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정상회담에
오른
신라인 최치원(崔致遠)
12세에 당나라 유학 장원급제
벼슬
시주석, “장풍(長風)이 만리를 통해...”
![2013-08-12_170234.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econotalking.kr%2Fnews%2Fphoto%2Ffirst%2F201308%2Fimg_98419_1.jpg)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간
정상회담에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 ‘범해’(泛海)가 올랐다. 신동과 천재로 불린 것으로 전해오는 최치원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오늘의 중국 최고 지도자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나 양국간 우호를 위해 그의 시를 읊었을까.
한·중 정상회담의 ‘오랜친구’
화답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박대통령을
‘오랜친구’(老朋友)라고 말하고 중국몽(中國夢)과 박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가 상통한다고 동의했다. 박대통령은 마음의 믿음을 안고 달려간다는
‘심신지여’(心身之旅)라고 화답했다.
![2013-08-12_171255.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econotalking.kr%2Fnews%2Fphoto%2Ffirst%2F201308%2Fimg_98419_2.jpg)
또한 시주석의 ‘오랜친구’에 화답하듯 한국
기업인들과 포럼에서 ‘선주붕우’(先做朋友), ‘후주생의’(後做生意)라는 말로 “먼저 친구를 만든 후에 비즈니스 하라”고 당부
했다.
이번 박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중국측이 각별하고 특별하게 예우한 배경에는 1,000년이 넘는 역사적 관계가 깊다는 사실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믿어진다. 바로 시진핑
주석이 인용한 고운 최치원의 귀국시가 이를 말해준다고 믿는다.
‘괘석부창해’(掛席浮滄海)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장풍만리통’(長風萬里通) -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구나.
시 주석이 최치원의 시를 읊은 것은 곧 한·중 수교
20주년을 넘긴후 앞으로 20년을 넘어 통일 한반도까지 만리길을 ‘노붕우’(老朋友) 사이로 동행하자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이번 양국 정상회담을 계기로 종전까지 정치외교가 냉랭했던 ‘정냉’(政冷)에서 ‘정열’(政熱)로 바뀌고 있지 않는가.
허유 관장의 최치원 발자취
기행
한국 고서(古書) 연구지 24호에 한국비림박물관
허유(許由) 관장의 ‘중국에서 만난 고운 최치원’ 기행문이 소개된 바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시안(西安)에 유학했던 최치원의
발자취를 시찰한 소감문이다.
![2013-08-12_171418.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econotalking.kr%2Fnews%2Fphoto%2Ffirst%2F201308%2Fimg_98419_3.jpg)
당나라 시절 시안은 장안(長安)으로
불리는 인구 100만명의
대도시로 동서문물의 중심지 역할을 맡아 신라인을 비롯한 각국의 유학생과 상인들로 붐볐다.
고운 최치원은 겨우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6년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사직하고 유람하며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고 29세에 귀국하여 전국을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임종했다. 그러나 그의 천재적 시문이 중국에 있는 고운 최치원 기념관 등에 많이 남아있지만 국내에는 대전에 있는 뿌리공원의 경주최씨 시조비에
그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그동안 역사공부에 소홀한 우리네도 고운 최치원을
거의 잊고 지내다가 이번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 시진핑 주석에 의해 새삼 최치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된
셈이다.
12세 조기유학 ‘신라 신동’
소문
허유 선생 기행문에 따르면 고운 최치원은 겨우
12세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6년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정부 벼슬을 얻고 황소(黃巢)의 반란때 격서(檄書)로 그를 무릎 꿇였으니 그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수 있다.
당초 고운은 서기 857년, 신라 헌앙왕때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길이 아찬(阿)급까지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그의 부친이 당나라로 유학 보내면서 “10년만에 급제(及第)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훈계했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국 유학생이 몰려 들었으며 신라
유학생들만 800여명에 달했다. 최치원은 12세에 조기유학하여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14세 이상으로 제한하여 입학할수 없어 장안(長安)의
명사인 위(偉) 승상댁에서 심부름하면서 공부했다. 어느날 최치원이 바둑과 글솜씨를 보이자 승상이 시(詩)를 써 보라고
했다.
‘창외삼경우’(窓外三更雨) - 창밖은 한밤중 비만
내리는데,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등잔 앞의 내마음은 고국을 달려가네.
고운이 단번에 이같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써보이자 승상이 “앞으로 다른일 말고 글공부만 하라”고 당부하여 마음놓고 시작에 몰두할수 있었다.
유학 6년만에 장원급제
벼슬길
최치원은 부친이 당 유학 10년내로 급제하지 못하면
내자식이 아니라고 독려한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공부했다.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밤낮 책읽고 시문을
창작했다.
승상의
외동딸 숙향(叔香)과도 시담(詩談)으로 대화했다. 사춘기를 지날 무렵 두 남녀간 연정이 용솟음 쳤음도 짐작할수 있다. 이무렵부터 고운이
신동(神童)이란 소문이 당나라 황실에게 전해졌다. 당 의종(懿宗)이 승상에게 신라 신동을 만나 보자고 했다.
황제가 고운에게 “이 석함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맞춰 보라”고 명했다. 고운이 즉각 고개숙여 응답했다.
‘단단석중물’(團團石中物)
- 단단한 돌함 속
물건은
‘비옥역비금’(非玉亦非金)
- 옥도 아니고 금도
아니고
‘야야지시조’(夜夜知時鳥)
- 밤마다 때를
알리는 새이나
‘함정미토음’(含情未吐音)
- 뜻만 품었지 아직
소리는 못낸다.
계란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황제가 신라 신동이 기특하다고 칭찬했음은 물론이다. 이로부터 최치원의 명성이 장안으로 퍼져 틈틈이 시를 쓰며 명문들과
폭넓게 교우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황제에게 건의하여 선주(宣州)의 율수현위라는 현감의 보좌역 벼슬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무렵
고운이 남긴 명시가 봄을 찬미하는 장안춘(長安春)과 먼 타국에서의 나그네 심정을 그린 ‘도중작’(途中作)으로
남아있다.
이보다 앞서
최치원은 당 유학 6년만인 18세때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빈공과(賓貢科)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했다. 당 의종이 물러나고 희종이 등극했던
첫해에 예부시장 배찬(裵纘)이 주관한 과거시험에 장원했으니 부친이 엄명한 10년만의 합격을 6년만에 달성한 것이다.
고운이 장원급제 했지만 주변의 시샘 때문에 관직을
제수받지 못해 낙양(洛陽) 천지를 유랑하며 다니다가 지방정부 관청인 율수현위 보직을 받았다. 현위직은 현감 보좌직으로 민정을 살피는 직무였기에
고운으로서는 공부하고 글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시기에 열심히 쓴 작품들로 문집 5권을 남길수 있었다.
![2013-08-12_171708.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econotalking.kr%2Fnews%2Fphoto%2Ffirst%2F201308%2Fimg_98419_4.jpg)
쌍녀분의 원혼을 풀어준
詩談
최치원이 당나라 벼슬로 사방을 시찰하면서
‘쌍녀분’(女墳) 이야기를 남겨 지금도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그의 발자취를 들려준다. 양자강 남쪽 고순현(高淳縣)에 접어들어 넓은 들녘을
‘치원교’(致遠橋)로 건너가면 1,000년 넘게 보존된 ‘쌍녀분’이 나온다.
![2013-08-12_171806.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econotalking.kr%2Fnews%2Fphoto%2Ffirst%2F201308%2Fimg_98419_5.jpg)
잡초 우거진 농토 한가운데 있는 쌍녀분 속의 영혼의
원한을 신라인 고운 최치원이 풀어줬다는 사연을 이 고장 사람들이 두루 증언한다.
한(恨)을 품고 죽은 16세, 18세 장(張)씨
자매의 영혼이 최치원에게 꿈속에서 말했다.
아비가 큰딸을 늙은 소금장수, 작은 딸은 차장수에게
시집 보냈다. 자매는 매년 아비에게 남편감을 바꿔 달라고 애원했지만 결코 들어주지 않았다. 이어 울적한 마음의 한을 풀기 어려워 요절했다는
사연이다.
고운이
율수현 현위로 지방 시찰중 역관(驛館)에서 유숙하다가 꿈에 장씨 자매를 만나 시담(詩談)으로 주고 받았다.
고운이 “어느집 두여인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차례나 봄을 원망했나요”라고 했다. 두여인이 “너무나 좋은 글 감사한다”면서 붉은 주머니를 놓고 갔다. 주머니 속에 애틋한
사랑이 실려 있었다.
“살아 있을때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 했는데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뿜도다.”
“그대의 기상은 오산처럼 빼어나서 함께 오묘한
이치를 말 할만 하여이다.”
신라인 고운에게 띄운 고혼의 연정임은 물론이다.
이에 고운이 다시 화답했다.
‘부세영화몽중몽’(浮世榮華夢中夢) - 뜬구름같은
이세상 영화는 꿈속의 꿈, ‘백운심처호안신’(白雲深處好安身) - 흰구름 자욱한 곳에서 한몸 편안히 지내는 것도 좋으리.
황소의 반란을 진압한 고운의
격서
고운은 2년여만에 당나라 벼슬을 사직하고 교우하던
이위(李尉)집 문객으로 기거하다 절강성 서북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고병(高騈) 장군을 만났다. 고병장군은 진해 절도사(節度使)로 황소(黃巢)의
반란을 진압할 책무를 지고 있으면서 고운을 ‘관역순관’(館驛巡官)으로 임명, 보좌를 요청했다.
황소라는 인물은 과거에 낙방하여 소금 밀매업을
하다가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으로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고 선포했다. 당나라 말기 당쟁이
심하고 환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 민심이 이반되었었다. 황소의 난으로 당 희종은 사천쪽으로 도피하여 고병장군이 이를 토벌하러
나섰다.
이때 고운
최치원이 작성한 ‘격황소서’(檄黃巢書)가 그의 무릎을 꿇게 했다는 이야기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인 최치원의 기록은 지금도 모택동의 고향인
양주시 ‘최치원 기념관’에 그의 시집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 성루 2층 건물에 일대기와 계원필경 사본 등에 명시 60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율수현 박물관과 고순현 박물관에도 그의 동상과 흉상 및 작품이 남아있다고 한다.
반면에 국내에는 경주최씨 족보와 대전 뿌리공원의
시조비 정도가 고작이라고 하니 역사문화 보존과 계승에 너무나 무심하지 않느냐는 반성이 나온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 시진핑 주석이
고운 최치원의 귀국시를 인용하여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한다’고 했으니 한·중간 무한우의를 위해 중국속의 한국역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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