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22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
성경본문 : 예레미야애가 2: 1-22
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
4. 원수 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6. 성막을 동산의 초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8.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10. 처녀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12.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13.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
15.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 너의 모든 원수는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18.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찌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찌어다
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찌어다 하였도다
20.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
21. 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
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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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관지 목사
1.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애 2: 1∼6)
우리는 평소에 온순하던 분이 화가 나면 더 무서운 것을 경험하거나 보는 수가 있습니다. 학생 시절에 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선생님이 무섭게 화를 내시던 일이나 군대 시절에 아주 온유하던 상관으로부터 어느 날 무서운 기합을 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선 "아니, 이 선생님이 내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섭섭함, 나가서는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너무 야속해서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잘못했습니다. 야단을 맞아도 변명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그렇게 화를 낸 것이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그 선생님을 그렇게 노하시게 한 일이 송구스러워집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은 늘 평가를 받으며 삽니다. 요즘은 보수도 직급에 따라 받는 것이 아니라 능력 평가에 따라 받는 연봉제가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평소에 나에게 잘 해주던 상관이 평가를 할 때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견딜 수 없이 서운하지요. 그러나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당한 평가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나만 내세우거나, 자기가 평가하는 나와 남이 평가하는 나 사이의 간격이 클수록 사회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주님은 목자였습니다. 목자 가운데서도 선한 목자였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의 말씀 그대로 주께서 원수같이 되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분이 되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 나를 보호해 주시던 분이 이제는 원수가 되어 나를 향해 활을 당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이 반대가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름은 참 좋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엘리야 때 가뭄이 들었을 때 손바닥만한 구름이 나타나더니 이어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구름이 진노의 표현이 됩니다. 1절 앞부분,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성경에는 발판(「개역성경」에는 '발등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이라는 말이 좋은 뜻으로 여러 군데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1절 뒷부분, 하나님께서 발판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때때로 구원의 뿔로 묘사됩니다. 성경에서 뿔은 힘과 권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능의 손이지요.
시편 118편 15절과 16절을 보면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가운데 3절 중간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들입니다. 원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닥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이 원수같이 되었을 때의 일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주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이 하는 일은 공정하다. 너희들은 이와 같이 야단 맞을 일을 했다, 그러므로 불평할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생생한 묘사를 모두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평소에 온유하던 선생님이 심하게 야단칠 때 우선 야속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야단맞을 짓을 했고 그 선생님이 그렇게 노여워하는 것은 정당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날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날입니까? 진노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입니다.
성경 여러 군데 "진노의 잔"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이 진노의 잔이 차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이 진노의 잔이 차는 날 가장 온유하시고 가장 자비로우시던 주님은 가장 무서운 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무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진노의 날이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진노의 날은 계속해서 채워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지혜로운 왕 하나는 자기가 왕으로서의 영화에 너무 취할까봐 두려워 특별 비서를 하나 고용했다고 합니다. 이 비서가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아침에 한 번 "왕이여, 왕께서는 언제인가 죽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저녁에 한 번 "왕이여, 왕께서는 언제인가 죽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외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왕은 그런 방법으로도 죽음의 날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고 성실하게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심판의 날, 진노의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날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날에도 구름은 여전히 나를 안내해주고 내가 바라는 비가 온다는 것을 알려 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그 날에도 나는 여전히 주님의 발판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 날에도 주님의 오른손은 여전히 권능의 손으로서 나를 보호하고 있어야합니다.
그 날에도 주님은 원수가 아니라 목자로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고마운 분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경건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주님의 자녀로서 할 바를 다 해야합니다.
주께서 원수같이 되지 않고 변함없는 목자가 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제단을 버리시고 성소를 미워하시다(애 2: 7∼10)
지금 읽은 말씀에는 무너지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성소, 궁전의 성벽, 8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벽, 성벽과 성곽(성벽은 내벽을 말하고 성곽은 외벽을 말합니다,) 9절에서는 성문, 빗장이 부서지고 파괴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비극은 제단과 성소가 파괴된 것입니다.
궁전이 무너지고 성벽이 무너진 것도 큰 일이고 충격적인 일이지만 성전이 파괴된 것은 그 가운데서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에는 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슬퍼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에는 왕과 지도자들, 그리고 선지자들, 10절에서는 장로들과 예루살렘 처녀들이 제 할 일을 하지 하고 슬퍼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에 나오는 "딸 시온의 장로들"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뜻보다 일반적인 지도자들, 원로 계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선지자들이 묵시를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궐과 성벽을 원수의 손에 넘겨 파괴하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단과 성소까지 헐고 선지자들이 묵시를 받지 못하게 하기로 결심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극한점(極限點)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잔이 차기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진노의 잔에 진노가 가득 차서 철철 넘쳐흐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결심하셨습니다. 고뇌 어린 결심이었을 것입니다. 여러 번 망설이다가 이런 결심을 하셨을 것입니다.
또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라고 했습니다. 줄을 띠었습니다. 측량을 해 가면서 치밀하게 파괴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감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여러 가지를 거둬 가시는 일이 있습니다. 건강을 거둬 가시는 일이 있습니다. 재물을 거둬 가는 일이 있습니다. 살던 집을 거둬 가시는 일이 있습니다. 자녀를 거둬 가시는 일이 있습니다.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종자돈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업을 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본을 말합니다. "종자돈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종자돈까지 까먹었다면 그 사업은 끝장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 삶 전체의 종자돈입니다. 믿음을 까먹어서는 안 됩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볍씨는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곧 모를 내기 시작하겠는데 모를 내어야 할 볍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가 제 할 일을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인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경제인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 하나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큰 사회문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드라마 「왕건」에서 오래 전에 궁예가 평민의 복장을 하고 여기 저기 순시하는데 군인들의 훈련장(순군부)에 가보니까 훈련받는 군인들이 하나도 없는 장면이 방영된 일이 있었습니다. 폭정이 계속되어 군대가 가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제일 큰 문제는 교회가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등대에 기름이 떨어져 빛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910년에 우리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습니다. 여기 기록된 것과 같은 파괴는 없었지만 나라의 기능이 모두 정지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 때 더 왕성하고 성도들의 믿음은 더 뜨거워졌습니다. 그 믿음에서 나오는 힘을 가지고 삼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믿음이 힘을 잃었을 때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서 거두어 가신 것이 있습니까?
건강을 잠시 거두어 가셨습니까? 재물을 잠시 거두어 가셨습니까?
믿음을 거둬가지 않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건강도 돌려주시고 재물도 돌려주십니다. 돌려주시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교회를 거둬가지 않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다른 것들의 기능도 살아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는데 여기 나열된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성전이 파괴되고 선지자들이 영적인 힘을 상실한 것입니다. 애가는 슬픈 노래 가운데 슬픈 노래인데 그래서 1장도 "슬프다(애카하!)"라는 말로 시작되고 2장
도 "슬프다(애카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과연 슬퍼할만 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할 일을 더욱 힘차게 해야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영감을 받지 못하는도다"라고 탄식했는데 이 땅의 성직자들이 영감을 풍성하게 받아야 합니다.
지금이 우리의 믿음이 더 해지는 때가 되어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무엇을 거둬가시는 일이 있지만 믿음을 거둬가지 않으시는 것을 감사 드립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전보다 더 크게 회복되는 때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거짓 선지자들이 한 일(애 2: 11∼16)
11절은 아주 큰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이 눈물에 상하고, 창자가 끊어지며 간이 땅에 쏟아진다, 이것을 한 마디로 단장(斷腸)의 슬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사에, 사냥꾼이 원숭이 새끼들을 잡았는데 이것을 본 어미 원숭이가 울부짖으며 이리 저리 뒹굴다가 죽었답니다. 사람들이 그 배를 갈라보니 지나친 슬픔 때문에 창자가 토막토막 다 끊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단장의 슬픔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예레미야가 지금 그와 같은 슬픔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슬픔을 성경 몇 군데서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이 눈물에 상했다고 했는데, 다윗은 원수들에게 둘려 싸였을 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라고 시편 6편에서 슬퍼했습니다.
디윗은 또 밧세바와 간음한 뒤에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시편 51편에서 "나는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슬퍼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이 성이 장차 멸망할 것을 생각하면서 우셨습니다(눅19: 41).
우리는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이웃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슬퍼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이와 같이 비참하게 되고 원수들의 조롱을 받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표준 새번역성경」으로 읽어 드립니다.
“예언자들은 네게 보여 준다고 하면서 거짓되고 헛된 환상을 보고 네 죄를 분명히 밝혀 주지 않아서 너를 사로잡혀 가게 하였으며 거짓되고 허황된 예언만을 네게 하였다”
예레미야 당시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하나냐입니다.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를 목에 메고 "이렇게 바벨론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예언할 때 하나냐는 그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립니다.
예언자는 아니지만 같은 종교 지도자인 바스홀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나무 고랑으로 묶어 성전 문 위층에 두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을 더 좋아합니다. 왜? 참된 예언자들은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는데 대해 거짓 예언자들은 항상 평화를 외치고 잘 될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에 대해서 8장 11절에서 "그들이 내 딸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8장 9절에서는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면 패망합니다. 잘못된 말씀을 듣고 따르면 원수들의 조롱을 받게 됩니다.
15절 이하를 보세요.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보고 얼마나 심하게 조롱합니까?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고 잘못된 말씀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들이 전하는 것, 물론 잘못된 말씀입니다.
1950년대 통일교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따라 갔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까지 통일교를 추종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역시 1950년대 박태선(朴泰善) 장로가 집회를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모릅니다. 그 때는 집회를 할 때 한강 백사장과 남산에서 많이 했습니다.
박태선이 남산에서 집회할 때 헌금 시간에 사람들이 빼 바친 금반지가 두 가마니였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몇 해 전에 시한부 종말론이 퍼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까? 그들의 주장을 담은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책은(다미 선교회는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라"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인쇄소 몇 군데를 동원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팔렸습니다.
퍼시 콜레라는 엉터리가 쓴「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한국판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람이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할 때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렸습니다.
교회 안에도 잘못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에 달콤하기만 한 말씀,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꾸짖지 않는 말씀,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14절,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라는 말씀은 죄악을 드러내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은 결과 사로잡혀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나라의 예수를 잘 믿는 수상이 주일마다 교회에 가는데 때때로 변두리의 교회를 찾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곤 했습니다. 각료 하나가 그 이유를 묻자 "수상이 와 있다는 것을 알면 아무래도 목사님들이 신경을 씁니다. 나에게 듣기 좋은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내가 수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설교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설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수상은 바른 말씀을 사모하는,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설교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때때로 "나에게 얼마나 듣기 좋은가?"하는 것을 기준으로 말씀을 평가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강조되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말씀을 평가해야 합니다.
"나는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죄악을 드러내는 말씀을 싫어하지는 않는가?" "미혹에 빠지고 있지는 않는가?" 살피기를 바랍니다.
3. 자녀들을 위해 손을 들지어다(애 2: 17∼19)
17절의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에서 이미 정하신 일은 무엇이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나를 잘 믿고 섬기면 내가 너희를 축복할 것이고 나를 멀리하면 너희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따르는 백성은 축복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반하는 백성은 저주하기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계명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 십계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는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 하셨지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은 신명기에 와서 더 자세해지고 분명해집니다.
여러분 신명기 4장 25절에서 31절까지를 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27절의 말씀,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이 말씀이 이제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말씀하실 때 저주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축복을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고 내 말씀을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미 옛적에 하신 말씀 가운데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에서 저주받을 짓을 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일, 옛적에 하신 말씀 가운데 축복 받을 일,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의 말씀대로 행해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 중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강 옆에서 모이는 목사님들의 기도 모임이 있는데 그 이름이 통곡의 강 기도모임입니다. 한강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이 이 일을 주관하고 있는데 아마도 여기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지 「공동번역」성경의 번역으로 읽어보면 실감이 납니다.
“야훼께서 벼르시던 일을 기어이 하셨다. 일러 주셨던 일을 끝내 하시고 말았다.일찍이 선언하신 대로 사정없이 너를 부수시었다.원수들의 뿔을 들어 올려 우쭐거리게 하셨다
짓밟힌 일없던 수도 시온아,참마음으로 주께 울부짖어라.밤낮으로 눈물을 강같이 흘려라 조금도 마음을 놓지 말아라 눈 붙일 생각도 하지 말아라
야경 도는 초저녁부터 일어나 울부짖어라.네 마음을 주 앞에 물 붓듯이 쏟아라
길목에서 굶주려 숨져 가는 자식들을 살려 달라고 손을 들어 빌어라.“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19절 후반절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내일 살펴보겠습니다만 먹을 것이 너무 없으니까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먹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이와 같은 굶주림은 없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어린이들은 매우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굶주림을 위해 손을 들고 기도해야합니다. 자녀들이 영적인 만족이 없으니까 길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청소년들이 영적으로 더 심하게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북한 어린이들의 육신적인 굶주림과 남한 청소년들의 영적인 굶주림, 어느 것이 더 심각하다고 보십니까?
남한 문제도 적지 않게 심각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청소년들의 영적인 굶주림이 심한 것은 홍수 가운데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해야합니다.
창세기 21장, 아브라함의 여종인 하갈이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나서 헤맬 때 물이 떨어졌습니다. 하갈이 아이를 위해서 우니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의 눈을 밝게 하셔서 샘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기갈을 위해 울 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영을 맑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축복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중에 있으면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자녀들을 위해 자녀들의 영적인 굶주림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4. 피하거나 남을 자가 없나이다(애 2: 20∼22)
요즘 구제역(口蹄疫)이 세계의 많은 지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의 톱 뉴스를 거의 매일 구제역 확산에 대한 보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유난히 자주 일어나는 지진, 구제역,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잦은 폭설과 폭우…, 성경의 마지막날에 대한 예언들과는 관계가 없을까,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도살한 가축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끔찍한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도축한 가축들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륙(屠戮) 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길에 널려 있습니다. 21절,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려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이것을 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을 것입니까?
무서운 굶주림 때문에 20절을 보면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잡아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몇 해 전까지 북한에서 이와 비슷한 소문이 많이 흘러 나왔습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선지자 엘리사 시절,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적군이 한 길로 오다가 일곱 길로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괴롭히는 세력이 무섭게 몰려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가 되면 사람들이 사방에서 성전을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 때 성전에 갔던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서도 예수님이 없어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두려운 일들이 그와 같이 몰려듭니다. 22절 "주께서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심판의 두려움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20장 뒷부분을 보면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성전도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은 22절 중간의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심판은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의 인사고과, 어떤 일이 있은 다음에 논공행상, 재판의 판결,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선거는 표로 심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심판이냐, 수능고사가 과연 수험생들의 실력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냐, 이런 것들도 끊임없이 문제가 되지요.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합니다.
세상의 심판은 정밀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상 주어야 할 사람 빠뜨리고, 벌주어야 할 사람 빠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밀합니다.
설교에서 종종 인용되는 예화인데 로빈손이라는 역사가는 평생 역사를 연구하고서 "하나님이 돌리는 심판의 맷돌은 대단히 천천히 돌아가지만 그것은 대단히 정밀해서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갈려고 하는 것을 완전하게 갈아준다"
세상의 심판은 피할 수도 있습니다. 사정을 한다, 단속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이 때만 피하면 된다", 또 어느 재벌그룹 총수처럼 법의 손이 닿지 않는 외국으로 나가면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땅 끝에 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께 이런 간청을 하지요.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은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전하게 해 주옵소서", 부자는 형제들에게 심판이 있고 음부가 있으니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잘 믿고 선행에 힘써서 음부에 오지 말라고, 나처럼 고생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전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예언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고 진정으로 참회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20절 앞부분,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고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사람에게 이같이 행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순절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삼가며, 경건에 힘쓰며 보내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