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물고문 이상호입니다.
얼마전 대마도를 여행하였던 친구들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이것을 보지 않으면 죽지도 말라는 비경 “하이롱베이”를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베트남은 어떤 나라일까요.
한 두번 가보고 그나라를 다 알 수 는 없지만,
나름 베트남에서 느낀 이야기로 풀어가보자 합니다.
자!
그럼 그냥 생각 없이 가 보기로 한다.
베트남은 오랜 기간을 침략자들에 의해 전쟁에 휩싸였던 나라이다.
다른 나라들이 베트남을 침공하였기에 그 당사자이던 베트남 민중들이 침략에 맞서 항거했던 슬픈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트남을 비롯한 캄보디아,라오스 즉 인도차이나 반도는 1885년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국제정세에 따라 1, 2차 양차세계대전을 격으면서 일본, 영국, 중국 등의 침략이 계속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던 베트남 청년 호치민에 의해 베트남은 독립되고, 결국 미국의 군대가 패배한 최초의 전쟁을 수행 했던 나라로 기억된다.
베트남하면 미국의 헐리우드영화를 통해서 흔히 보았던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곳,
이런 영화에서는 결국 미군을 해방자나 정의의 군대로,
또는 미군 병사들을 인간미와 동료애 가득한 형제처럼 묘사했던 것이 전부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플래툰>이란 영화에서 보면 미군들은 양민을 학살하고 어린애를 겁탈하거나 인질로 삼으며 동료끼리 반목하며 광기에 사로잡힌 채 서로에게 총뿌리를 겨누기도 한다.
이제는 거의 아물아물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에서 선을 상징하는 윌렘 대포(엘리어스 역)와 악역의 톰 베린저(반즈상사 역)밖에 기억에 없다.
또한 1987년에 제작된 영화중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걸죽한 목소리와 감미로운 음악이 압권(What a Wonderful World)이었던 영화 굿모닝 베트남(Good Morning, Vietnam)이 있는데,
1965년 베트남 전쟁 당시 사이공(현재는 호찌민시)에 있는 미군 라디오 방송국의 DJ로 한 사나이(얼마전 고인이 된 로빈 월리암스)가 부임해서 격는 이야기가 줄거리인데, 특히 장부의 최고 고위 관료를 여과 없이 해학과 풍자로 신랄하게 비꼬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그가 부임 전에는 허접한 멘트를 내뱉는 DJ에 의해 사전에 검열된 뉴스와 날씨정보, 흘러간 옛 노래들로 메워졌었다,
이런 미군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전쟁과 폭염에 지친 병사들에게 외면당하고, 그런 상황에 로빈-월리암스가 부임하게 된다.
그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군 당국이 요구한 모든 지시사항을 모조리 무시하고,
절규하듯 외치는 '굿! 모닝 베트남~~~'이라는 경쾌한 오프닝 멘트를 시작으로 유머러스한 멘트와 금지된 히피곡은 물론 정부의 최고위층을 빗댄 해학을 석어가며 방송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의 방송은 모든 군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최고의 청취율을 기록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방송과 돌출행동은 군상부층의 반발을 사게 되고 그로인해 강제 귀국당하는 스토리이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정부의 요청으로 1966년에 한국군이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논란은 접어두고 생각해 볼때
이것은 우리군의 현대화는 물론 6.25동란으로 피페해진 경제를 일으키는데 큰 디딤돌이 된다.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보게,되고, 이는 한국경제가 도약하는 데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는 데에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부정할 수 없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약 10억달러 내외의 수입이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벌어들인 달러가 한국경제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은 베트남 참전에 따른 수익과 더불어 그 이전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님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하이롱베이 크르즈선- 레스토랑에서 음악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선상유람을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이번으로 두 번째 오는데,
그 두 번다 하노이와 하이롱베이 이다.
이곳 하이롱베이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70Km 떨어진 곳으로 차량으로 약 2~3시간 떨어진 곳이다.
이곳의 절경은 두 번 보아도 싫지가 않기 때문에 또 오게 되었다.
2008년에는 갓바섬의 리조트에 머물면서 올 때 갈 때 “하이롱베이”를 들렀는데 이번에는 그 코스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스쳐지나는 풍광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날씨 또한 푸른 하늘이 눈 시리게 쾌청하고 현기증에 어지러울 정도로 무덥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 많았던 목조로 된 유람선과 수상마을의 초라한 배에서 물속으로 자맥질하며 1달러를 외치던 어린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다들 어디로 간 걸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예전 방문때에는 승선인원이 약40명여 되는 열악한 목선으로 달랑 8명이 승선하여 수상마을에 도착해서 거기서 또다시 조그만 보트로 유람을 하였었다.
당연 에어컨시설도 없었고 선상에서 다금바리 회를 떠주는데 그 위생상태가 의심되어 거의 먹지를 못하고 섭씨4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가져간 소주를 빈속에 털어 넣고 더워서 털털거리며 간신히 돌아가가는 선풍기에 머리를 디밀며 후회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이롱베이 선상유람을 할 수 있는 크루즈가 운행되고 있는데,
더위에 지쳐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던 예전의 그 하이롱베이 유람선이 아니라 에어컨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이제는 배에서 내릴 필요도 없고, 크루즈선에서 제공되는 공연을 보면서 선상 뷔페를 이용하게 되어 있어 그 편리함에 쾌적함을 더하여 갑자기 격세지감을 느낀다.
승선한 사람들 거의가 한국인이고 준비된 음식들도 깔끔하고 한국인들의 입맛에 잘 맞춰진 것 같았다.
거기에는 다금바리라 불리우던 생선이 상 두군데 쟁반 수북이 초고추장과 함께 탐스럽게 담겨있다.
선상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와 약간의 약주가 한순배 돌고,
크루즈선의 3인조 밴드에서 아름다운 풍광에 어우러지는 잔잔한 세미-클라식 음율이 흘러 나온다.
거의 한 시간에 걸친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앞쪽의 무대와 우리와 떨어져 있었던 다른 일행들
그러니까 같이 패키지여행을 온 일행인데,
경남 진주에서 7명 초등생을 자녀로둔 7명의 자모회원들로 30세 중반의 여성들이다. 초등생 말고도 미취학한 어린아이들도 같이 엄마를 따라 동행하여 그 식구가 20여명이 넘는다.
이 칠명의 엄마들은 이번 여행내내 우리와 같이 일정을 소화하면서 우리를 잘 따라주었고, 나와 친구들 남자 칠명 또한 다는 아니지만 손자, 손녀를 두거나 앞으로 얼마지나지 않아 할아범들이 될 사람들이라 투어를 나가거나 들어올 때 누구랄 것도 없지만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꼭 챙기는 버릇이 생겨 그들과 더욱 친숙해지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일면초식도 없었지만 낯설은 외국을 여행할라치면 그들과 친숙하게 된다. 아마도 말도 그렇고 생김새도 낯설고 모든것이 틀린 속에서 같은 나라 같은 사람이라서 그런가보다.
꿈의 절경 하이롱 만을 다돌아 이제다시 떠나왔던 곳으로 크루즈선은 회항을 한다.
감미롭던 음악이 어느새 홍대클럽 댄스곡으로 바뀐다.
쾌활한 그 칠명의 엄마들이 흥겨움을 참지 못한다.
어찌나 쾌활한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말로만 듣던 홍대 클럽을 옮겨놓은 것 같다. 요즘 TV를 채우는 걸그릅 빰을 친다.
크루즈숭객 전체가 흥에 겨워 그들의 몸짓에 열광하며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누구랄 것도 없는 남녀노소가 광란했던 그 댄스파티는 도착을 알리는 맨트가 나오자 아쉽게 멈추어지고 언제 그랬냐하며 우리일행들과 함께 어린아이들을 챙겨 배에서 빠져나왔다.
오후의 일정은 나와 친구들은 발마사지, 아이들과 학부모는 수상극관람 이란다. 아마도 베트남은 물론 동남아여행을 다녀온 분이라면 다 아시다시피 일정이 다 그렇고 그렇다.
그런데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폴, 중국, 일본 어딜가나 발마사지가 있는데, 베트남 발마사지는 좀 특이한 것 같았다.
나의 주관적 느낌이지만 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은 마사지가 좀 고통스럽다.
이에 비해 베트남 발마사지는 세기의 강도는 비슷한데 고통은 적은 것 같았다.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발마사지의 최초시작은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4~5천년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집트의 제6왕조 때 앙크마호르(Ankhmahor)의 무덤 속에 있는 벽화 속에 발마사지 해주는 그림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고대역사학자가 아니어서 자세한 것은 잘은 모르겠다.
우리 일행들이 들어온 발 마사지 샵은 2008년에 왔던 그 동네에 그 집인 것 같았는데, 다른 곳은 변해도 이곳은 변하지 않아 내심 놀랐다.
그 당시에 묵었던 호텔과 약주한잔 기울이던 술집들이 그대로 있어 그 기억이 생생하다.
이곳 베트남은 질곡(桎梏)의 역사 끝에 독립한 자존심이 센 국가이기도 하다.
전쟁을 오래 치르다보니 사회기반 시설들이 거의 파괴되고 그나마 있는 것은 낡고 패허나 다름 없지만,
근자에들어 중국의 발전상을 모델로 한 도이모이(도이=변경,모이=시작, 쇄신)정책으로 개방되어 앞으로 상당히 발전이 있으리라 기대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발마사지로 피곤함을 풀고 일찍 숙소로 돌아와 호텔에 있는 야외 수영장 Bar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원한 맥주잔을 기울인다.
늦게 서쪽 해안으로 넘어가는 태양볕은 사그라지지 않는 뜨거움으로 사람들을 결국 물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야외 수영장끝에서 하이롱만으로 지는 석양을 보게 되면 1992년에 우리에게 소개 되었던 프랑스영화 인도차이나(Indochine)영화의 엔딩장면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의 대표여배우 “까드린느 드느브”와 베트남계 프랑스여배우 “린당팜”이 주연했던 영화인데,
19세기 말 시작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가 한창이던 1930년,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된 시점부터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북베트남에 공산주의 정부 수립이될 때까지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굴곡진 역사 속에 휩쓸린 사람들의 운명이 전개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프랑스의 시각에서 본 인도차이나 식민시대의 이야기이라서 역사와는 좀 괴리감이 있는 영화이지만 촬영지의 풍경이 아름답게 소개되어 세상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열대의 밤은 사람들을 의지와 상관없이 자유분방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하이롱베이의 밤은 깊어간다.
[하이롱베이 의 목조 관광용 선박-현재에도 관광용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이롱베이 크루즈 레스토랑의 가수]
[황야의 7인]
[하이롱베이 크루즈선 옥상에서 진주 학부형들]
[진주에서 관광온 학생들-손주처럼 귀엽다.]
[5달러에 두개를 판매하는 야자나무열매수액- 잔돈이 없어 몇개를 못구입했는데 그냥 서너개를 짤라 구었다.아주머니가 인심이 좋다.]
[진주에서온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우리와 다른배에 승선했는데, 다시 만나서 엄청 반갑다고 환호성을 지른다.]
[하이롱베이를 전망할수있는 전망대가 있는 팁톰섬-우리는 안간다 전망대~ 더워서]
[하노이 국립역사박물관]
하노이는 여전히 사람들, 오토바이, 각종차량들로 뒤범벅이되어 복잡한 것을 뛰어 넘어 아수라장의 난장판이다.
그런 와중에도 그 속에 나름 질서가 있어 흐름이 있다.
참 묘하다.
예전 북베트남의 수도이며 현재 통일된 베트남의 수도이자 영웅적 민족주의자 호치민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노이 구도심은 역사가 꾀나 깊다.
옛날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것을 합친다면 1,000년이 넘는 고도(古都)이다.
이곳에는 36통이라는 각기 서로 다른 상점들의 거리가 있다.
이것은 11세기경 리(李)왕조에서 왕궁에 사용할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전국의 각 상단에게 알리게 되고 그 상단들이 모이게 되어 지금의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니 복잡함은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곳을 권하지 않는다.
일행의 손주같은 초등생 녀석을 잠시 이지만 그 복잡한 통에 잊어버려 그 엄마와 우리 친구녀석들이 그 복잡한곳을 뚫고 지나서 사람들의 부대낌으로 지칠 쯤 발견하여 우리의 혼을 빼어 놓았던 곳이라 그런가보다.
36통이 아니라 북새통인 것 같다.
우리가 이 북새통을 들어서기 전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생맥주집에 다 모였다. 고생한 일행들과 다 같이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달래는 기분만은 상큼하다.
[위 힌건물 모퉁이에 위치한 레스토랑- 36통 을 빠져나와 모이기로한 약속장소이다. 생맥주와 아이스크림, 생과일쥬스등이 있다.
한녀석을 눈에서 잠시 떼었더니 없어져 우리들이 맨붕된 곳]
구도심의 하노이에서 느끼는 정취는 단순히 덥고 복잡한 기억이지만,
이곳의 구도심을 벗어나게 되면 계획적인 블록의 신도시를 만나게 된다.
숙소인 메리어트호텔에서 일어나 시원한 새벽바람 맞으며 한 시간여를 잘 꾸며진 근처 동네 산책을 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7년 전에 왔던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은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별로 통제를 받는 그런 곳이 아니라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영위하며 우리와 별 다르지 않다. 아침에 출근하고 휴일을 즐기며 열심히 살아간다.
이제 이들도 곳 우리의 경쟁상대가 될 날이 머지안음을 느낀다.
간밤에 숙소에서 열린 소주파티에서 친구들과 오간 정담은 머리는 무겁지만 우정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친구들의 지식에 힘입어 내 지성도 많이 살이 찌워졌으리라 믿는다.
관중과 포숙아의 관포지교(管鮑之交)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20세 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서로 싸우며 화해를 반복하여 쌓아온 친구들이기에 그 정의 깊이가 꽤 깊다고 생각한다.
하노이시 외곽을 끼고 흐르는 홍강(弘江) 푸른 맹그로브 숲을 지난다.
푸른 맹그로브잎이 쌀국수위에 고명으로 얹는 고수풀을 연상하게 한다.
베트남하면 쌀국수가 제일먼저 떠올라서 그런가보다.
우리나라에서 베트남 포아저씨 쌀국수집은 내가 사는 동네에도 있고 시내에 나가면 흔히 볼 수가 있는데,
여기 베트남에는 그런 쌀국수 간판 붙은 곳이 없어 의아하다.
“Hanoi Beef Soup”으로 잘 알려진 이 베트남 쌀국수(PHO)는 베트남에서는 아침 주식으로 알려져 있다는데 도무지 쌀국수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일지는 모르겠으나 약주가 과한 다음날 숙취 해소용으로 쌀국수의 따수운 국물이 참 좋다.
이 국물은 소나 닭의 뼈와 고기로 만든다고 한다.
이 뜨거운 국물에 얇게 썬 안심고기, 우리는 고수라고 부르는 향차이와 숙주나물, 칠리고추, 라임 등을 적당히 섞어서 식탁에 오르는데,
나는 향차이와 숙주나물을 더 추가하여 넣어 국물 맛이 더 시원하고 개운하여 속풀이로는 제격이다.
물론 같이 동행하는 사람들중에는 냄새 고약한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내가 듬뿍 넣어 먹는 것을 보고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보기도 한다.
이제 내 고향으로 귀국이다.
복잡한 하노이공항이 다가온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관광하러올 계획이다.
물론 이곳 중부의 다낭과 후이에, 그리고 지금은 호치민으로 바뀐 사이공 또한 관광차 올 계획이니 몇 번은 더 들락거릴 것 같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 기쁜일이고 가슴 벅찬 행복이다.
여행은 준비하면서 먼저 기쁘다.
오갈때의 번잡함이나 고단함은 그자체가 행복으로 승화되어 재미있게 느껴지니 이 또한 오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