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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과 북간도]
글/사진 김경식
서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그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청년이 당해야 했던 정신적 고뇌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자유와 희망의 시로 승화하였다. 결백하고 지성적인 청년은 하늘의 별을 그리워했다. 맑고 순결한 시어를 조탁하며 한글과 민족을 하늘에 심었다. 삶이 고단하고 부끄러운 날이면 하늘을 보았다. 그의 삶은 짧았고 슬펐다. 마지막 그가 숨을 거둔 곳은 일본의 감옥이었다. 독립운동 협의로 일제는 그를 감옥에서 죽인 것이다. 1945년 2월16일, 28세의 젊은 청년은 서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누구인가. 윤동주다. 순국이었다.
▲ 윤동주 시비 (용정 대성 중학교)
죄가 있다면 배앗긴 조국을 사랑한 죄였다. 당시 많은 대한의 젊은이들이 윤동주처럼 죽어갔다. 윤동주는 시를 썼다. 살아생전에 그를 시인이라 불러준 이가 없을 정도로 무명이었다. 고독했다. 그러나 순결하고 맑은 영혼은 하늘을 지향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칼날은 오히려 그가 좋아했던 하늘을 두려워했다.
맑고 순결한 시어를 창조하였다고 하여, 그가 독립의지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총과 칼을 들고 일제에 항거하는 것만이 독립운동은 아니지 않는가. 윤동주는 조용하지만 은밀하게 일제에게 펜으로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거룩한 저항정신은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자기 고백의 언어조차 일제는 위험하게 여겼다. 윤동주의 시어들은 전달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무서운 의식화로 받아 들여 졌을 게다.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참회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응하게 된다. 이것이 독립의식으로 발전하면 결국 일제에 투쟁한다. 이것이 일제 경찰이 그를 체포한 이유다.
윤동주는 죽는 날 까지 인쇄된 시집을 발행하지도 못했고 등단하지도 못했다.
그의 시적인 부활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고도 3년을 기다려야 했다. 1948년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 발행되었다. 이 시집을 읽은 해방 된 조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으로 울었다. 민족의 시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읽는 사람들에게 별을 가슴에 품게 만들었다. 식민지의 밤길을 걸을 때에 썼던 그의 시들은 순결하고 결백하여 감동을 준다.
삶과 시가 일치하였기에 민족의 등불이 되었다. 등불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이제 그의 시편들은 민족의 별이 되어 하늘에 떠 있다. 아직도 시련의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삶의 길을 평화롭게 인도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재단에 바쳐진 순교였다. 윤동주를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결국 그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일은 민족의 역사와 문학을 탐방하는 기행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
본론
1) 윤동주의 삶과 문학
조국의 식민지 상황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그는 아마도 그 체제에 순응하면서 잘 살았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부끄러운 현실을 알았기에 펜을 들었다. 참회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그냥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민족의식이 있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이해해야 한다.
윤동주 시인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1917년 12월 30일 태어났다. 북간도다.
윤동주의 삶의 궤적을 찾기 위해서는 북간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좁게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사이 섬을 간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이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간도의 범주도 넓어진다. 계속해서 북방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곳은 옛 고구려, 발해의 영토이므로 우리 땅이라는 의식이 많았다.
간도에는 서간도와 동간도, 북간도가 있다. 서간도는 백두산 서편이다. 달리 말하면 압록강 건너편과 요령(遼寧)성 봉성시 부근 봉황성 주변까지다. 동간도는 백두산과 송화강 상류지역의 서부지역이다. 북간도는 두만강 인접 지역과 동부지역이다.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가 모두가 북간도 땅이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북간도는 그의 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윤동주의 고향마을 명동촌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다. 서북쪽으로 선바위란 삼형제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절경이다. 그 산 정상에는 성터의 흔적이 있다. 선바위 언저리는 명동촌 사람들의 놀이터였다. 동쪽에서 뻗어 내린 장백산맥은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살바위란 험한 산들 휘돌아 명동촌으로 다가왔다. 명동촌에서 바라보면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다.
윤동주는 초등학교 방학 때 선바위에 소풍을 가기도 했다. 나는 20년 전 어느 가을 날 문익환 목사에게 직접 윤동주와 그의 유년 시절이야기를 들었다. 명동촌 선바위로 윤동주와 함께 소풍 같던 이야기도 했다. 당시 사진도 보여 주었다. 문익환 목사는 유년 시절 윤동주의 친한 친구였다.
윤동주의 생가는 5칸의 기와집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서 있었다.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약 30그루의 살구와 자두 나무가 있는 과수원이었다. 동쪽 쪽대문을 나서면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큰 뽕나무가 서 있었고, 교회당과 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이 우물은 그의 시 <자화상>의 작품의 무대이다.
산모통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전문
그는 왜 이곳에서 태어났을까. 만주는 함경도보다 농사짓기에 땅이 비옥했다.
회령과 종성 등지에 살던 네 가문의 어른들은 모여 함께 두만강을 넘기로 약정한다.
회령과 종성은 두만강변의 도시였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정리한 4가문의 어른들은 모두 141명의 식솔들과 더불어 1899년에 두만강을 건넌다. 당시는 국경이 지금처럼 확실하지 않을 때다. 목숨을 걸고 떠난 이들에게는 잘 살아보자는 강한 소망이 있었다. 1899년 2월 찬 바람이 불던 날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도착한다.
당시 간도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는 간도에 사람들이 사는 것을 금했다. 그들의 조상들이 터전을 잡았던 터였기 때문에 신성시했다.
그러나 간도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우리 역사를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은 작은 영역부터 우리 땅으로 만들 작정을 하고 떠난 것이다. 조선의 불꽃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어떤 지배에서도 벗어나 자유롭게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들이 간도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은 기독교가 일찍 전해졌다.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1900년 두만강을 건넌다. 18명의 식구들과 함께 명동촌에 자리를 잡는다. 윤하현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들인 윤영석을 북경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윤영석의 아들이 윤동주다.
윤동주는 장로교 유아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집안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당시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김약연 선생이 활약하던 이 지역은 이미 독립운동의 거점 같은 장소다. 자연적으로 그는 민족적인 정기를 가슴에 새기면서 자랐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김약연 선생(1862~1942)은 회령에서1899년 이주해 온 분으로 1909년 기독교인이 된다. 청국인에게 땅을 구입하여 조선인 마을을 만든 장본인이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은 1906년 10월경 이상설(李相卨) 등이 용정(龍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후 문을 닫는다. 이후에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설립된다. 김약연 선생에 의해서다. 그는 명동서숙을 설립하고 명동소학교 명동중학교를 세운다. 또한 교회당을 신축하고 서울에서 교사를 초빙한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7) 선생은 1910년 기독교인이 된다.
윤하현 선생은 김약연 선생에 버금가는 선각자였다. 김약연 선생에게 윤하현 선생이 없었다면 “그의 지도력은 그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이 말을 문익환 목사의 모친에게 직접 들었다. 김약연 선생의 여동생 김용과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혼례를 올린다. 명동촌의 경사였다.
윤동주는 두 누님을 잃고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10세까지 이름은 해환(海煥)이었다. 동생 윤일주는 달환(達煥), 나이 어려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었다.
<해>와 <달>과 <별>을 첫 자에 넣어 이름을 지었던 부모의 생각은 그를 시인이 되게 만들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육필시집을 만들기도 했던 윤동주의 이런 결과물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윤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김약연 선생이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조선역사'였다. 같은 반 학생이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이었다. 이 학교에는 항상 태극기가 게양 되었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 졸업생 14명에게 주어진 선물은 김동환의 <국경의밤> 시집이었다. 학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십리 떨어진 대립자에 있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한다. 그곳에서 1년간 수학한다. 그의 대표시 <별 헤는 밤>에서 “패(佩),경(鏡) 옥(玉)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는 시어는 이 학교에서 만났던 중국인 소녀들과의 추억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보낸 윤동주에게는 자연히 독립 정신이 뇌리와 가슴에 흐른다. 당시 가족들과 이웃들의 화두는 민족과 독립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는 별'이다. 이런 이유로 그를 천체 미학의 시인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민족과 독립, 희망의 상징어를 별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국 광복은 자신이 살아서 보기에는 너무 멀리에 존재하는 별이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서시의 '주어진 길'은 자신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 재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그의 시는 아름답고 맑고 순결하지만 내면에는 이런 민족적인 자각이 꿈틀거리며 흘러간다.
1932년 4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로 진학한다. 가족들도 모두 용정으로 이주한다.
그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생가도 이때 매도되어 다른 사람들이 살다가 1981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 마을 명동촌의 삶을 풍경들을 동시에 그려 넣었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웬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 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윤동주 시인 동시 ‘ 굴뚝’ 전문
지금 생가는 1994년 8월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용정문학연맹과 연변대학연구소 기타 많은 이들의 성원으로 복원되었다. 윤동주가 15세까지 살았던 집이니 그의 문학소년 시절의 꿈과 희망이 싹튼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집에서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어린이’를 구독하여 읽었다. 시인의 꿈을 키우던 생가가 문학 산실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용정 일송정 (산꼭대기)
초등학교 친구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으니 생가는 당시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이다.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인 소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다. 그 무렵 명동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가 성행했다. 평화를 갈구하던 가족들은 윤동주의 중학교 입학에 즈음하여 용정으로 이사를 한다. 명동촌은 정든 땅이었다. 용정은 명동촌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였다.
명동촌은 이념의 갈등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몰아 붙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을 살해하려고 했다. 더 이상 이주를 미를 수 없었다. 용정가 제2구 1동36호 20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이사를 한다. 윤동주는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1932년은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앞 세워 괴뢰국을 만든다. 푸이는 허수아비였다. 결국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된다. 북간도의 위기였다. 북간도의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진중학교와 그들이 경영하던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았다.
은진중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캐나다 선교부에서 경영했다. 학교 분위기는 일본의 간섭으로 부터 자유로웠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축구도 잘 했고 교내 잡지를 만드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웅변도 잘 했다.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을 하기도 했다.
동급생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숭실중학교에 편입한다. 그러나 1936년 봄 신사참배로 숭실중학교는 폐교된다. 이 무렵 문학에 심취한다. 도서관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빌려 자신의 필체로 필사한다. 신문을 스크랩하고 시를 습작하며 열심히 독서한다.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카톨릭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한다.
중학교 때 그의 서가에는 정지용시집,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 주요한의 <아름다운 새벽 >,김동환의 <국경의 밤>, 한용운의 <님의침묵>, 양주동의 <조선의맥박>, 이은상의 <노산시조집>, 윤석중 동요집이 꽃혀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당시 그의 서재는 약 800권의 장서로 벽면이 가득했다.
예수의 탄생일 성탄절에 최초의 시 작품이 탄생한다.
<초 한 대 >,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는 바로 1934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쓰여졌다. 이듬해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로 3학년에 편입한다. 은진중학교에서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였지만 편입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한 학년을 낮춰 편입한다.
윤동주는 어렵게 편입했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1938년 2월에 졸업한다.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는 용정중학교의 전신이다.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을 5년 넘게 다녔다. 용정중학교 교정이 윤동주 문학기행의 산실이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교정의 윤동주 시비는 1992년 9월10일 동아일보와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하여 세워졌다.
윤동주는 1938년에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반대는 심각했다. 문과입학을 반대에 윤동주는 단식으로 호소했다. 조부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부친을 설득하여 윤동주 연회전문 문과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이양하 교수에게 영시를 배우고 최현배 교수에게 조선어와 민족의식의 깨우친다. 그의 시는 민족적이며‘슬픔의 미학’으로 변모한다.
식민지의 상황인식과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동시를 쓰던 천진무구함에서 벗어나는 때는 이 무렵이다. <슬픈 족속>에는 당시의 그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 윤동주 시인의 시 ‘슬픈 족속’ 전문
이 시는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을 표현한다. 불과 4행이지만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로 모두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그런데 흰 수건은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고, 흰 저고리는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백의 민족인 우리 민족은 슲픈 족속이 된 것이다. 나이 22세 때에 비로소 통렬한 자기 성찰을 하며 민족을 가슴에 담는다.
절망의 정서가 고개를 숙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면, 희망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다.
결국 절망과 희망은 가까운 거리에 존재한다. 절망의 정서는 슬픔을 동반하며 지상의 것들을 추구한다. 동주가 발견한 희망의 상징어 들은 모두 지상에 존재한다. 그것은 하늘과 별과 달이다. 그는 희망의 길을 준비했다. 1938년 5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꿈을 키우고 있었다. 걷기를 좋아했다.
그는 연희 동산을 거닐며 절망의 길이 <새로운 길>이 시 같이 되어 주길 기원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 전문
이 시가 쓰여 지던 1938년 당시 연희전문학교 정문 앞에서 서강 쪽으로는 논이었다.
자신의 고향 북간도를 그리워 하며 아름다운 조국의 농촌을 사랑했다. 윤동주는 논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는 산책을 좋아했다.
윤동주의 시작품은 모두 110여 편이다. 이중 35편이 동시이다.
지금도 연세대 교정에 남아 있는 기숙사 건물은 고색창연하다. 지금은 연세대재단사무실로 쓰고 있는 기숙사 3층 지붕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같은 방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끌려갔다. 일제는 전쟁물자 수급에 혈안이 되었다. 당연히 그 파급이 연희전문학교 기숙사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숙사의 식단이 열악해 지기 시작하자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은 하숙집을 찾아 나선다. 당시 윤동주는 4학년 정병욱은 2학년이었다. 1941년 5월부터 시작된 누상동 하숙생활은 행복했다.
▲ 윤동주시인이 자주 오르내렸던 언덕
그집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김송의 부인 조성녀는 성악가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며 음악을 듣고 문학과 삶에 관해 정담을 나눴다. 그러나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일본 형사들이 소설가 김송과 윤동주의 방을 가택수색하며 책의 목록을 기록하고 편지를 압수해 갔다. 그들이 북아현동으로 하숙집을 옮긴 이유이다.
그의 대표시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별혜는 밤>과 <서시>가 누하동 집에서 하숙생활을 할 때 쓰여졌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만나 문학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문헌이 없다. 다만 1948년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정지용 시인이 써 준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언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 시인의 시 ‘ 별 헤는 밤’ 전문
1941년 11월5일에 쓴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을 읽으면 언제나 마음이 숙연해진다. 당시 그의 하숙생활도 형편이 좋지 못했다. 일 년 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온다. 학교 후배인 정병욱과 친숙한 생활을 한다. 훗날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원고를 간직했다가 광복 후에 시집 을 출간 수 있게 한다. 1948년 육필시집을 세상에 알리며 아무도 몰랐던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 시집은 3부를 똑 같이 써서 묶었다.
1부는 이양하 교수, 1부는 연전 후배 정병욱, 마지막 1부는 윤동주 자신이 보관했다. 이양하 교수는 이 시집이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인쇄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했다. 윤동주는 연전 졸업 기념으로자신의 시집 77부를 자비출간하려고 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만나 문학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문헌이 없다. 다만 1948년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정지용 시인이 써 준다. 그러나 1950년 정지용 시인이 행방불명되어 1955년 발해된 시집에는 그의 서문이 삭제되었다. 우리에게 이념은 이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2) 윤동주의 죽음
1941년, 일제는 전쟁으로 광분한다. 조선의 학제는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진다. 그가 대학을 1941년 12월 27일에 졸업하게 된 이유이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하여 1942년 4월 2일, 동경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2년 여름방학 때 그는 북간도 용정 고향집을 방문한다. 2학기가 시작 될 때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로 전학을 한다. 당시 그의 사촌 송몽규와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경에서 교토 행은 결국 죽음의 길이었다. 1943년 7월10일 독립운동 협의로 송몽규가 검거되고, 윤동주도 7월14일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에 독립운동 협의로 체포된다. 윤동주는 교토의 카모카와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검사국 감옥의 독방에 넣어진다. 그가 일본에서 쓴 시와 산문 대부분이 이 무렵 압수되어 유실된다. 처음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 조사관은 윤동주 앞에 많은 서류를 던진다.
그 서류는 일 년 동안 일제 경찰이 자신을 미행하고 엿들은 정보를 그대로 기록한 문서였다. 윤동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자신의 방에 불이 몇 시에 꺼지고 켜지는 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송몽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한 서류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윤동주가 일제에 어떤 행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
그러나 일제는 윤동주에게 2년형을 선고한다. 당시 윤동주는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문화운동을 하고 싶어했다. 연극을 통해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문화운동을 더 두렵게 여겼다. 교토지방재판소는 윤동주에게 치안유지법 위반 협의로 구속한다.
큐슈(九州)의 후쿠오카 형무소 생활은 비참했다. 독방에서 그는 깡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쪽으로 연명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었다. 그의 당숙 윤영춘의 증언이 그것이다. 윤영춘은 윤동주가 사망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윤동주 부친과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운구한 분이다.
송몽규를 감옥에서 만났는데 그는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치고 있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5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주사를 맞고 있었다. 그 대열에 송몽규가 줄을 서 있다가 다가섰다. 송몽규의 몰골은 참혹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가 하는 인사말 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 하니 송몽규는 간신히 들릴 목소리로 “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 같은 시기에 감옥살이를 했던 김헌술씨도 같은 진술을 했다. 그는 5~10cc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며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고 증언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수인번호를‘모기소리 같은 가냘픈 소리’로 복창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2월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시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윤일주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망통지의 전보가 온 날은 일요일이었다. 식구들은 다 교회에 출석하고 나와 동생이 집을 보는 고요한 오전, 날아든 전보는 < 2월16일 동주 사망,시체 가지러 오라> 였다."
윤일주는 교회로 달려갔다. 예배를 마친 교인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윤동주 집은 삽시간에 초상집이 되었다. 북간도로 윤동주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부친과 삼촌 윤영춘은 길을 떠난다. 분노의 길이었다. 그러나 조국을 잃은 자식들이 모두들 당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북간도에서 일본을 가기는 어려운 상황인데 당시는 어떻게 했겠는가. 동주의 시신은 화장을 하여 재로 가져왔다. 동생 윤일주는 용정에서 2백 리 떨어진 두만강변의 한국 땅 상삼봉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로부터 시신을 넘겨 받아 두만강 다리를 건넌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1945년 3월6일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다. 조국해방을 불과 5개월 남겨두고 그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집 앞뜰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북간도가 울었다.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의 집례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 장례식에서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는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눈발 날리는 하늘과 산천을 바라 보았다. 조국해방을 위해 눈물흘리며 기도했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의 민족의식과 품격에 고개가 숙연해 진다. 장지는 용정의 동산으로 결정되었다. 그해 5월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시비를 세웠다. 그의 가족들이 시인이라고 제일 먼저 인정하였다.
그가 운명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는 자신이 4년 전에 썼던 시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부활을 알리는 <새벽이 올 때까지> 란 시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새벽이 올 때까지’ 전문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민족을 위해 순교한 것이다. 그들의 고결한 피는 민족의 재단을 더욱 순결하고 결백하게 만든다. 부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민족이 존재하는 한 그의 시들은 읽혀질 것이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다시 살아 났다.
윤동주 그는 27년 2개월의 순결한 삶을 민족의 재단에 바쳤다.
그의 죽음이 슬프지만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이미 그를 시를 통해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시에 담겨 있는 그의 맑고 순결한 영혼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 서시 친필원고
3) 윤동주 시인의 작품 탐구
--<서시>,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를 중심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서시" 전문
1941년 11월20일 누상동 하숙집에서 쓴 시다.
<서시>의 주제는 삶속에서 부끄러움이 없기를 갈망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시는 1948년에 발행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첫 선을 보인 후에 국민의 애송시가 된다. 자유시, 서정시이며 고백적이며 의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백하고 있다.
(1~4행)은 삶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5~8행)은 다가올 미래의 삶에 대한 의지적인 결심이며, (9행)은 식민지의 절망적인 현실적 상황이다.
하늘은 절대자, 민족, 자연의 하늘이다.
<별>은 희망, 이상의 세계, 조국의 독립을 의미하며 바람은
일제 식민지 상황, 시련이 내포되어 있다.
<밤>은 식민지 상황의 절망 시간이다.
이 시는 1948년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시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시이며, 우리 현대시중 애독자가 가장 많은 명시중의 명시다. 청소년기에 이 시를 한번이라도 읽지 않은 이는 드물다. 그러나 이 시는 성인이 될수록 읽기가 쉽지 않다. 서시가 던지는 자성의 언어들이 읽는 이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시'의 마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직하지 못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한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진실하게 사는 방법인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정직한 길로 인도하는 의지적인 힘을 ‘서시’는 가지고 있다.
이런 힘은 ‘서시’를 통한 시의 언어만 가지고 있지 않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왜 마음이 순결해지는가. 그가 맑은 영혼을 가지고 순결함을 지니고 순교자처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옥에서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숨졌다는 것은 그가 우리 민족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우리 민족의 별이 되었다.
서시는 짧은 시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시어도 몇 단어가 되지 않는다. 즉 하늘, 별, 밤, 바람이란 단어를 가지고 읽는 이들에게 삶의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이 화두는 오늘날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가 되어 힘과 용기를 준다. 때로는 부끄러운 현실의 삶을 반성하게 만든다. 이런 힘을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정직함과 순결한 자기 고백일 것이다
.
서시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표현에서 종결어미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1행에서 4행에는 '~괴로워했다'라는 과거형 종결어미를 썼다. 5행에서 8행까지는 '~ 걸아가야 겠다'라는 미래형 종결어미를 도입하였다. 9행에는 '스치운다'라는 현재형 종결어미를 사용하고 있다.
서시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의 이미지의 응집된 단어는 ‘별’이다. 희망과 독립, 소망을 나타내는 이 별이 존재하므로 바람(식민지 현실)을 맞으면서도 그가 살아가는 이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 시인의 결백하고 순결한 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뭇잎의 흔들림에도 자신의 삶을 반성하던 윤동주 자신의 삶이 아니고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이 표현을 그는 시각적 이미지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서시>속에서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생활의 반성한다. 미래의 삶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미래의 결연한 결심을 하고 나니 다시“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냉정한 현실이다.
결국 서시의 배경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떠있으며 그 아래 윤동주 시인이 존재한다. 캄캄한 일제하의 밤에 개인적인 희망과 민족의 독립인 별이 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하면서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도덕성의 결백성과 순결성으로 인해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있다
'별'과 반대되는 개념인 '바람'은 그가 갈구하는 순결한 삶과 양심을 흔드는 현실적적인 시련을 의미한다. 우주섭리의 자연 현상속에서 벌어지는 이런 변화들을 감지하면서 그는 민족의 고난을 자신이 품으려고 했다.
서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41년 11월20일 윤동주 시인의 나이 24세에 쓰여졌다. 그 당시의 표현을 그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한 마디로 요약하였다. 일제의 강압통치가 최악으로 치달아가던 때였다.
1945년 2월 조국의 독립을 6개월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 차디찬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민족의 제단에 순교자가 되어 이 서시로 부활하였다. 절망적인 환경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았다. 결국 윤동주 시인이 선택한 구원의 방법은 인간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다.
진정한 자아 탐구와 정직한 참회의 과정을 거쳐야 자기 극복과 현실적인 모순을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시'는 그런 과정을 가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자기 고백문이다. 박두진 선생이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한국 서정시의 백미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시는 우리국민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짐하고 고백하게 하는 시가 될 것이다.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이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윤동주 시인의 시“ 참회록” 전문
주제는 자기 고백을 통한 결백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 반성적, 고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부끄러운 자화상을 통해 민족과 나라가 쇠퇴하여 망한 파란 녹이 낀 조선왕조의 유물을 도입하고 시키고 있다. 망한 조선의 아들 윤동주 자신은 지금 왕조의 유물이 되어 일본 땅에 유학을 와 있다. 현실적인 모순을 깨닫는다.
김좌진 장군처럼 독립운동을 하지 못한 현실과 일제하의 절망적인 상황을 밤으로 상징화 했다. 슬픔 사람의 뒷모양은 윤동주 자신의 삶을 암시하며 자신을 속죄양으로 삼고 싶은 고백을을 시로서 표현하고 있다. 1942년 1월24일 그는 참회록을 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에 태어났다. 만24년 1개월은 그의 전생애다. 결국 그의 생애 전체를 참회하고 있다.
참회록은 윤동주 시인의 자아 반성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시다. 이 참회의 반성은 치욕스러운 우리 역사 앞에 서 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을 가지게 된다.
일제하에서 무력적인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약한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이런 참회는 윤동주 시인의 시와 현실적인 삶을 떠받치는 중심축이기도 하다. <참회록>이 표현하는 순결하고 숨김없는 참회의 모습이 소중한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날' 곧 독립이 되어도 계속참회를 하겠다고 한다. 이런 반성과 참회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 속에서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정직한 삶을 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정한 역사 현실앞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참회하며 삶을 회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참회는 희생정신과 역사의식과 철학을 지니고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행위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은 정확한 역사인식과 식민지 상황에서 그가 만든 삶의 길을 묘사한 작품이다. 결국 이 길은 미래에 다가올 독립의지로 실천적인 삶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제1연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적인 자화상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이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라는
2연에서는 윤동주 시인 자신의 삶 전체를 참회하고 있다.
3연은 일제치하에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나약한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자신의 삶 역시 독립이 되는 날이 오면 다시 참회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결국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반성과 참회가 진정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참회록에서 거울은 외면과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이 거울은 역사 인식의 필수적인 도구이며 미래를 전망하는 창이다. 그러므로 이 거울을 잘 닦아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참회와 반성은 말이 아닌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한다. 4연과 5연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밤이면 밤마다 자신의 거울을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닦는 행위는 자기 반성의 성실성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라는 표현은 자기 희생의 참회만이 민족을 구원하고 독립의 그날에 부끄럽지 않게 됨을 윤동주 시인은 믿고 있었다. 희망을 예비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닦으면서 그가 추구하려고 했던 삶은 양심적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결국 이 참회록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유서같은 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순교자처럼 이 참회록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강한 자기 반성을 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삶이 순결하고 고결하였기 때문이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시인의 시" 쉽게 씌여진 시' 전문
주제는 절망적인 현실 극복의 의지와 고독한 현실을 표현하고 고백적이며 명상적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는 공간적인 배경의 제시(제1연)하고, <승>은 무기력한 현실 생활(제2-4연)을 표현한다. <전>은 부끄러움의 참회 (제5-7연)와 <결)은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결심(제8-10연)을하고 있다. 지금 윤동주는 하숙집 작은 다다미방 곧 절망적인 공간에 갇혀있다. 육첩방 이다.
현실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을 배우기 위해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일은 천명을 어기는 일인 것 같아 괴로워하고 있다. 암울한 일제의 탄압 상황에서 등불을 잡기위해 절망을 극복하는 정신적 지주 아침 곧 조국 광복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쓰여진 시다.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적국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자기의 나약함을 자책하고 참회하고 있다. 다른 유학생 같으면 엘리트 의식으로 동족을 무시하고 일제의 행정 공무원이 될 길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빼앗긴 조국을 생각하면서 통렬한 자기 반성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유학중 하숙방에서 번민과 좌절에서 오는 무력감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써 내려간 시다. 그는 이 무력감에 승복하지 않고 시인의 사명감을 자각하며 정직하고 섬세하게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당시 윤동주 시인의 내면적인 자화상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쉽게 쓰여진 시’라는 제목의 이 시는 10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실인실을 통해 자기자신의 삶을 참회하고 있다.
제1연은 윤동주 시인 자신이 처한 현실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상징어가 '육첩방'이다. 자신의 적국인 일본땅에서 유학하고 있는 모순적인 삶이 현실이다. '밤비'는 이 암담하고 쓸쓸한 당시의 상황의 상징어다.
제2연의 ‘슬픈 천명’이 말해주듯 그는 시인으로서의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란 아주 나약한 존재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어를 다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명(天命)을 지니고 있기에 고민과 번뇌가 떠나질 않고 있다.
제3-4연은 윤동주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고국을 떠나온 것이 죽은 지식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님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국에서는 온 민족이 일제에 의해 노예적인 능멸을 당하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고 있다. '늙은 교수의 강의' 이렇듯 민족의 문제와 관련이 없는 현실과도 거리가 먼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 와 있는 현실이 부끄러운 것이다.
제5-6연의“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라는 표현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는 꿈과 희망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꿈을 잃어버리고 일본에서 의미없는 유학생활을 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제7연은 시를 쓰는 행위와 유학 생활이 현실 상황과 거리가 있음을 자각하고 부끄러워한다. 이런 부끄러움은 민족의 독립에 기여하지 못하는 삶과 나약한 자신의 삶이 원인이다.
제8연의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는 모순적인 현실 상황과 절망적인 현실을 1연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제9연에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라는 표현은 시인 자신은 절망하지 않고 냉혹한 일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결의를 보여 주고 있다. '어둠'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등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다. '등불'을 켜고 조국의 광복인 '아침'이 오는 모습을 반드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후의 나’는 끝까지 견디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10연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란 표현이다.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자신안의 두 자아가 화합을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의 자아는 현실을 망각한 체념적인 자아와 현실을 참회하고 극복하려는 자아를 말한다. '최초의 악수'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분열된 자아의 화해와 일치를 뜻한다.
결국 이 시는 현실적인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참회와 회개로 형상화 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순결한 마음과 정결한 마음을 지닌 청년 윤동주에게서 가능한 일이다. 그는 이런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조국의 독립을 그리워하였다.
▲ 북간도의 농촌풍경
결론
윤동주 시인의 문학은 정직성, 민족의식,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별을 노래한 시인이다. 이 별은 희망의 상징어다. 밤이라는 일제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국 광복의 별은 너무나 멀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그는 고독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기다렸다. 그가 일제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야 조국은 독립되었다.
맑고 순결한 그의 영혼의 시어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시를 읽으면서 하늘의 별을 본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가슴에 담는다.
시는 일상의 삶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어들은 우리 삶을 비추는 햇살 같은 존재이다. 북간도 기행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그의 시들을 다시 탐구해 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그의 삶과 문학을 인식하면, 감동의 흔들림으로 가슴이 두근 거릴 수도 있다.
가슴의 흔들림은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것을 나는 믿는다. 그의 삶과 문학을 가슴으로 느껴보기 위한 시 읽기와 기행이 의미있는 이유다.
<서시>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게 한다. 그의 짧았던 28년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화두다.
따듯한 가슴을 지니며 이웃과 민족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의 삶을 따라가 보자.
그의 짧은 시어들은 당신의 삶을 더욱 맑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을 읽은 독자들도 맑고 욕심 없는 삶에 행복을 느끼길 기원한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통하여 아름답고 소박한 삶을 얻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윤동주 시인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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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동주 시인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게 되어 답답함이 사라졌습니다. 윤동주의 영혼에 천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하시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경식님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