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臧王 (? ~ 682년)은 淵蓋蘇文에 의해 옹립된 고구리의 마지막 임금 입니다.
보장왕의 이름은 高藏(고장) 입니다.
고구리의 임금들은 廟號(묘호)나 諡號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고구리 임금들을 지칭하는 동천왕, 장수왕, 보장왕과 같이 王으로 부르는 명칭은
《三國史記》를 쓴 사람들에 의해 작명된 듯 합니다.
고구리를 기록한 24사는 고구리의 임금들은 모두 이름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구리 마지막 임금이 였던 보장왕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디로 갔으며 어디에서 묻혔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高藏及男建遣太大兄男產將首領九十八人,持帛幡出降,且請入朝,勣以禮延接。
고장과 남건이 太大兄 남산을 보내어 首領 98명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나아가 항복하게 하고 아울러 入朝를 청하였다.
이적은 禮를 갖추어 영접하였다.
男建猶閉門固守。
그러나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總章元年九月,勣又移營於平壤城南,男建頻遣兵出戰,皆大敗。
총장(總章) 원년(A.D.668; 高句王 寶藏王 27) 9월에 이적이 또 平壤城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니,
男建이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대패하였다.
男建下捉兵總管僧信誠密遣人詣軍中,許開城門為內應。
남건의 밑에서 兵事를 總管하던 승(僧) 신성이 비밀리 軍中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문을 열고 내응하겠다고 하였다.
經五日,信誠果開門,勣從兵入,登城鼓譟,燒城門樓,四面火起。
5일이 지나서 信誠이 과연 성문을 열자 이적이 군사를 놓아 들여보내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성의 문루에 불을 지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었다.
男建窘急自刺,不死。
이에 남건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十一月,拔平壤城,虜高藏、男建等。
11월에 平壤城을 함락시키고, 고장‧ 남건 등을 사로 잡았다.
十二月,至京師,獻俘於含元宮。
12월에 경사(京師)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에서 헌부(獻俘)를 하였다.
詔以高藏政不由己,授司平太常伯;男產先降,授司宰少卿;
男建配流黔州;男生以鄉導有功,授右衛大將軍,封汴國公,特進如故。
조서를 내려 고장은 정사를 제 주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을 제수하였다.
남산은 남보다 먼저 항복하였다 하여 사재소경을 제수하였다.
남건은 검주(黔州)로 流配 시켰다.
남생은 향도한 공이 있다 하여 우위대장군 제수하고,
변국공(汴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特進) 은 옛날과 같이 인정하였다.
현재 중공역사는 남건이 유배 보내진 黔州의 위치를 위 지도로 비정 합니다.
이곳은 苗族들의 땅이며 彭水가 있는 땅 입니다.
※어느 유트뷰에 지금의 우리와 언와와 모습이 가장 유사한 민족이 苗族이라고 하는 것은
男建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高麗-19/18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儀鳳中, 高宗授高藏開府儀同三司·遼東都督, 封朝鮮王, 居安東, 鎭本蕃爲主.
의봉(678~679)연간에 고종이 高藏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오랑캐가 주둔하는 군주다.
安東=安東都護府 입니다.
高藏至安東, 潛與靺鞨相通謀叛.
고장이 안동에 이르자 몰래 동류인 말갈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였다.
보장왕은 유배중에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괴했던 것입니다.
靺鞨을 우리 역사로 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말갈은 고구리와 마지막 까지
그 운명을 같이한 고구리의 血盟이 였다 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입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말갈이 우리 역사가 아니라면 고구리 역사 우리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事覺, 召還, 配流 恐州 幷分徙其人, 散向河南· 隴右諸州, 其貧弱者留在安東城傍.
일이 드러나자 불러 소환하여 恐州와 아울러 분산하여 유배하였으며,
河南과 隴右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고 빈약한 자들은 安東城 부근에 머무르게 하였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恐州에 관한 위치를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의 河南의 위치는 하남성 북부 일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河南의 실제 위치는 渭水의 남쪽 입니다.
또한 隴右=隴西 입니다.
즉, 보장왕이 유배된 곳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보장왕과 반란을 도모했던 사람들의 유배지는 하남과 롱서 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唐代의 雍州(도읍지가 속해 있는 땅)는 隴西라고 해석 합니다.
高藏以永淳初卒,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於 利>墓左賜以葬地, 兼爲樹碑.
영순682~683)초 고장이 죽자 위위경에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운구하여
경사에 이르게 한 뒤 利의 묘 좌측으로 매장지를 하사하고 겸하여 비석을 세워 주었다.
보장왕의 시신은 長安으로 옮겨 돌궐의 頡利可汗(일릭카칸:동동궐의 마지망 임금)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다
라는 것이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 입니다.
그렇다면 보장왕이 유배 보내진 恐州라는 땅은 長安과 멀지 않은 곳에 존재 한다 라는 의미 입니다.
위 기록에서의 의문은 고대 역사에서 멸망한 나라의 임금은그 임금을 다시 옹립하여 왕조를 재건하려는 세력 때문에
멸망한 나라의 임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해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당조는 반란을 획책한 보장왕과 그 일당들을 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했을 까요?
또한 안동도호부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면 당조는 어떻게 그 반락 모의를 알 수 있었던 것이며
안동도호부를 어떻게 통제 할 수 있었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