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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텃밭 말석에서 피어난
가지 꽃 송이들은
하나같이 땅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양지 좇아 윗자리 옆자리
눈치 재는 시절에도
고개 수그려 땅만 바라보는
이렇게 자성自省이 깊은 식물 앞에서
참 부끄럽습니다
별자리
새파란 싹 숨구멍 내주던 동구 밖 미나리꽝
철사줄 박아 만든 앉은뱅이 그 썰매
작은오빠 몰래 한 번만 타 본다는 게 그만
얼음구멍에 발목까지 빠졌으니
모닥불 피운 논둑에 모여 앉아
나이롱 양말 말리다보면
졸음에 겨워 스르르 눈 감겨도
신기하지 불똥 맞은 내 양말
구멍구멍으로 돋아나던 하얀 별
별은 하늘에만 뜨는 줄 알았지
가슴에서부터 뜬다는 것 그때는 몰랐다
빌딩숲에서 밤하늘 올려다보며 문득, 드는 생각
양말 벗어 말리던 또래들 두 볼도 별, 하나
나무라지 않고 집으로 데려 가던
커다란 오빠손도 별, 하나
갓 지은 저녁밥 아랫목에 묻어두고
나를 찾아 나온 엄마 목소리도 별, 하나
지금 내 가슴에 박혀있는 총총 그 별들은
세상으로 통과하는 숨구멍
아버지
-무화과나무
-얘야, 꽃은 보여주는 것만 아니란다
무화과 꽃, 저 혼자 꽃받침 속에서 필 때 쯤
독장골 나락 논에 엎드려 두벌, 세벌 김매다
휘어진 등짝으로 팔 남매 꽃피워낸 당신
-무화과는 속에서부터 익는 열매란다
당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
그 아이의 육 개월 된 딸 민채를 품에 안고
줄장미 담장 곁,
삼십 년 전 당신이 심어주신
무화과나무 곁에서
찰칵 찰칵 가족사진 찍습니다
호박
베란다에 방치된 채
겨우내 얼었다가 녹았다가
뼛속까지 허공이 된 몸
담장아래 내다 묻었을 뿐인데
미처 읽어내지 못한 세상사처럼
곁가지만 만들며가는 어리석은 내 방식까지 품어
다시 싹 내리고 꽃피워
칠팔월 땡볕에도 탯줄 맨 끝자리에
잔병치레 잦던 나를 앉혀 다스려 낸 당신
-호박은 늙으면 속이라도 달지만
다 늙은 어미 속은 소태맛이라, 아무쓸모 없구나.
당신의 애끓는 노동가 뒤에서 나는 날마다 푸르렀습니다
그랬습니다
마땅하듯 차지한 달디 단 이 꽃자리가
당신 애간장 다 녹여낸 깊은 속이란 것,
무서리 맞고 담장에 걸려있는
마른호박 줄기 걷어내면서
텅, 쓰디쓴 당신 속 그 소태맛의 배후에
단맛으로만 길들여진, 여태 생 속인 내가 있는 줄
아직 알지 못합니다
늪
자두밭 진입로에 느닷없이 빠져버린 자동차
모를 일이다
다시 먹구름 떼로 몰아오는 장대비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그 오기만큼 깊어지는 미궁 앞에서
이미 잘못 든 길이라는 것 알아차렸을 때
직진도 후진도 불가능한,
저 수렁 속 끝이 어딘지를
지금 나는 묻지 않기로한다
소용돌이 선명한 바퀴자국에도
다시 꽃 피우고 지워내는 법칙 있을 것이므로
레커차가 도착하고
늪의 깊이를,
상심한 나를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
얼룩
땡볕 그림자에 떠밀려 기우뚱거렸지만
우리 얼마나 밑바닥에 서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2년 시한부계약 시퍼런 서슬아래
코피 터지도록 바짝 엎드려
정규직으로 가는 길, 해피데이를 꿈꾸었지만
오늘도 지상의 정점에는
탈락된 목구멍들 아득히 정체 중
세 번을 갈아타야 지상에 오를 수 있는
지하철 수성구청역 에스컬레이트
다시, 고용승계 애원하듯
츠륵, 츠르륵
마지막계단 톱니 꽉 물고 설핏 비켜가는
정오의 심장에 쿡,
발자국 찍어보는 저 청년의 등짝
아직 때 아니라고 단풍도 낙엽도 되지못한
중국단풍 가지 사이로 얼룩얼룩 표류하는
섬 하나,
폭포
하늘과 물안개 하나 된 공산폭포
이쯤에서 한 번 뒤돌아 보거라
아래로만 흘러가는 물결에도
탐욕이 실리는지
절벽이다
온 몸 얼얼하도록 채찍질하는
맵고 뜨겁고 차디찬 낙차에
무섭게 붉어진 개옻단풍 가지 사이로
얘야, 여기 피해 갈 생이란 없단다
어머니 목소리에
살얼음 끼는 소리
밥 한 봉지
쉬이 뜸 들지 못한 또래들 표정에 섞여
뭉게뭉게 부푸는 목요일 정오
큰 솥의 멸치다시국물 우려질 동안 깨순이며 참비름
살짝 데쳐 무치고
봄배추 삶아 된장국거리 버무려 놓고 생고등어 한 상자
튀김옷 입히면
복지관 담장 따라 온 해묵은 이팝나무도
갓 지은 100인분의 막막한 기대 뜸 들이느라 분주하다
자원봉사자가 수저와 배식판 한 순배 돌리는 사이
귀먹은 끝순할매 오늘도 잽싸게 다음 한 끼니의 밥덩어리
또래들의 눈치까지 덤으로
검은 비닐봉지에 꼭 꼭 감추는 거 훔쳐보고 말았다
살아가는 힘,
저토록 처절하게 감추는 거구나
끝내는 죽음과도 묶여야 할 맹렬한 저 매듭 옆에서
자꾸만 얼룩얼룩 뜨거워지는 내 목구멍
첫 눈
나를 키우던 풀잎 위에 첫 눈 내립니다
북부 시외버스 정류장 내 오랜 발자국
그 발자국 다시 신고
눈 내리는 갑티재 지름길 넘으면
바람보다 먼저 그 겨울에 들 수 있을까요
이마에 숯검정 부적처럼 찍고 외갓집 가던 첫날밤
밤부엉이 울음 건너오던 낮은 처마 문틀에
가을내 말린 국화꽃잎 창호지에 덧바르던 외할매
엄마의 한 뼘 그 꽃밭에 박속을 풀 듯 쏟아지던 함박눈
그 날 절절 끓던 구둘목에서
외할매의 낡은 털스웨터는 어린 벙어리 장갑으로 부풀었습니다
군위군 금양리, 내 근원의 불씨
오늘 문득
그 겨울 편지 무등을 타고
펄 펄 첫눈으로 건너옵니다
그 의자
다시 앉아보고 싶다
삐걱삐걱 닳은 시간 깜부기처럼 피어나던
긴 나무의자
버드나무 그림자 찰랑거리는 봇도랑에 발 담그고
제 탯줄 씻어 내던 한 아이 있었다
검정고무신 벗어 피라미떼 좇던 날
손톱 끝 봉긋 피어나던 물봉숭아
꿈결인 듯 천천히 다가와서는
또다시 멀어져가던 기차소리
겹겹으로 물결칠 때, 나 온종일 종아리 아려도
측백나무 손 흔드는 다음 역까지
무작정 따라가 보고 싶던 유년을 지나
분홍 꽃모종 이맛전에 옮겨 심던 소녀도 지났다
살면서
살아가면서, 엉뚱한 길 만날 때마다
내 안의 계절을 수없이 바꾸어 주던 그 의자
뒤돌아보면 내 그림자도 까닭 없이 낯설어
사람, 그 이름을 부르듯
나는 봉림역*으로 간다
* 중앙선에 있는 경북 군위의 작은 역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시집 출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시집,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훈훈한, 알찬 행사이겠지요.
축하드립니다.
여러 선생님의 인사, 많이 고맙습니다^^ 즐거운 추석명절, 고향 잘 다녀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