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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웅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까 당신들이 재물을 털어서 대문파에 상납했다던데 그 곳이 대체 어디인가?"
종리우현은 한 서린 음성으로 답했다.
"저희 수신단이 있는 곳 백 리 안에 정파의 태양이라는 건륭문의 분타가 한 곳 있습니다. 저희는 이 곳에 약탈한 물자의 십분지 일을 꼬박꼬박 바쳐왔습니다."
백리웅천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으니... 내 언젠가는 건륭문주 단후상연의 머리털을 몽땅 뽑아 빗자루를 만드는 데 쓰겠다."
그의 호방한 말에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 동시에 모두들 통쾌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건륭문의 단후상연이 누구인가? 정파의 태양이자 당금 무림의 두 기둥 중 하나가 아닌가?
많은 이목이 있는 데서 그를 가리켜 험한 막말을 하는 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이 신비스런 죽립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자 모두들 눈앞에 어떤 광경이 사실처럼 떠오르며 절로 웃음까지 나오는 것이었다.
종리우현은 중인들의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말했다.
"그 뿐이 아니지요. 사파의 하늘이라는 적야성 분타는 훨씬 멀리 있지만 건륭문에 바치는 액수의 두 배를 바쳤습니다. 게다가 가끔 관부에도 몰래 갖다바쳤지요."
이때 막사궁도 뒤질세라 입을 열었다.
"저희 흑룡방은 인근에 건륭문 분타가 없어서 적야성 분타가 상납을 독식했습니다. 저흰 무조건 반을 바쳐왔습니다. 관부에 바친 돈은 그의 삼분지 일 정도 됩니다."
그의 입이 닫히기 무섭게 서옥령도 입을 열어 비슷한 사정임을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자 백리웅천은 기가 탁 막혔다.
물론 도적들과 그들을 잡는 관병들이 서로 공생하는 처지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나 직접 상황을 전해들으니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돌연 백리웅천의 죽립이 부르르 떨리며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육성이 중인들의 고막을 흔들며 퍼져 나갔다.
"무림이나 관부나 하나 같이 잡종 새끼들이로군. 빌어 처먹을 놈의 세상! 모조리 아랫도리 털을 왕창 뽑아 뒷간 전용 수세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는 자가 없었다. 음성에 실린 위압적인 공력으로 인해 오장육부에 충격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략 오백 명은 됨직한 자들이 무릎을 꿇으며 복부를 얼싸안고 있었다. 그보다 공력이 강한 자들은 제 자리에 서 있었지만 안색이 참담하게 질려 있었다.
삼존회의 세 영수들의 낯빛에도 괴로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장내의 인물 모두가 백리웅천의 기도에 완전히 질려 버린 상황이었다.
백리웅천은 노기를 누르며 종리우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머지 상황을 이야기해보게."
"네. 그럼......."
종리우현은 중단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세월은 흘러 수적 집단의 두령들이 죽거나 늙어 세대교체가 이뤄지게 되었다. 그 즈음 장강수로십팔채의 영웅으로 떠오른 자가 있었다. 바로 수룡천의 두령인 조운평이었다.
조운평은 수적치고는 정녕 보기 드문 무공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른 수적들이 관병의 습격을 받아 원군을 요청하면 지체 없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또한 수적 집단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종리우현, 막사궁, 서옥령은 이때 자신들 집단의 수령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수룡천의 조운평이 중심이 되어 장강수로십팔채가 완전한 하나로 뭉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서로의 의견이 같음을 확인하고 조운평을 찾아가 자신들의 뜻을 밝혔다.
세 집단이 수룡천에 합세할 테니 장강수로십팔채 전체를 일통하여 무림을 진동시키는 강대한 세력으로 커보자고 제의한 것이었다.
조운평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종리우현 등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돌아갔다.
백리웅천은 종리우현의 이야기를 자르고 조운평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멋지고 당찬 제의를 거절했는가?"
조운평은 즉시 답했다.
"사실 그런 꿈을 꾼 것은 저희 수룡천이 더합니다. 저희 수룡천은 세력이 가장 큰 만큼 피해도 가장 컸지요."
그는 말을 끊고 처연한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적야성과 건륭문에 매월 상납했을 뿐 아니라 검운총과 은소곡 등 정사양도에서 각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방파에 일 년에 한 번씩 예물을 보냈지요. 게다가 관부에 들어간 돈까지 합치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성은 점점 높아졌고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물론 다른 집단도 마찬가지지만 이 모든 것은 극비리에 행해진 일입니다. 상납을 받는 측의 체면까지 고려해줘야 하니까요."
백리웅천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침음성을 발했다.
"흐음!"
조운평은 낯빛을 무겁게 하며 종리우현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런데 저들은 중요한 사항 하나를 모르고 있습니다."
백리웅천은 호기심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그게 뭔가?"
"관부나 무림 그 어느 곳도 장강의 수적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작은 집단들이 적당한 노략질을 하며 자신들에게 떡고물을 갖다 주는 것은 아주 좋아합니다."
"......."
"하나 대륙의 젖줄인 장강 남북의 운송에 큰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강성한 집단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지요. 이는 왕조나 무림의 존립기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백리웅천은 눈매를 좁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인 것 같소."
조운평의 말은 계속되었다.
"무림의 강자들이 오랜 역사를 두고 장강을 삼류 수적 집단에게 방치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관과 무림이 서로 침범치 않는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장강을 장악하러 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백리웅천은 크게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거렸다. 그는 조운평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옳게 느껴져 그가 새롭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저희 수적들이 한 깃발 아래 뭉치면 먼저 무림의 강대세력이 몰려와 저희들을 산산조각 내어 더욱 작은 수십 개의 도적 집단으로 나눠 놓을 것입니다."
"......."
"저희들은 먹고 살면서 상납도 하려니 더욱 힘든 처지가 되고 오히려 민생에 끼치는 해악도 더 커질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저들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지요."
백리웅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종리우현 등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듣기엔 조운평의 말은 틀린 데가 없다. 이번에는 당신들이 한번 말해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종리우현이 즉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제의를 했던 시점에는 그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 후 무림의 사정이 변했습니다. 정사간에 전운(戰運)이 감돌며 우리에게 신경 쓸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말을 막사궁이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조운평은 술주정뱅이 폐인이 되어가니 저희들 힘으로라도 뭔가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서옥령이 말을 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우리가 힘을 합해 군산을 장악했던 거예요."
"흐음, 좋소."
백리웅천은 중후한 음성으로 말을 자르고는 조운평을 향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정말 술주정뱅이가 되어 버렸는가?"
조운평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생은 주기(酒氣)를 이용해 내공을 늘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리웅천이 여전히 죽립을 깊숙이 쓰고 코 아래만 보이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좋소. 이제 됐소."
백리웅천은 늠연히 말을 받고는 중인들을 빙 둘러 바라보았다. 하나 수룡천 결사대에 가려 그 뒤쪽에 있는 삼존회 무사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는 돌연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붕! 솟아올랐다.
그는 서 있던 풀밭에서 좌측으로 십여 장 떨어진 가시덤불 위로 날아갔다.
척!
백리웅천은 발 디딜 틈 없이 촘촘한 가시덤불 맨 꼭대기에 사뿐히 날아 내렸다. 바늘처럼 뾰족한 가시 위에 맨발로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선 것이다. 더구나 덤불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저럴 수가......!"
중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입을 딱 벌린 채 탄성을 발했다.
백리웅천은 죽립을 비스듬히 쓴 채 고개를 천천히 돌려 삼천여 명 정도의 인파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암흑으로부터 대지를 지키는 광명(光明)의 수호신 같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