흠모하여 찾아갔다. 얼마 동안 함께 앉아 있을 때 모의를 현령으로 삼는다는 격문이 오자, 모의의 얼굴에 좋아하는 기색이 가득하였다. 이에 장봉은 이를 천하게 여기고서 그곳을 떠났다. 그 뒤에 모의는 어머니가 죽자 벼슬을 내던지고 상복을 입었으며,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않으니, 장봉이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을 탄식하였다. 《後漢書 卷69 竇何列傳》
♣ 봉계[鳳溪]길재(吉再)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다.
♣ 봉고파직[封庫罷職]창고를 봉하고 관직을 파함(그만두게 함). 암행어사(暗行御史)나 감사(監司)가 바르지 못한 관리(수령)를 파면시키고 관가의 창고를 잠그던 일
♣ 봉구봉[鳳求鳳]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나라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의 집 연회(宴會)에 초대받았다. 그 때에 탁왕손의 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음율(音律)을 좋아한다는 것을 사마상여가 알고, 거문고로 숫봉이 암컷을 구하는 곡조[鳳求鳳曲]를 탔더니 과연 문군이 밤에 상여에게 달려 와서 서로 부부(夫婦)가 되었다고 한다.
♣ 봉구약수관[蓬邱弱水寬]모두 멀다는 뜻인데, 봉래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고 약수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江)으로 길이가 삼천 리나 되고 물의 부력(浮力)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 봉구황[鳳求凰]금곡(琴曲)의 이름. 봉황(鳳凰)은 화목한 부부의 상징으로 많이 쓰임.
♣ 봉궐[鳳闕]봉궐은 한(漢) 나라 때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는 궁궐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궁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 봉기불탁속[鳳饑不啄粟]봉은 굶주려도 좁쌀을 쪼지 않음. 굳은 지조
♣ 봉노[烽櫓]봉로는 봉화대(烽火臺)를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민가 위에 씩씩하게 서 있는 기정이요, 해자(垓字)에 어린 봉로 그림자[旗亭壯邑屋 烽櫓蟠城隍]”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3 入衡州》
♣ 봉단[鳳團]좋은 차[茶]를 가루로 반죽하여 용이나 봉처럼 뭉쳐 놓은 것이다.
♣ 봉당[封堂]묘소를 말한다.
♣ 봉대곡[鳳臺曲]악부(樂府) 곡사(曲辭)의 하나인데,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당시에 퉁소를 잘 불던 소사(簫史)라는 사람과 서로 좋아하므로, 마침내 그에게로 시집을 보냈는데, 나중에는 농옥도 퉁소를 배워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잘 냄으로써 봉황이 그의 집에 모여들자, 마침내 봉대를 짓고 부부(夫婦)가 그곳에서 살다가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봉황을 따라 신선(神仙)이 되어 갔다는 내용을 노래한 것이다.
♣ 봉덕[鳳德]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의 문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그리도 덕이 쇠했는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그는 공자를 봉에 비유하여 태평 시대도 아닌데 숨지 않고 세상에 나온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論語 微子》
♣ 봉덕지쇠[鳳德之衰]초(楚) 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새여, 봉새여, 어찌 그리 덕이 쇠한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봉새란 세상이 도가 있을 때에만 나타나고 무도한 때에는 숨어버리는 것이므로, 접여가 이 봉새를 공자에 비유하여, 공자가 그 무도한 세상에 은거하지 않는 것을 기롱한 것이다. 《論語 微子》
♣ 봉도[奉道]도교를 믿다.
♣ 봉도[蓬島]선인(仙人)이 살고 있는 해도(海島).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 봉도연하[蓬島煙霞]봉래산(蓬萊山) 즉 금강산을 끼고 있는 간성(杆城)의 선경(仙境)을 비유한 말이다.
♣ 봉두난발[蓬頭亂髮]봉두는 본래 쑥대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웃자란 쑥의 줄기같이 긴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진 모양을 가리킴.
♣ 봉두이면[蓬頭黧面]흐트러진 머리와 때묻은 얼굴로, 여기서는 초라한 모습을 뜻한다.
♣ 봉랍[鳳蠟]봉황새의 모양을 그려 넣은 납촉(蠟燭)을 말함.
♣ 봉래[蓬萊]신선이 산다는 해도(海島)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 봉래각[蓬萊閣]중국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 단애산(丹崖山) 위에 있는 누각 이름으로, 예로부터 문인 학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 봉래궁[蓬萊宮]당 나라의 궁전 이름으로, 장안(長安)의 동쪽 봉래지(蓬萊池) 옆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대명궁(大明宮)이었는데 고종(高宗) 때 봉래궁으로 바꿨다. 전하여 왕궁(王宮)의 뜻으로 쓰인다.
♣ 봉래도[蓬萊島]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서 선인이 산다는 곳임.
♣ 봉래산[蓬萊山]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 봉래산[蓬萊山]중국에서 가상적으로 이름 지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와 불사약(不死藥)이 있다는 영산(靈山).
♣ 봉래오색[蓬萊五色]봉래궁(蓬萊宮)은 당(唐)나라 대명궁(大明宮)인데, 여기서는 우리 궁궐에 비유하여 쓴 것. “천자(天子)의 정궁(正宮)이어서 그 뒤에는 항상 오색의 서운(瑞雲)이 떠 있다.” 하였다.
♣ 봉래원교[蓬萊圓嶠]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산이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그 안에 대여(岱輿), 원교(圓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선산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바다에 떠 있으므로 항상 조수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므로 상제(上帝)가 사방으로 떠내려갈까 걱정스러워서 열다섯 마리의 자라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떠받치고 있게 하였는데, 3교대로 하여 6만 년마다 한 번 교대하게 하였다. 이에 다섯 선산이 비로소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용백국(龍伯國)에 거인이 있어서 한 번 낚시질을 하여 여섯 마리의 자라를 잡아서 이를 짊어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자, 대여와 원교 두 산이 북극으로 흘러가서 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 봉래전각과금오[蓬萊殿閣跨金鰲]금오(金鰲)는 금빛으로 생긴 큰 자라. 신선(神仙)이 사는 해중(海中)에서 사는데, 이 자라가 신선이 거처하는 봉래전(蓬萊殿) 밑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고사이다.
♣ 봉래천[蓬萊淺]한(漢) 나라 때의 신선(神仙)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자, 마고가 봉래산(蓬萊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네. 이번에 봉래산에 가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적보다 바닷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더군. 그러니 어찌 다시 육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神仙傳 麻姑》
♣ 봉래청천[蓬萊淸淺]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 되는 큰 변천이 있으리라는 말이다. 봉래는 동해(東海) 가운데 있는 섬 이름인데, 선녀(仙女)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접대한 이후로 동해가 세 번 상전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는데, 지난번 봉래도(蓬萊島)를 가보니 물이 얕아져서 전에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보다 대략 반쯤 더 얕아졌으니, 아마도 동해가 다시 육지로 바뀔 듯합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봉래풍악[蓬萊楓岳]금강산의 별칭. 여름철엔 봉래, 가을엔 풍악이라 한다.
♣ 봉력[鳳曆]옛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때에, 봉(鳳)새가 천시(天時)를 안다 하여 봉조씨(鳳鳥氏)로써 역정(曆正)을 삼았으므로, 세상에 기년(紀年)을 봉력(鳳曆)이라 한다.
♣ 봉련[鳳輦]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 봉루[鳳樓]금중(禁中)에 설치한 아름다운 누각(樓閣)을 가리킨다.
♣ 봉류[封留]한 고조(漢高祖)가 개국공신 장량(張良)을 유후(留侯)에 봉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봉릉[鳳綾]당 현종(唐玄宗) 때 영왕(寧王)이 기왕(岐王)ㆍ설왕(薛王) 이하를 거느리고 주청(奏請)하여 승여(乘輿) 앞에 붓을 놓고 행재(行在)의 일을 적어 천보(天寶) 10년에 3백 권을 지어 바치니, 현종이 보고 자주[紫] 용봉릉(龍鳳陵)에 책 표제를 쓰게 하여 별각(別閣)에 두게 했다.
♣ 봉린노위[封隣魯衛]노(魯) 나라는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이고 위(衛) 나라는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의 봉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노 나라와 위 나라의 정사는 마치 형제처럼 비슷하다.[魯衛之政 兄弟也]”라는 말이 있다.
♣ 봉마[蓬麻]봉생마중(蓬生麻中)의 준말.
♣ 봉마공장[蓬麻共長]다른 사람의 영향의 받아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 속에서 나면 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며, 흰 모래가 검은 흙 속에 있으면 저절로 검어진다.” 하였다.
♣ 봉마붕[蓬麻朋]그와 사귀게 되면 자연히 바르게 되는 친구를 말한다. “쑥이 삼대 밭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아진다.[蓬生麻中 不扶而直]”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荀子 勸學》
♣ 봉마토사상전도[蓬麻兎絲相顚倒]부부(夫婦)의 이별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신혼별(新婚別) 시에, “새삼 덩굴이 쑥대 삼을 타고 오르니, 이 때문에 덩굴이 길게 뻗지 못하네. 딸을 원정군에게 시집보내려거든, 차라리 길가에 버리는 게 나으리라[兎絲附蓬麻 引蔓故不長 嫁女與征夫 不如棄路傍].” 한 데서 온 말로, 새삼 덩굴은 본디 소나무나 잣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하찮은 쑥대와 삼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자랄 수가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7》
♣ 봉명전[奉明殿]민간 출신의 제왕(帝王)이 자기 친부모의 묘소를 개장하는 일을 말한다. 봉명전(奉明殿)은 한(漢) 나라 선제(宣帝)의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묘소가 봉명현(奉明縣)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漢書 卷63ㆍ文選 卷10 西征賦 注》
♣ 봉명화[鳳鳴和]춘추(春秋)시대 때에 진경중(陳敬仲)이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갔는데 의중(懿仲)이 그에게 딸을 주려고 점을 쳤더니 점괘에, “숫봉 암봉이 날아 화합하게 울음운다. 팔대(八代)를 지나면 더할 수 없이 높겠구나.” 하더니 과연 그 뒤에 그 자손이 제(齊) 나라 임금이 되었다.
♣ 봉모[鳳毛]봉황의 터럭 하나라는 말로, 부조(父祖)의 유풍(遺風)을 이어받은 걸출한 인물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 나라 왕소(王劭)와 남조 제(齊)의 사초종(謝超宗)이 각각 환온(桓溫)과 제 무제(齊武帝)로부터 “봉모(鳳毛)를 확실히 이어받아 가지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容止ㆍ南齊書 卷36 謝超宗列傳》
♣ 봉모[鳳毛]자식이 아버지의 훌륭한 풍채를 닮았음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왕소(王邵)가 자기 아버지인 왕도(王導)의 풍채를 닮았는데, 그가 시중(侍中)이 되어 공복(公服)을 입고 들어오자, 환온(桓溫)이 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원래 봉의 터럭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故自有鳳毛]”고 하며 찬탄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容止》
♣ 봉목시성[蜂目豺聲]벌과 같은 눈, 승냥이 같은 소리. 흉악(凶惡)한 인상(印象)
♣ 봉미[鳳尾]대나무 가지의 별칭. 대나무 가지 끝에 한들거리는 여러 개의 잎들이 봉황 꼬리와 비슷하므로 붙여진 이름임.
♣ 봉미[鳳尾]파초의 일종. 봉미초(鳳尾蕉). 그 잎이 봉의 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輟耕錄》
♣ 봉미초[鳳尾草]상록목본(常綠木本)의 식물 이름. 여름에 꽃이 피는데 단성(單性)이며 화피(花被)도 없다고 함. 《本草 無漏子》
♣ 봉방의질[蜂房蟻垤]벌이나 개미들도 각자 하나씩의 방을 차지하고 있듯, 이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 간에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서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 봉번이효[奉蘩以孝]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제사를 정성껏 받든다는 것. 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번(采蘩)에 “어디서 다북쑥 캐나 저 여울가 못가로세[于以采蘩 于沼于池]"라고 하였음.
♣ 봉봉[唪唪]열매가 많이 달린 모양
♣ 봉봉불불[蓬蓬拂拂]다같이 바람이 부는 모양을 말하는데, 즉 북풍(北風)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 봉봉연[蓬蓬然]봉봉연은 바람이 일어나 거칠 것 없이 불어제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바람이여, 지금 그대는 북해에서 쌩쌩 일어나 남해로 쌩쌩 들어가고 있다.[今子蓬蓬然起於北海 蓬蓬然入於南海]”는 말이 있다.
♣ 봉비[葑菲]시경(詩經) 패풍(邶風) 곡풍(谷風)의 “무 캐고 순무 캐네. 뿌리가 맛 없다고 잎까지 내버릴까.[采葑采菲 無以下體]”에서 나온 말로, 비루하지만 하나의 좋은 덕(德)을 자기도 가지고 있다는 뜻의 겸칭(謙稱)이다.
♣ 봉비불유[葑菲不遺]무는 본디 뿌리와 잎을 다 먹는데, 뿌리는 혹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잎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전하여 무슨 물건이라도 좋은 점은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詩經 邶風, 谷風》
♣ 봉비하체인소열[葑菲下體人所悅]순무와 무[葑菲]는 두 가지 다 잎도 뿌리도 먹을 만한 채소인데, 그 뿌리는 때에 따라 맛이 있을 때가 있고 맛이 없을 때도 있다. 따라서 그 채소를 캐는 사람은 꼭 그 뿌리만을 보고 캐서는 안 되듯이 인간 부부 사이도 얼굴이 젊고 예뻤을 때가 있었는가 하면 늙고 병들 때도 있는데, 지금 늙고 병들었다 하여 옛날 젊어 함께 고생하던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임. 《詩經 邶風 谷風》
♣ 봉사[鳳社]강원도 고성군(高城郡) 오대면(五臺面) 금강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를 가리킨다.
♣ 봉사[封事]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밀봉하여 천자에게 올리는 서장(書狀).
♣ 봉산[蓬山]동래(東萊)의 고호이다.
♣ 봉산[蓬山]본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이르는데, 전하여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인 봉관(蓬館)의 뜻으로도 쓰인다.
♣ 봉산[鳳山]황해도 봉산. 그 이름에 의하여 명사(明使) 호부낭중(戶部郞中)가 정작 봉이 나타난 산으로 보아 성대(聖代)의 상서를 부(賦)로 노래했음.
♣ 봉산관[蓬山館]호당(湖堂), 즉 독서당(讀書堂)을 가리킨다.
♣ 봉산장실[蓬山藏室]모두 장서실을 가리킴. 후한 때 장서실인 동관(東觀)을 가리켜 노씨장실(老氏藏室)ㆍ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인데, 즉 노씨장실은 옛날 노자(老子)가 장실주하사(藏室柱下史)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도가봉래산은 곧 봉래산의 선부(仙府)에는 유경 비록(幽經祕錄)이 다 쟁여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後漢書 卷二十三》
♣ 봉상위녀섬[縫裳魏女攕]시경(詩經) 위풍(魏風) 갈구(葛屨)에, “가녀린 여자의 손이여, 가히 치마를 지을 만하도다.[摻摻女手 可以縫裳]”하였다.
♣ 봉생마중[蓬生麻中]훌륭한 벗을 둔 것을 말함. 《荀子》 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지 않아도 곧다.[蓬生麻中 不扶而直]" 하였음.
♣ 봉선[封禪]옛적에 제왕(帝王)이 천하가 태평한 공을 이루면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옥첩(玉牒)을 땅에 봉하는 것이니,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 봉선서[封禪書]사기(史記)의 편명(篇名)이다. 황제가 태산(泰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봉(封)이라 하고,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 봉성[鳳城]봉화(奉和)의 고호이다.
♣ 봉성[鳳城]장안(長安)에 대한 이칭으로 제도(帝都)를 가리킨다.
♣ 봉소[鳳沼]대궐 안에 있는 못.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키는 봉황지(鳳凰池)와 같은 말로, 조정을 가리킨다.
♣ 봉소성단채운수[鳳簫聲斷彩雲愁]혼령이 이미 하늘 위로 멀리 떠나갔다는 말이다. 소사(蕭史)와 농옥(弄玉)이 피리를 불면 봉황이 날아오곤 하였는데, 뒤에 봉황을 타고서 채운(彩雲) 위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심전기(沈佺期)의 시 ‘봉소곡(鳳簫曲)’에 “昔時嬴如厭世紛 學吹鳳簫乘彩雲”이라는 구절이 있다.
♣ 봉수[鳳髓]값비싼 식품으로 치는 것이나, 값진 가야금 줄의 뜻으로도 쓰인다.
♣ 봉수[鳳髓]봉황의 골수로, 뛰어난 사람이 남긴 진귀한 글을 가리킨 듯하다.
♣ 봉수[鳳髓]봉황의 골수인데 진미(珍味)의 뜻으로 쓰인다. 이함용(李咸用)의 부귀곡(富貴曲)에 “하얀 구슬잔엔 봉수가 무르녹고, 불그레한 상저에는 성순이 가늘어라.[雪暖瑤杯鳳髓融 紅施象筯猩脣細]" 하였다.
♣ 봉수[鳳髓]송 나라 진복령(秦茯苓)의 아칭(雅稱)
♣ 봉시[封豕]큰 돼지라는 뜻인데, 성질이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 조(條)에, “오(吳)가 봉시와 큰 뱀이 되어 상국(上國)을 범한다.” 하였다.
♣ 봉시상호[蓬矢桑弧]봉시는 쑥대로 만든 살이며 상호(桑弧)는 뽕나무로 만든 활. 고대에는 남자를 낳으면 활을 문 왼쪽에, 여자를 낳으면 문 오른쪽에 베풀었으며, 세자(世子)를 낳으면 사인(射人)이 상호에 봉시로 천지와 사방에 쏘니 이는 원대한 뜻을 품으라는 뜻이라 한다. 《禮記 內則》
♣ 봉시상호[蓬矢桑弧]아들을 처음 낳을 때에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사방으로 쏘고는 문에 거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은 남자는 사방에 다니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 봉심[蓬心]강직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 봉심[蓬心]원리에 통달하지 못하는 마음. 《莊子 逍遙遊》
♣ 봉아[蜂衙]벌집 즉 봉소(蜂巢)를 말한다. 꿀벌들이 아침저녁으로 군아(軍衙)처럼 때를 정하여 집을 드나드는 것을 이른 말로, 관리들이 조석으로 아참(衙參)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 봉안역[奉安驛]광주(廣州)의 속역(屬驛)이다.
♣ 봉암[鳳巖]이경여(李敬輿)의 호이다.
♣ 봉액[縫腋]공자가 송 나라에 살 때에는 그 곳에서 쓰는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노(魯) 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縫腋衣)를 입었다 하여 후세에서 유학(儒學)하는 이의 의관(衣冠)을 이것으로 말하였다.
♣ 봉액[逢掖]봉액은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옷을 말한다.
♣ 봉액[鳳掖]봉액은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킨다.
♣ 봉액[縫掖]유자(儒者)가 입는, 겨드랑만 꿰매어 옆이 넓게 터진 옷.
♣ 봉억[鳳臆]천리마의 별칭.
♣ 봉연[鷄人]봉연은 제왕의 가마임.
♣ 봉영[逢迎]만나는 사람들마다 병사(兵使)의 눈치만 보며 비위를 맞추려 한다는 뜻이다.
♣ 봉영[蓬瀛]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을 말하는데 신선이 산다고 한다.
♣ 봉영이매[逢迎魑魅]소동파(蘇東坡)가 먼 곳으로 귀양가서 임금에게 올린 글에, “이매(魑魅)가 바다 위에 마중 나왔으니,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리이까.”라는 구절이 있다.
♣ 봉옥[封屋]임금의 교화가 사해에 두루 미쳐 풍속이 아름다워지니 집집마다 모두 덕행(德行)이 있어서 정표(旌表)할 만하다는 말이다.
♣ 봉요[蜂腰]벌의 허리처럼 한 가운데가 가늘다는 뜻이다. 시를 지을 때 칠언시의 4번째 자가 평성(平聲)이고 그 앞뒤의 자가 측성(仄聲)인 경우 또는 오언시에 2번째 글자가 평성(平聲)이고 그 앞 뒤 자가 측성(仄聲)인 경우 허리가 짤록한 벌과 같다하여 봉요(蜂腰)라고 하며 이를 피한다.
♣ 봉우장집[鳳羽長戢]군자(君子)가 출세(出世)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 봉우진[封于秦]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갔다가 비를 만나 소나무 밑에 피하고, 그 소나무를 대부(大夫)로 봉했다.
♣ 봉원[蓬原]동래(東萊)의 별칭이다.
♣ 봉유[封留]전한(前漢)의 공신(功臣) 장량(張良)이 유후(留侯)에 봉해진 것을 말한다.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공신을 봉하면서 장량에게 제(齊)나라 땅에 삼만 호(三萬戶)되는 지방을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니, 그는 ‘신이 처음 폐하(陛下)를 유(留)에서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면 족합니다.” 하였다.
♣ 봉유족[封留足]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공신들을 봉(封)할 적에, 장량(張良)의 공이 가장 크다 하여 그에게 삼만호(三萬戶)를 봉해주려고 하자, 장량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臣)은 유(留) 땅에 봉해진 것만으로 만족하고, 삼만호는 감히 당치 않습니다.” 하여, 마침내 장량을 유후(留侯)로 봉해준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五十五》
♣ 봉의[縫衣]옛날 유자(儒者)가 입던 소매가 넉넉한 옷이다.
♣ 봉이[封姨]풍신(風神)의 이명(異名)이다.
♣ 봉익[鳳翼]봉황의 날개로, 대궐 처마를 가리킨다.
♣ 봉인[封印]밀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음. 또는 그 도장.
♣ 봉인[封人]변방을 지키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 봉인[奉引]임금의 앞에서 수레를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 봉인[封人]주(周)나라 때 사도(司徒)에 소속된 벼슬로, 제왕의 사직단과 경기 지방의 수호를 맡았다.
♣ 봉일[捧日]송나라가 망할 때에 황태후인 가씨(賈氏)의 꿈에,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것을 어떤 선비가 받아서 받들고 있었는데, 깨어서 그 꿈에 보았던 선비를 찾다가 육수부(陸秀夫)라는 사람을 발견하여 발탁 등용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육수부는 원(元)나라 군사에 쫓기면서도 어린 8세 황제를 모시고 충성을 다하다가 최후에는 그 어린 황제를 업고 물로 뛰어들어 같이 죽었다.
♣ 봉입금지[鳳入禁池]중서성(中書省)을 봉황지(鳳凰池)라 한다.
♣ 봉입금지교[鳳入禁池翹]요직(要職)에서 벼슬한 것을 말한다. 중서성(中書省)이 금중(禁中)에 있어 중요한 정무(政務)를 처리하여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기 때문에, 중서성을 봉황지(鳳凰池)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는 문하성(門下省)을 지칭한 것이다. 문선(文選) 사조 직중서성시( 謝眺 直中書省詩)에 “여기가 상봉지라는 곳이지, 패옥소리 쟁그랑쟁그랑 울리네.[玆言翔鳳池 鳴珮多淸響]" 하였다
♣ 봉자[鳳觜]십주기(十洲記)에 “도가(道家)에서 봉의 부리와 기린의 뿔을 합하여 달여 만든 아교를 속현교(續絃膠)라고 하는데 이를 사용해 끊어진 활줄을 잇는다.”고 하였다.
♣ 봉자[鳳姿]임금의 자태
♣ 봉자서로[鳳觜犀顱]신체적으로 특이함. 봉의 부리, 무소 두개골은 관상학(觀相學)에 있어 모두 귀인(貴人)의 상에 속함.
♣ 봉장추[鳳將雛]봉황이 새끼를 거느리고 있다는 뜻. 어버이와 자식이 함께 있는 것을 노래한 옛 악곡의 이름이다. 고악부(古樂府) 농서행(隴西行)에, “봉황새 추추히 우는구나, 한 어미 아홉 새끼 거느리고[鳳凰鳴啾啾 一母將九雛].”라 했음.
♣ 봉전[葑田]줄풀[菰]이나 마름[菱]이 여러 해 동안 자라며 썩은 진흙이 쌓여서 밭이 된 것을 말한다.
♣ 봉조[鳳詔]봉조는 임금의 조칙(詔勅)이다.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이 오색지(五色紙)에다 조서(詔書)를 써서 나무로 만든 봉(鳳)의 입에 물려서 반포(頒布)하였다.
♣ 봉조부지상중니[鳳鳥不至傷仲尼]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도가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인 모양이다.[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라고 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봉주[鳳咮]연석(硯石)의 이름이다. 송(宋) 나라 때 용배산(龍焙山)은 마치 나는 봉황이 고개를 숙여 물은 마시는 형상과 같았는데, 그 봉황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결이 옥(玉)같이 고운 창흑색(蒼黑色)의 돌이 있어, 그 돌로 만든 벼루를 소식(蘇軾)이 봉주(鳳咮)라고 이름한 데서 온 말이다.
♣ 봉주[鳳州]현재의 섬서성(陝西省) 봉현(鳳縣).
♣ 봉지[鳳墀]궁전(宮殿) 또는 궁궐의 뜰을 말한다.
♣ 봉지[鳳池]당(唐) 나라 중서성(中書省)이 있는 못 이름인데, 전하여 중서성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한림원(翰林院)에 해당함.
♣ 봉지[鳳池]봉지(鳳池)는 궁궐에 있는 봉황지(鳳凰池)로서 즉 금중(禁中)을 말한다.
♣ 봉지완공영[蓬池阮公詠]완공은 진(晉) 나라 때 완적(阮籍)을 가리킴. 완적의 영회시(詠懷詩)에 “봉지 가에서 배회하고 다시 머리 돌려 대량을 바라보네[徘徊蓬池上 還顧望大梁].”라고 한 것을 말하는데, 봉지는 즉 진(晉) 나라의 장군 조적(祖逖)이 비분강개하여 후조 황제(後趙皇帝)를 참칭한 오랑캐 석륵(石勒)과 싸웠던 곳이다. 《文選 卷二十三》
♣ 봉창[篷牕]뜸을 걸어 놓은 배[船]의 창을 말한다.
♣ 봉책[鳳柵]봉책(鳳柵)은 봉황성(鳳凰城)을 가리킨다.
♣ 봉천[奉倩]봉천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순찬(荀粲)의 자임.
♣ 봉천위[奉天圍]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으로 피난을 갔다가 주자(朱泚)의 반군(叛軍)에게 포위를 당한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12》
♣ 봉천조[奉天詔]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당하여 봉천(奉天)으로 쫓겨가 있을 때, 주자의 군대는 철통같이 봉천을 포위하였고, 양식도 거의 다하여 상황이 매우 다급해지자, 덕종이 장리(將吏)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여 스스로 위망의 지경에 빠졌으니, 이는 실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경들은 아무 죄도 없으니, 의당 일찍 투항을 해서 처자를 구해야 할 것이다.”고 한 것을 말한 것이다. 《資治通鑑 卷二百二十九 唐德宗紀》
♣ 봉체[封遞]벼슬아치가 암행어사의 봉고(封庫)로 인해 체직되는 일.
♣ 봉춘군[奉春君]유경(劉敬)의 봉호(封號).
♣ 봉취[鳳吹]생황(笙篁)이나 퉁소 등의 악기. 여기서는 임금의 행차에 연주하는 음악을 뜻한다.
♣ 봉침[縫針]옷을 꿰매는 바늘.
♣ 봉태[逢殆]액을 당하다.
♣ 봉패위[逢覇尉]한(漢) 나라 때의 명장(名將) 이광(李廣)이 한때 파직되어 초야에 있을 적에, 하룻밤에는 기병(騎兵) 하나를 데리고 나가 어떤 이와 전간(田間)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패릉정(霸陵亭)에 이르렀을 때, 패릉위(霸陵尉)가 취하여 이광을 못 가게 하자, 이 광의 기병이 “옛 이 장군(李將軍)이다.”고 말하니, 패릉위가 말하기를, “지금의 장군도 밤에 다니지 못하는데, 무슨 까닭이냐?”하고는, 강제로 이광을 패릉정 밑에서 자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九》
♣ 봉해[蓬海]봉해는 봉래도가 있는 바다를 말한다.
♣ 봉해천[蓬海淺]봉해는 봉래도가 있는 바다를 말한다. 동한(東漢)환제(桓帝) 때 선인(仙人) 왕원(王遠)이 채경(蔡經)의 집에 내려와 선녀 마고(麻姑)를 불러왔는데, 마고가 말하기를 “내가 선인을 모신 이후 동해가 세 번 뽕밭이 된 것을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 보니 물이 또 그전에 모일 때보다 절반가량 얕아졌었습니다.”에서 나온 것이다.
♣ 봉현[鳳絃]가야금 줄을 말한다.
♣ 봉혜[鳳鞋]봉황새를 수놓아 꾸민 부인(婦人)의 신을 말한다.
♣ 봉혜하덕쇠[鳳兮何德衰]논어(論語)에, “접여(接輿)가 공자 앞을 지내 가며 노래 부르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한고.’ 하였다.” 했다.
♣ 봉호[蓬壺]바다 속에 있다는 신선들이 사는 산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습유기(拾遺記) 고신(高辛)에, “삼호(三壺)는 바로 바다 속에 있는 세 산으로, 첫 번째는 방호(方壺)인데 이는 방장산(方丈山)이고, 두 번째는 봉호(蓬壺)인데 이는 봉래산이고, 세 번째는 영호(瀛壺)인데 이는 영주산(瀛洲山)으로, 모양이 마치 술병과 같이 생겼다.” 하였다.
♣ 봉호[封胡]봉호갈말(封胡羯末)의 약칭으로 진(晉) 나라 사씨(謝氏) 집안의 사소(謝韶), 사랑(謝郞), 사현(謝玄), 사천(謝川)의 자(字)인데, 모두 훌륭한 인물들이었다.
♣ 봉호[封狐]봉호는 큰 여우를 말하는데, 염토(炎土) 지대에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많이 해친다는 뜻으로,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복사가 쌓여 있고 봉호는 천리에 우글거린다[蝮蛇蓁蓁 封狐千里].” 하였다.
♣ 봉호몰인[蓬蒿沒人]후한(後漢) 장중울(張仲蔚)이 “蓬蒿沒人”한 집에서 영명(榮名) 대신 양성(養性)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인정해 주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유공(劉龔)만은 알아주었다고 한다. 《高士傳 中 張仲蔚》
♣ 봉화여산하[烽火驪山下]주나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란 미인에게 미혹하였는데, 포사는 평생에 웃는 일이 없었다. 왕은 한 번 웃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여산에 봉화(烽火)를 올렸더니 사방의 제후(諸侯)들은 참으로 난리가 난 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가 헛걸음을 하니 그제야 포사가 한 번 웃었다. 그 뒤에 정말 외적이 침입하였을 적에 봉화를 드니 제후들이 믿지 않고 군사가 오지 않아 국도(國都)가 함락되었다.
♣ 봉황대[鳳凰臺]경주(慶州)에 있는 누대(樓臺)로, 일본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들르던 곳이다.
♣ 봉황대[鳳凰臺]봉황대는 금릉(金陵)에 있는데, 이백이 시를 짓고 놀던 명승지이다. 이백(李白)이 금릉(金陵) 봉황대에 올라서 지은 시에, ‘삼산은 반이나 푸른 하늘 밖에 떨어졌고, 두 물은 백로주(白鷺洲)를 가운데로 나누었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는 구절이 있다.
♣ 봉황대[鳳凰臺]이백(李白)이 황학루(黃鶴樓)에 갔다가 최호(崔顥)의 황학루 시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지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짓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후 금릉(金陵) 봉황대(鳳凰臺)에 가서 봉황대(鳳凰臺) 시를 지었는데, 그 구성은 황학루 시를 모방하였다. 황학루 시에 “옛사람은 황학을 타고 떠나버리고, 이곳엔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昔人巳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하였다.
♣ 봉황령[鳳凰翎]대나무 잎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