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직업인지라 남들 다 출근하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하는 시간에 퍼질러 자는 펜더...뭐 어쩌랴? 글쟁이 팔자 간 녹여가며 밤 세워 일하는 것이 체질에 맞는 것을...
문제는 이 라이프 스타일이란 것이 보통 새벽 5시쯤 잠을 청해서 보통 정오 이쪽저쪽해서 깬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거진 6년째 하다보니 이제 고치고 싶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고쳐야 할 이유도, 바꿔야 할 필요도 못 느끼고 있던 내게 엄청난 시련이 시작되었으니...바로 전화였다.
작년 연말부터 갑자기 늘기 시작한 그놈의 “전화판촉”의 70% 이상은 대부분 "땅 사세요"로 시작되는 부동산 업자들의 전화였다...문제는 이넘들이 꽤 조직적으로 사무실을 차려서 전화를 한다는 것이다.
- 땅 좋은데 나왔는데 좀 사지??
- 신도시에 좋은 땅이 나왔는데...
내가 받은 것 중에 제일 황당했던 전화는,
- 아저씨 돈 벌게 해 준다니까, 일단 집어만 넣어 놔. 여기가 뜬다니까 글쎄...
다짜고짜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돈 벌게 해 준다니까!!” 하는 소프라노 톤의 그 괄괄한 목소리...이놈의 전화통을 박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선택한 것이 오전 중에 전화기 코드를 뽑아 놓는 것 이였다. 즉, 와이프가 출근하기 전에 우리 집 전화기 코드를 뽑아 버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니 자는 동안엔 괜찮았는데, 문제는 내가 잠에서 깨어난 후에 슬슬 일을 하려 할 때였다. 다시 전화기에 불이 붙고,
- 땅 사라니까...사람이 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당신 부자 만들어 준다니까!!
대충 이런 전화부터 시작해서, 초고속 인터넷 망 서비스 가입 권유 전화, 비데기 판촉 전화, 홈 씨어터 등등 가지각색의 판촉 전화가 다 걸려왔다. 아마 이것도 무슨 “붐”이 분 건지, 아니면 집에 앉아 있는 얼빵한 아줌마들 돈 빼먹으려고 덤벼드는 건지(실제로 얼마전 본 우원의 모친께서 사기를 당했다...뭐 결국 어떻게 해결은 봤지만, 참 징했다...이걸 고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목하 고민 중이다) 여하튼 벼라별 전화가 다 왔다.
하나포스인가 하는데서는
- 제주도 2박3일 숙박권하구요, 가입비, 설치비 무료에다가, 사은품으로...
- 저...메가패스 쓰는데요...2년 약정이 되어 있어서,
- 어머 그러세요? 잘 됐네요, 이번 판촉기간 동안에 가입하시는 분들께 한해서 위약금 지원 혜택이 돌아가는데, 이 참에 메가패스 해지하시고 저희 거 쓰세요. 거기서 뭐라 그러면 저희 고객센터에서 알아서 다 해결해 드릴테니까...
위약금까지 물어준단다...그래도 이런건 양반이다. 엘쥐에서 무슨 홈 씨어터 당첨 되었다고 구라성 전화가 날아와 하는 말이
- 한달에 3만 얼마를 내시면 디비디 타이틀 주구요, 뭐뭐뭐도 줘요...
대충 이런 구라성 멘트 날리는 데는 100% 사기다. 하루에도 이런 전화 수십통이 오는데, 오는 족족 '18' 거리며 끊어버린다. 사람들 등골 빼먹으려고 작정한 넘들, 나중엔 집에 있는 나에게 울 와이프가 신청했다며 구라를 날리기 시작하는 넘들도 등장한다.
- 안주인 되시는 분이 비데를 사셨는데요, 여성들 냉이나 대하에는 비데다 딱이거든요?
- 울 와이프 이름 알아요?
- ............
- 계약을 했으면 이름 정도는 알 거 아닙니까?
- 아니. 그게 아니라 바깥분의 허락을 받으시라고 하도 급하게 말씀하셔서...
- 방금 전엔 계약 했다면서요?
- ............
- 당신 구라치는 거지? 어디서 사발을 풀고...
이쯤 되면 전화가 끊어진다. 음...전화도 이 정도가 되면 공해가 된다고 봐야 하나? 이런일을 몇 번 겪게 되자, 결국 수가 생겼는데, 그게 뭐냐면, 전화 건 뇬놈들에게 따지듯이 묻는 거다.
- 당신 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냈어?
이러면 십중팔구 어물쩡거리는데, 여기서 교육 받고 안받은 이들의 티가 확 난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녀석들은 어물쩡거리다가 그 중 절반은 그쪽에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나머지 절반은 변명으로 일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들은 천연덕 스럽게 이렇게 받아친다
- 아이 사장님도 저희가 하는 일이 이거 아닙니까? 그거 못 알아내겠어요?
(대부분 날 부르는 호칭이 사장님이 된다. 왜 사장님일까?) 만약 여기서 더 추궁하게 되면 이렇게 받아친다
- 하하, 너무 많은걸 아시려고 하시네, 이게 다 저희들 영업비밀입니다. 이것도 경쟁이 치열해서요. 좀 이해해 주십시오 사장님.
이러면서 말을 막아 버린다.
일단 이런전화 받으면 기분이 나쁜게 사실이다. 내 경험상 이런 전화판매로 나가는 물건 중에 좋은 물건 못봤다는 게 정답이고, 결정적으로 내가 원치 않는데, 전화기를 놓지 않고 끝까지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역시 고역이다. 결국 나란 녀석이 한다는 짓이 전화가 와서 뭐 판다는 전화면 그냥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가끔
- 18년놈...
이라고 짧은 욕 한마디와 함께 말이다. 어쩌다 기분이 좀 나쁘면, 전화통을 붙잡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끄집어내서 욕을 한 적도 있었다. 뭐 그네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이런 전화를 하루에 엿 댓통씩 받다보면 매일 인내심 테스트를 받는 느낌이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져 버렸다. 저번 주 금요일날이었다. 역시 전화코드를 연결하자마자 곧 울리는 전화기,
- 여보세요?
- 예, 안녕하세요, 저희는 웅진 코웨이 정수기 랜탈 사업부...
어쩌고 저쩌고...아 전화를 끊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짧은 선택의 기로, 그러나 이럴땐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여야 한다는 전장의 법칙을 난 망각하고 말았다...실제로 이들은 전화기를 받자마자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주저함이 있으면 곧바로 따발총처럼 쏘아붙힌다. 만약 이때 전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묘한 연민과 동정심 같은게 생겨서 전화를 끝까지 받게 되고,
- 미안합니다.
란 말과 함께 끊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첫 5초의 대화가 끝나기 전에 전화기를 끊어야 한다. 명심하라 독자제위 열분들...
- 고객님께선 무슨 물을 드세요?
- 예? 무슨 물이라뇨?
아...여기에 난 걸려 들고 말았다. 왜 질문을 했지? 하긴 이게 그들이 파 놓는 함정이었던 것이였다. 질문을 던지게 만들어서 대화를 끌고 나가려는 그들의 노련한 술수...아 씨바 첫 5초안에 전화를 끊는건데!!
- 아네, 집에서 어떤물을 드시는가 해서요, 정수기 쓰세요? 아니면 생수 사서 드세요?
- 아...저희집은 그냥 물을 끓여서 먹는데요...
- (화들짝 놀라며) 어머 정말요? 대단하시네요!!
- 예?
- 제가 지금까지 여러집에 전화 드렸는데, 선생님 같은 분은...저기 혹시 가장이세요?
- 예...(또다시 대답을 하고 말았다)
- 예...제가 오늘 백 집 넘게 전화를 드렸는데, 물 끓여 드시는 분은 두분 정도밖에 없으셨거든요...요즘도 물 끓여 드시는 집이 있네요?
- (뭔가 시대에 역행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그게 큰 잘못인가요?
- 아니, 그게 번거롭지 않으세요?
- 제가 물 안 끓이는데요?
- ......요즘은 정수기 물을 마시는 게 시대의 대세예요. 저희가 그래서 선생님께 이렇게 전화 드린 거구요
- ........
- 요즘 경제도 힘든데 정수기를 사는게 경제적으로 부담도 되시고 하는데, 저히는 한달에 2만 9천원에(2만 얼마였다) 정수기를 빌려드려요. 특별히 저희 정수기를 10일 동안 사용해 보시고 좋으시면 랜탈 하시라고 이렇게 전화 드리는 겁니다.
- 그거 가지고 오면 무조건 빌려야 하는 거잖아요
- 어머 그런게 어디있어요. 고객님이 원하시면 빌려드리는 거죠. 저희는 그런거 없어요. 그리고 하루에 900원 꼴인데, 온 가족에게 건강한 물을 마시게 하는데, 가장으로써 그 정도도 못해 줘요?
정말...하루에 900원이 없어서 정수기를 못 빌리면 무능력한 가장으로 매도되는 게 되어 버렸다. 여기서 안 빌린다면 그냥 무능력한 가장으로 낙인 찍히는 셈이었다.
- 저는 그냥 물 끓여 마실께요...지금까지 마시던대로 살아야죠.
- 그럼 하루 900원을 못내서 무능력한 가장으로 지내시려구요?
- 그렇게 필요성을 못 느끼는데요? 집도 좁은데 정수기까지 들이면..
결국 전화기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 여자의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계속 그런 물 드세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계속 그런 물 드세요 하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물 끓여 마시는 게 마치 하층민의 전형처럼 보이는 삶이란 느낌이 들었다. 막 전화기에 대고 한소리를 하려는 찰나 전화는 끊어졌다.
그날 오후 동안 난 900원도 못내는 무능력한 가장으로 살아야 하는 날 보게 되었다.
여러통의 판촉전화를 받아봤지만, 이 정도로 내 폐부를 깊숙이 찌른 전화도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사람이 바보가 되고, 29년 동안 잘먹고 잘 살았다고 자부한 내가 그놈의 정수기 한대 못 들여서 무능력한 가장이 되어 정수기 회사 직원으로부터 “그런 물”로 치부되는 끓인 물을 마셔야 하는 못난 가장이 되다니...으음...결국 정수기 물을 가족들에게 먹이는 사람만이 능력있는 가장이 되는 세상에서 펜더는 정말 무능력한 가장으로 살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P.S 본 우원에게 전화를 건 웅진 코웨이의 랜탈 사업부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하는 여자분이 이 기사를 보게 되면 다시 펜더네 집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하루 900원씩 내고 당신 기준으로 “능력있는 가장”이 되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당신네 정수기 빌리기로 결심 했습니다. 정말 그 물 마시면 저 같은 놈도 능력 있는 가장으로 가족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건가요?
첫댓글 나도 그런 물 먹고 살지..ㅋㅋ~ 근데 울집에 정수기 있어도 난 정수기 물 싫더라.. 오히려 지저분한 경우도 있쥐..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