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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
김려 ∣ 파란시선 0058 ∣ B6(128×208) ∣ 114쪽 ∣ 2020년 6월 2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축축한 저녁이 벚꽃을 잠깐 다녀갔다
‘숲’은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에 자주 등장한다. 김려 시인의 시심이 거주하는 장소를 상징하는 것이 숲이겠는데, 그 숲에는 죽음의 핏빛 이미지들을 품은 ‘새’와 ‘뱀’, ‘참나무’, ‘상제나비’ 등이 널려 있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숲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보통 숲은 자연 만물이 거주하는 대지의 품으로 상징된다. 숲은 시의 신이 거주하고 있는 신전이라고도 달리 말할 수 있다. 숲은 신성이 느껴지는 미지의 장소이며, 그래서 두려움을 주지만 한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김려 시인이 숲에서 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다. 그도 숲의 어떤 매력, 숲이 뿜어내는 어떤 관능성에 매혹되어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느닷없이」에서 시인이 “흔들리는 식물의 성기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말이다. 숲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들은 시인에게 어떤 신비롭고 매혹적인 관능을 표현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시인이 들어간 ‘언덕’의 숲은 “어디에도 머물 수 없고/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곳, 그래서 멈출 수 없이 달려야만 하는 곳이었고 “문틈에 낀 울음”이 들리는 곳이었다. 시인을 이끌었던 “바람을/돌에 매달아 바다에 던졌”던 것은 숲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겠다. 생명력을 느끼기 위해 시의 신전으로 들어왔으나, 시인이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죽은 새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만나게 되는 숲은 김려 시인에게도 여전히 시의 신전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숲이 ‘밀교’의 신전, 비밀스럽게 신적인 것이 전달되는 곳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신전에서 신적인 것은 생명의 파괴를 통해 역설적으로 현현한다.(이상 이성혁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김려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2016년 <사이펀>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는 김려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여기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않는 자세로 자신을 지키려는 아픔이 있다. 잘못 찾아온,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블랑쇼의 우정으로 자신 안에 있는 이 약한 짐승에게 손을 내미는 시편들. 언어로 옮길 수 없는 불가능한 작업에 뛰어든 시인의 자승자박은 “구름도 그냥 스스로 모습을 바꾸고 싶었”듯이(「소극장 팬터마임」) “대나무밭에서 자라 대나무인 줄 알고 있는 동백나무”의 밑이 ‘어떤 것은 희고 어떤 것은 붉었다’라고 실토한다(「옥곡 IC」). 지는 게 인생이란 걸 알아 버린 싸움꾼의 상대는 언제나 자신이다. ‘당신의 팔처럼 감기는 올무가 반짝이는’ 목걸이(「모란 전골」)인 줄 알았던 우리는 그녀의 시편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흩어지는 존재가 된다. 생은 덫에 걸린 짐승의 목에서 반짝이는 올무가 아니던가. ‘풀을 베다가 반 토막만 남은 맹꽁이의 살점을 찾아 무릎을 꿇고 수풀을 뒤지는’(「숲은 왜 오월을」) 시인은 “이해하는 만큼 말하고 싶었는데 대화는 어려웠다”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고백한다(「저작권」).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으나 사랑받고 싶은 이의 마음은 자신이 만든 인형의 엄마가 되어 주고(「어른이 되는 방법」), “주룩주룩 웃는 비”를 맞으며 생의 트렁크를 끌고 간다(「웨딩드레스」). 세상에 쏟아 놓은 엇비슷한 조각들. 귀퉁이가 모자라거나 남아 겉도는 조각들. 한바탕 꿈은 채울 수 없는 그림인데 그것도 모르고 한 조각 한 조각 여기저기 맞춰 보는 비애로 모든 것에 있다는 제자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여정의 한가운데서 시인은 감금된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시를 쓴다. 미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알고 있는 게 이것뿐이라고, 모른다는 그 힘으로 세상을 쓰고 읽는다. 저기 “말발굽 소리를 내며”(「비표본 오류」) 오고 있는 고통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로드킬당한 개를 수습하는 그녀에게 삶의 길은 물고 놓아주지 않는 개처럼 끈질기다(「애완견」). 자신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 원형의 천정을 가진 시인의 공간 어느 벽면에선가, 속삭이는 그 소리들이 마음 기둥 여기저기 부딪히며 돌아오고 있다.
―신정민(시인)
■ 시인의 말
선 채로 미라가 된 저녁
생선 눈동자 같은 하늘
눈발은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들릴 듯 말 듯 녹는다
희디흰
검은 밤이
붉다
■ 저자 약력
김려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6년 <사이펀>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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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가시꽃 – 11
느닷없이 – 12
의문의 저녁 – 14
반짝이는 – 15
뒷물 – 16
안개 – 18
이팝 – 19
탱고, 삼십오 세 – 20
나비 묘지 – 22
나는 알고 있다 – 23
수련 – 24
임상 불가 판정 – 26
소극장 팬터마임 – 28
상사 – 30
밀교 – 31
여여 – 32
제2부
자귀나무 – 37
어른이 되는 방법 – 38
바위제비꽃 – 39
부메랑 – 40
웨딩드레스 – 42
폭식 – 44
새점 – 46
사하라 – 47
옥곡 IC – 48
모란 전골 – 50
아일랜드 아임랜드 – 52
구르는 돌 – 54
감기 – 56
끈 – 58
저 아래에는 비가 내리는 풍경이 있었다 – 60
폭설 – 62
나는 죽어서 리무진을 탄다 – 64
제3부
숲은 왜 오월을 – 67
말 많은 사람은 외로운 사람 – 68
신선동 사람들 – 70
외유성 출장 – 71
비표본 오류 – 72
그 뒤 – 74
끝없는 허밍 – 76
안녕하십니까 – 77
애완견 – 78
그렇다면 그가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한 게 잘못인가 – 80
오버 더 숄더 샷 – 82
앞에는 멧돼지 뒤에는 개 – 83
일곱 번째 감정 – 86
도화(徒花) - 88
저작권 – 90
통역가를 신뢰하지 않는 싱커페이션 – 92
등 – 94
풀꽃 – 96
해설 이성혁 만다라의 숲과 심장의 시 – 97
■ 시집 속의 시 세 편
가시꽃
제 몸을 쪼고 있는 새와
제 꼬리를 물려고 맴도는 뱀한테
돌을 던지고 있다
참나무는 죽은 편백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핏방울은 찔레 꽃잎에 맺혀 있다
진주 목걸이처럼 흩어진 봄밤
상제나비 한 마리 날아와
사이사이 붉은 유리구슬을 꿰고 있다
흰 얼굴에 덮어씌운 검은 숄은 아주 멀리 있을 것이므로
숲은 발을 질질 끌며 늪으로 가고 있다 ***
여여
난간에 목매달고
치마 뒤집어쓰고
뛰어내리나 마나
동백이 동백일 수 있는 시간
밤새도록 뻘밭 헤매다
꽃,
찾으나 못 찾으나
작은 동박새가 작은 동박새일 수 있는 시간
종래의 소속이 다르나
모두 잠들기 기다려 기어 나온 실지렁이
굳이 봄밤처럼 말라 죽은 까닭
경계를 넘지 않고도 꽃에 도달할 수 있다는
조금 더 나아가면 그때 그 자리
사소한 이유로 고라니
산에서 울고
그믐달 움찔 몸을 떨고
나무는 자기가 죽은 것을 모르고
바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
폭설
노인은 앉은뱅이 아내를 업고 밭으로 갔다
텃밭 한쪽 꽃방석 위에 아내를 앉혀 놓고 봄날을 골랐다
햇살의 흰 머리카락
수정 브로치를 단 민들레 곁에서 반짝거렸다
풀 한 번 뽑고
아내 한 번 쳐다보고
풀 한 번 뽑고 아내 한 번 쳐다보고
잇몸만 남은 한낮
다소곳 늙은 아내가 전하는 말
올해도 영감이 좋아하는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아무렴, 내년에도 볼 수 있지
감나무 그늘
노부부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텃밭의 노부부가
앞당겨 본 겨울
눈부신 봄날이
꽃잎인 듯 흩어져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