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의 초등,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서 고등학교는 대구 누님 집에서 다녔다. 식사는 달성동 누님 집에서 하고 잠은 고성동 대한실업 사(자형의 고물상 숙직실)에서 잤다.
고등학교 3년 초겨울에 취업지도 교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을지로의 천광전자에 취업해서 뚝섬 성수동에서 하숙하며 출퇴근했었다. CEO의 갑질로 그만두고 1970년 말 고향에서 겨울을 지내고 1971년 2월15일(설날) 입대를 하였다.
고향 친구들과 34개월 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74년 12월에 제대했다.
자형 소개로 제일공업사(자형 친구분)에 서기로 취업했다. 그때도 누님 집과 대한실업사에서 생활했다.
1976년 1월 29일에 아내(심외자)와 중매결혼을 하고 비로소 독립된 내 집이 생겼었다.
신혼생활은 행복했었다.
일찍이 사랑의 결실이 있었다.
아내가 딸을 임신 했다.
가장으로써 책임감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때가 조카와 동업하고, 투자하고, 업종을 2번씩이나 바꾸고, 결별하고, 독립하고, 남구 대명동에서 서구 원대동으로 업장과 주거지를 이사하는 격변기라 할 수 있다.
1976년 10월 새로운 나의 직장은 원대신시장 입구 부근에 있는 종합 가전, 전기 판매장입니다.
간판은 공중전자(전주인것 그대로)입니다.
집은 진00 씨 문간방에 살았습니다. 얼마 후 가게 이층에 방이 비위서 이사를 왔습니다. 이층 계단이 가팔라서 아기들이 위험했습니다.
얼마 후 건물 주인(김00)이 우리한테 매매를 권했습니다. 우리는 가진 돈이 없어서 포기했고, 다른 사람이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전 주인 김00이 가게와 붙은 방을 썼는데, 이사 가고 우리가 이층에서 내려와서 가게와 붙은 1층 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딸이 4학년,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길가라서 면학 분위기도 안 좋고 집도 좁고, 가게도 좁고 해서 원대오거리 원대학원(2층) 3층에 전셋집(조00 씨 집)을 3천만 원에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4년 살고, 그 집 큰딸이 이사 온다고 해서 길00 씨의 큰 한옥을 5천만 원에 얻었습니다.
4년여 후 집이 소방도로 개설로, 이주비 250만 원 받고 박00 씨의 3층 집을 전세 8천만 원에 이사했습니다.
이 집에서 4년여 살고 자가를 짓고 1997년 10월 말에 이사해서 오늘까지 28년째 살고 있습니다.
첫댓글 샛방살이는 소 시민의 애환입니다.
내남없이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가 녹아있습니다.
조왕연 선생님 화이팅 입니다.
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