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고린도전서 1장 26-31절) 231210 주일설교
소명에 이끌리는 삶 – 김기철(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된 자신의 영적 자아를 더 깊이 알아가고 추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자아정체성 추구는 우리의 하나님 형상을 온전히 경험해 가는 과정이다. 목회 신학자 케이스-윈터스(Anna Case-Winters)가 설명하는 대로 하나님 형상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각인(stamp)으로서의 형상인 ‘뿌리’다. 하나님 형상을 살아내는 삶을 산다는 말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영적 뿌리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과 자신의 근원적인 관계를 보여 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해 준다. 둘째, 반영(reflection)으로서의 형상인 ‘사명’이다. 하나님 형상을 살아내는 삶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으로, 이는 자신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깨닫는 일이다.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반영해야 할 것을 더 온전히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감당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이루어가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세상 속에서 삶으로 반영하는 일이 곧 하나님 형상을 삶으로 구현하는 일이다. 하나님 형상에서 우리의 소명 의식이 흘러나온다. 하나님 형상이 활성화될 때, 삶의 현장에서 사명을 맡기신 분과 사명을 맡은 자의 관계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삶의 환경이나 상황의 변화 속에서 영성에 이끌려 ‘뿌리 재확인’과 ‘사명 이루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 형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명 이루기는 기독교 영성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출애굽기 3:1-10에서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에서의 영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했고 소명을 이루어가는 방식을 갱신할 수 있었다. 열왕기상 19:11-21에서 엘리야는 굴 어귀에서의 영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했고 소명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랬듯이, 소명을 재확인하고 변화하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그 소명을 재구성하는 삶이 소명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生命)은 ‘命’이 있는 ‘生’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소명 받은 삶이다.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체’가 된 인간은 생명을 살아내는 존재로 지음받았다(창 2:7). 우리는 생명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야 마땅한 존재다. 소명 의식(vocation)은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손수 지으시고 피조물이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셨으며 에덴동산이라는 정원을 일구셨다(창 2:8). 또한, 최초의 사람이 그 정원을 맡아 돌보게 하시고 피조물들에 이름을 붙이게 하시며(창 2:15, 20)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다. 이 부르심은 사람에게 소명 의식을 갖게 하였다. 소명 의식은 ‘반영으로서의 하나님 형상’이 활성화되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삶으로 반영해내는 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직업 의식(profession)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경험하는 것이기보다는 먹고 사는일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는 태도다. 하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며 타락한 후에는, 사람은 땅에서 나는 것을먹기 위해 죽는 날까지 수고하게 되었고 얼굴에 땀을 흘리게 되었으며 흙을 갈게 되었다(창 3:17, 19, 23). 이 노동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삶이기보다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고 이 일에걸맞게 사람이 직업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성가 기니스(Os Guinness)가 설명하듯, 중세 가톨릭 교회는 1차적 소명과 2차적 소명을 구분하며 1차적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고 하나님을 향하는 거룩한 소명으로 이해하고, 2차적 소명을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하는 세속적 소명으로 이해했다. 이로 인해 성직자의 권위가 높아지며 특권 의식이 생겼고 평신도들의 소명 의식은 약해져서 직업 의식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룩한 소명 의식은 성직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영적 엘리트주의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소명의 두 차원을 분리하며 상위 소명과 하위 소명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인데, 이 차이는 혼인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소명 이해에 반기를 들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인식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수도사 루터는 소명을 둘로 나누는 기준이었던 성직자의 금혼을 폐기하며 자신도 혼인을 했고 만인제사장됨을 주장했다. 2차적 소명 안으로 1차적 소명을 통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소명 이해에 기초하여 영성가 기니스는 소명이란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은 모든 신앙인이 삶 속에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실행하는 모든 일을 포함한다. 그런데 평신도들은 소명 의식을 성직자들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소극적 소명 의식과 직업 의식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 쉽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교회에는 어느새 영적 엘리트주의가 다시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직자들의 소명 의식조차 직업 의식화 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인들 사이에서 소명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생기고 소명 의식이 점차 왜곡되고 있다.
스티븐스는 이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에는 여러 노동이 포함됨을 강조한다. 모든 노동은 협력하여 의미 있게 ‘하나님의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티븐스의 말처럼 각자 “일터에 가는 것”을 “사역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소젖을 짜는 일도소명 의식을 가지고 일할 때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일할 때,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 질서 유지 사역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여기시는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을 그저 먹고 살기 위한일로 인식하면서 스스로 영적으로 낮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소명이 내일을 이끌게 하라 – 이재훈(온누리교회 담임)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오늘과 내일과 모레’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현을 쓰신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 몇몇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긴급한 상황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을 드리자 여우 같은 헤롯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뜻을 따라가야 할 길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의 시간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라는 단어는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애가 문자적으로 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매우 시적이면서도 깊은 의미를 전해 준다.
이 세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상황에 이끌려 가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시고 모든 상황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오늘 하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일은 더욱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계획을 세우며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어느 한순간 우리는 내 인생이 내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일매일 그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행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통해 설명하신 것은 헤롯의 어떤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취소되거나 축소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일은 가르치고 고치고 전파하시는 일이었다. 헤롯이 죽이려고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위협도, 심지어 죽음도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소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 13:32)고 하신 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이후 3일 만에부활하실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다. 매우 함축적이고 예언적인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를 보여 주셨다.
예루살렘에서 여우 같은 헤롯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지만, 오늘과 내일의 예수님의 일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을 것이며 예수님은 담대하게 계획대로 앞으로 나아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피해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께 죽음은 사역의 절정이었다. 예수님은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아니라 그 죽음을 향해 나아가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인의 책임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의 계획을 아시고 피하실 수 있었지만 의로운 길로 계속 선택하심으로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상을 건강하게 변화시켰던 분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발견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담대히 그 일을 행한 것이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것이 소명(Calling)이라면,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며 희생하는 것은 용기(Courage)다. 역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소명만 있어도 안 되고 용기만 있어도 안 된다. 소명과 용기가 둘 다 있어야 한다.
소명을 따라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너무 많은 일을 이루려고 하다 시간에 속박된 인생을 산다. 주어진 시간에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가능한 한 많은 일을 이루어 내겠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다. 소명은 나이 들지 않는다. 소명은 은퇴와도 상관없다. 때로 소명은 직업과 같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다르다. 직업에서 은퇴하여도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은 가능하다.
또한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발견한 소명을 용기 있게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으면 소명을 버리고 사람이나 상황에 이끌린다. 소명을 따라 살려면 때로 다른 것을 내려놓고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딤후 1:7).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용기를 주신다.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책에서 “진정한 용기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용기”를 말한다고 했다. 이 말이 상식적으로는 맞는다고 할 수 있지만 성경적 표현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가는 용기”이다.
나에게 있어서 ‘오늘과 내일과 모레’가 소명으로 채워질 것인지 아닌지는 용기를 얼마나 불어넣는가에 달려 있다. 소명이 내일을 이끌게 하라.
본문 26절의 첫 문장은 “당신의 부르심, 곧 소명을 보라”(Consider your own calling). 바울은 당신이 누구이고 언제 부름 받았는가를 ‘생각하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고린도 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여러 영적 경험들이 있었고 갖은 은사를 체험했으며 열심이 있었다. 영광의 주님을 믿는 자신들 역시 어떤 신비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음식이나 결혼이나 생활에서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26절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도전한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신들은 ‘지혜의 사람들’이 아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당신들은 그렇게 권력, ‘힘’도 없다. 세상 기준으로 ‘태생’이 고귀한 귀족 가문 출신들도 적다. 27~28절 더 적나라한 표현은 세상 기준 그대들은 실상 어리석고, 약하고, 낮고 천한 자들이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혹 형제로서 그들이 G께서 주신 소명대로 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르심을 생각하라고 하기 전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
물론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보, 가이오, 에라스도(롬 16:23)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스데반 등 꽤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외에 소수의 부자들(고전 11:17~34) 대부분은 노예 해방된 자들, 수공업자들, 소상인들(26절)로 그들은 인간적 기준에 의해(육체를 따라) 교육 많이 받아 지혜롭거나, 부나 관직이나, 무슨 가문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련한 자들”(곧 바보들 또는 무지한 자들) “연약한 자들” “천민 출신자들”이었다.
그러나 G은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G은 고린도의 권문가들이나 부자들이나 학자들이 아니라, 무식하고 연약하고 천한 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구원하시고, 교회 곧 그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이 사실에서 고린도의 X인들과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단는다:
한편, 세상에서 높이 평가되는 지혜, 힘, 문벌 등 인간 구원에 무능하고 무의미하고, 즉 “미련하고” “연약한 것들” 한편 아무것도 가진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노예들이나 천민들을 G의 고귀한 자녀들로 만드는 G의 “지혜”와 “능력” 곧 “은혜”(sola gratia)! 다.
그것이 왜 중요할까? 자신의 부패하고 형편없고 연약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는 자가 G의 부르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교만을 깨고 겸손히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G께서 쓰셨던 아모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L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암 7:14~15) 난 대단하지 않고 양 떼 치던 목동, 뽕나무나 기르던 사람, 부름받아 쓰임 받았다.
예레미야 “슬프도소이다 주 L여 보소서 나는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4~5). 그는 말도 잘 못하는 작은자다. IS의 해방이란 큰일에 부름 받았던 모세도 자신은 과실과 늙고 연약하며 말에도 어눌한 자였다. J의 제자들도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고백했지, 자신이 G의 부르심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다.
바울을 보면 당대 최고의 학벌 가말리엘 문하, 바리새인으로서 경건하고 종교적으로 흠잡을 데 없었고,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IS중의 IS이요 로마 시민권 갖고 있었고, 세상 배경은 모든 잘난 배경을 가졌건만 그 역시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깊이 깨달았다. 그들이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러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들은 소명에 자신을 전부 드렸다. 내 부족에 대한 깊은 인식이 소명에 따른 G의 일에 자신을 드리는 위대한 출발이다.
약한 자를 택하시는 이유 – 김덕수 교수 + 김세윤 교수
27~28절 2개의 동사. 먼저 27절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 28절 있는 것들을 폐하겠다. ‘폐하다’는 말 영어 성경(NIV)은 ‘무효화 시킨다’ 혹 ‘무가치하게 만든다’(nullify)로 번역했다. NRSV 성경 ‘reduce to nothing’으로 번역. 인간의 모든 허식과 자존심을 제거해 무(無)로, zero로 돌리겠다는 것. 왜? 그때 G의 일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 G의 창조는 어디서 시작될까? 뭔가 존재하던 것을 멋지게 잘 다듬어 놓는 것이 창조인가? G의 창조는 ‘무(無)에서’의 창조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거기서 G의 일을 보이신다. 무로부터의 창조 G께서 일하시는 방식. G은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고, 모든 것의 근원이 자신들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있는 자들을 다 폐하겠다, 제로로 돌리겠다.
그렇다면 부족한 우리를 부르심은? 세상 지혜를 폐하려는 목적. 27~28절 헬 원문, ‘부끄럽게 하려고’ 2회, ‘폐하려고’ 1회, 3개의 목적절로 구성 G께서 세상의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선택하신 목적. 세상의 가진 자들을 폐하려는 것이 소명. G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29절) 자랑 말고, 세상 지혜 자도 자랑 못하고 오직 G만 자랑함.
구원의 철저한 은혜성을 깨닫지 못한 고린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같이 그들의 가문, 학벌, 권세, 부 등을 “자랑”하였다. 30, 31절 이들에게 바울은 그 축복들의 철저한 은혜성을 강조: “G의 은혜로 여러분들이 믿음과 세례를 통해 C J와 연합. C J는 G의 은혜에 의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그러므로 G의 은혜에 의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J C의 구원을 우리가 G의 은혜에 의해 덧 입은 것이다.”
X인들이 받은 구원의 선물을 자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선물을 주신 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선물에만 집착하면, X인들은 금방 특권의식과 우월감에 빠진다. 고린도 X인들이 저지른 잘못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그들이 받은 구원의 철저한 은혜성을 강조, 그들이 사실은 그들을 구원하신 “주”를 자랑하라고 권면한다. 그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무엇(지혜·능력·문종벌·교성…)을 가지지 않고, G께서 오직 그의 은혜로, 그의 주권자적 자유로 그들을 선택(27~28절 “선택”과 26절 “부르심”에 대한 강조를 음미할 것) 구원하신 것.
그러므로 자랑하려거든 자신의 뭔가? 심지어 자기 은사도 자랑 말고,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그들에게 구원과 모든 은사 선물로 주시는 “주만 자랑해야” 31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오역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도록 하라”가 옳다(렘 9:22~23; 고후10:17)
30절 바울은 X가 G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지혜”요, “의”요, “거룩함”이요, “구속”이다. “지혜”는 X가 인간의 지혜와는 정반대되는 G의 오묘한 구원의 방도됨을 의미, “의”는 그의 대속의 죽음에 나타난 G의 우리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신실하심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기고/용서되고 그와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을 뜻한다. “거룩함” 또는 “성화됨”은 그리하여 G께 헌신된 G의 백성, “구속”은 세상의 사탄과 그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됨. 어휘들은 X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을 포괄적으로 그리기 위해 동원된 그림 언어들이다.
강영우 박사의 한국 최초의 장애인 박사로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지낸.
중학교 때 실명과 가족의 죽음 강 박사의 어린 시절은 시련의 연속. 아버지가 세상 떠나고 3년 후 중학교 3학년 때, 축구하다 친구가 찬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 떠났고, 믿고 따르던 누나마저 공장에서 일하던 중 과로로 숨져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된다. 절망하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맹인재활센터로 보내진 수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대부분 안마사가 되거나 점쟁이 길로 갔지만, 그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이 아닌 G을 바라보았다.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을 때 G이 ‘Yes’하셨다면 저는 누나 뒤를 이어 공장에 들어가 소년가장 되었겠지만 G은 ‘No’ 맹인재활센터에 세계적 인물 되기 저를 훈련시키셨다. 그 후 G은 나에게, 실명의 약점을 아름다운 세상을 만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주셨다.
‘실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실명을 통해서’ 오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것.”
“열등감이 커지고 좌절감에 빠지면 어디에서도 기회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는 ‘노웨어’(nowhere)에 띄어쓰기만 하면 지금 여기에, ‘나우 히어’(Now here)가 되듯이 잠시 멀리 떨어져서 보면 기회는 지금 여기에 있다. 긍정과 부정은 스페이스 하나 차이이다.”
강 박사는 맹인 고아인 자신도 G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중한 존재. G의 비전을 이루는 데는 맹인, 고아라도 예외일 수 없다며, 절망 속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 물론, 맹인으로 남들에게 짐이나 될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주저앉지 않았다. 또래들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 서울맹학교 중등부 1학년으로 입학해 점자 ABC부터 배우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연세대 입학하게 된 것. 뒤이어 문과대를 차석으로 졸업 유학 가려 했지만, 장애로 인해 유학 갈 수 없다는 불평등 조항이 가로막았다. 1972년 장애가 유학의 결격조항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불평등한 조항을 없애달라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 결국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는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더욱 절망의 수렁 속에 빠졌었다. 그때 다행히 바울도 기도의 응답 받지 못했음을 접하고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세상과 미래를 보게 되었다. 바울 선생의 약점을 제거해 주시지 않고 그 약점 그대로 위대한 G의 도구로 사용하셨듯 내 실명도 그 자체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 확신하게 되었던 것.”
한 알의 밀알이 된 삶 그는 늘 G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고 그 대답은 항상 ‘G의 영광을 드러내고 눈 뜬 사람들까지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그의 다짐은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차관보가 되는 것으로, 결정적으로 <세계명사사전>에 오른 글로벌 리더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장애인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대변자이자 작가이자 연설가로서 세계적인 인물 이 되어 활약하며, 장애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편견 없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G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평생을 살았다. 저의 실명을 통해 G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다.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G의 인도하심 덕분이다. 두 눈 잃고, 저는 한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내가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며, 고난과 역경은 우리의 관점에 따라 ‘기회도 되고 축복도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입증해 주는 산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니 그저 감개무량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 강영우 박사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안찬호 선교사의 <들어 쓰심>에 그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다. 광부였던 아버지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당시 고교생인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에도 탄광에서 일해야만 했다. 결국 돈이 없어 고등학교를 중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부가 되었다. 고된 광부 일에 지쳐 술로 세월을 보내었다. 어느 날, 탄광에서 일하던 중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다. 함께 갱 속에 갇혔던 다른 광부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예수 믿나?”어이가 없었다. 갱이 무너져 죽게 생겼는데 무슨 예수 타령인가? “안 믿어요!”라고 소리치자 그 광부가 침착하게 말한다. “내 경험상 여기서 우리는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넌 죽어서 어디로 갈 것 같은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갈 수 있다.어떻게 하겠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광부의 말을 듣기로 했다. 무릎을 꿇고 영접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지면서 통곡을 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병원에 누워있었다. 기적처럼 자신은 구조되었지만, 복음을 전해주었던 광부는 죽고 말았다.
‘나를 살리고 자신은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 후 그는 선교사가 되어 죽을 고비들을 넘기면서 자신을 구원한 십자가를 전하였다. 케냐에 22년째 사역하면서 케냐 사람들조차 두려워하는 마사이족의 거주지에 24개 교회를 세웠고, 44개 유치원과 초등학교, 3개의 중고등학교, 1개의 신학대학 세웠다. 그는 성공적인 사역에도 “G은 너무나 무능하고 우둔한 저 같은 사람에게 구원 G하시고 사명 주셨다. 나는 X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유해석 선교사의 ‘높여주심’ 책은 이집트에서 16억 이슬람 영혼을 가슴에 품었던 자신의 삶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중 3때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했지만회사가 망하면서 실직자가 되었다. 그는 현실을 비관하고 16살 어린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지만, G의 은혜로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다행히 예수를 만나 구원받고 헌신의 삶을 살았다. 1990년 한국 오엠 선교회 1기생 선교 훈련 받고 이집트 빈민가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였다. 4번의 말라리아로 청각을 잃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세가 심하였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때 주님이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오셔서 기댈 곳 없는 저에게 능력의 언덕이 되어 주셨고 세계를 품어 J C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이슬람 영혼들을 사랑하게 하셨다. 죽기를 소망했던1 6살 소년을 16억 영혼을 품는 거인이 되게 하신 것. 인간의 끝이 G의 시작이며, 할 수 없다고 무릎 꿇는 자리에서 주님은 비로소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G의 능력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약한 질그릇에 임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
스코틀랜드의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있었다. 그는 사역을 통해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고 교인들에 의해 강제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섬겼던 지역은 까다로운 곳이었다. 주민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진리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그가 섬겼던 기간 동안 회심한 사람이 하나토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설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건을 기억했다. 예배 중에 헌금 쟁반이 돌려지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쟁반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왜?” 물었더니 소년은 드릴 헌금이 없어 자신을 고스란히 G께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쟁반 위에 올라섰던 그 소년이 바로 1817년 남아공으로 간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입니다. 그는 G께 쓰임 받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다.그런데 이 모든 일은 작은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시골 목사의 충성된 사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 속에 보배이신 X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 보배를 통해 G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며 G의 영광이 되게 하실 것.
중국의 장자가 말한‘무용지용’ 고사성어. 무용지물은‘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이지만 무용지용(은‘쓸모가 없는데도 쓸모가 있다’는 의미다. 하루는 장자가 산길을 가노라니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가 있었다. 둘레는 백 자쯤 되고 높이는 몇천 길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했고 줄기 윗부분은 거대한 우산 같아 몇 이랑 땅을 덮을 만했다. 장자가 나무 베는 이에게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나무를 어째서 베지 않는 것입니까? 홀로 몇 천 년을 자란 것을?” 그러자 나무 베는 이가 말한다. “이상할 게 무어겠소? 이 나무는 그저 쓸데없는 목재라오. 배 만드는데 쓰기에는 물에 젖고, 널감으로 쓰기엔 빨리 썩고, 기구로 만들자니 쉽게 망가지고, 창으로 만들기엔 기름이 먹질 않고, 기둥으로 쓰기엔 좀먹기가 쉽소. 그저 좋은 목재가 못 되는 나무이니 쓸 만한 곳이 없어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요.” 그때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좋지 못하기 때문에 그 타고난 수명을 다하게 되었구나.” 인간의 눈에는 쓸모없어 내 버려둔 나무이지만 나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명대로 살 수 있게 되어 쓸모 있는 점이 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저자 젠 브리커(Jen Bricker)는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났다. 심장도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있었다. 산부인과 간호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의사는 아기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는 병실에 누운 아기를 보고 충격에 빠져 입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그러나 그녀는 믿음으로 행하며 나아갔다. 강인한 두 팔로 공중에 매달려 공연을 펼치는 공중 곡예사가 되었고 파워텀블링(power tumbling) 챔피언이 되었다. BBC등 TV 뉴스쇼에 출연하여 감동과 희망을 선사하는 강연가가 되었습니다. 젠은 자신을 장애자로 여기지 않았고 G의 선물이라 믿고 오히려 날마다 자신의 몸에 감사했다. 그녀는 말합고 “만약 내가 다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이렇게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한계와 싸워 승리할 비결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장 23절의 말씀 대로 행하는 믿음이 있을 때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주디 월터(Judd Walter)의 일화 윤영준 목사의 <신발 한 켤레의 사랑> 감동 깊은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 그중에 ‘전화위복의 기회’라는 글이 있다. 청년 주디 월터(Judd Walter)는 얼굴에 난 여드름 치료 받았는데, 치료하는 과정에서 엑스레이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실수로 얼굴이 볼품없이 나빠졌습니다. 심한 우울증과 함께 열등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흉한 얼굴의 청년은 신앙적 의지를 발동하여 다시 일어났습니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인생을 살리라”고 다짐하였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자고 작정한 것. 중국에 가서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0번이나 재선되는 유력한 인사. 그는 G의 도움 받으며 G만 기쁘시게 하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쓴 편지인데 내용인즉
“기독교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전해주는 산 증거입니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교회보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오자 대학을 중퇴하고 보험회사에 근무하던 중 방송국 공개홀에서 ‘가라 모세’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NBC방송국의 전속가수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앞에는 돈과 인기가 보장되어 있었으나 좋아하는 교회에서 그리고 집회에서 찬양할 기회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주일 아침 찬송을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건반 위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라 큰 재물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이 되겠네 큰 집과 넓은 땅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라 못 박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라.”
어머니가 평소 애송하던 레아 밀러(Rhea Miller)의 시였다.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제 목소리,제 존재,제 젊음 모두 주를 위해서만 드리겠다.” 그토록 꿈꾸던 기회였지만 방송국 출연을 거절했다. 그 시에 곡을 붙였다. 찬송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그는 찬송을 부르면서 고백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주님을 잊고 살았다. 이제 주님만이 참된 행복임을 깨달았다.”
그 후 빌리 그레이엄 부흥단에 들어가 노래하는 전도자가 되어 찬송을 불러 많은 사람을 G께로 인도했다. 1983년 74세 된 백발의 조지 베버리 쉐아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설교 후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다. 사람들의 뜨거운 갈채에 “저는 여러분의 박수갈채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다”라고 말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일본이 자랑하는 지성인입니다. 천황숭배 시절에 제일고보 교사였습니다. 제일고보는 일본에서 일류고다. 학교 경축식 날 천황 숭배의식이 거행될 때 참배해야 했으나 우찌무라 간조는 거부했다. 그 시대에 참배를 거부는 보통 용기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기득권을 부정해야 하는 용기다. 일본인들은 매국노라고 침을 뱉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언론은 연일 그의 타도에 나섰다. 마침내 그는 사표를 냈다. 각오했던 일입니다. 미국으로 떠나 맨해튼에서 음식장사를 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기자들이 질문했다. “왜 이러한 초라함을 자초했습니까?” 그러자 우찌무라 간조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부귀와 영화를 원치 않습니다. 명예도 원치 않는다.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은 G 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뿐. 어렸을 때 예수께서 반드시 재림하신다고 배웠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고로 나는 현재의 평안을 위해 우상에게 절할 수 없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G이 높여주시는 자의 가치관이며 F이 존중히 여겨주시는 자의 모DL 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가면 도시 한복판을 가르는 ‘스기하라 거리’가 있다. 이 거리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영사관의 부영사였던‘스기하라 지우네’를 기념하여 만든 거리다. 1940년 여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나치 점령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인접한 국가 리투아니아로 피난 갔으나 그곳 역시 안전하지 못해 다른 나라로 탈출할 상황이었지만 다른 나라로 가려면 입국 비자가 필요했다. 당시 비자를 얻는 일이 쉽지 않았다. 비자를 발급하는 각국 대사관들은 철수 준비로 문을 닫았다. 일본영사관만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상태였다. 유대인들은 서둘러 일본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곳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당시 부영사였던 스기하라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본국 정부에 문의 전보를 쳤습니다. 외무성에서 곧바로 회신이 왔습니다.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독일과 우호 관계에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다. 영사관 담장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던 스기하라는 두 차례나 정부에 허락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만 회답은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말라는 것. 이틀 밤을 고민하던 스기하라는 본국 외무성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도저히 저 많은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영사관 문을 열고 유대인들을 들어오게 한 스기하라는 그날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과 식사도 거른 채 비자를 발급했다.그렇게 해서 목숨을 구한 유대인의 숫자가 무려6천명이 넘었다. 스기하라는 그 후 독일을 물리친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전쟁이 끝난 뒤 풀려난 스기하라는 일본 정부에 복직 신청을 냈다. 하지만 정부는 복직을 거부했다.
전시상황에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개인의 판단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스기하라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IS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억하고 리투아니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그 거리 이름을‘스기하라 거리’라고 명명했다. 그의 인도적인 행동 덕분에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뉴욕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스기하라는 그때를 회상하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소.이때를 위해 내가 존재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오.”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김상웅의 <백범 김구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金九)선생은 청년 시절에 고능선이라는 스승이 계셨다. 스승이 20세 청년 김구에게 나라가 망해가는 안타까움을 말하자 김구는 울분을 못이겨 울면서 들었다. 김구는 나라가 망하지 않을 방법을 물었다. 그때 고능선은“청국으로 가라.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고 할 것이니 청국으로 가서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들과 친분을 맺어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면 나라를 구하라”고 했다. 김구가 스승에게 “저와 같이 어린 한 사람이 청국으로 간다고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때 스승이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은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제 일을 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말에 청년 김구는 청나라로 떠나 훗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사명을 다하였다.
한 소방관의 마지막 대답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과격 단체의 테러로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자욱한 연기로 뒤덮였을 때. 탈출자로 꽉 찬 비상계단에서 유독 거꾸로 올라가는 소방관이 아마추어 사진작가 카메라에 잡혔었지요. “왜 올라가느냐”는 물음에 소방관은 “이것은 나의 일”(This is my job)이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그 소방관의 마지막 모습이 나중에 발간된 ‘9·11 메모리얼 포토 북’에 실리기도 했다. 이처럼 소방관을 먹고 살기 위한 직업으로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간, 9·11 사태 때 순직한 소방관이 347명이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직업을 가장 존경하느냐’는 조사에서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소방관을 1위에 올린 것. 우리나라에서 목사와 장로와 기독교인들의 신뢰도가 얼마나 떨어진것을 잘 아는 우리로서는 참 부끄럽고 부럽다. 소방관들은 소명을 알고 사명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소방관들도 그렇다. 몇 년 전 CJ 이천 공장에서 화재를 진압하던 윤재희 소방사가 철제 빔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됐었지요. 윤 소방사는 지휘 차량운전이 임무였지만 자진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가 순직했다. 그에게는석 달 뒤 결혼 날을 잡아 놓은 약혼녀가 있었다. 약혼녀가 “운전만 하지 왜 자꾸 화재 현장에 들어가느냐”고 걱정하자, 29세 청년은 “불 끄는 게 소방관인데 운전대만 잡고 있을 수 있느냐”며 불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설가 이외수는 예전에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 대학생 취급 받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대접 받고, 예전에 대학가는 서점이 호황이었지만 지금은 술집이 호황, 예전에는 호스티스들이 여대생 흉내 냈지만 지금은 여대생들이 호스티스 흉내 내고 다니는 세상이요, 양심도, 예절도, 전통도, 기품도, 낭만도 죽은 세상이다. 신자의 모습 아닐까요? 예전에 소명이 없으면 C 취급받기 힘들었으나 크리스천들은 소명 없이 대접받는다. 소명도 사명도 죽었다.
첫댓글 아멘 🙏 🙏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