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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수필가가 읽는 피천득 수필
- 잊을 수 없는 수필가 잊을 수 없는 수필들 -
1. 들어가며
40여 년 가까이 수필과 함께하며 수필을 써오면서 나에게 수필(문학)이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문학으로 함께 해 온 수필로뿐 아니라 내 삶의 힘들고 어려웠던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삶의 곳곳에서 수필은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었다. 때로는 치유로 때로는 회복으로 내게 다가와 준 수필이기에 나는 어느 문학 장르보다 수필을 사랑한다. 그것은 수필이 ‘나’라고 하는 실제 실존의 나이면서 진실한 나로 말하는 문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도 몇 권씩 배달되어 오는 수필집들을 받으면서 나는 한 권의 책이 아닌 그분들의 삶 전부를 받는 거룩한 부담감으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책을 받고 펼친다. 더러는 문학적으로 영글지 못한 작품도 있고 너무 식상하고 진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있다. 그렇다고 수필 속에 담겨있는 그분들 삶의 가치도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진실하고 솔직한 그래서 아이 같은 천진함이 묻어나는 글들 속에서 더 감동할 때도 있다. 수필은 그렇게 사람의 이야기, 사람내 나는 이야기면서 곧 그 사람이다. 이미 우리나라엔 비공식적 집계로 1만5천을 헤아리는 수필가가 있다. 종합문예지 외에도 월간⋅격월간⋅계간 등의 수필 전문 문예지가 무려 30종이 넘는다. 여느 장르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현상으로 이른바 수필문학의 전성기라 할 수도 있다. 고 이어령 선생은 21세기는 수필문학의 시대라고 하셨다. 모든 시대적 요구와 환경과 조건들이 수필문학의 시대를 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다. 물론 문학적 작품의 파괴력이 시나 소설 등 타 장르엔 못 미친다. 그것은 수필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 중 유일하게 실제의 나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내가 화자가 되는 수필만은 온전히 나의 문학일 수 있다.
오늘 이 귀한 시간에 시인인 금아 피천득이 아니라 수필가 금아 피천득의 문학 수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 하지만 이 글은 비평적 글이 아니다. 어쩌면 금아수필에 대한 한 독자의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수필가의 한 사람으로 금아 수필을 읽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쯤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서 거론된 작품도 지면상 그리고 제한된 시간상 내 마음이 먼저 간 것들임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2. 내가 아는 금아 피천득
금아 피천득은 1910년 한성부(서울)에서 출생하여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1946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26년 《신민》(新民) 2월호에 첫 시조 <가을비>를 발표했고, 1930년 4월 7일 《동아일보》에 시 <차즘>(찾음)으로 등단했다.(정정호) 그리고 193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抒情小曲)〉·〈파이프〉로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고, 잡지 《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과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하며 좋은 평을 받았다.
금아의 최초 수필은 1932년 5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은전 한 닢>이다. 이 수필은 한국수필가협회의 《수필문예》 제3집(‘72.4.1)에도 실렸었다.
금아의 문학세계는 시보다 수필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보는데, 그의 수필은 일상의 정감을 섬세한 필체로 서정시처럼 곱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인연〉을 비롯하여 〈수필〉,〈플루트 플레이어〉 등은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집으로 《서정시집(抒情詩集)》(상호출판사.1947)·《금아시문선》(1959)·《산호와 진주》(1969)·《삶의 노래-내가 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1993)·《생명》(1993)·《꽃씨와 도둑》(1997) 과 번역시집 《소네트의 시집》(1976) 이 있으며 영문판 시 수필집 《A Skylark》(2001)도 있다. 수필집으로는 《수필》(범우사.1976)·《금아문선》(1980)·《인연》(1996) 등과 《금아피천득 문학전집》(전 5권, 샘터.1997)이 있었는데 이번에 정정호 교수의 큰 수고로 《피천득문학전집》(전 7권, 범우사.2022)이 발간되어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제1회 한국수필문학상(1977)·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1991)·인촌상 문학부문(1995) 등을 수상했다.
금아 선생은 비교적 소수와 친분을 쌓았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소설가 춘원 이광수, 그리고 소설가 최인호와 박완서, 시인 이해인 수녀 등과 친분이 깊었다고 알려져 있다.
“낭만주의 시와 스피노자를 좋아했고, 명석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사셨다.”(제자 석경징 서울대학교 교수)는 금아의 수필집 《수필》은 한국 독서문화를 바꾸어 버린 범우문고 1번(범우에세이選은17)으로 1976년 4월 20일 초판 1쇄 발행(1979년 10월 20일 중판발행) 이후 1985년 7월 5일 2판 1쇄를 발행하며 20판 넘게 발행 되었으며, 2009년 5월 25일에는 피천득 수필집 발간 33주년 기념 특별 개정판으로 244쪽의 신국판에 언제 읽어도 친근감을 갖게 해 주는 그의 수필 15편을 추가 수록하여 특별판 양장본이 발간되기도 했다. 또한 수필집 《인연》은 1996년 샘터사에서 1판이 나온 후 2002년 2판, 2007년 3판이 발간되었으며, 2018년엔 민음사에서 한정판 선집을 내기도 하는 여전히 국민이 좋아하는 수필집으로 사랑을 받는 만큼 피천득의 《수필》과 《인연》은 명실공히 한국 수필 문단 뿐만 아니라 독서계에 큰 바람을 일으켰으며 사그라지지 않는 명저 명작으로 지금도 끊임없이 읽히고 있다. 그런 그가 2007년 5월 25일 11시 40분 9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우리를 안타깝게 했는데 특히 5월은 그가 태어나고 또한 가신 달로 더욱 그와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2010년 5월 29일 탄생 100주년을 맞기도 했다.
2007년 5월 25일 오후 11시 40분 금아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았을 때는 생각보다도 너무 한산한 장례식장에서 영정마저 외로워 보였다. 98세 생일(5월 29일)을 나흘 앞두고였다.
그는 1910년 5월 29일에 태어나서 태어난 달인 5월 25일 세상을 떠남으로 '오월' 이라는 수필을 남길 정도로 좋아했던 5월에 잠들어 진정한 5월의 수필가가 되셨다.
잠실 롯데월드 3층 민속박물관(송파구 올림픽로 240) 입구에 피천득기념관이 있다. 2008년 6월 5일 개관했다. 하지만 기념관만 있을 뿐 안내도 홍보도 없었다. 해서 문학인이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월간 『한국수필』로 등단한 우리 ‘한국수필작가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당번을 정해 도슨트 봉사를 하기로 했다. 처음엔 참여율이 괜찮았지만 봉사자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3개월쯤 되자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3명만 계속하다가 나 역시 시간이 맞지 않아 만 8년을 하고는 2017년에 그만두었다. 현재는 매 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금아 피천득기념사업회 김진모사무총장이 유소년들을 초청하거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행사를 하고 있다. 유소년에겐 피천득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일반인에겐 도슨트 봉사 및 금아와 사진직기 등으로 함께 하고 있다.
이 공간은 금아 피천득(1910~2007)의 생애를 담은 전시공간으로
첫 번째 테마 ‘금아를 만나다’엔 선생의 일생을 담은 연보를 통해 선생의 삶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고, 두 번째 테마 ‘금아의 이야기’엔 관련 유물 및 선생의 대표 저서들을 전시해 놓았으며, 세 번째 테마 ‘금아의 서재’엔 선생이 쓰시던 작은 침대와 책장, 책상, 아끼던 인형들과 생전에 기거하던 반포동 아파트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으며, 네 번째 테마 ‘금아를 추억함’에는 선생의 메시지와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영상관과 사진 촬영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생의 명시들로 꾸며져 있고, 다섯 번째 테마 ‘금아의 인연’엔 어머니, 딸 서영, 그리고 가까이하던 지인과 문인, 후배들에 대한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다.
기념관 중앙 좌측엔 금아 선생의 좌상이 있다. 앉아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다. 워낙 작은 체구시라 아이들이 앉으면 제격이다. 오래전 수필문학진흥회⋅수필공원 행사에 갔을 때인데 맨 앞자리가 비어있었다. 인사도 할 겸 앞쪽으로 나갔는데 거기 금아 선생이 앉아 계셨다. 워낙 작은 체구(體軀)시라 앉아계셨는데도 마치 빈 의자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선생은 작은 체구만큼 순수함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그의 순수함은 샘터사를 창설한 김재순 샘터사 고문과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30년 넘게 해마다 첫눈을 먼저 보는 사람이 전화를 걸기로 했단다. 전화를 먼저 건 사람이 이기는 거였다. 그만큼 둘은 순수하게 각별한 사이였단다. 그런가 하면 선생의 미수연에 참가했던 박완서 소설가가 나이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며 “사람이 저렇게도 늙을 수가 있구나" 하면서 그분의 늙음을 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분명 한국 수필문단에 참으로 큰 영향을 끼치신 분이다. 그의 수필 <수필> 그리고 <오월> 뿐 아니라 너무 일찍 절필을 하여 100편도 되지 않는 작품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이 명작 명품이 되고 있다.
3. 내가 좋아하는 금아의 수필
수필을 공부하고 쓰게 되면서 아이가 말을 배우는 단계처럼 선생의 <수필>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에 실렸던 <인연> <은전 한 닢> <플루트 연주자> <종달새> 등의 수필과 번역 단편소설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등은 어쩌면 한 시대를 산 우리 모두 타의적으로 금아 피천득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피상적이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 문학 특히 수필가 및 수필애호가에 끼친 영향도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게 되면서 선생의 수필을 다시 정독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선생의 존재감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금아의 수필은 시도 그렇지만 일찍 절필을 하셔서 많지가 않아 안타깝고 아쉽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세계는 1천편의 작품보다 크고 넓다.
정정호 교수가 엮은 《피천득문학전집 2》 수필집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는 제1부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 27편, 제2부 종달새에 34편, 제3부 인연에 30편 등 총 91편이 실려 있다. 아마 금아 선생의 수필 모두가 실렸다 할 것이다. 물론 제3권의 산문집 《꿀 항아리》의 작품들도 수필에 포함 시킨다면 할 수도 있겠으나 편집자인 정정호 교수가 구분한 것처럼 제2권의 수필만을 금아 수필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수필 중 최초의 금아 수필은 1932년 5월 8일 동아일보에 발표된 <은전 한 닢>인데 시적 정서를 중시하는 금아 선생이 시적 리듬감도 차용하고 소설적 기법도 활용하여 재미있는 콩트적 수필을 구사해 낸 것이 좋았다.
내가 상해(上海)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錢莊)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하ㅡ오(좋소).” 하고 내어준다. 그는 ‘하ㅡ오’ 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하ㅡ오.” 하고 던져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거치른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빼앗아 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원 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은전 한 닢>(1932)
이 수필은 금아의 공식적인 첫 수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금아 수필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나는 마지막의 소설적 전환이 좋았다. 콩트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의 수필에서도 이런 마무리가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알고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이런 전환은 수필의 재미와 맛을 함께 확보하는 좋은 방법이다. 내용을 보면 객관적 시각으로 늙은 거지의 행적을 담담하게 그리는데 그런 거지의 행동이 다분히 호기심을 느끼게 한다.
이 수필은 금아 선생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 곧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그 결과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모습을 통해 인간은 한 목표를 갖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목표함이 그 시대적 상황(물신주의 등)에서 나온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기보단 ‘나만’의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은전 한 닢을 소유해 보겠다는 맹목적인 인간의 소유욕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현대인의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욕망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거지의 한 마디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 내지 소유욕에 목표가 있어야 삶도 강단지게 살아갈 수 있다는 복합적 교훈도 깨닫게 한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하는 거지의 대답을 끝맺음으로 한 것도 그가 하려고 했던 더 많은 생각과 말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독자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함으로써 읽고 난 후에까지 긴 여운으로 남게 하는 현대수필이 지향해야 할 좋은 수필작법을 제시했다 할 수 있다.
같은 해 발표한 <어머니의 사랑>과 <장미>가 있는데 <장미>도 좋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다분히 동화적이다. 최근 동수필(童隨筆)에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어머니의 사랑>은 동수필로 봐도 될 것이다. 특히 금아 수필에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내지 엄마 사랑이 중심 주제로 나타나는데 <어머니의 사랑>은 금아가 스물두 살이란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 10년도 더 지났음에도 더욱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그땐 후장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타국 외지에서 외롭게 공부하던 그에게 어머니의 존재가 더욱 사무치도록 그리웠을 것으로 추측되어 짠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수필은 지난 일에 대한 추억이 글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금아 수필 역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고 이후 <엄마>나 그 외 작품들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곧 열 살 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의 잠재적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기억들이 여러 작품을 쓰게 했을 것이다.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심적 현실의 표현은 내가 체험했던 경험적 자아들을 건드려 잠재된 욕구와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힘을 뻗치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냥 보면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금아의 수필들은 내면에서 큰 회오리를 겪는다. 하지만 그것이 밖으로 글이 되어 표출될 때는 평화롭게 전개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금아 선생의 수필은 아리거나 보드랍게 가슴으로 스며든다.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잔잔하고 소소한 그러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함과 진지함이 느껴지게 한다. 그게 금아 수필을 읽게 하는 맛이고 멋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 같은데 주고 있는 것이 크고, 눈여겨 보는 것 같지 않은데 주시하고 있다는 묘한 느낌으로 작품이 스며오곤 한다.
그렇게 보면 <시골 한약국>(1956)도 그렇다. 한약방이라면 당연히 아니 필히 갖추고 있어야 할 약재료인 녹용과 인삼조차도 구비 해 둘 수 없는 가난한 시골 한약방의 설정은 사실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출발이 될 것이라는 소설적 필연성과 구조성을 갖는다. 거기에 ‘사-오십 리나 되는 청양이라는 곳에 가서 내 돈으로 나 먹을 약재를 사고 약국을 해 먹으려면 꼭 있어야 된다는 약재를 사도록 돈을 주었다.’는 것은 또 어떤가. 이쯤 되면 작가의 인간 됨과 당시의 인심을 짐작케 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크고 맑은 종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금아의 수필이 갖는 문학적 파괴력 내지 마력(魔力)이 바로 이런 거다. 거기다 그 시골 한약방의 약재 같은 내 책을 보면서 ‘나는 그 시골 약국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런 게 수필이라 생각한다. 수필은 곧 ‘사실-진실’이기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잔잔한 감동의 파고가 오래도록 느껴지게 한다. 특히 구성이 긴밀하고 주제도 뚜렷하고 결론도 확실하여 쉽게 읽히면서도 긴장감을 갖게 하면서 재미있게 읽힌다.
나는 학생시절에 병이 나서 충청도 어느 시골에 가서 몇 달 휴양을 하였다. 그 때 내가 유하던 집 할아버지의 권고로 용하다는 한약국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한 제 지어 먹은 일이 있다.
그 의원은 한참 내 맥을 짚어보고서는 전신 쇠약이니까 녹용과 삼을 넣은 보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 약방에는 약재가 없고 약 살 돈도 당장 없다고 하였다. 사실 낡은 약장에는 서랍이 많지 않았고 서랍 하나에 걸려있는 약저울도 녹이 슬어 있었다.
약국 천장을 쳐다봐도 먼지 앉은 약봉지가 십여 개쯤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내 마음이 그에게 끌렸던지 그 이튿날 나는 그 한의와 같이 사-오십 리나 되는 청양이라는 곳에 가서 내 돈으로 나 먹을 약재를 사고 약국을 해 먹으려면 꼭 있어야 된다는 약재를 사도록 돈을 주었다.
약의 효험인지, 여름 시냇가에 날마다 낚시질을 다니고 밤이면 곤히 잠을 잔 덕택인지 나는 몸이 건강해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돌려주었던 그 돈은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후 「세익스피어」의 극 『로미오와 줄리엣』 속에서 로미오가 독약을 사는 약방이 나올 때 비상조차 없을 충청도 그 시골 약국을 회상하였다.
양복 한 벌 변변한 것을 못해 입고 사들인 책들을 사변 통에 다 잃어버리고 그 후 5년간 애면글면 모은 나의 책은 지금 겨우 삼백 권에 지나지 아니한다. 나는 이 책들을 내가 기른 꽃들을 만져보듯이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듯이 대견스럽게 보기도 한다.
물론 내가 구해 놓은 이 책들은 예전 그 한방 의사가 나한테서 돈을 취하여 사온 진피, 후박, 감초, 반하, 행인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황, 웅담, 사향, 영사, 지금정 같은 책자들이 필요할 때면, 나는 그 시골 약국을 생각하게 된다. <시골 한약국>(1956)
그런가 하면 부성(父性)이기보단 모성적(母性的)인 금아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서른일곱 살에 낳은 서영이 열두 살 때다. 29세에 결혼하여 바로 세영을 낳았고, 33세에 수영을, 그리고 서른일곱에야 서영을 낳았으니 딸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겠는가. 그러니 자신이 엄마에게서 받고 싶었던 사랑까지를 포함하여 엄마가 가질만한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아빠인 금아에게서 다 나타났던 것이다. 어쩌면 금아의 그런 모성적 생각과 행동은 다분히 일찍 여윈 어머니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역반응적 사랑일 수도 있다. 그런 심적 반응이 수필 <어느 날> 속의 대화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아침 6시 반이 되어도 깨지를 않았다. 산에 안겨서 잠든 호수와 같이 서영이 숨결에는 아무 불안이 없다. 더 재우고 싶었으나 5분 후에 그 단잠을 깨웠다. 세수하는 동안에 시간표에 맞추어 책을 가방에 넣어주었다. 엄마보고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주라고 했다.
아침 10시까지 오늘 강독할 프랜시스 톰프슨의 「하늘의 사냥개」를 오래간만에 읽어보았다. 모호한 데가 몇 군데 있다.
오후 5시에 집에 돌아오니 서영이가 아직도 학교에서 아니 와 있다. 엄마보고 이웃집에 가서 전화를 걸어 보라고 하였다.
“3시 반에 파했다는데요.”
바깥은 벌써 캄캄하여 온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버스에서 내리는 작은 여학생은 다 서영이 같았다. 나는 3시경에 다방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서 데리고 올 것을 잘못하였다. 어디를 갔을까? 오늘 청소도 아닌데…….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서영이는 버스에서 내리더니 학교에서 놀다가 왔다고 한다. 나는 나무라지 않았다.
“버스에 사람 많지? 자꾸 밀리지 않던?” 하고 물어보았다.
서영이는 숙제를 하다가 잠이 들고 나는 늦도록 ‘아미엘’을 읽었다. 자기 전에 낮에 강독한 「하늘의 사냥개」 속의 모호한 곳을 다시 읽어보았다.
석연하여지지 않는다. 자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영이 얼굴에는 아무 불안이 없다. <어느 날> (1959)
‘금아’ 하면 떠올려지는 작품이 <수필>이다. 그런데 이 수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린다. 수필가의 입장으로 보면 감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수필에 대한 정의처럼 회자되고 있는 이 수필 작품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필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가까이까지 왔다가 그 주위만 맴돌다 가버리기도 하고 수필을 쓰는 수필가들까지도 수없이 인용하면서도 상쾌한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문구가 첫 시작 부분이다. 명문으로 자타가 인정하면서도 그 문장이 품고 있는 내용 곧 실제적 의미가 내 것으로 만들어지기엔 너무 차원이 높거나 구체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현실 속에서 수필작법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결국 임계점(臨界點)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유에서다. 청자연적, 난, 학, 청초하고 몸 맵씨 날렵한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 그게 수필이라니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려지지도 잡히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라거나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도 그렇고 특히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문학의 구조성을 외면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문학적일 수 없는 글이라는 말도 된다. 한 번 읽어보자.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 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또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이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차알스 램(C. Lamb)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1959)
아름다운 문장,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처럼 아 이것이구나 하고 맥을 짚어낼 수가 없는 부분들이 있다. 알 것 같기는 한데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금아는 수필이란 삶에 대한 조용한 반성이라고 하면서 수필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없는 내 생활 때문이라는 자아성찰로 끝내면서 나는 수필을 이렇게 쓰고 쓰려 한다는 수필론으로 펴고 있다.
이에 대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수필가 윤오영은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라고 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피요 눈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 했지만 때로는 남성적일 수도 있다‘고도 했고, '수필은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고 했지만, 모든 것이 신기하고 청신하게 느껴지는, 때 안 묻은 소년의 글일 수도 있으며, 인생을 회고하며 생을 거의 체념한 노경(老境)의 글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이상 《수필문학입문》(윤오영.1980.관동출판사) 144쪽)
윤오영 뿐 아니라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읽는 이마다 받아들이는 정도들이 다 다를 수 있다. 어떻든 이 <수필>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글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수필 하면 떠오르는 피천득 그리고 수필의 정의처럼 아니 모범 수필론처럼 된 <수필>이 교과서에 실렸으니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도 염려가 큰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수필의 정의를 논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그리할 것이기에 수필 발전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또한 금아 선생이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만 수필을 써야 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많은 수필론 중 하나로 이를 기점으로 더욱 다양한 많은 수필론을 펼쳐달라는 선생의 소망이 담겼을 수도 있다.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 또한 긍정적인 면을 불러오는 일이 될 것이다. 콕 찝어서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아니잖느냐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개인차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정도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시나브로 어느 날 그게 다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를 보완하는 보다 좋은 내용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케 한다면 그게 바로 발전하는 모습도 될 것이다. 어떤 표현도 다른 많은 해석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 해석이 씨앗이 되어 풍성한 추수감을 만든다면 농사는 풍작 아닌가. ‘수필’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여준 금아 선생에게 내 이해도에 따라 누구나 다른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 그림은 계속 더 많은 의미와 이야기도 말하게 할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발전이 아닐까.
혹자는 수필문학의 지평을 은연중 한계짓게 하는 왜소화의 요인으로 지적하면서 금아의 작품이 수필문학의 전범이자 본령이며 정통이고 주류요 본류라 강요하는 것 같다고도 하지만 이 또한 많은 생각들 중 하나가 아닐까. 나 역시 금아의 마음과 뜻이 다 이해되진 않았어도 대부분의 뜻이 몸에 젖어 들듯 이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 논란의 작품이 <인연>이다. <수필> 이상으로 많이 회자 되는 작품이다. 구성은 현재에서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가장 일반적인 3단 구성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역시 긴밀한 구성, 주제가 뚜렷하고 결론이 확실한 작품이다.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聯想)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았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10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인연>(1973.수필문학)
사실이냐 아니냐, 이다 아니다로 논란이 있지만 ‘허구’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할 말이 많다. 송명희 교수의 생각을 먼저 들어본다.
<인연>은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이다. 피천득은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아사꼬의 이야기를 쓴 「인연」에서만이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시절에 만났던 간호사 '유순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유순이」라는 수필에서도 허구적 양식을 차용하고 있다. 「인연」과 「유순이」란 두 작품에서의 1인칭의 화자는 분명 실제작가인 피천득과 동일인물이다. 하지만 이 수필에서 그리고 있는 사건의 중심인물(주인공)은 아사꼬와 간호사 유순이로서 저자-화자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르죈식으로 말하자면 저자와 화자는 동일인이지만 주인공은 동일인이 아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 즉 아사꼬와 유순이라는 여성과의 만남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양식적 측면에서 두 작품은 허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즉, 사건이 있고, 서술하는 화자가 있다는 점에서 서사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마치 1인칭 관찰자 서술의 소설처럼. 하지만 두 편의 수필은 그리고 있는 내용이 작가 피천득이 직접 경험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아니며, 길이도 짧아 서사적 수필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이처럼 피천득의 수필은 경험적 사실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수필에서 허구성 수용은 수필의 내용을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허구가 수필에서도 허용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법적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작가적 양심에 맡겨야 할 문제일 것이다. 허구를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한 사실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해야 하느냐의 문제라 본다. 하기에 그 증명도 작가 본인만 할 수 있다. 한 때 많은 감동의 작품으로 읽혀지던 일본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란 작품이 만들어진 동화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실망감을 느꼈던 일이 있다. 내용상 달라진 건 없는데 그것이 사실이었느냐 만들어진 허구였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차이가 너무나 컸던 것이다. 독자의 그런 감동을 겨냥하여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문학화 한다면 이는 독자를 기만한 것 뿐 아니라 문학을 기만한 것이다. <인연>에 대하여도 사실이냐 아니냐를 거론하는데도 작자가 아니라 하면 아닐 것이다. 훗날이라도 사실이 아니었다고 하면 <우동 한 그릇> 같은 일이 벌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김기림의 <길>은 분명히 수필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많은 닝송가들은 그걸 시로 낭송한다. 작가는 수필이라 했는데 읽는 이가 그걸 시로 보는 경우다. 이처럼 작품은 작가를 떠나면 독자의 것이 된다. 해석 또한 독자의 몫이다. 작가적 양심을 믿고 작품으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문학의 방법이 아닐까. 물론 수필이 허구이면 안 되는 것은 수필이기 때문이다. 허구라면 소설이나 동화여야 한다. 사실을 얼마나 진실로 문학화 하느냐의 능력이 좋은 수필을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금아의 수필 중 <送年>(1969)과 <晩年>(1976)은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 해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유언장’이란 소제를 달고 나온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 날》(황금찬 도종환 외. 2006. 경덕출판사)에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갔구나>란 제목으로도 실려있다. <송년>에선 ‘올해가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슬퍼할 것은 없다. 나의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내 병은 자기와 술 한 잔 마시면 금방 나을 것이라고 하니 그와 적조하게 지내지 않는 한 나는 건강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춘(早春)같은 서영이가 시집갈 때까지 몇 해 더 아빠의 마음을 푸르게 할 것이다.’(위 책 196쪽)라고 했고, <만년>에선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염치없는 사람이다.‘ (위 책 196쪽)라고 했다.
두 작품을 읽다 보면 가상유언장으로 묶인 만큼 선생의 삶을 정리하는 내용으로 읽힌다. 한 해의 마지막이나 생의 마지막이나 마지막을 맞는 마음은 같지 않을까. 하지만 선생은 <송년>에선 서영이와 한 해라도 더 살고프다는 소망을, 그리고 <만년>에선 인생의 마지막 뒷모습을 생각하며 쓰신 것 같다. 문인은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글과 함께 생의 뒷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선생의 ’사랑의 생활철학‘이 스며나는 작품이다.
금아의 수필은 자연과 파격이 공존하면서도 그 글 속에서도 가고자 하는 길을 분명히 한다. 결코 금아 문학의 본질인 정(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정은 단순한 사람과 사람의 정만이 아니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 나라를 생각하는 분노와 절망까지도 정 속에 담는다. 그래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적인 균형을 도모하고 지나친 자유로움을 경계한다. 그런 제한과 경계 안에서 다시 균형을 찾는다. 가지런함과 어긋남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무엇인지를 소곤대는 말처럼 조용히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공감으로 제압한다. 그가 받은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동양의 여백미와 서양의 구체성 그리고 금아만의 개성과 무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금아의 사랑은 ‘사랑해서 아팠고, 사랑을 못해서 아팠다’는 시인의 시구처럼 아픔과 사랑, 사랑과 아픔까지도 엄마 아사코 유순이 서영이라는 세월과 인연의 끈의 흐름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조용하면서도 나지막하게 평화를 연주하는 실내악이 된다.
4. 나가기 - 왜 금아 수필들을 좋아할까.
금아의 수필은 ‘천진성(天眞性)의 미학, 그 정(情)의 이랑’이라고도 하고, ‘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면 사계절이 내 앞에서 조용히 스미었다 사라지고 말 없는 어떤 사람 하나가 사색하듯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우리네 소소한 일상과 삶과 인생이 아주 천천히 슬쩍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고도 한다.
인격에서 향기가 풍겨야 수필의 꽃이 필 수 있다면서,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인품이 전하여져 왔습니다. 그 논거를 대라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경험한 사실들, 생사를 가르는 난관에 처했을 때의 처신, 혹은 이해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피천득 선생의 글에서는 그가 경험한 사실 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분에게는 사(邪)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라고도 한다.
정목일은 그러한 현상을 금아의 수필이 시적인 문장이요, 서정적인 문장이요, 고결한 인품이 담긴 문장이요, 순수하고 투명한 동심의 문장이요, 여성적이며 유미적인 문장이어서라고 했다.
알베레스는 ‘수필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 했다. 순수하고 깨끗한 정서의 흐름, 폭넓고 깊이있는 학식과 사색, 비판력과 통찰력이 없으면 지성적 기반은 서지 않는다.‘며 수필의 예술성을 말하면서 수필의 내용에 대해서는 ‘수필은 불평과 불만과 격정과 관대가 발효되어 자연이 유로된 문학’이라고 했다. 수필의 예술성이나 내용성은 여타 문학과는 분명히 다르다. 문학이라는 창작품인데도 수필에서의 창작은 경험적인 것에 문학적 상상을 더한 창작이다. 그래서 ‘수필은 자유로운 산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자유로운 산문이다.’ (수필문학입문, 윤오영,1980.관동출판사,156쪽)라고 하는 것이다.
금아의 친구인 윤오영은 ‘수필이란 가장 오래된 문학 형태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문학 형태요, 아직도 미래의 문학 형태인 것이다. 원래 옛날에는 문학이라는 귀글과 줄글이 있었으니 즉 시와 문이 문학의 양종이다. 소설이 등장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훨씬 후세에 있어서이다. 수필이란 곧 이 문에서 발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활동은 과거의 모든 문학 형태나 인습이나 구속에서 탈피하려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기에 수필을 아직도 미완성 미정립의 문학 형태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일면 정당한 견해로 이 문장이야말로 영원의 미완성을 희망할지도 모른다. 이 진정한 문학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수필은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것, 배우지 않고 붓 나가는 대로 쓰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수필문학입문, 윤오영,1980.관동출판사,1157-158)라고 했는데 이는 금아의 ‘붓 가는 대로’에 대한 해명도 될 것이다. 문학정신이 근간이 된 새로운 문학형태가 수필이고 틀에 얽메이는 것이 아니라 틀이 보이지 않으면서 틀을 더 정확히 유지하는 고난도의 무형식이 바로 수필이기에 ‘붓 나가는 대로’는 이미 경지의 작가가 써나가는 글인 것이다. 중년 이상의 문학, 그것은 어느 정도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 ‘척하면 척’일 수 있는 삶의 사람들이 그 무르익은 생각을 거침없이 풀어내는 붓 가는 대로인 것이다.
이번에 이 귀한 시간을 통해 금아 선생의 수필을 다시 정독하면서 그의 수필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정목일이 말했던 그런 이유 외에도 그냥 잘 읽힌다는 것을 들고 싶다. 왜 읽힐까? 읽히니까 읽고, 읽고 싶으니까 읽는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나는 위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장미>(1932) <유순이>(1933) <오월>(1969) <종달새>(1963) <파리에 부친 편지>(1969) <여린 마음>(1978)을 특히 좋아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 개인적으로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시대에 금아 선생이 살아주셨다는 것이 감사하고, 100편도 안 되는 그의 수필이지만 한 편 한 편이 더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수필인 것을 재인식 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음이 기쁘기 한량없다. 다시 한번 귀한 기회를 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최원현 nulsaem@daum.net
수필가⋅묺락평론가. 1951년 전남 나주 출생.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월간 한국수필 발행 겸 편집인.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펜문학상⋅대한민국예술문화공로상 수상 외,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등 18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 중학교《국어1》《도덕2》등에 수필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등에 수필 이론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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