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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동맹한 왕을 거절한 민족의 수난 (youtube.com)
단 11:22 “넘치는 물 같은 군대가 그에게 넘침으로 말미암아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며”
우리는 지난번에 동맹한 왕은 예수그리스도이심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절망 중에 있는 지구성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그분을 누가 거절했다고 합니까?
이방인의 통치자로 부름을 받은 빌라도가 거절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 27: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무슨 말씀같습니까?
빌라도가 그래도 선한 양심이 있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서 그 아내를 통해 유태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시대의 소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 738 “빌라도는 예수님을 구원하고자 열망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자기의 세속적 권리를 잃어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무죄한 생명을 희생 시키는 편을 택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칙을 희생하면서 손실과 어려움을 피하고 있는가!”
빌라도의 선택 창조주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일을 선택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다고 합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서, 세속적인 권리를 잃어버리기 보다는 무엇을 희생 시키는 편을 택하였다고 합니까? 세속적 권리를 택하였다.
우리도 이런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날마다 하죠? 그리고 순간마다 합니다.
제가 언제 이런 예기 한번 드렸죠?
제가 알고 있는 장로님이 계십니다.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하여서 지금은 살아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20대 후반에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를 만났는데 그분이 저의 손을 붙잡고 우시는 것입니다.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딸을 죽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가 고삼 수능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딸이 아빠에게 이런 예기를 합니다. 아빠 나 수능 시험 끝날 때까지만 안식일에 학교가면 안돼 라고요. 처음엔 안된다고 했는데 날마다 그런 부탁을 하니 수능 끝날 때 까지만이라고 다짐을 받고 허락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안식일 학교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자기가 딸을 영원한 멸망으로 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불뱀이 왜 나타났는지 우리 성도님들 아시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까지 가는 그 사막길은 독사가 원래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그 독사의 독이 얼마나 맹렬한지 그래서 불뱀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그런데 불 뱀에게 물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누가 지켜 주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민수기 21장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누가 불뱀을 보내사 물게 하셨다고요?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습니까? 그럼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전에는 하나님께서 불뱀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자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거두신 것입니다.
왜요? 왜 거두셨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니 그래 너희들 힘으로 살아 보아라 라는 듯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럴 때 사탄이 이런 기회에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하고 불뱀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가운데 살아갑니까?
선왕 84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져 있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안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하여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한 순간도 안전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귀하신 성도님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싼 바 되신 귀하신 분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손을 이탈하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빌라도도 사랑하시어서 그러한 죄에 빠지지 말도록 그 아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터어키의 성소피아 사원에 50권으로 되어 있는 로마 궁중의 서기관의 손에 의해 쓰여진 문서가 있습니다.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카이사르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글을 집필한 사람은 로마 역사가 “빌레루스 파테르쿠러스” 라고 합니다.
그는 가이사와 친한 벗이었고 16년동안 로마군대를 지휘하였고 은퇴후에는 로마사를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문서에서 예수와 관련된 글이 있는데 그가 만난 인물중 가장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자신의 전 군대보다 예수를 더 두려워 하였다는 문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병자를 치료하시는 예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이야기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던 이야기 그것을 거절했을 때 유태인들이 예수를 증오하였던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를 제가 교회 카톡방에 올려놓았는데 한번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보고서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얼마나 마음에 많은 번민을 하였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빌라도는 분명 깨닫았습니다.
그의 부인에 의하여서 그의 재판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빌라도를 구원하기 위하여 마지막 기회를 그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명예와 자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자리 때문에 돈 몇푼 때문에 장래 걱정 때문에 그런 것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순간이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없길 소망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창조주를 빌라도가 거절했고요 그리고 유태인들이 창조주를 거절했습니다.
유태인들은 누굽니까?
아담으로부터는 4000년 아브라함으로 부터는 약 2000년을 메시야의 소망을 가지고 기다린 백성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정작 기다렸던 메시야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했다고요? 거절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그들의 생각하고 오신 메시야의 모습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생각을 많이 하여야 하지만 그 생각을 말씀에 굴복시키지 않는 생각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 성도님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생각에 대한 말씀 중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어떻게 생각했다 합니까?
그가 마땅히 벌 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요.
얼마나 모순된 생각입니까? 우리 성도님들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마시고요 내 생각으로만 살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여서 우리의 생각을 이끄시어 그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재판정에서 유태인들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성경 보겠습니다.
요 19: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라고 요청하니 빌라도가 무슨 말을 합니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하죠 그러니 백성을 대표하는 대 제사장들이 무슨 말을 합니까?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왕은 누굽니까?
매일 매순간 살아가면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말로만 아닙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만 그렇게 하였다 하드라도 괜찮습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삼고 절대 복종하면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예수살렘 성을 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을 보시며 어떻게 하셨다고요? 우셨다.
왜 우셨습니까?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보니까 그들의 쟁래가 눈에 보이시니 우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날이 이르게 될 것을 보셨습니까?
메시야를 거절한 백성들의 멸망을 보신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우리도 거절하면 똑 같은 결과를 보게 될까요?
그러나 그런 날이 이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발견됩니다.
마 24:15-19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던 어떻게 하라고요? 도망하라.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누가는 해석하여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눅 21: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멸망의 가증한 것을 무엇으로 해석했습니까?
군대가 와서 포위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누가는 가르쳐 줍니다.
군대가 포위 당하는 것을 보거던 어떻게 하라고요? 도망하라
예수님 당시 유태나라는 로마나라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도 로마에 맡기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유태인들은 로마에 항거하여서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과 로마사이의 제 1차 전쟁이 일어납니다.
역사에는 유대 독립전쟁이라고도 하고요 유대 반란이라고도 합니다.
이 전쟁은 서기 66년에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군대 36.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에워쌉니다.
그렇게 에워 싸고 금방 공격을 할듯한 로마 군대가 갑자기 포위망을 풀고 철군하였습니다.
그때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을 보거든 도망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군인들이 철군하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도망하라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믿고 다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타이터스에 의하여 재차 침입하였을 때 그들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서기 70년에 타이터스에 의하여 다시 공격을 받았을 때 성안에는 절기로 인하여 모여든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하여 어림 잡아 270만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은 성안으로 돌입한 로마군에 의하여 불타버렸고요.
9월 8일에는 대부분의 저항이 수그려 들었고요. 20일 모든 전쟁은 종료되었습니다.
그 전쟁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은 11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만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고요.
그리고 그런 중에서도 항복을 하지 못하겠다는 960명의 열심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해 서쪽 해안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마사다로 들어갔습니다.
지형적으로 너무 험난하였기 때문에 막강한 로마 군대라 할지라도 쉽게 정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군대는 3년이나 에워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대는 마사다 요새 앞에 마사다 높이 만한 토담을 쌓고 공격을 해 오자 마사다가 함락될 것이라는 것을 느낀 마사다의 지도자 엘리아젤 벤 야이르와 마사다의 유태인들은 포로가 되어서 수모를 겪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유인으로 영광스런 죽음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가장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을 비롯한 자녀들 모든 가족들을 칼로 죽인 다음 모든 남자들이 열명을 제비뽑아서 그 사람들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고 다시 한명을 뽑아 아홉을 죽이고 마지막 한 사람은 자결함으로 모든 사건이 종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들이 3년에 걸친 포와 공격으로 영광의 댓가를 바라고 마사다에 진입을 하였을 때는 960구의 시체앞에 망연 자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사다 요새를 살피는 중 깊은 곳에 숨어 있었던 할머니 1명과 어린이 5명 그리고 그곳의 지도자 엘리아젤 벤 야이르의 친척 노인 이렇게 할머니 두명과 아이들 5명 이렇게 7명이 생존하여서 마사다의 이야기가 전해 졌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마사다는 수천명이 수년간 먹을 수 있는 식략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마사다는 1842년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그 존재가 알려졌고요.
지금은 마사다 꼭대기 까지 케블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쉽게 올라 관광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유다와 로마의 전쟁으로 인하여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 졌습니다.
하나는 통곡의 벽이고요. 다른 하나는 로마에 있는 타이터스의 개선문입니다.
통곡의 벽은 유태인들에게 지난일을 살피라는 상징이 되었고요.
개선문은 로마의 위세가 어떠하였음을 세상에 알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았다는 것을 유태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아직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초림하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 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무엇을 하고 있으라고요? 준비하고 있으라.
그 이유가 무엇이라 합니까? 생각지 않은 때에 누가 오신다고요? 인자가 오신다.
우리 성도님들 그날을 위해 진짜 준비하고 계신가요?
적당하게 준비하면서 살아갑니까?
이거 버리려니 먹고 살아야 하고요.
저거 버리자니 영원한 세상이 진짜 있으면 지금까지 믿은 것이 억울하고요.
그런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 십자가로 나가시던 날 밤 베드로가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같은 말씀이 마가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베드로에게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람의 생각으로 기록했다면 자기들의 스승격인 베드로에 대하여 좋은 기록을 하기를 원하겠죠?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를 통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기록하면서 그 일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제자들이 모드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까?
멀찍이 왜 멀찍이 따랐을까요?
바짝 따르려니 유태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무섭고요.
더 멀리서 따르려니 예수님이 궁금하고요.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얼른 예수님곁에 설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버리지 않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하고 비슷합니까?
그러다가 베드로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집니다.
우리도 멀찍이 따르면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자기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동자와 마주쳤기에 베드로는 회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순간이 올지라도 우리를 향하시는 주님을 바라본다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순간이 오도록 방치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런 순간이 오지 않도록 살아야 할까요?
우리 성도님들 우리 함께 예수님께 더 가까이 붙어서 따라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멀찍이가 아니라 주님 더 가까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다가 우리 주님 예루살렘 문을 여실 깨 그 옆에서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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