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록 번역 내력
고전번역서 DB
원서명 海上錄 역자 김달진, 이상형 간행처 한국고전번역원. 정희득, 1977, 외교. 금계일기 · http://db.itkc.or.kr/inLink?dataId=ITKC_BT_1401A. 원서명 錦溪日記
해행총재(海行摠載) 본문 海上錄(해상록) 정희득(鄭希得) 月峯海上錄卷之二 詩○ ... (2016년 6차 개정증보판) 연행록총간(燕行錄叢刊) 作者別(Author) 著者人名 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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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DB
원서명 海上錄 역자 김달진, 이상형 간행처 한국고전번역원. 정희득, 1977, 외교. 동 사상일록 · http://db.itkc.or.kr/inLink?dataId=ITKC_BT_1382A. 원서명 東槎上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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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행총재(海行摠載) 본문 海上錄(해상록) 정희득(鄭希得) 月峯海上錄卷之二 詩○七 ... (2016년 6차 개정증보판) 연행록총간(燕行錄叢刊) 作者別(Author) 著者人名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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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해상록 - 나무위키
2018년 6월 4일 ... 月峯海上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던 정희득(鄭希 得)이 지은 일기. 2.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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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序跋)/ 서(序) [윤봉조(尹鳳朝)]
나라에서는 왜놈과 더불어 선왕(先王) 때부터 백세(百世)의 수원(讎怨)이 있는데다가, 10년 동안 병란을 일으키매 팔도 백성이 어육(魚肉)처럼 살상을 당하여, 상한 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포로 된 자는 돌아오지 못하니, 사대부의 여론[聲氣]이 원통하고 분하게 여긴 지 이미 오래다.
나는 일찍이 수은(睡隱) 강공 항(姜公沆 공(公)은 존칭)이 왜놈에게 포로 되었을 때 지은 《간양록(看羊錄)》을 보고서, 그 사실의 험난함과 그 심정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생환을 기행(奇幸)으로 여기고 그 절의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당시에도 없던 일일뿐만 아니라 천백 년 동안에 한번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나는 경술년(1730, 영조 6)에 무령(武靈)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무령은 본디 강공의 고향이라, 매양 가까이 사는 부로(父老)들과 공의 고사(古事)를 즐겨 이야기하였다. 함평(咸平) 사는 정군 덕휴(鄭君德休)는 나와 동방 진사(同榜進士)인데 걱정스레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 우리 선조 상사공(上舍公 본서의 저자인 정희득을 말함)의 사적은 듣지 못하였던가? 우리 선조 또한 강공과 같은 때에 포로가 되었다가, 마침내 성효로써 왜놈을 감동시켜 강공보다 먼저 일본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그 사실을 손수 엮은 것이다.”
하고는 이내 해상록(海上錄 바다에서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 권을 내보였다.
그 생사 간에 헤매면서 호혈(虎穴)에 몸을 맡겼던 모습이 역력히 눈에 보이는 듯하며, 효자로서 충신으로서 애통하고 감분하던 마음씨가 문자 간에 발현되어, 읽을수록 슬프고 통절함이 마치 궂은 비 싸늘한 바람에 짝 잃은 한 많은 새들이 모여서 울부짖는 것과 같았다. 강공의 사실과 비겨볼 때 정상은 더욱 기구하고 심사는 더욱 애절하나, 생환의 기행함과 절의의 고상함은 또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누가 알았으랴, 천백 년에 한번 보기 드문 일이 시대를 같이하고 고향을 이웃하여 생겨남이 이토록 기이할 줄이야. 다만 아깝게도 상사공(上舍公)은 이미 그 이름이 전하지 못하고, 그 기록이 또한 《간양록(看羊錄)》과 함께 간행되지 못하였구나!
대체로 강공은 일찍부터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이미 석주공(石洲公 선조 때의 시인 권필(權鞸)의 호)의 시(詩) 한 수로 더욱 중명(重名)을 얻었으며, 또 능히 그 기록을 오래 전하게 된 것은 마치 양웅(揚雄)의 문하(門下)에 후파(侯芭)가 있었던 것과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공에게만은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어찌 그 사람이 드날리지 않았다 해서 그 사실마저 왈가왈부할 것인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史馬遷))이 백이(伯夷)의 전기를 엮으면서, 유광(由光)의 사적이 사책(史策)에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재삼 탄식하여 간절히 그 의사를 표시하였으니, 내 이 일에 있어서도 적이 슬퍼하는 바이다.
공은 기구하고 막다른 액운에서 스스로 그 의리를 다했을 뿐 당초부터 세상에 알려짐을 바라지 않았지만, 백 년 동안이나 침체하여 알리지 못한 것은 다만 후인의 한이 될 뿐이다.
이제 정군이 여러 자손과 함께 이 기록을 인쇄에 붙여 간행하려 하니, 사적의 드러나고 안 드러남은 실로 그 시기가 있는 것이며, 두 분과 두 기록이 장차 함께 함평(咸平)과 영광(靈光)에 전파될 것이다. 노자(老子)와 한비(韓非)가 전기(傳記)를 함께 한다해서 또 누가 잘못이라 할 것인가.
공의 이름은 희득(希得)이니, 강개하여 지절이 있었다. 환국한 뒤에 진사과에 올랐지만 벼슬하지 않았고, 만년에는 또 흉당(凶黨)들의 폐비 모의(廢妃謀議)를 힘을 다해 꺾어서 대의를 붙들어 세웠으니, 여기서 그 시종 일관한 행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숭정후임자(崇禎後壬子 1732, 영조 8) 10월 일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 윤봉조(尹鳳朝) 서
[주-D001] 서(序) : 서(序)에서 저자의 6대손 정간(鄭澗)의 발문(跋文)까지 원문(原文) 편차는 착간(錯簡)되었기 때문에 번역문에서는 재편집하였다. 원문 참고자의 주의를 요함.[주-D002] 후파(候芭) : 전한(前漢) 양웅(揚雄)의 제자로서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전수(傳受)하고 웅(雄)이 죽은 뒤에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前漢書 87》[주-D003] 유광(由光) : 허유(許由)와 무광(務光). 허유는 요(堯)가, 무광은 탕(湯)이 천하를 넘겨주려 해도 받지 않았다 함. 《史記 伯夷傳》[주-D004] 노자(老子)와 한비(韓非)가 전기(傳記)를 함께 한다 : 노자(老子)와 한비자(韓非子)가 《사기(史記)》 노장신한전(老莊申韓傳)에 함께 수록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주-D005] 폐비 모의(廢妃謀議) : 광해군(光海君) 때 이해(李垓) 등이 영광(靈光)에서 대비(大妃) 폐출에 관한 모의를 하는 것을 정희득(鄭希得)이 현령(縣令) 박정원(朴鼎元)과 함께 극력 배척한 일을 말함. 《本海上錄所收 墓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