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동의 시 세계 서정적 자아와 순응의 미학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시간과 생명성에서 탐색하는 자아 현대시의 구도나 표현 양상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한 시인이 탐색하거나 추구하는 시정신이 일치하는 정서의 범주(範疇)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읽게 되는데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통념이나 체험에서 창조되는 상상력이 시의 골간(骨幹)을 형성하고 이것이 그 시인의 삶과 인생관의 진실로 승화하고 있음을 간과(看過)하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시적 흐름이나 그 구성의 향방을 살펴보면 그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진실의 귀결점(歸結點)이 어디이며 무엇인가가 중요한 사유(思惟)의 중심축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그 시인의 의식(consciousness)은 항상 생명성으로 활기차게 분출(噴出)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박일동 선생이 상재하는 시집『여심(餘心)』을 일별하면서 문득 이러한 상념부터 떠올리는 것은 우리 시인들이 진실로 구현하고 실행해야 할 시의 위의(威儀)가 존재의 문제에서 탐색하는 자아(自我)의 존엄과 거기에서 추출한 인생의 진실이 작품 속에 투영(投影)되어 있다는 점을 감명 깊게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라고 정평이 나있던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한 바와 같이 시가 단순하게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하다고 했다. 그리고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 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주의 있게 경청해보면 박일동 선생이 현현(顯現)하는 시간성(혹은 ‘세월’)과 생명성이 적절한 조화를 생성하면서 자아를 관조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삶과의 조화와 화해를 위해서 ‘너른 세상 / 세월과 바람 속 / 나는 흘러 흘러서 / 어디로 갈 것인가(「춘일(春日)」 중에서)’라는 자문(自問)으로 그의 시적 진실(혹은 인생의 진실)을 토로(吐露)하면서 ‘세월’과 동행하는 ‘나’를 정립하려 하고 있다. 자가도취는 그 자신을 눈멀게 한다 여기에는 치유할 약도 없단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아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보이는 만큼 밖에 더 알랴 그리고 아는 만큼 더 보이랴 있는 것 없는 것 아무리 찾아다녀도 실존(實存)과 현실 사이 한계가 있고 길은 하나 오직 내 안에 있더라네. --「길」 전문 이 작품에서 박일동 선생의 내면에 잠재(潛在)한 ‘실존과 현실 사이’와 그 ‘한계’를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그가 절실하게 천착(穿鑿)하는 것은 ‘오직 내 안에’ 존재하는 ‘길’임을 감지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아도취’에 대한 경계를 시적 상황(situation)으로 도입한 것은 아마도 자아에의 인식이 바로 존재와의 문제와 현실적인 괴리(乖離)의 상충(相衝)에서 탐색된 ‘길’의 정립을 위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 떠날까 왠지 바삐 돌아가는 저 풍차 뒤로 쫓기고 밀리는 시간들 사이사이 이제사 내가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이련가 그날이 그날인 찌든 굴레 바닥에 굴리다가 버리지 못하는 미련 하나 둘 내려놓을 때 신천지(新天地)에 부는 바람 어느새 내 안에 스며들고 다만 그것 자유이다. --「여백(餘白)」 전문 저 하늘 창창(蒼蒼) 비움 가득하다. 청풍(淸風)에 깃든 우리의 서정 친구여 귀갓길의 차 한 잔 기다림에 넓혀지는 마음의 여백 그윽하여라 찻잔 넘치는 국화 향기. --「여심(餘心)」 전문 여기에서도 ‘내가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 여유’를 절감(切減)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내 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방함으로써 그가 지적 자양으로 구축한 진실의 구심축(求心軸)이 ‘시간들 사이사이’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시집의 표제시가 되는 작품「여심(餘心)」에서도「여백(餘白)」과 동일하게 ‘비움’과 ‘마음의 여백’ 등이 ‘우리의 서정’임을 일깨우면서 ‘그날이 그날인 찌든 굴레 / 바닥에 굴리다가 / 버리지 못하는 미련 / 하나 둘 내려놓을 때’라는 동일한 개념의 관조(觀照)를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일동 선생은 다시 ‘가보지 못한 / 낮선 길 걷다가 / 하도 팍팍하여 / 초록빛 강물 바라보고 / 잠시 묵묵히 앉았다 // 저쪽 / 산모퉁이로 기차가 지나간다 / 이윽고 / 잔잔한 풍경은 / 금새 나에게 휴식이다.(「휴식」전문)’라거나 ‘때로 남들이 / 보지 못하는 것도 / 나에게만 / 살짝 보여주는 것이었다.(「상상력」전문)’ 라는 어조(語調-tone)로 ‘나’에 대한 회상과 반추(反芻)가 동시에 유로(流露)되고 있어서 그의 내면에는 자아(생명성)의 수긍(首肯)과 함께 ‘저쪽’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예감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그는 ‘산 막히고 물 막히어 / 울울한 심사 각인(刻印)한 세월과 / 바람 속에 갈잎만 흩날리고(「오지(奧地)」중에서)’ 또는 ‘둘이 아닌 생명은 / 단 한 번뿐인 / 인생을 살아감이다(「불이인간(不二人間)」중에서)’라는 단정과 같이 ‘세월’과 ‘생명’의 상관성이 바로 존재라는 근원으로 현현되고 있다. 이와같이 ‘비움의’ 미학은 작품「불이(不二)」 전문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엇갈리는 기류 속 / 어둠이 있어 / 빛도 있다지 않던가 // 인간 실재(實在)와 / 진실한 비움(空) / 보이지 않는 아득함이여 // 고뇌의 기로 / 자기와의 싸움에서 / 길을 묻는다 //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 / 사람 더하기 사람은 사람이다.’는 ‘진실한 비움’을 철학적 진리로 내면에서 분사(噴射)하고 있다. 이것의 박일동 선생의 시적 진실이며 그의 가치관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2. 형상화하는 고향과 서정의 원천 박일동 선생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atream of consciousness)은 자아의 생성이 곧 상상력의 창조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회상과 관조로 형상화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인식이다. 고향이란 생명의 원천(源泉)이며 자아의 회귀(回歸)로 시적 사유의 원류가 된다. 아롱 아롱 아지랑이 너머로 종달새 알을 품는 시냇가 내 어릴 적 고향의 작은 마을 아득히 흘러간 세월이건만 오래인 지금껏 잊히어지지 않네 눈 내리고 바람 불고 청보리밭 푸른 물결 춤을 추고 소들이 자운영 갈아엎으면 모심던 농부들 논두렁에 앉아 새참 먹고 농부들 허리 펴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네 내가 기억하는 옛적 시냇물은 여전히 내 가슴에 흐르고 언덕 아래 하얗게 하얗게 피인 찔레꽃, 찔레꽃 부여안고 잃어버린 고향 이야기 들려줄 사람아. --「시냇가」 전문 그렇다. 그는 ‘어릴 적 고향의 작은 마을’에서 상상력은 생산되고 문학적 창조로 전이(轉移) 된다. ‘아득히 흘러간 세월’ 따라서 지금은 잃어버린 고향 이야기‘에 향수를 달래고 있다. 거기에는 ‘하얗게 핀 / 찔레꽃’과 ‘종달새 알을 품는 시냇가’와 ‘청보리밭 푸른 물결 춤을 추고’ ‘모심던 농부들 허리 펴며 막걸리 잔 기울이’는 낭만도 있다. 이것이 그에게서는 모두가 서정적인 자아를 구현하는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향에서 탐색하는 서정성은 작품「호롱불과 짚신」「타작」 「고향 선술집」「가뭄」「백중(伯仲」「백자잔(白磁盞」「쌀」「한가위날」등에서 그의 진솔한 서정적인 자아가 발현되고 있다. 이는 그에게 내재(內在)되어 있는 시적 본령(本領)이 너무나 서정인 사유에서 추출한 시정신의 모태(母胎)로 정착되어 있어서 그에게 침잠(沈潛)된 시심(詩心-poetical feeling)은 청순하면서도 안온한 품격을 풍겨내고 있다. 이러한 서정적 의식은 만유(萬有)의 자연 순응을 전제로 하여 그의 깊은 내면을 감싸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면서 기원하는 시적 결집의 정점(頂點)은 결론적으로 자연 회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본디의 모습대로 꾸밈이 없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이 스스로 그러하다 사람 손 타지 않고 때묻지 않은 그것. 순수와 깨끗함이 그대로 자연이고 일상의 빛과 바람 무시로 새로워라 복사꽃 피고지고 비움이 채움일래. --「자연(自然)」 전문 이처럼 순정적인 그의 심연(深淵)에서 ‘자연’은 그가 삶이 무엇인가, 또는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우리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본디의 모습’으로 ‘때묻지 않은 그것’이 바로 ‘순수=자연’이라는 등식(等式)으로 해법을 찾고 있다. 그에게서 ‘일상의 빛과 바람’이라는 안정된 서정의 범주에서 ‘비움이 채움’이라는 또 다른 진실을 구현하는 지적 혜안(知的慧眼)과 그가 구축한 지적 원리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융합(融合)으로 조화를 성취하는 시법(詩法)을 정감어린 어조로 유로(流露)하고 있다. 비가 내린다 꽃비가 내린다 사월의 잔치는 끝났는가 꽃은 지는 뒷모습도 아름답구나 가뭄을 달래주는 봄비가 하얀 낙화(落花)와 함께 땅바닥에 내려쌓인다 텃밭에 진즉 심어 둔 옥수수 감자도 단비에 목추기고 파란 이파리 내밀겠다. --「곡우(穀雨)」 전문 이와 같이 서정성은 작품 켠켠에서 읽을 수 있는데 한결 같이 소년적 여린 감성의 어조가 더욱 시흥(詩興)을 발현하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꽃비’ 혹은 ‘꽃은 / 지는 뒷모습도 아름답구나’ 또는 ‘단비에 목축이고 / 파란 이파리 내밀겠다.’는 계절적인 정경(情景)이나 ‘눈 녹아 흐르는 / 맑은 물 계곡 / 조약돌 구르는 소리.(「봄이 오는가」전문)’, ‘정원의 해묵은 / 소나무 / 먼지 털고 일어서서 / 아침 햇살 향해 / 기지개를 켠다(「청명일(淸明日)」중에서)’ 등과 같이 자연 서정이 적시(摘示)하는 그의 서정 중심축에는 궁극적(窮極的)으로 형용(形容-modiflation)하려는 다양한 정경과 그에 수반(隨伴)하는 의미적인 요소가 명징(明澄)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흔히 쓰던 말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들린다. 그가 감응(感應)하는 자연은 바로 이러한 무위자연을 충족하는 청정(淸淨)한 시각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내재된 사유의 순수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시적 경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스칼은 유명한 그의 글「팡세」에서 자연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신학(神學)까지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이야 말로 자연을 깊이 존중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이라는 무궁한 대진리 앞에서 수용해야 하는 인간의 순리로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강은 / 먼저 / 낮은 곳부터 살핀다 // 아래로 / 아래로 가다보면 / 나려갈수록 / 나눔이 커지고 // 바라보는 / 사람의 마음도 / 넓디넓게 / 넓혀주고 있다.(「강」전문)’라거나 ‘산은 / 높이 오를수록 / 사람의 마음을 / 깊게 해주는 것이었다.(「산」전문)’는 어조와 같이 ‘강’이나 ‘산’이 보여주는 외연(外延)과 그들이 들려주는 내포(內包)의 이미지나 메시지는 모두가 우리 인간들이 실행해야 할 덕목(德目)이 적나라(赤裸裸)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밖에도 작품「철부지」「섬 처녀」「고향 잃은 철새」「옥 같은 물에」「강촌에서」「구절초」「마이산 가는 길」「홍매(紅梅)」「까치집」등에서 그가 간직한 내면의 서정적인 자아가 진솔하게 현현하고 있어서 그가 취택하거나 지향하는 시적 진실의 향방을 예감할 수 있는 좋은 주제임을 알 수 있다. 열풍 싸안은 태풍도 한 차례 지나갔는데 여름밤 아직도 식을 줄 모르고 그래도 때는 백로(白露) 절기라 맑은 이슬 머금은 풀벌레 새벽잠을 깨운다 풀벌레 소리, 여름이 가는 소리 어느새 높아진 태양이 들녘 위로 막바지 작열하고 고개 숙인 이삭, 가을이 천천히 물들어간다. 여기 작품 「풀벌레 소리」에서와 같이 자연 취향의 서정이 시각과 청각(聽覺)의 이미지를 통해서 자연의 섭리(攝理)를 감지하고 순응하는 그의 미학과 ‘여름’과 ‘가을’로 건너는 시간성이 화해(和解)하는 서정적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계절적인 자연의 조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성숙(成熟)하는 은연중(隱然中)에 그의 진지(眞摯)한 철학이 스며 있다고 할 수 있다. 3. ‘삶의 이야기들’과 ‘思無邪’의 조화 박일동 선생은 이미 ‘시인의 말’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시인도 많고 시도 넘쳐나지만 / 시가 시다운 역할을 못하고 있는 성싶다. 문제는 소통이다.’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심중(心中)에서 숙성(熟成)된 가치관이 현대시와 현대시인들에게 띄우는 일종의 경종(警鐘)으로 들려진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대의 시인들이 누구나 한번쯤은 자성(自省)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시적 상황과 실재(實在)의 행간(行間)에서 도출(導出)하는 시인의 상상공간이 시간과의 조화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우둔(愚鈍)이 항시 도사리고 있음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일동 선생은 이렇게 ‘시가 시다운 역할을 못’하는 난삽(難澁)한 문제들을 ‘소통’이라는 해법(解法)을 제시함으로써 그가 탐색하려는 시적 진실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존재의 자리에 / 이야기가 있다 // 말을 안 하여도 / 이야기는 있다 // 표정과 몸짓만도 / 이야기가 된다 // 인간이 살아가는 / 처음부터 지금껏 // 관계와 관계들 // 뭇 화제를 낳고 // 얘기가 있는 곳에 / 마음이 움직인다.(「이야기의 시작」 전문)’는 어조와 같이 ‘존재의 자리’나 ‘인간이 살아가는’ ‘관계와 관계’에서 우리들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시(詩)는 이미지이다 삶의 이야기들이 다양한 표정을 하고 꿈틀댄다 그림 속에도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깔려 있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어 다양한 색깔과 향기 시와 그림은 동행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동행(同行)」 전문 그렇다. 시와 ‘삶의 이야기들’을 교감(交感)하는 근원적인 문제들이 포괄(包括)하는 것이 ‘세상을 아름답게’하는 원류가 된다. 여기에서는 화중유시(畵中有詩 )와 시중유화(詩中有畵)라는 고전적인 명언을 인용해서 ‘시와 그림은 동행하며’ 우리들의 실 생활(real life)과 접목시키는 시법으로 소통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러하듯이 ‘우리는 옛적 / 천자문(千字文) 익힐 때부터 / 시의 꽃씨를 뿌려왔다.(「시(詩)의 꽃씨를 뿌려요」중에서)’거나 ‘여기가 정녕 / 마음의 여유를 갖고 / 살 수 있는 별천지(別天地)이구나 // 구치(驅馳)이듯 쫓기는 / 세월과 바람 속에 / 느림과 비움의 소요(逍遙)- / 여심산방(餘心山房)이여 // 빈 계곡 채우는 / 물소리 / 바람소리 / 지천대(地天臺) 위에 / 현존(現存)하는 기(氣) 틀고 앉으면 // 산나리 야생화(野生花)같은 / 시상(詩像)- 아련히 / 가슴으로 번득일 때 / 오늘도 산에는 꽃이 피네.「여심산방(餘心山房)-崔白山 시인에게」 전문)’와 같이 그의 내적 이면에는 시(혹은 예술)와의 소통(교감)을 통한 삶의 지향점을 적시하고 있다. 다산초당 처마 끝 스치는 솔바람 천년이 간들 빛바래고 잦아질까보냐 석간수, 다조바위 이끼 낀 언저리 유배의 땅 옛 자취 의구한데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초당을 찾아 차 끓이고 다산과 마주앉으면 찻잔 바쳐 든 마음, 사무사(思無邪)련가 차는 곧 멋이 되고 선(禪)이 되었다 선인들의 높은 학문이 자아낸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의 예지 오랜 세월 시상(詩像) 같은 정취 남아 상기도 아련히 찻잔 속 향기로 감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전문 그는 어느 날 다산초당을 찾아온 초의선사가 다산과 마주 앉아서 찻잔을 바쳐들고 ‘사무사’를 교감하면서 ‘상통천문 하다지리의 예지’를 논하고 오랜 세월 시상‘의 청취에 젖어 있다. 논어 위정편(論語 爲政篇)에서 말하는 ’시삼백 일언이이폐지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시경에 있는 삼백편의 시는 한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라는 ‘사무사’를 적시함으로써 시가 갖는 위의나 그 본령에 접근하려는 투철한 시정신을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의 시법으로 요약하고 있다. 옛날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백거이가 말했듯이 시는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정과 말과 소리 그리고 의미가 융합해야 비로소 시라는 형체로 완성하게 된다. 이처럼 박일동 선생은 삶과 시가 동질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황폐화한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휴머니즘(humanism)의 비범(非凡)한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는 논지를 견지(堅持)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다 다시 ‘99세에 첫 시집을 낸 일본 할머니의 이야기 / 발행부수 100만부를 넘길 전망이라는 / 아사히신문 보도(1월6일)를 보았다(「정년은 없다」중에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 ‘초등학교 학력에 평생 여관 보조, 재봉일 등을 / 해온 아마추어 시인 ‘시바타도요’ 할머니’의 이야기와 ‘두바이의 통치자 세이크 모하메드 / 그는 시인이었다 / 시인이기에 가능했던 발상이 / 두바이의 신화(神話)를 낳았네(「미래도시」중에서)’에서처럼 아랍에미리트의 통치자 ‘세이크 모하메드’가 시인이었기 때문에 ‘사막에 시를 쓰는 정신의 역사(役事)(「해시(海市)」중에서)’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스토리는 그 의미가 범상(凡常)치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스토리의 결론은 ‘비록 나이가 많을지라도 / 오늘을 꿋꿋이 힘차게 살아간다면 그가 /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주역이 아니겠는가 / 문인(文人)은 진정 정년이 없다.’라든가 ‘IT 강국에 태어난 우리의 아들 딸들이여 / 남과같이 해서는 그 이상이 될 수 없잖은가 / 시나 소설 많이 읽기를 권하는 이유라네.’라는 교시적(敎示的)인 메시지가 정감(情感)으로 수용되고 있다. 4. ‘현대라는 문명’과 시적 진실 박일동 선생은 위와 같은 서정적인 자아의 성찰과 존재의 인식을 순응하면서도 시중유골(詩中有骨)의 언어와 상징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의 사회성인 시사적(時事的)인 언어의 분사(噴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와 고립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교류하면서 집단을 이루며 사회를 형성한다. 현대시도 또한 사회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는 의식적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합당한 주제를 탐구하게 된다. 지금 현대사회는 더욱더 그 구도가 복잡다단하여 모순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합리한 것이 노출되어 있어서 우리 시인들은 그 복합적인 사고(思考)를 표현함으로써 다소 해소하거나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데 있다는 T.S. 엘리엇의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의 말이나 시는 인생의 비평이라는 M. 아널드의 말과 같이 시는 다소 사회적인 문명비평의 기능도 병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뭔가가 부재한 오늘의 식탁은 빈 그릇 뿐이다 꼭 담겨져 있어야 할 것이 빠져 있기 까닭이다 정녕, 현대라는 문명(文明)의 작란일까 일상의 삶이 왠지 모르게 쫓기고 아버지 따로 아이들 따로 한 지붕 안에서도 엇갈리는 식사시간 아내는 가족에게 두레반 같은 훈훈한 밥상이 되어 주려했다. --「밥상」 중에서 이와 같이 시의 사회성은 일반사회의 공통성 위에서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사회적인 능동성을 표현해서 시사성이 내재된 교시적인 효과를 지향하고 있다. 위 작품에서는 단순한 ‘밥상’을 통해서 ‘현대라는 문명의 작란’까지도 형상화하는 시법은 종전의 시의 사회적 기능에서 승화해서 현대의 불안감, 위기감 등에서 벗어나려는 해소의 방향으로 어떤 기원이나 희망사항들이 시적인 메시지로 현현되고 있다. 이처럼 가족간의 ‘아버지 따로 아이들 따로’라는 이질감이 표출되는 시적 구도는 그의 시정신이 침잠(沈潛)되어 있어서 어쩌면 현대시가 추구하는 시법이 바로 사회적인 요소가 언어와 결합하여 비평적이거나 위안과 안정을 갈구(渴求)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언제 부터인가 오염된 웅덩이를 말끔히 씻어내려 줄 비는 오지 않았다 연년이 타들어가는 검은 대지 수개월 물을 먹지 못한 맹수들이 땅에 혀를 박고 죽어갔다 멀리 북극의 해빙이 부른 기상이변 안개 속처럼 가마득하여 전에는 아무도 몰랐었다 아아 놀라워라, 그렇게 세상은 좁다. --「세상은 좁다」 중에서 그렇다. ‘세상은 좁다’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의 파괴가 인간의 몰락도 초래할 수 있다는 위험 경고이다. 오염되고 가뭄으로 지구가 타들어가서 맹수들이 죽어가고 ‘북극의 해빙’으로 기상이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무책임한 인간들의 문명세계를 질타하고 있다. 그는 작품「쌀밥」중에서 ‘이 지구상엔 아직도 기아와 추위에 / 떨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 그들도 알고 있었을까’라거나 작품「부재(不在)」중에서는 ‘세상은 때로 / 없어야할 게 있어서 문제가 되고 / 있어야할 게 없어서 / 더욱 큰 문제가 아니겠니?’라는 어조처럼 이 지구상의 문제점들이 한편의 작품으로 형상화하면서 갈등의 해갈(解渴)점을 모색한다는 공통성을 지니게 된다. 함부로 버리는 걸 죄악으로 알았던 아버지 세대에는 떨어진 밥풀 하나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었다 배부르다고 벌써 가난을 잊었는가. --「망각」 중에서 아열대 대륙으로부터 날아든 꽃매미 무리 과수(果樹)에 달라붙으면 농민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 --「괴물」 중에서 보라. 그는 전근대에서 보릿고개를 연상(聯想-associative)하면서 ‘버리는 죄악’을 ‘배부르다고 벌써 가난을 잊었는가.’라는 메시지로 사회적 경고를 적시하고 있다. 또한 ‘꽃매미 무리’의 병폐에 대한 농민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서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주제를 탐색하고 있다. 이 밖에도 ‘태안 앞 바다에서 시작된 / 기름띠 검은 파도 / 어디까지 밀어닥치려나 // 해안선 따라 엉겨 붙은 시름 / 어민들 속이 까맣게 탄다(「새들, 돌아오다」중에서)’ 는 ‘태안 앞 바다’의 ‘기름띠 검은 파도’에서부터 ‘보리누름 기다리다 못해 / 식구 입 하나 덜려고 / 속아서 정신대 간 / 누이야 / 아리아리 아리랑고개 / 넘어 갔는가.(「누이아리랑」중에서)’라는 ‘정신대’ 문제, 그리고 ‘아득히 잊어진 듯했다가 /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악몽(惡夢) /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리는가.(「돌비(石雨)」중에서)’라는 ‘나가사키’의 원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회문제를 적시하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려는 서정의 시세계와 동일한 감응을 분출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박일동 선생이 이 시집 『여심』을 통해서 우리들의 공감을 확대하는 요인은 그가 내밀(內密)하게 사물(事物)과 관념(觀念)의 행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탐색하는 시적 진실이 대체적으로 안온하고 안정적인 보편성에 사유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가 단정적으로 전해주는 메시지는 시간성과 생명성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자아에 대한 인식과 고향과 자연을 축으로 한 서정성의 추구 그리고 ‘思無邪’를 지향하는 시적 진실의 탐구 등이 주축(主軸)을 형성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다시 그가 천착하는 시법은 시의 사회성에 대한 통찰(洞察)로서 시의 교시적인 기능을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살펴본 박일동 선생의 시집『여심』은 그가 충만으로 다가갈 우리들의 가치관의 승화가 무엇이며 어떤 방향인지를 제시하는 메시지가 다양한 시법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의 순정성과 순응의 미학을 다시 정감으로 느끼게 하는 발성법(發聲法)으로서의 시의 위의를 감도(感度) 높게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절감한다. 그에게 축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