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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인터넷 전자족보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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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는 유목민이었었어 동국(東國) 강씨(姜氏)
강영헌 추천 1 조회 191 23.10.08 18:44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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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강이식 시조님에 대한 사료로 휘가 처음 기록된 것은

    최산두가 지은 대사간공 강렬의 행장보다 앞선 사료로서

    은렬공파의 강익선이란 분이 1932년 편집한 은어보(은렬공파와 어사공파의 합보)에 실린

    강희안 선조께서 1451년 3월에 지으신 연원보가 있지요

    이는 안동권씨 성화보(1476년)보다 25년 빠른 족보인데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서문만 전해져 온다고

    최근에 본 카페에도 서문 전문이 이미 게시되어 있음을 잘 알고 계실텐데...

    그리고 그동안 휘가 나오는 부분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중략, 하략 등 생략시키고 감춰져 온 사연이

    시조님께서 고구려인이 아닌 수나라인이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했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상고해 볼 사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었는데

    최근에 이와같은 동일한 맥락으로

    영의정 강맹경의 후손이신 강린이란 분께서 1928년 지으신 국로추사(菊露秋寫)라는 책이 발견되었고 어떻게 믿을 수 있나?라는 관점에서

    이 책에 역사적 사실로서 인용된 다양한 서적등 사료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재 사료 소장 여부를 그의 아들되시는 노인과 상담중에 있음도 상기시켜 드립니다

  • 본 카페에 제가 올린 국로추사는 믿을 수 없는 야사라고 빨리 내리라는 강권을 제가 수용하지 못해 더이상 운영자 역할도 내려 놓은 상태인데

    우리 시조님에 대한 단재 신채호선생의 임유관전투도 서곽잡록이라는 것에서 인용하고 서곽잡록만을 좇는다 했는데

    현재의 우리 시조님의 사적은 서곽잡록과 대동운해등 섞어서

    국적은 고구려 관함은 병마원수도 아닌 병마도원수로 을지문덕과 고건무(후 영류왕)의 상사로써 총사령관이라

    서곽잡록의 저자 이문흥도
    우리의 최초족보 남한보의 편자이신 석로,석구 형제분들의 조부이신 강홍중의 친외손이 아닙니까?

    서곽잡록도 어쩌면 우리 강문의 가장을 보고 쓰신 내용이 아닐까? 봅니다

    아니면 외람되지만 신채호선생의 창작품이 아닐런지? 추정되는 것이 선생은 일제시절에 민중계몽을 위해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영장군 구국의 영웅들을 소설을 쓰신 전례로 보듯이 임유관전투의 승장이 누구라는 기록도 없음에 강이식 선조님을 인용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조차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강문의 명석한 두뇌들이 합심하여 고증할 방법을 찾는 것이 시급한 시기에 섣부른 단정적 발표는 삼가함이 옳지 않겠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오니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 1761 신사보가 신미보라 오타 발견

  • 작성자 23.10.25 09:44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우리 강씨 종중 역사에 매진하시는 그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 오타가 아닌가요?

    1) 고수간 70년전쟁(589~668)에서 가로속 589는 598임유관전투가 맞지요?

    2) 앞서 지적한 1761<신미보>는 <신사보>인데 아직까지 수정이 안된 상태 그대로 군요

  • 족보 서문기준 1761년 <신미보>는 <신사보>의 오타가 아니신지요?
    앞서도 계속 지적하였지만 아직도 수정이 안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발간기준으로 말하면 1762년 <임오보>라고도 하나

    후대 족보들이 서문 작성년대를 기준으로 <신사보>라 통상 칭하며 굳어져 왔기에
    굳이 <임오보>라 하지 않고 <신사보>라 칭해도 무탈하다는 생각입니다

  • 유투브를 보다보니 그 유투브댓글로 위와 같은 댓글이 있어 참조해 보시라 올렸으니
    아니시면 그냥 삭제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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