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모금 활동
구걸하는 사람이 가는 길에 장미꽂이 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온통 가시밭 투성이기도 하다. 간염을 앓던 나는 미국에서 요양하는 2년 동안 이 길을 여행하였다. 처음에는 혼자서,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나머지 6개월 동안은 최 주교님과 함께 했다.
많은 외국의 주교들이 도움을 청하러 '세계의 창고' 라고 일컫는 미국을 찾아오듯이 최 주교님도 같은 이유로 미국에 왔다. 내가
만난 한 아프리카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미국에 오는것은 미국의 탐닉할 만한 사회 생활을 구경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최 주교님도 그러했다. 자신이 맡은 부산 교구를 위하여 모금과 선교 사제를 구할 목적으로 왔다. 볼티모어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주교님과 나는 모금 유세에 나섰다. 길고 더운 여름 동안 서쪽으로 미네아폴리스, 북으로 캐나다의 몬트리올, 그리고 남으로는 멕시코의 멕시코시티까지 여행을 하였다.
최 주교님에게는 이 여행이 자신이 태어난 산 많은 한반도를 떠난 첫 해외 나들이었다. 경상남도 산골 한 벽촌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주교님이 바다 건너 저편에 있는 미국에 대해서 말과 글로만 알고 있다가 막상 미국에 와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미국의 풍요와 영화를 목격하자, 곧바로 회복 안되는 가벼운 쇼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주교님 도착 전에 주교님과 같이 할 6개월 동안의 여행 일정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4월에 도착하여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50개 이상의 본당에서 주교님이 모금 강론을 할 수 있도록 본당 신부들로부터 미리 허락을 받아 놓고 있었다.
모금에 대해서 처음에는 두려움과 망설임을 느끼기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활동은 어느 정도 일정한 틀을 갖기
시작했다. 금요일이 되면 주일에 강론할 볻당으로 주교님을 모셔 가서 본당 신부에게 소개한 다음 주교님을 그 본당에 남겨 두고,
나는 다른 본당으로 가서 주교님의 이름으로 모금 강론을 하였다.
월요일이 되면 나는 주교님을 모시러 갔다. 그리고 일주일의 나머지날에는 미국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을 찾아갔으며, 또 우리가 방문하는 지역에 소재한 신학교나 수녀원을 방문하여 강론을 하기도 하고, 한국에 관한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월요일은 일주일 중 최고로 좋은 날이었다. 주교님을 모시러 주교님이 머물고 있는 본당으로 가면 주교님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보자 마자 방으로 안내한다. 눈은 빛나고, 희색이 만면하고, 두 손을 열심히 비비면서 말한다.
"대성공이야, 대성공." 그리고 모금 총액을 말해 준다. 그 금액은 언제나 큰 액수였다. 주교님은 마치 마술사가 옷소매에서
색종이를 계속 끄집어내듯이, 정신없이 현금과 수표 그리고 이름과 주소가 적힌 헌금 약속 종이를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이것을 손으로 듬뿍 집어 나에게 준다. 나는 곧바로 나의 손가방에 담고 기록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 다음 주교님은 나에게 묻는다. "신부님의 모금은 어떠합니까?" 나의 대답은 언제나 약간 실망적이다. 왜냐하면 큰 본당은 주교님 몫이고, 나는 일부러 작은 본당을 골라서 간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주교님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비록 주교님의 영어가 초보적이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미국 사람들은 주교님의 진실성과 순진성에 본능적으로 좋은
반응을 보였다.
최 주교님이 미국에 도착하여 3일째 되는 날 볼티모어 대교구에 있는 새로 건축한 성모 대성당에서 그의 첫 번째 강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특별한 건물이다. 모든 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이라도 이렇게 호화로운 성전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당
건물의 건축가격은 당대의 최고의 금액이었다. 성당에 따르는 사제관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건축물이었다. 미스터 젠킨스라는 이름을 가진 신자가 전용을 절대로 금지한 엄청난 금액을 대성당 건립에 사용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당시 볼티모어 대교구는 대성당이 전혀 필요없었다. 그래서 그 유언을 바꾸려고 법적 노력을 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많은 돈이 낭비되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기념물적인 교회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토요일 오후 이 거대한 건축물에 도착한 주교님은 다음날 아침 신자들로 가득 찰 이 성당의 강론대에 서서 큰 회중을 향하여 영어로 강론할 것을 생각하자 단순히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산 교구의 대청동 대성당을 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최 주교님의 심정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의 대성당은 이 건물에 비교하면 마치 자동차 차고와 같은 것이다. 최 주교님의 거처가 있는 중앙성당의 주교관을 이 대성당의 사제관에 비교하면 지극히 보잘것없는 미소한 건물이다. 주일 첫 미사는 아침 7시에 있었다. 7시 15분 전 나는 본당 신부와 함께 최 주교님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나는 마치 사형수를 데리러 온 사형 집행인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 안에서 응답이 없었다. 두 번, 세 번 노크를 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본당 신부가 안절 부절하지 못하여 나는 할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주교님은 5분밖에 안 걸리는 짧은 강론을 큰소리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읽고 있었다. 주교님은 나더러 한번 들어 보라고 했다. 나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 후 주교님의 소맷자락을 잡고 복도로 모시고 나왔다. 본당 신부는 주교님의 왼편에, 나는 오른편에,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제의실을
향하여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러나 주교님의 두려움은 하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신자들은 주교님의 모금 호소를 잘 이해했고, 주교님의 강론은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이 감동은 곧바로 교우들의 지갑과 핸드백으로 이어졌다.
주일 저녁 마지막 미사 후에 주교님은 기념 사진 찍기를 원하셨다. 대성당 정면에서, 강론대에서 그리고 사제관 건물 앞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아무리 말로 설명해 보아도 사람들이 주교님의 말을 믿으려 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물로 사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 주교님이 보스톤 대교구 교구장인 쿠싱 추기경을 방문한 사실도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 시간 약속을 하기 위하여 내가 추기경에게 전화를 했을 때 나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바로 추기경이었다. 전에 뵌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으르렁거리는 거칠고 신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일 수 있었다. "어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나는 방문 시간 약속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 주교님과 나는 오후
2시 추기경의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가 조금 지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추기경이 나타났다. 아마 오수를
즐겼던 모양이다. 눈을 비비며, 수단 단추를 채우면서 걸어 나왔다. 추기경은 손은 흔들면서 "주교님,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최 주교님도 "추기경님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게 무엇이람. 최주교님은 무릎을 꿇고 추기경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무척 당황하고 실망하였다. 담화 중 최 주교님이 한국 교회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추기경은 뚱단지같이 남미의 교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추기경은 남미 주교들이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며, 남미의 교회가 부자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장시간 비평했다. 또 그곳에서 필요한 것은 사회 혁명뿐이라고 추기경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추기경은 말하기를 잠시 멈추고 자신의 손바닥 뒤쪽에서 나를 보며 "자네 주교에게는 통역하지 말게. 나를 과격분자로 여길지 모르네" 라고 말했다.
재정 지원을 약속받은 후 추기경과의 만남이 끝나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최 주교님은 만나는 사람들을 자신의 성격대로 순진하고 진지하게 대하였다. 미국에서 만난 여러 고위 성직자 중에서 쿠싱 추기경은 최 주교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쿠싱 추기경을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독특하고 부드러운 마음씨와 소박한 인상을 좋아했다.
대부분의 미국 주교들은 쿠싱 추기경처럼 최 주교님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최 주교님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그 특이한 예가 중서부에 있는 한 교구 주교의 경우였다. 객실에서 두세 시간을 기다렸으나 그 주교는 나타나지 않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유도 남기지 않았다. 최 주교는 당연히 화가 났다. 자동차를 타자마자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국에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공짜로 받은 것이었다. 나와 최 주교님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최 주교님은 한 개비를 나에게 주고, 또 한 개비를 자신의 입에 물면서 "소 신부, 담배 피웁시다. 나는 화가 나면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라고 말했다.
"어떤 때는 화가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지지요." 이 말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래서 우리가 담배를 다 피운 다음, 주교님에게
물었다. "이젠 기분이 좋읍니까?" 하였더니 "아니오"라고 주교님은 말했다. 그리고 묵주를 꺼내면서 "묵주 기도를 바칩시다"
라고 말했다. 묵주 기도 후에는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최 주교님은 의전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아니했다. 한번은 멕시코에서 만난 한 위엄있는 주교가 우리의 괴상한 예절을 보고 크게 놀랐다. 나를 한쪽으로 불러 놓고, 나에게 교회의 의전 절차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했다. 여러가지 중에서 재미있는 사항은 자동차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재미있는 사항은 자동차의 상석은 뒷자석 오른쪽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교를 보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교가 차에 오르도록 문을 열고, 주교가 오른쪽 뒷자석에 앉자 마자 문을 닫고 빨리 차 뒤를 돌아 왼쪽 좌석,
주교님 옆에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내가 운전을 아니 할 때를 말한다. 이 예절을 가르친 멕시코 주교가 보는 앞에서 나는 우리를 태우고 갈 차의 오른쪽 뒷문을 열었고, 최 주교님은 차에 올랐다. 나는 문을 닫고 급히 뒤를 돌아 왼쪽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최 주교님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이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 상석이 아닌 내 자리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이것을 보고 당황한 멕시코 주교에에 나는 양어깨를 으쓱 들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최 주교님과 대화할 때 미국 사람이 천천히 그리고 명확한 소리로 말해야만 주교님은 상대방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 주교님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교님은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읽을 줄 알
뿐만 아니라 훌륭한 연기도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최 주교님이 자신의 영어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것은 아니었다.
최 주교님의 영어 때문에 우리가 곤경에 처한 일이 있었다. 한번은 캐나다 토론토의 성 요셉 수녀원에서 새로 건축한 본원 건물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건물은 넓은 판유리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자동문이 설치된 당시로서는 값비싼 최신식 건물이었다. 총원장 수녀님이 우리를 건물 안으로 안내할 때 최 주교님은 큰소리로 "too good! too good! (너무 좋다!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말은 최 주교님 같은 경상도 사람이 "매우 좋다!를 너무 좋다" 라는 말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직역한 영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too good'이 '지나치게 좋다' 라는 부정적 의미를 가진 것을 주교님응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이다.
최 주교님의 말을 비난의 말로 받아들인 총원장 수녀님이 "아니오, 주교님, 너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자 주교님은 더 큰
소리로 "yes,yes, too good! too good!" 이라고 했다. 그 후에 'too good'의 뜻을 주교님에게 설명했지만 이 표현을 너무 좋아한
주교님은 쉽사리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주교님이 미국에서 본 것은 거의 모두가 "too good! too good!" 이었다.
본원 건물을 구경한 뒤 총원장 수녀님과 엄숙한 표정을 한 보좌 수녀들이 음료수와 쿠키를 앞에 놓고 주교님 주위에 앉아 담소할
시간을 가졌다. 즐겁고 유쾌한 순간이었다. 수녀들은 모두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수녀들을 보자 기분이 몹시
고조된 주교님은 "나는 미소 짓는 (스마일, smile) 수녀들을 만나면 언제나 매우 반갑습니다" 라고 하는 말 중에, 이 '스마일
(smile)' 단어 대신에 '냄새 나다' 라는 '스멜(smell)'이란 단어를 사용해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수녀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는 즉시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여들었다. "주교님의 '스멜(smell)' 이란 말은 '스마일(smile)' 을 잘못 말한 것입니다" 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주교님은 더 큰소리로 "그래요, 내가 말한 것은 '스멜', '스멜' 입니다." 라고 말했다.
최 주교님과 같이 여행을 하다보니 나도 한국인의 눈으로 미국을 새롭게 보게 된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재미있는 교훈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주교님과 나는 도로변에 위치한 식당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프라이팬에 지진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와
콜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여종업원이 음식을 식탁에 놓은 다음 계산서를 뒤집어 식탁 위에 놓고 갔다. 내가 그것을 집기 전에 주교님이 먼저 집어 버렸다. 아래쪽에 $1.20 라고 적혀 있었다. 갑자기 주교님의 두 눈이 놀란듯이 옆으로 크게 열렸다.
"이 간단한 식사가 1달러 20센트라니! 이돈은 한국 노동자의 하루벌이보다 많은 돈인데!"라고 말했다. 이런 마당에 나는 또 25센트짜리 은전을 팁으로 식탁에 놓아야 했다. 이 광경을 주교님이 또 보았다. 이 돈은 우리 공동의 소유물이다. 팁의 습관을 모르는
주교님에게 또다시 팁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식당에 가는 대신 아침에 땅콩버터나, 소시지나 혹은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 시간이 되면 주유소에 설치된 음료수 자판기에서 콜라를 사서 차 안에서 식사를 하였다.
한 번은 뉴욕주의 로체스터로 가는 길이었다. 펜실베니아주의 신록으로 뒤덮인 고지대의 아름다운 산길에 차를 세우고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콜라병을 집어 들어 내용물을 다 마신 후, 나는 빈 병을 하늘 높이 던져 그것이 산아래 텅 빈 풀밭으로 떨어져 굴러가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어다. 이것을 본 주교님은 웃으면서 "다음에는 한국까지 멀리 던지시오. 그러면 거지들이 그 빈 병을 가지려고 서로 다투게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우리가 델라웨어주 윌밍턴을 지나고 있었다. 외국인을 빤히 쳐다보는 한국인의 습성을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이라면 흔히 겪는 경험이다. 주교님은 한 늙은 흑인이 파지와 넝마와 고철을 가득 실은 유모차를 끌고 우리 자동차 옆을 지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 흑인 넝마주이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주교님은 "저봐, 저 사람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인데,
음식을 어떻게 구해 먹길래 저렇게 몸이 좋을까?" 하고 의아해 했다. 나는 설명했다. "저 사람의 하루벌이가 식생활을 해결하는데 충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복지 기관에서 복지 기금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그러면 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구먼" 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주교님은 모두가 유령 도시라고 말했다.
"도대체 모든 사람이 어디에 갔습니까?" 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밖에 있으며, 거리는 언제나 만원이고 모두가 밤에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궁금하지만,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집에 있고, 직장에 있고, 그렇지 않으면 자동차로 혹은 다른 교통 수단으로 여행을 하고있다. 그러니 길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주교님에게 또 강한 인상을 준 것은 공원이다. 공원의 크기나, 그 수나, 혹은 그 아름다움이 아니고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미국의 공원마다 죽은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국에서는 땔감을 구하러 멀고도 먼 산길을 걸어 산 속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공원의 나뭇가지를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다. 주교님에게는 정말로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최 주교님이 처음으로 폐차장을 보았을 때 미국 사회에 대해서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중고차이지만 아직도 재산이 될 수 있는 자동차를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그냥 버리는 사실을 보고 도무지 그 현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만일 이곳이 한국이라면..." 하고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중서부 어느 지역에서 마침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해 차를 타고 주문하는 맥도널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샀는데, 내가 겨자를 치려고 할 때 빵 가운데에 있는 고기를 보고 주교님은 "내가 어릴 때 나의 형제 자매가 1년 동안 먹어 본 고기의 양보다 많다" 라고 했다.
몇 주 동안 계속 여행한 끝에 우리는 우리의 본부 사무실 역활을 하는 워싱턴시의 나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나의 아버지와 여동생들이 휴가를 떠나 집에 아무도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식사 준비를 할 사람이 없으니 밖에 나가 외식을 하자고 주교님에게 말했다. 주교님은 부드러운 얼굴 표정으로 나에게 "한국의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내가 식당에서 이 귀한
돈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냥 냉장고에 있는 우유와 선반에 있는 빵으로 저녁 식사를 떼웁시다" 라고 말했다. 첫날은 할 수 없이
그렇게 했지만, 다음날부터는 TV식사(오븐에 가열만 하면 요리가 되는 냉동 식품으로, TV를 보면서 준비할 수 있어 TV식사라고 함) 중에서도 최고의 음식을 주교님에게 대접했다.
아버지의 집에서 주교님은 반가운 손님이었다. 주교님은 평신도보다 대접하기 쉬운 손님이었다. 하루는 여동생이 외출 중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TV식사를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쇠고기 스테이크를 요리했다. 식사 후 나의 아버지와 주교님과 나, 셋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주교님이 걱정이 되었는지 나의 아버지를 보고 "누가 설거지를 하지요?" 라고 물었다. 나의 아버지는 장난으로
"누구라니요, 물론 주교님이지요, 주교님 차례가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주교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윗도리와 로만 칼라를 벗고 부엌으로 갔다. 얼마 안 있어 부억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냄비와 프라이팬과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나의 아버지가 단순히 미국식 농담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교님은 나의 말에 개의치 않고 설거지를 계속하셨게에 다시 거실로 모셔오는데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알바니 교구의 교구 사무처 건물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 저녁 교구 사무처장 신부님이 우리를 식사에 초대하였다. 식사가 시작되자 주방 아주머니가 나와 주교님 앞에 비프 스테이크를 담아 접시를 가져왔는데, 스테이크의 크기가 젊은 벌목공이라도 다 먹으려면 힘들 정도의 큰 분량이었다. 나는 약 4분의1정도만 먹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주교님은 분명히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이 틀림없었다. 끝까지 애를 쓰면서 한 점의 고기도 남기지 않고 다 드셨다. 그 후 주교님은 이틀 동안 고생을
했다. 고기의 분량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남기지 않고 왜 다 드셨는지 물어 보았다. 주교님은 나의 질문에, 그 뒤에도 자주 사용하는 말, "아깝다!" 때문이라고 했다. "아깝다"의 뜻은 "너무 좋고 귀하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 라는 말이다.
최 주교님이 미국에 처음 오셨을 때 이상하게 생긴 뒷굽이 높은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구두를 구했는지 도무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 볼 마음이 썩 내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루는 그 이상한 하이힐 때문에 주교님이 발을
삐었다. 더 이상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 그 이상하게 생긴 구두를 구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아, 이 구두. 부산에 있는 메리놀 수녀가 준 것이야." 그제서야 미스테리가 풀렸다. 그 구두는 바로 수녀들이 신던 구두였다! 발을
삔 후 아무리 설득을 해도 새구두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교님과 타협한 끝에 하이힐을 반으로 절단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보기가 이상하였지만 더 이상 위험은 없었다.
주교님의 시력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안경을 끼고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루는 어디에서 그 안경을 샀는지 물어 보았다. 부산의 한 시장에서 아주 헐값으로 샀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안경점에서 검사를 했더니 안경알이 창문 유리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미국을 떠나기 얼마 앞서 미시건주의 어느 대주교와 만날 약속이 있었다. 머리가 너무 길어 주교님은 이발을 해야 했다. "주교님,
이발하러 갑시다" 하니, 주교님은 "NO"라고 말했다. 이유는 3주만 있으면 유럽으로 갈 것인데 유럽의 이발비는 미국보다 싸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도대체 유럽의 이발비가 미국보다 싸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들은 것도 아니고, 아마도 느낌이 그런 것 같았다.
주교님이 처음 미국에 오셨을 때 나는 소형 르노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주교님 마중을 갔었다. 주교님을 모시고 차를 운전하면서 나는 주교님에게 이 차가 매우 경제적인 차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내차가 주교님의 신분에 있는 분을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했다. 그러나 주교님은 한국에서 사용하는 지프차에 비교하면 내 차가 고급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예상했던대로 포드와 같은 대형차 대신 소형 르노를 계속 굴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이 소형차 때문에 우리는 재미있는 일도 경험하고
나쁜 일도 경험하였다.
예를 들어, 볼티모어에서의 어느 화창한 주일 오후, 돈 많고 영향력있는 천주교 신자들이 주교님을 위하여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우리는 그 도시의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 일찍 도착하여 파티가 열이는 고급 주택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파티를 베푼 집주인이 나를 찾아 현관 앞으로 가자고 했다. 한 경찰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 본부에서 교통 정리를 하도록 보낸 경찰관이라고 했다. 선의의 친절이 가득한 이 경찰관은 교통 경찰국에 연락해서 견이차를 불러 이 집 앞에 있는 나의 소형차를 한곳으로 치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 주교님이 타고 오는 리무진이 집 바로 앞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 온 것이다. 나는 주교님의 리무진은 이미 도착했다고 했다. 사실 저
소형차가 주교님 차라고 했다. 나는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소형 르노를 가리켰다. 집주인은 크게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경찰관은 점잖게 말했다. "신부님, 나는 성공회 신자입니다. 우리 성공회의 거드름 피우는 주교님들도 캐딜락이나 콘티넨탈을 타고 돌아다니느니 저런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경찰관의 말에 나는 "아멘" 하고 칵테일 장으로 들어갔다.
미국을 떠나기 전 워싱턴시에 한 수녀원에서 주교님은 미국 천주 교회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작은 나라
에서 온 작은 주교입니다. 더욱이 나는 외국인이며 낯선 사람입니다. 미국은 대국이며 강대국입니다. 내가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푸대접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어디을 가나 나는 작은 나라에서 온 작은 주교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주 교회의 주교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수녀원에서, 사제관에서, 교우 집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교에게 보이는 똑같은 존경과 경의를 받았습니다. 진실로 이것은 공번된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미국 신자들의 깊은 신앙의 징표입니다.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미국 교회의 놀라운 생명력과 역동력을 보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어디를 가나 천주교 이름 아래 세워지는 새
학교 건물, 수녀원, 교회 시설들을 보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천주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번성한 교회라고 말 하는 것이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미국 천주교 신자들의 아낌없이 도와 주는 마음은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나를 계속 감탄케 했습니다.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즉시 도와 주고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까지도 미사 후 제의실로 나를 찾아와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정말로 미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의 나라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는 아름답고 좋은 나라입니다.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영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작별 인사를 할 때 왔다. 6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한 끝에 미국을 떠날 시간이 온 것이다. 주교님은 혼자서 먼저
유럽으로 떠나고, 나는 몇 주 후 유럽에서 만나 그곳에서 다시 모금 활동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주교님은 로마로 가는 이탈리아 항공사의 항공권을 구입하였다. 아버지의 집에서 주교님의 짐을 달아 보니 항공사에서 개인당 허용하는 무게보다
12파운드(약 5.5킬로그램) 초과했다. 1파운드당 초과 징수금은 2달러였다. 워싱턴시에서 뉴욕 공항까지 차를 몰고 가는 하루 내내
초과 금액 때문에 주교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게다가 뉴욕 공항에서 15달러의 주차료 청구서를 주차장 관리자가 내 차의 와이퍼 밑에 끼워 놓고 갔다. 이상하게 보는 주교님에게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청구서가 뉴욕시에서 복지 기금을
기부해 달라는 안내문이라고 둘러댔다.
간신히 시간을 맞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탈리아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주교님을 짐과 함께 줄을 서게 한 다음 나는 급한 용무로 전화를 걸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이미 짐과 함께 주교님의 탑승 수속이 끝난 후였다. 나는 주교님에게 초과 금액을 얼마 지불했는지 물어 보았다. 주교님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푼도 안 냈어요, 오히려 내 짐의 무게는 한계 무게보다 약간 아래였어요!" 나는 주교님을 가까이에서 봤다. 주교님을 더 가까이 보면 볼수록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 주교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면 가방에서 겨울 외투와 토파를 끄집어내어 양복 위에 껴입었고, 또 가방 안에 있는 무게가 나가는 모든 물건을 호주머니에 다 집어넣고 있었다. 아무튼 주교님은 20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고, 그 돈은 한국 교회의 전교 회장에게 지불할 수 있는 한 달치 월급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주교님은 마음의 위로를 얻었고, 자신의 영혼에 시원한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몸을 뛰뚱거리며 비행기 탑승 계단을 오를 때 주교님의 모습은 로마로 가는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 마치 외계로 떠나는 우주인같이 보였다.
첫댓글 설산님, 언제 이렇게 다 쓰셨어요? 대단하세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돌려 드릴때가 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