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새해 아침
성경본문 에스라 7:9-10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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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해 첫날 아침입니다. 아주 신선하고, 새롭고, 뜻이 있는 그런 희망찬 첫 출발의 시간에 우리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시간입니까?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짐도 새롭게 하고, 각오도 새롭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의지도 새롭게 다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금년 한 해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신앙적인 교훈을 본문을 통해서 받아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일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뜻을 지닌 날이고 해서 무슨 말씀을 드릴까 생각을 하다가 에스라 7장에 있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하다가 구 정권이 무너지고 새 지도자가 탄생되면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는 세 가지의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교훈이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내내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바벨론을 떠나라하는 교훈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스7: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벨론의 아닥사스다왕 집권 제 7년째 되는 해인 B.C458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날입니다. 이 날 에스라는 히브리인 90,000명을 이끌고 70년간의 그 지긋지긋한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해방되어 자유의 나라, 그리던 고국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 히브리인들이 비로소 바벨론을 떠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은 불신 세상을 대표하는 나라입니다. 우상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멸망받을 세상 나라의 상징입니다. 이 같은 바벨론을 떠났다는 말은 세속에서 떠났다는 말이고, 불신 생활을 청산했다는 말이고, 그동안 익숙해졌던 좋지 못한 습관으로부터 손을 뗐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바벨론에 그대로 앉아 있어서는 행복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그 곳으로부터 과감하게 떠나야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그 정월 초하루입니다.
정월 초하루는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새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우유부단하게 신앙 생활하던 분이 계시면 결단을 내려서 바벨론에서 과감히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는 결단력이라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끊어버리는 용단과 구태 의연한 자리에서 일어서는 용기와 돌아서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니까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납니다. 그가 고향을 떠나려고 했을 때 왜 그를 불잡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모든 것을 탁탁 끊어 버리고 용기 있게 떠납니다.
또 에스더를 보십시오.
불가불 자신이 일어서야 했을 때 그는 여자의 몸으로 주저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일어나게 될 때 자신만 살아난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앞 날이 훤하게 뚫렸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지를 못하고 머뭇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이고 있으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롯의 처가 그런 경우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뛰어가라는 주의를 단단히 받았음에도 머뭇머뭇하고 과감히 돌아서지 못한 결과 두고두고 우유부단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정월 초하루 아침입니다.
새 날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출발해야 좋습니다. 오늘 바벨론을 과감히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 날을 힘 있게 맞이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으며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선한 도움을 받으라는 교훈입니다.
본문 "(스7:9)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나서 5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다고 하니까 만 4개월 동안 걸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직선 거리로 850㎞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지형상의 여러 조건으로 볼 때 그 길이가 1,440㎞나 되는 거리입니다. 에스라는 그 길을 4개월 동안 걸어오는 동안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고백은 아주 기가 막힌 고백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을 업고, 짐을 지고, 이고 들고, 사막 지대의 그 폭염 속에서 만 4개월 동안을 걸어왔다는 말입니다. 그 거리는 서울과 부산을 네 번이나 왕복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 길을 걸어오는 동안 무슨 일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을 4개월 동안 걸어서 약 90,000명이나 되는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여기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 여정에서는 이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사람은 고민이 없고, 고뇌가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나는 남이 잠을 잘 때 잠자지 아니하고, 남들이 먹을 때 나는 먹지 아니하고, 남들이 낭비할 때 나는 절약을 했고, 남들이 쉴 때 나는 부지런히 일을 했는데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탄식을 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된다면이야 인간에게 무슨 고민이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모를 때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큰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을 찾아 보겠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마침내는 우상을 섬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온 대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밖에서 줄을 던져 주어야 살아나올 수 있습니다. 물 속에서 살아 보겠다고 혼자서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공을 해보겠다고 꾀를 써 보기도 하고, 재주와 인간적인 수단을 써 보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자기 꾀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용단을 내려서 바벨론에서 떠나기만 하면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어려움들은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선하게 도우셔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십니다. 에스라는 본문에서 그런 교훈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모두 부드러워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기다리고, 그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순종자의 자세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드러운 사람으로 서 있어야 은혜를 힘입습니다.
보십시오. 그릇을 만드는 홅은 부드러워야 합니다.
거기에 모래나 돌이 섞이고 흙이 들어가 뻣뻣해지면 그릇이 볼품 있게 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흙에다 소의 억센 뼈를 깨어 부수고 갈아서 만든 미세한 가루를 넣고 이를 다시 반죽을 해서 만든 그릇을 최고로 쳐줍니다.이런 그릇을 이름하여 "본 차이나"라고 합니다. 본(Bone)이라는 말은 뼈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그릇 만드는 토기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주 부드러운 흙으로 당신 마음대로 빚어서 큰 그릇, 작은 그릇, 넓은 그릇, 좁은 그릇을 만들어 놓고 당신 마음대로 쓰시고, 사용하시고, 활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진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용하시고, 활용하십니다. 만일 부드럽지 않고 뻣뻣하고, 고집이 세서 내 마음대로 살아 보십시오. 결국에는 깨지고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엊그제 부목사를 면한 분이 있습니다.
나이 50이 되는데 부목사 신세를 못 면한다고 매일같이 안달입니다. 그리고 어디 목회자가 빈 교회가 있으면 그 곳에 골똘해서 기웃거려 봅니다. 그런다고 그게 잘 됩니까? 그런데 한 달 전에 지방의 어느 큰 교회에서 갑자기 만장일치로 모시기로 했으니 오십시오 하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지금까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청빙을 받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괜히 엉뚱한 곳에 마음을 뺏기고 안달을 했는데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이미 자리를 예비해 놓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앞 길을 알 것이며 누가 우리의 날 수를 짐작이나 할 것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부드러운 진흙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 좋으신 뜻대로 우리를 만드시고, 쓰시고, 사용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한해 동안 이 같은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3. 분명한 목표입니다.
본문 "(스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벨론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니 "내가 이렇게 하리라"하는 각오와 목표를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에스라는 분명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어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이고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 뛰고, 땀 흘리고, 수고하곤 합니다. 목적은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부단히 힘쓰고, 심고, 가꾸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그래서 목표가 없고, 목적이 분명치 못한 사람은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오늘 심는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진리와 의의 말씀을 받아서 열심히 심는 사람은 내일 싹이 날까, 노래 싹이 날 것인가를 기다리고 언젠가 맺혀질 그 아름다운 화평과 의의 열매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축복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거두리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그 시간이 되면 열심히 심는 자에게는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거두는 기쁨 때문에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힘이 있습니다.
이태백이 늙어서 의기 소침해 가지고 흥을 잃고 살다가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어떤 노인이 큰 쇠절구를 숫돌에 갈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쇠절구를 그렇게 갈고 있는가 하고 물으니까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바늘을 만들려고 갈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 말에 이태백이 충격을 받고 돌아와서 다시 붓을 잡아 오늘의 이태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사람에게는 이 같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런 힘과 잠재력과 놀라운 가능성을 부여해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신 힘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고, 발견해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영어의 Education이라는 말은 "교육"이라는 뜻인데 라틴어의 Educo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Educo라는 말은 "끄집어 낸다"는 말입니다. 교육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끄집어내 주는 수단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뭡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잠재되어 있는 힘과 지혜와 능력을 성령의 도움으로 끄집어내어 세상을 효과적으로 힘있게 살게 하는 힘이 신앙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이 같은 용기와 결단력과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제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그 첫째 날 아침입니다. 금년 한 해를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해 동안 기쁨으로 승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