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석을 이용한 대표적인 무덤양식이자 석조 구조물. 고인돌이란 명칭은 고 + 이(수동) + ㄴ(과거) + 돌의 형태로 만들어진 순 우리말이다. 故人돌 혹은 古人돌이 아니다.[1]
당시 거석을 옮길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군장 집단의 등장을 알려주는 유물이며, 신석기시대 이래 유행한 거석 숭배 문화와 연관성을 찾는 경우도 있다. 한국 등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대체로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 사이에 나타나나(단 육지와 단절된 제주도의 경우 초기 철기 시대에야 나타난다. 애초에 이 지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석기->철기시대테크로 청동기시대를 패스한 경우라),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의 고인돌은 기원전 4000 ~ 5000년의 건축물로서 존재한다. 현재 인정받는 세계 최고(最古)의 고인돌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 존재하는 고인돌이다.
의미가 확장되어 선사시대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아래 항목을 비롯하여 선사시대를 중심으로 한 게임에서 비롯된 바 크다. 한반도에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정의에 따라 선사와 역사 두 시대의 경계선에 놓여 있기는 한데… 따지자면 선사시대 쪽에 가깝다.
고인돌 밑에는 무덤이 있는데 왠지 '무덤'보다 '거석 구조물'의 인상이 더 강하다. 대개 위에 돌널무덤 형식으로 방을 만들어 사람을 매장하고 그 위에 굄돌과 고인돌을 쌓는다. 다만 전부 무덤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묘표석, 제단 등으로 만들어진 고인돌도 있다. 기사사진
몇몇 아주 운두가 높은 고인돌들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아해지는 조합을 이루지만, 실은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진다. 받침이 되는 돌을 세우고, 그 받침이 덮힐 정도로 완만한 흙 경사로를 만든 뒤, 통나무 굴대 같은 것을 깔아 인력을 동원해 경사로로 끌어올려 올린 뒤 흙 경사로를 파내 버리는 것. 현존하는 고인돌들의 접접면을 봐도 그 당시 끼인 흙 층을 발견할 수 있다(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선사시대 거석 유적들도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마법이나 초고대문명설 같은 게 아니다! 물론 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흙을 쌓고, 그 흙을 파내는 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전 세계 약 6만여기의 고인돌 중 남북한을 합쳐서 약 4만여 기 정도가 한반도에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 동네에서는 집을 지으려고 보니까 무지막지한 돌덩이가 막고 있고 치우기도 너무 크고 해서 그냥 안에 두고 지은 뒤 알고 보니 고인돌이더라하는 집도 더러 있다(순간포착 등에 더러 소개되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한의 고인돌은 대부분 전라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고대에는 한반도니 하는 경계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보는게 더 정확하다는 견해도 있다). 지역별로 보자면 강원도에 338기, 경기도 502기, 충북 189기, 충남 478기, 전북 1597기, 전남 1만 9068기, 경북 2800기, 경남 1238기, 제주 140기로 거의 대부분의 고인돌은 전남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 북한이 주장하는 1만기 ~ 1만 5000기의 고인돌 수를 합하여 4만여기라고 하는 것.
참고로 서울에도 고인돌이 꽤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도시 개발이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고인돌이 거의 멸실된 것으로 보여진다. 정릉동, 개포동(4기), 개포동 대모산, 우면동, 양재동(6기), 원지동(16기), 고척동 등에서 존재하였으며 그중 원지동 고인돌은 1984년에 16기가 관련유물과 함께 발견되었으나 보호시설물과 안내판의 설치, 문화재지정등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대부분 멸실된 것으로 보여진다.[2]
과거에는 석붕(石棚)이라 불렀으며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으나 실증주의적 고고학이 대두하기 전까지는 흥미의 대상이었을 뿐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연대 자체가 오래된 점,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 매장부가 지상으로 드러나 있어 도굴이나 유실의 위험이 큰 점 등 여러 이유로 유물 등이 잔류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연구하기에 아쉬운 점이 있다. 다만 무덤의 수효 자체가 많아 자잘한 발굴은 계속되는 중.
고인돌이 동네사람들이 취미생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남해안에 있었던 세력이 진나라(秦) ~ 전한 초기의 중국과 교류한 흔적이 나오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밖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전남(특히 영산강 인근) 지역의 경우 고인돌 → 독무덤 → 장고형 무덤(전방후원분)으로 이어지는, 묘제마다 떡밥인 양식으로 이어지는 지라 의미가 더 깊다[3].
물론, 이스터 섬의 모아이 사례에서도 보듯이 큰 돌로 뭐 좀 만들어놨다는 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고대문명이 발전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남에서 모헨조다로유적처럼 목욕탕이나 하수도시설이 나오면 모를까
굄돌의 밑둥을 지하에 파묻고, 그 위에 덮개돌을 잘 다듬어서 얹은 형태이다.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고인돌에 비해 유물이 적은 편이다. 본래는 굄돌과 함께 두 판석이 직사각형 꼴의 무덤방을 이루고, 덮개돌이 그 뚜껑 역할을 하는 형태이다. 두 굄돌과 덮개돌은 치울 수 없지만 양쪽의 긴 두개의 마구리벽만 치우면 손쉽게 무덤방이 드러난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형태의 고인돌은 무덤방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덮개돌을 치워야 하기 때문에 유물이 많다. 과거에는 북방식이라 불렀으나, 남쪽에서도 이와 같은 양식이 발견되며 더는 북방식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주요 유적지의 이름을 따서 오덕형 고인돌이라 부른다.
기반식 고인돌
네 개의 굄돌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형태이다. 탁자식처럼 무게 중심을 맞출 필요가 없으므로 좀 더 다양한 형식을 보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가 마치 바둑판과 비슷하다하여 바둑판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남방식이라 불렀으나, 북쪽에서도 이와 같은 양식이 발견되며 더는 남방식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주요 유적지의 이름을 따서 심촌형 고인돌이라 부른다.
개석식 고인돌
굄돌 없이 바로 돌을 얹은 형태이다. 대체로 각각 북쪽과 남쪽에 분포하는 탁자식과 기반식 고인돌과 달리,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뚜껑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석식 고인돌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난 형태이다. 다만, 탁자식과는 다르게 여러개의 굄돌이 이글루 벽돌마냥 다닥다닥 붙어서 무덤방의 벽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6 ~ 8개 가량의 굄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무암을 사용한 것들도 있다. 무덤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다에 위치하여 바다에서 죽은 이의 넋을 기리거나, 바다의 풍랑이 적고, 고기가 많이 잡히길 기원하는 목적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제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관계로[4]제주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제주도와 인접한 중국 지역과 멀리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형식이 발견된 바 있다. 고창, 부안과 그외 호남지방에서도 이런 위석식 고인돌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의 고인돌이 발견되는데, 제주도와 달리 굄돌이 어느정도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는 형태이다.
[1]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적지 않다. [2] 서울 외에도 적극적 보호를 하지 않는 이상 멸실되는 경우가 많다. 농경지에 위치한 경우 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구석으로 치워버리거나 조경용으로 판매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크기가 크다보니 꽤 비싼값에 사간다고 한다. [3] 정확히 말하면, 전남 지역의 역사는 5세기 중엽까지 삼국사기 - 삼국유사에서는 공백 상태인 반면(삼국사기상 3세기의 일인 포상팔국의 난에 대해 삼국유사에서 나주에 위치했다는 보라국/발라국을 언급하는 것 정도밖에 없다), 최근에는 진서 장화전의 '동이마한신미제국', 일본서기의 '침미다례(심미다례)'와 근초고왕의 남정을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여기에 고고학적으로 5세기까지 독자적으로 유지되던 영산강 유역 독무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지역을 흔히 알려진 '마한'으로 묶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심하다. [4] 다만, 제주도의 모든 고인돌이 위석식이라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