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판윤공(判尹公) 휘(諱) 지례(之禮) 할아버지
할아버지 께서는 1398년(태종 7, 무인) 2월 2일, 자선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이吏曺判書)를 지낸 아버지 길상(吉祥)과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낸 원주(原州) 원빈(元賓)의 딸인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원씨(元氏) 사이에서 아들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 나셨다.
할아버지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그 전모를 자세히 밝힐 수 없으나 다만 족보상의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께서는 1417년(태종 17, 정유)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1431년(세종 13, 신해)에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조선시대 조회, 의례를 맏아 보던 관청의 정4품 벼슬)가 되셨고, 1438년(세종 20,무오)에 상호군(上護軍; 정3품 무관직)을 거쳐 가선대부예문관대제학(嘉善大夫藝文館大提學),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禮曹判書),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을 역임하셨다(참고 1).
그리고 <세조실록>에 따르면 1465년(세조 11, 을유)8월 근정전(勤政殿)에서 양로연(養老宴)이 베풀어졌는데, 이때 할아버지께서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의 자격으로 왕세자와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淑舟), 우의정(右議政)황수신(黃守身), 좌찬성(左贊成) 윤사분(尹士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변(李邊),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성봉조(成奉祖), 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검공조판서(檢工曹判書) 조관(趙貫), 검판한성부사(檢判漢城府事) 양수(楊修), 윤희제(尹希齊) 등과 함께 참석하여 술을 올렸다하였다참고 2).
할머니는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禮曹判書) 여흥(驪興) 민의생(閔義生)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민씨(閔氏)이시다. 할머니는 1396년(태조 5, 병자)8월12일 태어나셨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셨는데, 큰 아들 석성현감(石城縣監) 휘(諱) 수덕(守德)할아버지는 우리 마전정씨(麻田鄭氏)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셨고, 둘째 아들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휘(諱) 문덕(文德) 할아버지는 양근(楊根, 지금의 양평) 정씨의 입향조가 되셨으며, 셋째 아들 문천군수(文川郡守) 휘(諱) 숭덕(崇德) 할아버지는 순천(順川) 정씨의 입향조가 되셨다.
할아버지 께서는 1465년(세조 11, 을유) 7월12일, 6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13년 뒤인 1478년(성종 9, 무술)2월 8일,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묘소는 양천 죽동 양경공 할아버지 산소 오른쪽( 지금의 서울시 양천군 신정동 산 150-9) 손좌(巽坐)에 합장(合葬) 되었다.
할아버지에 관련된 자료로는 묘소(사진), 묘갈음기(墓碣陰記),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있다(참고 3).
<참고 1>
경주정씨중앙종친회, <경주정씨대관>, 서진출판사,498쪽, 2010
<참고 2>
<세조실록> 권36, 세조36, 을유 8월조
"乙酉. 御勤政殿, 設養老宴, 王世子與孝寧大君補, 永膺大君琰, 河東府府院君鄭麟趾, 蓬原府院君鄭昌孫, 領議政申叔舟, 右議政黃守身, 左贊成尹士昐, 中樞院副使李邊, 密山君朴仲孫, 判中樞院事成奉祖, 開城君崔濡, 檢工曹判書趙貫, 檢判漢城府事楊修尹希齊, 檢漢城府尹鄭之禮, 承旨等等入使. 王世子及老人班首趙寬以次進酒."
<참고 3>
1.묘소 사진
<경주정씨대관> 46쪽 상단 참조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150-9번지)
2. 묘갈음기(墓碣陰記)
<경주정씨대관> 499쪽 ~ 500쪽 참조
3. 신도비명(神道碑銘)
<경주정씨대관> 500쪽 ~ 5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