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당집 제19권[1]
[향엄 화상] 香嚴
위산潙山의 법을 이었고, 등주登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지한智閑이며, 행장은 보지 못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청주靑州 사람이라고 전한다. 키가 7척이나 되고,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해서 학문에 있어서 그를 당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위산의 대중 속에 지내면서 현묘한 담론으로 토론하니, 사람들이 선장禪匠이라 칭송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위산에게 참문하여 묻고 대답하기를 마치 물 흐르듯 했다. 위산은 그의 학문이 부박하여 근원을 깊이 통달한 것이 아님을 알았으나, 그의 말재주를 쉽사리 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위산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지금껏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눈과 귀를 통해 타인의 견문과 경권經卷이나 책자에서 얻은 것일 뿐이다. 나는 그것은 묻지 않겠다. 그대는 처음 부모의 태에서 갓 나와 동ㆍ서를 아직 알아보지 못했을 때의 본분사本分事를 한마디 일러 보라. 내가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려 하노라.”
이에 선사가 대답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양구하다가 다시 이러쿵저러쿵 몇 마디 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위산에게 도를 일러 주실 것을 청하니,
위산이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대 스스로가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다.”
선사는 방으로 돌아가 모든 서적을 두루 뒤졌으나 한마디도 대답에 알맞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선사는 마침내 그 책들을 몽땅 불 질러 버렸다.
어떤 학인이 가까이 와서 한 권 달라고 하니,
선사가 대답했다.
“내가 평생 동안 이것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데, 그대는 이것을 달라 해서 또 무엇 하려는가?”
그리고는 하나도 주지 않고 몽땅 태워 버렸다.
선사가 말했다.
“금생에는 불법을 배우지 않겠다. 난 오늘까지 나를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겼는데, 오늘 위산에게 한 방망이 맞으니 그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제는 그저 죽이나 먹고 밥이나 먹는 중으로 여생을 지내리라.”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위산에게 하직을 고하고 향엄산香嚴山 충忠 국사의 유적에서 몸과 마음을 쉬었다.
그리고 초목(草木:잡념)을 없애면서 번민을 덜고 있다가 어느 날 기와 쪽을 던지던 끝에 껄껄 웃으면서 크게 깨닫고는 이어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한 번 던지매 알던 것 잊으니
다시 더 닦을 것 없구나.
이르는 곳마다 자취가 없으니
성색聲色 밖의 위의威儀로다.
시방의 도를 아는 이라면
모두가 나를 일러 상상기上上機라 부르겠지.
그리고는 당장에 공부를 중단하고 방으로 돌아가서 향을 피우고, 위의를 갖추고는 오체를 땅에 던져 멀리 위산을 향해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진실된 선지식께서 큰 자비로써 이 어리석은 중생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는 바로 위산으로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고하고 아울러 게송도 함께 화상에게 이야기하니, 화상이 바로 상당上堂하여 유나維那로 하여금 함께 대중에게 알리게 했다.
대중이 듣고 모두가 치하했는데, 앙산만이 밖에 나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앙산이 돌아오니, 위산이 앙산에게 앞의 인연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아울러 게송을 보여 주었다.
앙산이 한 번 훑어보고, 모든 것을 치하한 뒤에 화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게 발명發明했다고는 하나 화상께서 직접 시험해 보셨습니까?”
위산이 대답했다.
“시험해 보지는 않았다.”
앙산이 당장에 향엄에게 가서 모든 것을 치하한 뒤에 말했다.
“지난날에는 이미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의혹을 쉬게 하진 못했습니다. 어떤 의심인고 하니, 적聻! 바야흐로 만들려고 하였더니, 사형師兄이 이미 발명하셨구려. 다른 이치를 지어서 일러 보십시오.”
이에 선사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어서 대답하였다.
작년의 가난함은 가난함이 아니요
금년의 가난함이 참으로 가난함이라.
작년에는 송곳도 세울 자리가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도다.
앙산이 이 게송을 보고 말했다.
“사형께서는 여래선如來禪은 알고 계시지만, 조사선祖師禪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마치 사람이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발로는 가지를 밟았으나, 손으로는 가지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나무 아래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에게 대답을 해야 하지만 대답을 하면 떨어져 죽을 것이고,
대답하지 않으면 그의 물음을 외면하는 것이니,
이럴 때에는 어떻게 지시해야 생명을 잃지 않겠는가?”
호두虎頭의 초招 상좌가 도리어 물었다.
“나무에 오른 뒤는 묻지 않겠습니다. 나무에 오르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허허” 하고 웃었다.
“어떤 것이 현재의 배움에 의거하는 것입니까?”
선사가 부채를 돌리면서 말했다.
“보았는가, 보았는가?”
“어떤 것이 무표계無表戒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환속還俗하면 그때 말해 주리라.”
“어떤 것이 소리와 빛을 떠나 만나는 한 구절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내가 향엄에서 살기 전에 어디에 있었다 하겠는가?”
“그러할 때에도 감히 있었다고 이를 수 없겠습니다.”
“마치 환幻으로 된 사람이 마음으로 법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라.”
“어떤 것이 음성 이전의 한 구절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대덕이 묻지 않을 때에 대답해 주리라.”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지금은 묻고 있느니라.”
“단박에 근원根源을 끊었다고 부처님께서 인가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선사가 주장자를 던지고 손을 모으고 나가 버렸다.
또 선사는 옛사람의 행적을 가리키는 게송을 다음과 같이 송했다.
옛사람의 말은 말속에 뼈가 있어서
구름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
때때로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것처럼
구절 속에 숨지를 않네.
누군가 현현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가만히 헤아려 보아
오직 스스로 긍정하여야 뜻이 상하지 않으며
한 물건이라 하여도 관계없다네.
선사가 낙보樂普와 함께 동행同行을 했는데,
헤어지기 직전에 낙보가 물었다.
“동행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동경東京으로 가렵니다.”
“거기는 무엇 하러 가십니까?”
“네거리에다 암자를 지으려 하오.”
“암자는 지어서 무엇 하시렵니까?”
“사람들을 위하려 하오.”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시렵니까?”
선사가 불자를 들어 세우니, 낙보가 물었다.
“불자를 들어 세우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는 것입니까?”
선사가 불자를 던지니, 낙보가 말했다.
“황폐한 곳도 지나왔으면서 깨끗한 곳에서 어찌하여 사람을 미혹하려 하십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그를 수상히 여겨 무엇 하려는가?”
선사가 다음과 같이 여학음勵學吟을 읊었다.
입안 가득한 말, 말할 곳 없나니
분명히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하네.
서둘러 힘쓰고 이를 꽉 물라.
무상함이 닥쳐오면 구제할 길 없노라.
낮에 지껄인 이야기 밤이 되면 한탄하니
묵은 송곳 뾰족이 갈아서 깨끗이 털어 버려라.
이치가 다하여 깨달으면 스스로 잘 보임해야 하나니
이 생의 일은 내 말하지 않겠노라.
현현한 진리는 옛 노인의 어록에서 구해야 하고
선학禪學이란 모름지기 마음을 깨달아 그림자가 끊어지는 것이니라.
선사가 종교宗敎로 중생 제도하는 이를 경계하는 게송을 읊었다.
세 구절의 말씀으로 사람의 현현함을 궁구하니
날쌘 본래면목이 훤하게 보인다.
두 가닥 길을 틔워 기연機緣을 갖추니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여러 해를 말해야 한다.
동산同山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향엄에서 왔습니다.”
“어떠한 불법의 인연이 있던가?”
“불법의 인연은 많지만 오직 세 등급의 비춤을 즐겨 말씀하십니다.”
“이야기해 보라.”
학인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항조恒照ㆍ상조常照ㆍ본래조本來照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 가지 비춤을 묻던가?”
“예, 물었습니다.”
“어떻게 묻던가?”
“‘어떤 것이 항조입니까?’ 하기도 하고, 또 상조에 대해 묻기도 하였습니다.”
동산이 말했다.
“꼭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았구나.”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 질문거리를 하나 내려 주십시오.”
“물을 것은 있으나 드러낼 필요는 없느니라. 그대는 인연을 따라 천 마을, 만 리 밖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쉬거라.”
그 스님이 이렇게 묻는 법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니,
동산이 물었다.
“왜 우는가?”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 말씀드립니다. 말세의 후생이 화상의 방편에 힘입어 이러한 도를 얻었으니,
첫째는 기쁨을 이길 수 없음이요,
둘째는 화상의 법석法席을 연모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눈물이 흐릅니다.”
동산이 말했다.
“당唐의 삼장三藏께서는 어찌하여 당나라에서 서천西天의 10만 8천 리 길을 가셨던가?
오직 불법의 인연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토록 많은 험난을 무릅쓰셨느니라.
그러기에 말씀하시기를,
‘5천축天竺에 이르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다 말랐구나’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향엄까지 비록 만 리의 먼 길이라 해도 불법의 인연을 위한 것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 말에 그 스님이 다시 향엄으로 돌아와서 편안히 이틀을 묵었다. 하루는 선사가 모자를 쓰고 상당하자,
그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항조ㆍ상조ㆍ본래조 세 등급의 비춤이 있다’ 하셨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비추지 않을 때는 무엇이라 부릅니까?”
선사가 얼른 모자를 벗어서 대중 앞에다 던지니, 그 스님이 다시 동산으로 돌아와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동산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실이 그러한가?”
“사실이 그러합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머리를 쪼개도 잘못이 없겠구나.”
그 스님이 다시 향엄으로 와서 선사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니, 선사가 선상에서 내려와 동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풍新豊 화상은 참으로 작가作家로구나.”
선사가 최후송最後頌을 읊으니, 다음과 같다.
한마디의 말씀이 완전한 규칙이니
생각도 멈추고 스스로 인정함도 그만두어라.
길에서 같은 도인 만나면
눈썹만 까딱하여도 통하니
의심과 생각을 밟지 않기 때문이다.
사량 분별은 오히려 길동무를 데리고 가는 것이니
일생동안의 참선 공부가 이뤄지지 않으매
정성껏 전단나무만을 껴안아 본다.
선사가 상재송常在頌을 읊으니, 다음과 같다.
간수하기를 정성껏 하여 온갖 치우침을 고요히 잠재우니
평상시의 보고 들음이 가시밭에 들지 않는다.
네 가지 위의 안에서 모든 것이 깨끗해지니
기機와 감感이 서로 어울림을 일시에 던져 버리리라.
말 없는 곳에서 인연을 대하고 음성 이전에 자취를 드러내니
도가 같은 이는 서로가 알아서 힘을 빼는 수고로움이 없다.
선사가 다음과 같이 수행송修行頌을 읊었다.
날씨가 추우면 햇볕을 쪼이고
밤에 돌아와서는 한술 밥을 먹는다.
태어나기 이전의 일을 생각하고
의연히 그 청정에 맡기어라.
이렇게 찾을 때에
밝은 거울이 밝은 거울이 아니니
홀로 앉아 시원함을 느끼고
다닐 때에도 그저 그렇게 평안하다.
정鄭 낭중郞中이 다음의 게송으로 물었다.
풀어 주는 사람도 없고
결박하는 사람도 없다.
이 갈림길에서 벗어나면
다시 어느 성곽城廓으로 들어가랴.
선사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말[語] 속에 자취를 묻고
소리 이전에 용모를 드러낸다.
즉석에서 묘하게 알면
옛사람의 도와 같다.
근기에 응하면
너와 나의 종宗이 없으리라.
꾸짖으면 힘껏 내달리면서
포효하니 순식간에 용이 된다.
정 낭중이 또 게송으로 물어 왔다.
오는 데 다른 자취가 없고
가는 데 또한 내 길이 아니니
원숭이들 모두 쫓아 버린 뒤에는
산천의 경계는 있는가, 없는가?
선사가 발기송發機頌으로 대답했다.
말[語] 속에 뼈와 힘줄을 묻고
음성을 도의 위용으로 물들인다.
즉석에서 묘하게 알기만 하면
손뼉을 치면서 괴룡乖龍을 뒤쫓으리.
선사가 청사송淸思頌을 읊었다.
종일토록 빈집에 앉아서
조용히 생각하며 공부를 멈췄다.
다시는 뒤돌아볼 뜻이 없나니
어찌 평상平常이란 것 긍정하리.
선사가 담현송談玄頌을 읊었다.
분명해서 곁가지를 달지 않고
홀로 움직이니 무엇에 기대리.
길에서 도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말이나 침묵으로 대하지 말라.
현기玄機 학인에게 주는 게송이다.
묘한 진리는 빨라서 말로써 따지면 늦나니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신령한 기연에 미혹된다.
눈썹 치켜들고 문답을 하니,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네.
이 무슨 경계인가? 도가 같은 이라야 비로소 안다.
혼륜어송渾淪語頌을 읊으니, 다음과 같다.
한 묶음의 띠를 여섯 몫으로 나누어서
암자를 지으니 사립문은 없다.
머리를 싸맨 사람이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고개를 돌리며 혼륜의 말을 지껄이는구나.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이 세계는 날과 달이 짧으니, 모름지기 서둘러서 할 일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많은 여의치 못한 일을 평정해 다스리고는 다시 땅덩이와 같이 태연히 요동하지 않아야 한다.
온갖 수승한 경계라도 따라 움직이지 말고, 그저 이렇게 평상시처럼 하되 조작을 하지 말라.
현실을 홀로 벗어나서 반려(반연)를 거느리지 않으면 밝은 가을달이 하늘에 빛나듯 안팎이 환해지리라.
잠깐의 시간이라도 정신 차려 아끼어 금생에 끝내도록 힘써라. 금생에 끝내지 못하면 누가 그대를 대신하겠는가?
대덕들이여, 머리가 희어지고 이가 누레지고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멍하기를 기다리지 말라.
무상無常이 닥쳐오면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대덕들이여, 몸에는 옷, 승당 안의 기름ㆍ숯ㆍ평상ㆍ자리ㆍ침구 등 이 모두가 시방의 시주들이 공양하는 것인데, 어떤 도업道業으로 그 빚을 갚으려는가? 한 생각의 자취가 끊이지 않으면 그 모두가 빚이 되느니라.
헌칠한 장부여, 기개는 견고하고 마음은 오랏줄을 끊듯 하여 삼계三界의 인과를 멈추게 하라.
현재의 부귀ㆍ빈궁ㆍ고락의 일을 끊지 않으면 미래의 세상이 다하도록 애욕을 탐착하여 유루有漏의 업만을 쌓아 올리니, 오늘에 이르러 응당 만족함을 알아야 하리라.
과거의 부처님들도 모두가 범부로부터 수행한 것이지 천생天生으로 성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다.
대덕들이여, 처음 고향을 떠나 부모를 하직하고 출가한 뜻은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그럭저럭하거나 머뭇거리면서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삼가 참선 공부하는 이에게 고하나니,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 하셨고,
백장百丈은 말하기를,
‘한평생 노력해서 끝내 알아 버리면 그 누가 여러 겁의 재앙을 받겠는가?’ 하였느니라.”
선사가 명고송明古頌을 읊으니, 다음과 같다.
옛사람의 뼈는 영이靈異함이 많아서
현명한 자손들이 비밀히 간직했다.
한 가문에서 효도의 뜻 이루었으니
사람들 몰랐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라.
의지를 굳게 하여 헛된 의심 버리면
안정安靜을 얻어 위태롭지 않으리.
향할수록 등지고 구할수록 여의며
취할수록 잃고 급할수록 더디다.
계교計校도 없고, 지각知覺도 없는 것
흙탕물 같은 의식은 고금에 거짓이라
한 찰나刹那에 변화를 일으키면
드높은 돌산[石山]에 번갯불이 인다.
땅 속에서 일어나서 봉우리까지 태우고
막는 난간 없어서 바다 밑까지 태운다.
법의 그물 성글고, 신령한 불꽃 섬세하여
6월에 누우면 옷도 이불도 필요 없다.
가릴 것 없고 거짓도 없나니
도를 깨달은 이는 조사의 뜻을 노래한다.
우리 종파에서는 예부터 그 짓을 꺼리나니
이 사람만이 잘 보존한다.
법재法財를 보태고 부끄러움을 갖추어
헛되이 베풀지 않고 쓰는 곳을 분명히 안다.
누군가가 물으면 꾸짖는 일 없나니
다시 질문하면 쌀값이 비싸다고 말한다.
최창현崔暢玄 대부에게 주는 게송이다.
통달한 사람 자주 사라졌다 나타나
모양과 위의 드러냄 일정하지 않고
말끝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비밀스레 몰래 호지한다.
움직여서 옛길을 드러내어
밝고 묘함을 비로소 알았거든
사물에 맞추어 시설하기만 하되
부사의라 이르지는 말라.
선사가 보명송寶明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생각이 맑은 사람은 걱정이 적으니
풍채와 규범이 자연히 넉넉하다.
그림자는 음성과 얼굴에 속하지만
외로운 달은 손으로 잡을 길 없다.
선사의 출가송出家頌은 다음과 같다.
전부터 출가를 원했지만
출가의 참뜻은 모른다.
앉고 일어남이 종전과 같아서
조금도 수승함이 없구나.
선사가 다음과 같이 기법당송寄法堂頌을 읊었다.
동쪽 칸에서는 선정에 들고
서쪽 칸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가운데 칸에서는 잠을 자고
모든 건물 안에서는 도를 닦는다.
앞에서는 기교를 점검하고
뒤에서는 은신술을 하니라.
보는 사람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무슨 혼신[精靈]이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청정한 경지에서 화를 내고
기쁨 가운데서 성을 내며
평탄한 곳을 고수하지 않고
위험한 곳에서는 몸을 숨긴다
소경을 만나면 눈을 뜨고
승요僧瑤가 붓을 들면 정신을 집중시킨다.
선사가 다음과 같이 현지송玄旨頌을 읊었다.
갈수록 표적이 없고
올수록 그렇게 올 뿐이다.
누군가가 그 뜻을 묻는다면
그저 해해咳咳하고 웃으리.
도반 귀적歸寂에게 주는 게송이다.
같이 사는 70여 명의 도인들
함께 고향을 떠나서 산중 생활 즐기시네.
몸은 고목 같고 마음은 말랐으며
중국의 말도 이야기하지 않고 범서도 읽지 않는다네.
마음속의 희망이 다한 곳에 죽어도 좋다고 여기니
여래 제자, 사문들의 바른 자세이다.
깊은 믿음 함께 모아 탑 이루어
드높게 청산 속에 쌓아 두자.
도를 참구하는 일 헛짓이 아니고
몸뚱이를 벗어나는 일, 최상의 경지로세.
한 번도 오늘 아침 일을 이야기한 적 없으니
어둠 속에 머리를 묻고 현현한 진리를 감춰둔다.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인간들과 다른지라
깊고 묘한 신광神光으로 지혜를 더해간다.
선사가 다음의 권학송權學頌을 읊었다.
출가해서 도 닦는 이여, 평안함을 구하지 말라.
생각 잃고 평안하려 하면 도를 배우기 어렵다.
얻지 못했거든 어서 바삐 큰 도를 구하여라.
깨달은 뒤에는 편안함도 불안함도 모두 없으리.
선사가 지수득파송志守得破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여러분, 15일 이전에는 여기를 떠나지 말라.
15일 이후에는 여기에 머물지 말라.
떠나면 그대의 머리를 때려 부술 것이요
머물러도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떠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는 그 뜻은 무엇인가?
옳기는 옳으나 망설이면 어긋나느니라.
사견문송辭見聞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갈림길 나뉘는 곳에 잘 머물라.
그윽한 종취는 사람의 자취 드물다.
처음부터 오르는 길 없으니
쯧, 의혹을 버릴 길 없구나.
분명송分明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목숨을 몽땅 버릴 적에
위덕威德이 저절로 구족하다.
한 물건도 비슷한 것 없으니
규범이 분명히 드러난다.
준고로송遵古路頌을 다음과 같이 읊어서 낭중郞中에게 주었다.
빈 마음으로 경계를 초월하여 생각을 맑게 하니
구절 속은 자취 없고 소리 밖은 분명하다.
문자의 그림자에 놀라서 깨달으니
얼굴 움직이고 손가락 튀기매 향기에 배부르다.
동병마사蕫兵馬使에게 준 게송이다.
숙세宿世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산중山中에 이르러
반 게송을 얻기 위해 신기한 자취에 계합했네.
그대에게 이르나니,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곳을 생각하라.
뒤적이는 생각 일으키면 막혀서 통하지 못하리.
전지송專志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뒤적이고 뒤적이면서
의심을 남김없이 궁구하여
이렇게 분명히 본다 해도
무생無生의 도리를 연모하는 짓이다.
안팎을 생각하지 않고
눈썹도 얼굴도 드러내지 않으면
꿈에 뱀을 밟고
놀란 사람같이 갑자기 변하리.
종교宗敎와 종여宗如 두 학인에게 주는 게송이다.
절 안에 가득한 석가의 자손들
석가의 경전을 알지 못하네.
불러다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입에서는 잡된 소리만 난다.
삼구후의송三句後意頌을 읊으니, 다음과 같다.
글이 쓰이면 그 말에 허망함이 많으니
허망한 가운데 유무有無를 띄었도다.
글 이전에 알아야 하니
뜻 속의 구슬을 놓아 버려라.
이 밖의 교화하신 처음과 마지막의 연대들은 모두가 그의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칙명으로 시호를 용등龍燈 대사라 하였고,탑호는 연복延福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