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의 엄마 감나무 벌레야!
외가 뒤뜰에는 초가집 지붕보다 더 높이 치솟은 감나무가 있고 갓난아이 주먹보다도 종자가 작은 감이 가지가 휘어질듯이 올망졸망 달렸다.
찰감이라 그런지 땡감이라도 양손으로 한참 동안 조물락거리면 엄마의 젖가슴 마냥 몰캉몰캉 해지는데,
새끼손가락으로 "뽕" 뚫어서 쪽쪽 빨아 먹으면 감즙이 꿀처럼 달다.
외가 식구들은 그 감나무를 찰감나무라 하였다.
봄날, 마른 나뭇가지에 연초록의 싹이 움트고, 언땅을 헤치고 백합의 연둣빛 촉새가 장독대 옆에서 고개를 "쏘옥" 내밀면 아이들도 부산스럽게 흙장난을 하며 소꿉놀이가 시작되는데,
그곳은 늘 외가의 감나무 밑이었다.
어린 화야는 항상 도시로 간 엄마가 보고싶었다 .
날만 새면 동무들과 함께 오지도 않는 엄마 마중을 나가곤 했었다.
소꼽친구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단옷 입고 도시에 사는 엄마였다.
아이들의 그 행사는 매일 반복되었다. 동네를 둘러 싸고 흐르는 강어귀에서 마냥 기다리다가 헛탕치고
돌아 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순박한 아이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늘 강가로 나갔다.
어느날 엄마 꿈을 꾼 화야가 꾀병을 부리고, 밥을 먹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놀란 할머니는 밥숟가락으로 떠맥이면서 ,
밥 잘 먹으면 엄마가 온다는 소리에 한그릇 거뜬히 먹어 치우고 외사촌 출이에게 달려간다.
"우리 엄마가 온댄다 빨리 가자"
아이들은 강가로 달음질하고 돌다리를 건너서 오실 화야의 엄마를 기다린다.
지난해 비단옷에 여우 목도리를 걸치고 구천동네에 입성했던 화야엄마를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의 고모이며 이모이기도했다.
두아들만 데리고 도시로 간 엄마는 그리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습관처럼 늘 강가로 갔었고 물놀이 하면서도 "흘깃흘깃" 강건너를 지켜보았다.
다섯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이 감이 익기 시작하면 나무에 잘도 기어 오른다.
그중에 가장 높은 나무에 오르는 아이는 늘 사내 같은 화야였다.
나무 하나에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 쌍둥이감, 혹부리감 ,주전자감, 납작감 ,항아리감 ,
잎사귀 속에 불그스레, 꼭꼭 숨어 있는 돌연변이 감들만 따서 밑으로 던지면 아이들은 밑에서 치마로 받는다.
첫 홍시가 장독 위에 툭 떨어지던 날부터,
감홍시에 맛 들인 아이들은 앞마당에서 뛰어놀다가도 수시로 뒤안 감나무 밑을 두리번거린다.
그날도 엄마는 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뒤뜰 감나무 아래서 소꼽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움푹 패인 감나무 구멍 속에서 회색빛 털투성이 벌레 한 마리가 "스멀스멀"기어 나오는 것을 발견한 화야!
냅다 큰 소리로 외친다.
"우리 엄마다."
출이와 옥자가 깜짝 놀라서 바라본다.
" 야들아 ~저거 우리 엄마하자 !
이제부터 우리 엄마야"
엄마!
엄마 !
다른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부르는 엄마였지만 그동안 목말랐던 화야에게 엄마라는 대상이 정해지자 속에 꽉찬 응어리를 쉴새없이 뱉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출이와 옥자도 함께 부르자고 종용하는데,
외사촌 출이는 단박에 싫다면서 부얶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크게 불러본다.
부엌일을 하고 계시던 외숙모의 대답소리가 바깥까지 새어나오자 화야는 또 한 번 기가 죽는다.
이종사촌 옥자도 이내 엄마 자랑을 한다.
"울 엄마도 집에 있다"
벌레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쓰고싶지 않았던 총기있는 아이들은 함께 강가로 마중을 갈지언정
벌레 엄마는 필요 없었던 것인데, 함께 동요해 주지 않는 동무들이 섭섭했지만
엄마!
엄마!
화야는 원없이 불러 보았다.
그날 감나무 벌레는 그리운 엄마 역활을 톡톡히 해 주었고 느닷없이 엄마가 된 감 벌레는 구멍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엄마의 존재가 나타나자 화야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소꿉놀이에 빠져들었다.
화야의 마음속에 각인된 감나무 벌레는 이후로 엄마가 되었고, 날이 새자마자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벌레를 찾는다. 하지만 그 벌레조차 엄마만큼 만나기 힘들었다.
움푹패인 구멍 속으로 숨어버린 엄마벌레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 구멍에 입을 대고 큰소리로 불러 보기도한다.
어느날 감나무 가지위에 앉아 놀던 화야와 마주친 감나무벌레!
우리 엄마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벌레는 아랑곳 없이 유유히 사라졌다.
싯푸른 잎사귀 틈사이로 하얀 감꽃이 살포시 웃음을 드러내면 감꽃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분주하게 감나무 밑을 서성이는 아이들 ,하늘에서 떨어진 맛나 같은 달콤하고 쌉쌀한 감꽃을
줏어 먹기 시작하면,
엄마들은 아이들 주전버리 걱정 없이 들 일을 나가시고, 작은 아이들은 한 광주리 감꽃을 주워 모아
굵은 실에 꿰어서 목걸이도 만들고 화환도 만든다.
그날 하얀 감꽃으로 치장한 어린 신부는 꼬마 신랑을 맞이하고,
아이들의 깔깔 웃음소리가 돌담 너머 이웃집까지 건너가면, 엄마 품에서 갓 벗어난 아가야
"아장아장" 걸음마 앞세우고, 옆집 할머니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신다.
엄마가 사 보낸 붉은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화야가 감꽃 신부가 되었을 때도,
감 벌레 엄마는 분주하게 이파리를 갉아 먹으며 터실터실한 감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감꽃의 향연이 끝나고 감꽃 떨어진 가지에 배꼽 같은 푸른 감이 방긋이 웃으면,
어서어서 감이 자라서 홍시도 먹고 삭혀서도 먹고 조물락 거려 꿀 감도 만들어 먹어야지~
아이들은 야무진 꿈으로 설렌다.
작열하는 한여름 뜨거운 햇살과 천둥번개를 견디어 낸 시퍼런 풋감이 주홍빛을 띠고,
감이파리 붉은 반점을 새기며 물들어 갈즈음, 계절 감각이 없는 작은 아이들은
자주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익어가는 가을을 본능으로 느끼며 마른침을 삼킨다.
가을날 소슬바람에 무게를 견디지 못한 풋감이 떨어져 바닥에 뒹굴게 되자,
감 벌레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설익은 감을 모아 등겨 속에 묻어 두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가끔 심술쟁이 막내 이모가 화야의 등겨 속 감을 모조리 빼앗아 갔었다.
친가와 외가가 담벼락 사이라 구별 없이 살았지만 막내 이모는 유별나게 텃세를 했고,
등겨 속에 묻어 둔 간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파수병이 되어 늘 이모라는 적군의 동태를 살펴야 했다.
뒤뜰에 말라 비틀어진 백합 꽃대와 토란줄기 사이에 떨어진 농익은 홍시가
입 언저리에 묻고, 무명저고리 홍시로 얼룩지기 시작 할 즈음,작은 아이들은 또 한 번 성큼 자란다.
감나무와 함께 자라던 소꿉친구 옥자와 출이를 두고,
어느해 화야는 할머니와 도회지의 부모님에게로 돌아 갔었고, 서서히 도회지의 삶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방학이 되면 가장 먼저 찾던 외가집 찰감나무!
뜨거운 뙤약볕에 밭일하시고 돌아오신 흙투성이 외삼촌이,코를 고시며 단잠 자던 평상에는
감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내리고,출이와 옥자는 대구와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는데
터실터실한 감나무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비비며 반가워하던 여고생 화야는,
문득 벌레가 드나들던 움푹패인 구멍을 발견하며 감나무 벌레를 엄마라 부르며
위안을 받았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도회지의 중산층 생활에 젖은 화야에게 감은 더이상 탐나는 과일이 아니었으나,
겨울 방학에 외가집에 들르면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외할머니는 그 귀한 홍시 하나를 손에 쥐여 주었고,
화롯가에서 먹던 꽁꽁 언 홍시가 어찌나 맛있던지~
그 달콤한 홍시의 맛과 고운 추억을 이제 어디라야 찾을 수 있을까?
감나무 벌레야!
어린 날 내 엄마가 되어 주었던 감나무 벌레야!
움푹 패인 구멍 속을 향해
"엄마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외쳐 부르던 소리 듣고 있었니?
엄마를 향한 막연한 그리움!
한낱 미물에 불과했지만 유년에 위안을 주고 잠시나마 함께 했던,
나의 엄마 감나무 벌레야!
후생에는꼭 아름다운 인간으로 태어 나기를 ~
세영(歲煐)
09.01.19 17:28
첫댓글
감꽃 목걸이를 목에 널어 뜨리고 조개 껍질로 소꿉장난 하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저도 살며시 미소 지어 봅니다,
어린 화야가 엄마라 불렀던 감나무 벌레는 분명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것 같아요,
오랫만에 올리신글, 너무 좋아서 두번이나 읽고 갑니다, 새벽님~사랑해요^^*
훈석
09.01.19 18:43
감꽃의 향연속에서 감꽃 목걸이를 한 꼬마신부 화야며 외사촌 출이 이종사촌 옥자가
오래비 눈에 선하게 보이는군요
오래비도 감꽃 목걸이를 만든 기억이 나네요
고운 추억의 글 고맙습니다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하상
09.01.20 00:03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옹이 박힌 어린 화야의 응석과 투정이 많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주어지는 어떠한 일도 불행은 아니랍니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이 그렇게 단정지어 버릴 때
그 상자안에 갇히게 되고 말지요.
장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있는 화야의 모습에서
참으로 감사함을 느낌니다.
누리에 참 평화가 가득 하시길 빕니다.
참 아름답고 메세지가 담긴 좋은 글 입니다.
교과서에 실려도 충분한 글 입니다.
겨울 두루미
09.0 1.20 09:12
아고, 새벽님~! 그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유년의 시절을 더듬고
엄마가 그리워 쪼그만 구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감 벌레를 보고서도 어머니모습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하늘의 천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예나 지금이나 님 의 그 마음은 유년의 동심을 품고 사시니
그보다 더한 해맑은 빛이 어디 있을까 싶다.
또 하룻날 다가서 오는 님 의 잔잔한 되울림의 소리는 감동을 안겨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 둥지 안에서 머무는 텃밭의 고운님들 덕분에
오늘도 내 마음 안에도 새 싹이 돋아나고 있다. 머물다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맑은이슬
09.01.20 17:31
감칠맛 나는 글 향기에 취했다 갑니다. 새벽님의 맑은 마음도 읽고 갑니다. ^&^
實樂園 박희자
09.01.19 19:52
그렇게 어린 화야를 두고 엄마는 왜 도회지로 갔을까요?
어렸을적에 내가 살던 시골도 온천지가 감나무엿고 감꽃 목걸이 걸고 다니며
시들시들한 감꽃 억수로 많이 먹었는데. 정말 옛이야기속으로 사라지네요.
초란
09.01.19 23:35
그때 그나이엔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필요했던가 엄마~!!
소리만 들어도 주둑이 들던 화야 감꽃벌레 엄마라고 부르며
소꼽놀이로 성장했고 예쁜 원피스 에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거리 하고
신부 흉내 내며 와작지껄 웃어대던 그시절 눈에 선합니다.
이글을 읽으며 가슴에 눈물이 마구 흐르네요 .......새벽님 감사해요 고운밤 되세요
만강/김원금
09.01.20 19:34
우리집 마당에도 찰감나무가 있었어요,,,,,약간 물렁한 감을 손으로 주물럭 거려서 먹던 생각이 납니다....
그 감 보고 반시라고 하는것 같기도 해요....잠시 추억속으로 친정집을 다녀 왔네요....
레엔
09.01.20 21:21
어린시절 신기하게 나도 거기 있었던듯 선하네요!
화야의 엄마가 된 감벌레는 분명 다음생 인간으로 태어났을것 같고요~
글 잼나게 안쓰러이 잘 읽고 갑니다 요즈음은 포근해서 다행이네요,
추위에 너무 약하셔서~~ 건필 하세요
락운
09.01.20 22:07
제가 살던 강원도 영서지방에는 추워서 감나무가 못 살아 감나무를 못 보고 자랐는데도
마치 선화..(선화공주 생각이 나서 안 되겠다. 다시 새벽)
새벽님의 글에 폭 빠져 마치 저도 감나무 밑에서 놀았었다는 착각을 하게 되네요.
새벽님이 감추어 둔 등겨속 감이 저에게는 밀알 속에 감추어둔 고야(李)가 되어
노랗게 익은 고야를 형이 뺏어 가면 그렇게도 서럽게 울던 추억으로 오버랩 되기도 하고요.
그 징그러운 감벌레를 엄마 삼을 정도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니...
새벽님 엄마가 미워지네요.(제가 엄마를 미워하면 새벽님은 저를 미워할테지만...)
그래도 어린 새벽님이 너무 안쓰러워서....(눈물이 날까 말까....)
풍랑객
09.01.21 00:31
그림같은 동화.....애닯지만 담담한 그리움속에 머물다 갑니다. 평안하십시오.
wphotowang
09.01.21 10:30
육십년전 어린시절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와닿는 짜릿함을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
靑岩 류기환
09.01.24 22:46
아름다운 글 너무 잘 감상하였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화야
답글
한해에 두어번 모습을 보여 주었던 도시의 엄마!
무의식 적인 그리움,
아이의 본능은 엄마를 만나는 것이었고,
마침 눈앞에 나타난 벌레에게 엄마를 빙의 시켰다.
왜 하필 하찮은 벌레였을까?
그냥 엄마라고 불러 보고 싶었을 것이다.
대상이 무엇든간에~
꽃이나 강돌, 나무,하늘구름, 존재하는 모든것에 엄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가족공동체에서 밀려 난 나약한 아이의 저항일수도 있다.
작은 미물이지만 인간과 밀접한 관계로 정신적인 지주였던
화야와의 묘한 인연도 연관 되었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