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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사상
날짜 : 1990년 1월 12일
장소 : 한국 서울 중구 장교동 종교회관
행사 : 문선명 선생 내외 한국종교협의회 방문 환영식
각 종단의 중진 되시는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종단을 위해 봉사하고, 그 종단 자체가 자기 사명을 다하게 될 때 대한민국의 앞날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의 종단만으로는 안 됩니다. 서로 어떻게 화합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인데, 비단 종교계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계를 보나 사상계를 보나 문제가 됩니다. 어차피 인류는 하나의 목적점을 향해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인생문제와 신을 중심한 성인의 가르침
외적 내적 세계를 보면, 정치·경제·문화·사회를 중심삼고 역사를 이어 나오는 수많은 국가군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적 세계를 보면 각 종단들이 있습니다. 이 종단들의 각 종주는 다르지만 세계를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에 비하면 종교는 마음과 같은 것이고, 일반 사회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을 두고 볼 때, 그 몸과 마음이 언제 통일되느냐? 어떤 성인이든지 ‘내 교리를 통해서 몸과 마음을 하나 만들었다. 마음과 몸이 싸우는 이 전쟁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하고 자신 있게 선언한 사람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가 이와 같이 대치하고 있고, 외적 세계인 국가 주권자들에게 지금까지 종교계가 탄압을 받아 왔습니다. 많은 희생을 당해 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종교계는 맞기만 하고 외적 세계를 쳐 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맞으면서 커 나왔습니다. 이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근본사상’입니다.
본인은 대한민국 백의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종교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누구보다도 고심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인생과 인간의 문제를 놓고 깊은 고심을 하였습니다. 인간문제를 누가 해결해야 됩니까? 인간끼리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해결해야 됩니까? 성인의 가르침으로 해결해야 됩니다.
성인이라 하면 여러분이 알다시피 4대 종교의 종주를 말합니다. 그 종주들은 그의 생애 길을 무엇을 중심삼고 갔습니까?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문제인데 신이 있느냐 하는, 신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종교가 철학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종교는 신과 더불어 시작했지만 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를 보면 그 배후에는 신비경과 연결돼 있는데, 신이라는 배후의 움직이는 주체를 중심삼고 뜻을 펴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주들은 신과 더불어 생활무대를 같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과 더불어 출발하는 그 생활은 어떤 생활이겠습니까? 개인적 생활이겠습니까, 아니면 가정을 중심삼고 출발한 생활이겠습니까, 종족을 중심삼고 신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종교의 생활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백의민족을 중심삼고 출발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또한 국가와 더불어서이겠습니까? 세계문제와 영계와 육계, 하늘과 땅까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출발하면서 가정 구원 논리를 제창한 종교가 어디 있었습니까? 사회 구원, 종족 구원, 국가 구원을 주창하며 출발한 종교가 있었습니까? 대다수의 종교는 개인 구도를 주장합니다. 개인이 구원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그 도주가 가르치는 교리는 현세와 격리시키는 내용입니다. 출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비단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가라는 것이 뭡니까? 대한민국 백성으로서 어느 종족의 성씨를 통해서 태어났으면 그 전통적 역사 배경이 전부 나를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후의 전위대와 같은 가정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출가한다는 그 자체는 나라를 부정해야 되고, 사회를 부정해야 되고, 가정을 부정해야 되고, 가정에 있어서 부자관계까지도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운명의 길은 우리 개개인이 노력해서 개척할 수 있지만, 숙명의 길은 개척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의 관계를 끊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 됩니다. 어떤 독재자가 ‘저게 네 아버지가 아니야! 저게 네 아들이 아니야!’ 하고 천년만년 교육한다고 해도 그것은 혁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출가에서 부자의 관계까지 부정하고 나서는 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문제가 큽니다. 출가라는 말은 어머니 아버지의 관계를 그냥 붙들고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의 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를 중심했던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자기완성을 표준 하고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아완성을 표준 한 것입니다.
종교의 기원, 그리고 신과의 관계
모든 종교는 자아완성을 표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차적인 종교는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부모의 혈연까지도 부정하게 하고, 그다음엔 후대를 부정시키기까지 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천주교나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를 부정하고, 나라를 부정하고, 자기 가정을 부정하고, 자기 부모를 부정하고, 남자가 여자를 부정하고, 여자가 남자를 부정하는데, 왜 이래야 됩니까? 근본 문제가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그런 문제가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정해야 되느냐 하는 논리, 그 교리를 어떻게 종단에서 찾아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모호합니다. 불교나 유교도 그렇습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성지강(人性之綱)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여기서 ‘천(天)’이 하늘인데, 하늘이 있더라도 시작과 더불어 영원히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내가 이상적 하늘로서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작과 더불어 과정과 끝 전체가 영원히 천이어야 합니다. 그 천과 더불어 내가 행복해야 됩니다. 불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 천과 하나되게 될 때 모든 존재가 부러워해야 되고, 모든 것이 그를 높이면서 따라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개체가 태어난 어떤 특수성, 한국 민족이면 한국 민족에만 한정된 내용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종을 초월하고 사상을 초월하여 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과 더불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종단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주와 신과의 관계를 볼 때, 신을 따라가야 되겠느냐, 종주를 따라가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주와 신의 관계에서는 종주도 신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신이 절대적인 신이라면 절대적으로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신과 나의 관계, 신과 종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신과 종주의 관계와 종주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본인은 영계와 종교계에 대한 문제를 중심삼고 고심하다 보니 신비로운 세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 신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요즈음에 관계의 세계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 집을 볼 때도 부자의 관계, 부부의 관계, 형제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가정과 가정의 관계도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가정의 관계에서 탈락되면 안 됩니다. 자기와 가정의 관계, 가정과 가정의 관계, 종족과 종족의 관계에서 중심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관계의 세계를 떠날 수 없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이 되려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관계가 이상적이어야 합니다. 부부관계와 형제관계가 이상적이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기들끼리만 좋아하거나 부부끼리, 혹은 형제끼리만 좋아하면 안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부모와 아들, 종적 횡적 전후좌우로 다 화(和)해야 가화(家和)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화(家和)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개개인의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팔선이 문제가 아니고 세계의 전쟁이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 근본이 무엇이냐 할 때, 나입니다.
종교는 몸을 치고 마음을 따라 사는 생활
‘사람’이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남자 여자는 마음과 몸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를 믿는데 마음과 몸으로 믿어야 되겠습니까, 마음으로만 믿어야 되겠습니까?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믿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것이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 신은 먼저 마음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합니다. 주체인 마음을 통해서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다는 것은 수직을 두고 하는 말합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신과 완전히 하나되어서 몸을 하나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인이 일생을 두고 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신과 더불어 살면서 신의(神意)를 아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신의 뜻을 중심삼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이 잘 따라오지를 않습니다. 마음이 플러스이므로 몸이 마이너스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몸도 플러스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플러스와 플러스끼리가 되니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만들어야 되겠습니까? 근본 이상을 찾아 강력한 신앙심으로, 그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절대적인 자세를 갖추어 몸을 약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고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천사람 만사람 다 싫어합니다. 몇 억의 불교 신자가 있다면 그 가운데 고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억지로 하는 데서 이상이 실현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론적으로 모순입니다. 기뻐서 해도 안 될 일인데, 억지로 하여 완성을 본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종교생활은 몸을 치는 생활이므로 플러스인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마이너스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마이너스만 만들어 놓게 되면 하나되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이 마이너스로 돌아감으로써 몸과 마음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신은 왜 몸을 치지 않아도 되도록 창조하지 못했느냐 하면서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까닭은 모르지만 인간이 병 난 것은 사실입니다. 스님들이 계시지만, 아무리 도를 닦으며 염불을 외우더라도 고깃덩이의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욕망은 살아 있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정성 들이고 도를 닦는데도 잘 되지 않습니다. 가는 길과 그 세계의 전진 과정은 공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종교를 중심삼고 왜 몸을 고생시켜야 합니까? 양심 기준 앞에 몸을 약화시킴으로써 따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몸을 약화시켜 한 3년 동안 끌고 다니면서 습관이 되게 해야 됩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신앙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절대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나라와 세계의 잡다한 것 다 버리고 절대적으로 도의 기준 앞에 몸을 수양해서 귀일점을 찾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도 다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종교세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인격혁명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과 절식을 하고, 고행하면서 사회에 나가 핍박을 받고 반대를 받아야 합니다. 도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몸이 죽겠다며 야단하더라도 아랑곳없이 모든 것을 잊어야 합니다. 마음 앞에 몸이 순응할 수 있는 자아를 찾기 위한 고된 생활이 종교생활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가짜입니다. 보편타당한 이런 관을 중심하고 볼 때, 양심과 몸을 일치시키기 위해 몸을 경전이 가르치는 내용 이상까지 수행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불교로 말하면 참된 불교 신자입니다. 또한 기독교로 보면 참된 기독교 신자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스님들이 아내를 얻어 아들딸을 가졌다면, 가족을 거느리고 마음세계의 통일권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들을 업고 가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문제를 간소화하기 위해서 출가를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출가를 해서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완전한 도의 성취, 목적 성사를 한 후에 남자 도인, 여자 도인이 하나돼야 합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지금까지 가르쳐 준 모든 도력의 시대가 끝이 나고 도인들도 시집 장가를 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상에서는 시집 장가를 잘못 가서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귀의 소굴, 악마의 소굴, 사탄의 소굴이 돼 있습니다. 신은 ‘이놈의 망할 자식들, 너희들은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배도의 길을 가니 망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를 바로잡기 위해 표본이 필요하다. 스님이 결혼을 하고 신부 수녀들이 결혼해서 표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경전을 통해서 해석하겠습니까? 경전에는 없습니다. 4대 성인은 전부 도주입니다. 종교의 교주입니다. 그 교주를 중심삼고 수천년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인류를 교화시켜 나왔습니다. 천(天), 하나님은 천운을 움직이는 중심의 절대적 신인데, 도주들의 뜻이 좋기 때문에 그들을 세워서 교재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도주는 신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도주를 ‘절대적 신이다.’라고 한다면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근본진리를 찾기 위해 하나님과 담판
인간은 제1 원인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제1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그리는 이상을 가진 분입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아무 생각이나 하는 분이 아닙니다. 절대자이므로 그분이 생각하는 이상은 절대적입니다. 어느 종주든 그분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잘난 종주나 종교지도자, 세상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종교인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하면 큰일 납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디까지나 제1 존재가 아니고 결과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2 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나에게 있어서 제1 존재는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의 제1 존재는 할아버지 할머니입니다.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1 존재는 종지조상입니다. 인간의 종지조상을 중심삼고 알지는 못하지만 신이 있다면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신의 뜻이란 어떤 것입니까? 종교를 세워서 개인을 구도하는 것입니까, 가정을 구도하는 것입니까, 국가·세계·천지를 구도하는 것입니까? 지상과 천상에 지옥이 있는데, 구도라는 것은 천상천하의 지옥을 없애고 천국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절대 선한 분입니다.
본인은 이런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우주의 근본진리가 무엇이냐며 담판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을 발견했으니 죽기 아니면 살기입니다. 근본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담판을 했습니다. 본인은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당신은 어떤 분이시오?’라며 근본 사상을 밝혀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세계적 문제입니다. 거기서 유물사관과 유심사관의 이원론이 생겨났습니다. 마음이 먼저냐, 몸이 먼저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음도 먼저가 아니고 몸도 먼저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민주세계는 마음을 확대시킨 것이요, 공산세계는 몸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어떻게 해야 말릴 수 있습니까?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하나 만드는 것보다 선결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표어로 세운 것이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였습니다. 제1 표어가 이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모든 사람, 모든 종단이 세계와 하늘땅을 지배하고 싶어하지만 자기 자신을 주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10년간 찾아 헤맸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자기 집의 부모를 중심삼고 절대적으로 하나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효자의 도리입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가르쳐 주는 것은 충신의 길입니다. 효자와 충신은 통합니다. 그것을 좀 더 확대해서 말하면 성인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교주들이 성인입니까, 성자입니까? 예수님도 공자님도 석가모니도 성인입니다.
참된 신자란 종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4대 종교에서 도주 중의 도주가 누구입니까? 최고의 산봉우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동서남북 방향은 다르게 올라가지만 산봉우리는 하나입니다. 참된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불교의 스님들이 많이 참석하고 큰스님도 오셨는데, 석가모니가 ‘우리 큰스님이 넘버원이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석가모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계에 가 보면 돈이 필요 없습니다.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그곳에 가 보니까 그랬습니다. 권력이 필요 없습니다. 돈을 창조하고도 남을 수 있고, 다이아몬드별도 만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절대자이고 지식과 권력의 대왕이십니다. 춘하추동 4계절을 넘어서 영원히 자유자재로 행사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불교 신자는 석가모니의 신임을 받는 사람입니다. 신임 받는 것이 제일입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외적 관계에서 내적 관계로 가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석가모니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임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랑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어머니는 자식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아들이라고 절대적으로 믿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품에 안고 젖을 주면서 사랑해야 좋아합니다. 본성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주와 신자 간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관계입니다. 가화만사성의 관계인데, 그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되겠습니까? 교리를 중심삼은 관계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도의 이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도(道)라는 것은 가는 길을 말합니다.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가서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석가모니를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모두 종주를 만나 보고 싶어하는데, 만나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 것이 예수님의 것이 된다면 좋겠습니까? 결국은 귀의라는 것입니다. 동등한 자리에 가는 것이 신자들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동등한 자리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석가모니를 중심삼고 삼촌 관계가 좋겠습니까, 외삼촌의 관계가 좋겠습니까, 종의 관계가 좋겠습니까? 신자들에게 ‘너는 어떤 관계가 되기를 바라느냐?’라고 묻게 될 때, ‘석가모니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결론입니다. 아들딸은 상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같이 살면서 어디든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어디든지 동참할 수 있습니다. 부자의 관계에서 사랑을 중심삼게 되면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속성 가운데는 상속권이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게 될 때 남편의 것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남편의 것은 아내의 것이 됩니다. 또 아내의 것은 남편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금통장 두 개를 갖고 사는 부부가 있다면 그 부부는 가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따리를 싸기 위한 준비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뿌리를 고쳐 놓아야 됩니다.
석가모니와 제자의 관계는 그와 같은데, 예수님에게 ‘신자들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우리 몇 대 손자 종같이 일해라.’라고 말하겠습니까? 기독교 목사들은 ‘하나님의 종’이라며 기도를 합니다. 왜 그런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종밖에 안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종 위에는 양자가 있고, 서자가 있으며, 직계의 아들이 있습니다. 종에서 3단계를 넘어가야 아들딸이 되므로 같은 값이면 아들딸이라고 하지 왜 종이라고 합니까?
레버런 문은 참사랑의 철학자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아들딸같이 가까운 자리에 서고 싶습니까, 이웃집 삼촌 같은 자리에 서고 싶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에게 물어보면 ‘물어볼 게 뭐야? 횡적이 아니라 종적인 제일 가까운 부자의 관계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부자의 관계입니까? 그것은 종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는 횡적입니다. 그러면 종이 먼저입니까, 횡이 먼저입니까? 종이 먼저라면 어째서 그렇습니까? 세상의 모든 물건이 창조될 때 창조주는 수평을 보면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들은 수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종대는 전부 수직으로 자랍니다. 곡식을 보더라도 잎은 전부 휘어지더라도 종대만은 꼿꼿합니다. 종대에는 뿌리 종대와 순 종대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전부 수직입니다.
인간의 시조가 제2의 원인자라면 제1 원인자인 하나님은 높은 데 있고 인간은 낮은 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말하게 될 때, 사랑은 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개념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완전 종적인 수직을 만들 수 있는 작동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식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 가지고는 직행할 수 없습니다. 지식은 돌면서 나아갑니다. 또한 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굴러다닙니다. 권력도 수직이 못 됩니다. 그러나 참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이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 원리가 아니면 해명을 못합니다. 우주를 풀 수 없습니다. 참사랑이 무엇입니까? 직단거리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통하는 참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수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만 틀어져도 수직이 아닌 것입니다. 직단거리가 아닙니다. 무엇이 우주 가운데 직단거리인 수직을 점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참사랑뿐입니다.
본인이 요즘 참사랑 이야기를 하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레버런 문이 참사랑 철학자로 알려졌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돌아서 달려가 구하겠다고 합니까? 자기 생명이 귀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직단거리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복음입니다. 우주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수직 내용의 제일 직단거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있으면 세계는 거기서부터 위치 책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수직을 중심삼고 동쪽에 있든가 남쪽에 있든가 북쪽에 있든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수직이라는 말은 수직을 먼저 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횡인 수평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위라는 말은 위를 중심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래를 먼저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오른쪽이라는 말은 왼쪽이 있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여자만 가지고 여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두루뭉술한 말입니다. 여자라는 말은 남자를 선유 결정요건으로 삼고하는 말입니다. 상대적 개념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에서 제일 바른 수직을 찾으라고 할 때 지식을 가지고 찾을 수 없습니다. 권력으로도 못 찾습니다. 돈 가지고도 못 찾습니다. 그러나 사랑 가지고는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고 하나님의 사랑도 절대적이기 때문에 절대 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최단거리를 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사상입니다.
우주의 근본은 사랑과 생명과 혈통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 책을 보면서 ‘내가 왜 태어났는가?’라며 고민을 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푸대접받는 것이 원통하고 분해. 남자로 태어나서 한번 복수했으면 좋겠다. 윤회 환생해서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여자나 남자, 사람이 태어나기를 누구 때문에 태어났습니까? 자식은 부모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왜 있어야 합니까? 자식 때문에 있어야 합니다. 부모라는 말은 자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식이라는 말은 부모를 선유조건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유조건을 위해서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는 관계가 맺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남자가 태어나기를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참된 남자가 되려면 참된 아들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아들이 되려면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참된 여자를 만나서 참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부부에서 아내는 여자를 대표한 것이요, 남편은 남자를 대표한 것입니다. 전 세계 남성 여성의 대표자입니다. 동물세계는 수컷 암컷, 이온의 세계는 양이온 음이온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모두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컷 암컷은 모두 종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번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여자와의 관계를 생각도 안 하는데 이것 큰일이다.’라고 하겠지만, 천상세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게 될 것입니다. 남자로 생겨났다면 무엇을 하기 위해 그렇게 생겨났겠습니까? 볼록이 볼록 때문에 생겨났습니까? 그 근본 문제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볼록은 오목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또한 오목이 오목 때문에 생겨났습니까? 볼록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천지의 이치입니다. 동양사상도 음양을 중심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음양이 합덕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완성품입니다. 그 음양 합덕은 무엇으로 하는 것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 때문에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남자의 사랑은 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있습니다. 여자의 사랑은 남자에게 있습니다. 나 자체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근본은 사랑과 생명과 혈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혈통의 주체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본인도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을 갖고 있고,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 혼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상대가 척 나타나게 되면 사랑의 주파수가 옵니다.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피가 끓습니다. 그것이 누구를 닮아서 그렇습니까? 근본이 없는 데서는 태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갖고 있고, 생명을 갖고 있고, 핏줄을 갖고 있습니다. 성숙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숙했다는 것은 이성에 대해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세계가 다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사춘기에는 문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한 사람의 남자라면 그것은 남성을 대표한 것입니다. ‘나는 남성을 대표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공부해 가지고, 돈을 모아 가지고, 권력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세계의 남성들 가운데서 사랑하는 데에 지지 않는 대표자로 섰다고 할 때는, 모든 남성들이 ‘옳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표자가 됐다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제일 높아지고 싶어합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그렇습니까? 돈이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그렇습니다. 남자가 태어난 것은 여자 때문이요, 여자가 태어난 것은 남자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서로서로 귀한 것을 바꿔 두었습니다. 여자의 사랑 보따리는 남자가 주인입니다. 남자의 사랑 보따리는 누가 주인이겠습니까? 여자가 주인입니다. 여자가 주인인데 무슨 주인의 자격입니까? 왕권입니다. 시시한 초가집에 사는 남편의 아낙네로서가 아닙니다. 사랑의 왕권을 대표한 주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결혼식을 해야 땅이 진동하도록 북을 치고 좋다며 웨딩마치를 울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모르고 깜깜한 밤이 되어 뭘해도 흥이 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문 총재가 역사 이래 처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 봤습니까? 불교 경전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가 왜 결혼을 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무슨 사랑이냐 하면 절대적인 참사랑입니다. 부자의 관계는 어느 누가 가를 수 없고 혁명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거기에 흐르는 사랑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 관계가 절대적이라면 어머니와 아버지도 절대적이어야 되겠습니까, 상대적이어야 되겠습니까? 어머니 아버지도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가 떠나도 아들딸은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가정을 보면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기도 합니다.
남편 아내가 사는 데 있어서도 절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결혼하고 일주일도 못 가서 이혼하는 패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부부입니까, 가짜 부부입니까? 그것은 가짜 부부입니다.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고 할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스님들도 정성을 들이는 생활로 이 나라 불교계의 고승이 되었지만 옛날 어머니 아버지의 품이 그립지 않습니까?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혁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찾아 들어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의 동기로 흐르는 과정은 사랑관계를 안 갖고는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참사랑, 그리고 영생
그러면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됩니다. 불교에서는 인격적 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상 귀일법을 논해 가지고 인격적 신을 어떻게 발견하겠습니까? 안팎으로 정(情)·지(知)·의(意)의 감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발견합니까? 사랑하는 효자를 가진 부모가 그 아들이 돌아올 때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내 아들아!’ 하면서 고승이고 도주고 다 무시해 버린 채 붙들고 갖은 좋은 표정을 다 짓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 봅시다. 나를 위하는 사랑을 하면 큰일 납니다. 우주는 그것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라고 하는 사랑이라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우주의 근본인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창조의 근본에 들어가서 보게 될 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절대자가 믿을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절대적인 평화, 절대적인 행복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지식입니까? 하나님은 지식의 대왕입니다. 권력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합니다.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도 사랑을 절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참사랑의 아들딸을 만나게 되면 ‘내 것 전부 주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남편은 참된 여인에게 ‘내 것 전부 주겠다.’라고 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다.’라고 하면 참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히 돌아서 주고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기독교 목사들은 ‘창조주는 거룩하고 피조물은 속되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논법을 취소해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사랑이나 사랑이라는 말은 상대성을 떠나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상대가 누구입니까? ‘만물지중 유인최귀(萬物之衆 惟人最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이상적 사랑을 세우는 길은 투입입니다. 완전한 투입입니다. 100퍼센트 이상, 120퍼센트 투입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핍박을 받더라도 120퍼센트, 몇 백 퍼센트 이상 투입할 수 있는 본성의 기원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독재자가 그 시대를 파탄시켜 버리고 무(無)로 해소시켰다 하더라도 세계는 재현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무리 늙었어도 사랑을 재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재자가 누르더라도 역사를 초월해 재현되어서 권위를 당당히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세계의 도주들은 그 시대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투입한 것은 찾아질 수 있는 환경이 되면 드러나기 때문에 그 시대 이후에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신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있느냐 할 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 있느냐고 하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느냐고 하면 있고, 혈통이 있느냐고 하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혼자서는 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적이기 때문에 종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연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적인 자리인 자녀의 자리에서 커 가지고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까지 다 알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합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서 합하느냐? 종적인 자리입니다. 그 가운데 아들딸이 있고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원에 있어서의 현(弦)입니다. 상현(上弦) 하현(下弦)을 축소한 것이 되어 아담 해와는 하나의 부체와 같이 됩니다. 뼈와 살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혈통관계가 아닌 데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참사랑을 중심한 종적인 아버지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합니다. 아담 해와가 결혼하여 부부로서 횡적으로 하나되면 종적인 하나님이 내려옵니다. 그 밀고 내려오는 힘의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구형을 중심삼고 작용을 함으로써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누구를 닮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과 몸이 타락한 인간처럼 싸우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싸웁니까? 고장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합니다. 무슨 고장입니까? 팔은 하나 끊어졌어도 삽니다. 다리가 끊어졌어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 하체를 가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종적인 참사랑의 아버지, 그분이 창조주인데, 타락하지 않았으면 종적인 위치는 90각도입니다. 남자 여자도 참사랑으로 통하는 길은 직단거리입니다. 하늘땅이 통하는 참사랑의 길은 직단거리이므로 수직 앞에 90도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형을 중심삼고 볼 때 제일 높은 자리가 어디냐 하면 중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존재의 중심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가야 하나님의 사랑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내 것이 되고 하나님 앞에 소유된 모든 것은 내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중앙에 가서 하나님과 사랑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을 내 것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 만들고, 하나님의 소유를 내 것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중심삼고는 상속권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동거권,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이 움직이는 곳에 영생이 있다는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영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숨을 영원히 들이쉬어도 좋고 영원히 내쉬어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중심삼고 호흡하는 세계에 참사랑의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통해서 사랑을 이어받은 ‘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사랑을 안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부모의 혈육을 이어받았고, 부모의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모두 사랑을 갖고 있고 생명과 혈통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교의 평화 기준과 사랑의 도리
마음이 무엇입니까?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혈통을 통해서 이어받은 내적인 ‘나’라는 것입니다. 내적인 나는 종적인 나입니다. 그러면 몸은 무엇입니까? 타락하지 않았으면 본연의 근본 이상(理想)을 이어받은 나는 90각도에 서게 됩니다. 타락하지 않은 참된 부모의 사랑과 생명과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나면 몸과 마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적인 내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은 인격, 또 하나는 몸적인 외적 부모를 중심삼은 인격입니다. 거기에서 둘은 사랑을 중심삼고 생명과 혈통을 중심삼은 남자 여자의 혼합적인 통일권을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은 내적인 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기도해 보니 답이 간단하였습니다. 부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 부자의 관계가 그냥 그대로의 부자의 관계라면 타락한 세상에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팔아먹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우주의 비밀인 부자의 관계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부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제일 귀한 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악마의 행각입니다.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과 생명과 혈통인데 이것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제일 미워한 것은 음란입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망하지 않았습니다. 음란 때문이었습니다. 악마가 음란으로 악을 뿌렸으니 세계적으로 음란 바람에 휩쓸려 가는 인류의 군상이 될 때는 철퇴가 가해지는 것입니다.
교단이 그렇게 될 때는 교단이 망해 떨어지고, 나라가 그렇게 될 때는 나라가 망해 떨어지고, 역사가 그렇게 잘못되면 그 역사의 방향이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종교를 찾자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참된 하나님입니다. 지금까지 구원해 나온 하나님은 이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도주를 교육하고 인도해야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갖고 살고 싶으냐 하면 사랑을 중심삼고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답이 그것입니다.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몸이 90각도로 맞춰져서 완전히 하나된 사랑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통일시킬 수 있습니까? 참사랑입니다. 그러면 참사랑은 무엇입니까? 완전히 희생하고, 백 퍼센트 투입하고는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류가 역사시대에 잘못한 것을 보고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사람 같으면 다 말살해 버렸을 것입니다.
참사랑은 타락한 세계에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종적인 기준만 남아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 대신의 입장에서 그것만 땅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섭리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무엇을 중심삼고 살고 싶겠습니까? 참사랑을 중심삼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참사랑을 가진 남자 여자와 더불어 살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함께 품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을 가진 아들딸을 이 땅에 붙들고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목적
불교 스님들이 문 총재가 석가모니보다 높다고 한다고 야단을 하였습니다. 예수보다 높다, 공자보다 높다, 누구보다 높다 한다고 말입니다. 한 생애로 볼 때 종주 가운데 본인만큼 일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본인은 수십 수백 국가에서 반대를 받아도 기반을 닦았습니다. 일대를 중심삼고 볼 때 본인만큼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했다면 벌써 죽은 지 오래였을 것입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했으면 그랬을 것입니다.
선의 길인 통일교회의 행로는 사랑을 통한 이상을 중심삼고 가는 길입니다. 개인적 사랑관, 가정적 사랑관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사랑관은 수직입니다. 수직적 사랑관을 갖고 사상적 관을 바꿔야 합니다. 수직적 관을 갖춘 수평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민족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너 흑인하고 결혼해!’라고 하면 이의가 없이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몇 천년 전에 잃어버린 형제를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내 형제입니다. 얼굴 검은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하면서 붙들고 웁니다. 그와 같이 통곡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통곡을 잊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참사랑입니다. 통일교회는 그렇습니다. 본인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세계에 난다 긴다 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 이론적으로 논하여 패권을 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종교지도자들은 나를 좋아합니다.
이론에 맞지 않는 교리는 21세기에 필요가 없습니다. 이론에 맞지 않고 현실생활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종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렇습니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함부로 보아 넘기지를 않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논합니다.
하나님은 세계 구도가 목적이기 때문에 가정을 희생시키더라도 하나님의 민족을 찾으려고 합니다. 국가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하려고 합니다. 이 땅 위의 세계를 희생시켜서 만대의 영계에 간 모든 영혼들을 해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이 해방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세계의 종교계에 있어서 아는 사람이 십자가를 져야지.’라고 하면서 40성상을 풍상에 시달린 사나이가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입니다. 그 기백을 보면 천지를 막고 남을 수 있는 기백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부터 통일교회를 희생시키고, 만교(萬敎)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구원을 해야 한다고 제창한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의 예산보다 몇 백 배 많은 돈을 투입하여 초교파운동, 종교연합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무대에서는 종교재단을 만들어서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의 피를 팔아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 투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같이 투입하면 소생의 봄날, 환희의 사랑이상을 중심삼고 둥둥 춤출 수 있는 본연의 이상세계가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십자가를 동에서 지든, 서에서 지든, 집안에서 지든 응당 인류를 위하여 그 누군가는 져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구덩이의 썩은 물이 맑아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통일교회 사람들입니다.
흥하고 망하는 길은 위해서 사는 것에서 갈라집니다. 자연과학의 역학에서 입력과 출력을 두고 보면 언제나 입력이 출력보다도 큽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에서는 입력보다도 출력이 큽니다. 사랑이 있음으로써 이지러져 가는 세상에서 균형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해서 희생하는 터전과 위해 주고도 더 위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참사랑의 전통을 이어받는 데서만이 이 세상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위하는 길은 효자 사랑의 길입니다. 충신 사랑길, 성인 사랑길입니다. 성인의 사랑은 인류를 위한 사랑입니다. 성자는 하늘땅을 사랑하고, 하늘 왕궁법까지 지킬 줄 압니다. 하나님까지 심정적으로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종적인 자리를 붙들어야 됩니다.
성자의 도리와 하나님 사랑의 도리를 배우지 않고는 만교의 평화 기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종교협의회가 금후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겠느냐 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