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지하철 만남의 장소.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휴게의자, 커피 자판기, 공중전화 부스가 하나 있고, 객석을 향해 정면으로 물품 보관함 (코인 라커) 이 놓여 있다. 가로 여섯 칸, 세로 다섯 칸 해서 모두 삼십 개로 구획된 보관함은 이 연극을 이끌어 가는 주요 소도구이다. 지하철역 구내로 들어오는 입구와 개찰구가 등. 퇴장구로 쓰일 것이다. 무대 오른쪽에는 화장실 표시가 붙어 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전동차가 도착하고 떠나는 소리 끼여든다.
[장] 1장
(조명 밝아진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구내 방송이 사이사이 삽입되어서 좋다. 양복을 잘 갖춰 입은, 그러나 왜소한 중년의 한 신사가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난다. 주위를 살펴보고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보관함을 연다. 보관함엔 작업화, 작업복, 연장 가방 등이 들어 있다. 다시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에 서류가방을 박스 한 쪽에 넣고는 작업복 일습을 꺼낸다. 화장실로 향한다.)
[장] 2장
(노인과 노파, 구내에 들어선다. 노인은 자판기에서 율무차 한 잔을 빼 노파에게 건넨다. 노파는 목도리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데 몸이 몹시 쇠약해 보인다. 기침 소리)
[노인] 거봐, 내 뭐랬어. 아침 바람이 몸에 해롭다니까 는, 굳이--- .
[노파] 이렇게 아침 일찍 문 여는 복덕방이 있을까요?
[노인] 복덕방엔 왜 가누, 동리 사람들 일 나가기 전에 알아보려는 게지--- . 애들이 안면 웃어요, 땅금이 얼매나 되는지 시세도 물어 보잖고 무작정 가면 어쩌게요?
[페이지] 002
[노인] 암말 말구 임자는 보구만 있어. 내 양지바른 쪽으로다. 까치발 짚으면 바로 고향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두 자리 정하고 올 테니까.
(중년 신사, 화장실에서 나온다. 먼지투성이의 작업복 차림, 아까 와는 딴판인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일별하고는 휴게 의자 한쪽에 양복과 와이셔츠, 바지를 가지런히 놓고 구김이 가기 쉬운 부위마다 일일이 종이 막대를 끼운 다음 잘 갠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집행하는 것처럼 진지하다. 그리고 보관함에 옷들을 가지런히 집어넣는다. 마지막으로 서류 봉통에 구두를 넣고 보관함 문을 닫아건다. 사라진다. 노인, 일어서서 보관함 쪽으로 다가간다. 나일론 끈으로 묶은 꾸러미 하나를 함에 넣는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 한 개 한 개 투입구에 밀어 넣는다.)
[노인] 그거 또 들고 나왔수?
[노인] 나헌테 낙이라고는 저거 모으는 재미 밖에 더 있어? 이녁이 나헌테 시집올 때 해온 이불이 생각나네. 명주 솜 그 귀한 거를, 난리 때 없어졌지?--- 임자 잔디 이불은 내 해주지! 자, 이거 임자가 갖고 있어. (보관함 열쇠를 내민다)
[노파]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집에 둘 일이지, 뭐 하러 자꾸 들고 나와요?
[노인] (버럭 화를 내며) 치워 버리는 데 선수잖아? 내다 버리고, 아무나 줘 버리고! 되박이며, 버들고리며, 얽으미, 뒤주, 키! 그 뿐이여? 제사가 뭔 소용이냐고 들엎구서리 목기 그릇 그 귀한 걸 모두 내다 팔지를 않나!
[노파] 노염 푸세요. 없는 살림이니 어쩌겠수. 방 두 칸에 그런 거 쟁여 둘 데도 없어요--- 애들은 우리 죽으면 화장헐 것 같습니다. (보관함을 가리키며) 저거 다 소용없어요.
[노인]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화가 솟구쳐 바닥에 떨군다) 누가? 누가 불구덩이에 나를 넣어? 뼈라도 이빨이라도, 머리카락 한 줌이라도 있어야 묘 자릴 쓰지! 태워 버리고 말면 고향엔 뭘로 묻히나? 묘 자리라도 써야 낭중에 이장이라도 할 거 아닌가? 사람은 죽어서 태를 묻는 곳으로 돌아가 묻혀야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 장돌뱅이로 안 태어나는 거여, 철이라 군 약에 쓸래두 없는 고얀 것들! 내 그것들을 어떻게 믿어? 죽기 전에 아부님 어무니 묘를 찾아 뵙고 사초라도 내 손으로 해 드려야 할틴데--- 저거 뿌려 키울 땅 한 뙈기가 있나? 의지 삼을 제대로 된 자식이라도 있나---
[노파] 다 사는 게 힘에 부쳐 그러지요. (한숨) 우리 살아선 틀렸어요, 죽어서나 넘어갈까--- 가지 마세요. 어째 꿈자리도 뒤숭숭 헌 게--- 누가 즈이 산 한쪽 뚝 떼어 묘 쓰라고 내 주겠수--- .
[노인] (담배를 피워 물고 깊은숨을 내쉰다.) 넘겨다보면 이 십리여, 걸어서 한 시간 으믄 갈 고향인데--- 눈앞에 선산 두고 묘 자리 얻으러 다녀야 하는 꼴이라니. 머슴살이 허는 것도 아니고--- (끙하며 일어난다) 내 당겨 오리다. 어여 들어가.
[노파] 이거 시장 허면 드세요. 요기할 때라도 있을라는지. (비닐봉투에 싼 것을 내민다)
[노인] 됐어.
[노파] 가져가요. 어느 녘에 오실라우.
[노인] (벌컥 화를 내며) 아, 됐다니까! 이노무 처지 생각하면 생목이 올라 꿀물이라도 맥힐 판인데 인절미는 뭔 인절미여! 내둥 기다리고 있지 말구 집에 가. 한나절은 걸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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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그냥, 바람쐰다 생각허구 한 바퀴 휘 둘러보고 오셔요.
[노인] 내 걱정은 말구 어여 들어가--- 못 참겠다 싶으면 약 먹구, 쓴 물 올라오면 박하사탕 한 봉지 사다 먹어. 돈 애끼지 말고. 내 댕겨 오리다.
(노인, 개찰구 쪽으로 사라진다.)
[노파] 안 갔으면 좋겠구만---
(노인이 떠난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돌아선다.)
[장] 3장
(한 눈에 봐도 시골에서 막 올라온 모습을 한 50대 여인. 손에는 잔뜩 짐을 들었다. 여인은 의자에 짐을 부려 놓는다. 그 중 보자기로 싼 나무상자를 특히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올려 놓고 공중전화로 다가선다.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여인] 에미다! 에미 서울 왔어야. 올 게 꿀 농사를 다 끝난 농사여야. 산사태루 반 넘게 묻히구 초여름에 받아 논 거 인저 한 병 남었길래 안되겄다 허구 갖구 올라온겨. 평소에 니 뒤봐주는 상사 어른 좀 이참에 찾아 뵐라고 그랴.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른다) 뭐가 부끄릅냐! 니 근본이 부끄런 것이여? 에이 없으면 니두 없다! 명심해라. (좀 죽어 든다.) 특 상품 이며, 빛깔이 진헌 게 조청 같어야. 그려 그려. 내 봉천동 고모네 들렸다가 가게로 갈팅께 지녁은 같이 져 묵자. 찬거리도 쪼매 가져왔어야.
(앳되 보이는 군인 하나가 뒤에 와 선다. 그의 팔에는 큰 곰 인형이 안겨 있다. 여인은 군인을 돌아보고는 마음이 바빠진다.)
[여인] --- 운냐, 보오얀 사기 항아리에다 잘 넣어왔제. 참, 들구댕길라니까 영 갈고 치고. 느이 고모 득달걸이 달려들어 좀 덜어 달라고 그러면 워쩌나 싶고! 와 지난번에도 위장이 쓰리네. 눈알이 누르팅팅하네 속이 뻔한 소리 해 싸느만 과부 올케 뭐 보태 주기는커녕 누가 시집 식구 아니랄까 봐 앗아갈라 고만 그러니, 얼굴 보는 것두 겁난다 야. (뒤에 서 있는 군이을 위식한다. 말이 급해진다) 여게 파출소나 우체국 같은 디선 물건 안 맡아주냐? (뭐라 그러는 모양이다) 알았어야. 해본 소리제.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나두 그 정도는 안당께. 에미를 바보로 아는겨? --- 그려! 엉? (주위를 둘레둘레 살핀다. 보관함이 눈에 들어온다.) 그려, 있다. 벌집 맨크롬 쪽허니 서 있네 야. 잉, 잉, 그려! 뭐? 칠 백이나 되야? 뭐가 그리 비싸냐? 운냐. 공중전화니께 (군인의 눈치를 힐끔 본다. 군인,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리다가 갑자기 변의를 느끼고는 화장실로 향한다.) 그려. 갖구댕기다가 흘리고, 깨지고 뭐 그른 거 보담은 낫겄지. 운냐, 알었다. 그려, 들어가거라.
(전화를 끊고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낸다. 보관함 안에 옷 가방이랑 찬거리, 곡식 보따리를 먼저 넣는다. 맨 나중에 보자기로 잘 여미어 싼 나무상자를 넣는다. 문을 잠근다. 몇 번이고 잘 잠겼는가 확인한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다가 안심이 안 되는지 지갑에 넣었다. 양말에 넣었다 여러 번 단속 끝에 목걸이를 풀어 열쇠를 끼운다. 다시 목걸이를 건다.)
[여인]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홀가분 허긴 하네. (바삐 자리를 뜬다.)
[페이지] 004
[장] 4장.
(얼굴빛이 창백하고 피로에 지쳐 보이는 한 청년이 쇼핑봉투를 들고 보관함 앞에 선다. 다리 사이에 봉투를 끼운 채로 보관함을 연다. 잔뜩 들어 있는 전단들, 봉투에 나누어 담는다. 사라진다.)
[장] 5장.
(곰 인형을 든 군인, 공중전화를 건다. 몸에 군기가 배어 있다.)
[군인] 육군 3811 젓가락 부대, 김병일 이병! 휴가 나와 신고함다! 예, 편지는 받으셨습니까? 예, 만나고 싶슴다! 깜짝 놀랄 선물도 준비했슴다! 선미씨허고 저허고, 펜팔로 오간지 백일을 기념하는 선물임다! 지금 회사 앞임다! 예? 아, 퇴근시간까지 꼼짝 않고 대기하겠슴다! 선미씨 사진을 요짝 가슴에 딱 품고 있응께 염려 놓으십쇼! 예, 예! 정 그러시면 영화라도 때리고 오겠슴다! 2번 출구 쪽에서 여섯 시까지--- 예! 이따가 뵙겠슴다! 선미씨 먼저 끊으십시오! 아닙니다! 먼저 끊으십시오. 먼저 끊으십시오1 그럼 동시에 끊겠슴다. 하나, 둘, 셋!
(수화기를 놓고. 의기양양해져 휘파람을 분다. 문득 옆구리에 끼고 있던 곰 인형을? 떠 오리고는 난처해한다. 보관함이 눈에 뛴다. 보관함을 열고 곰 인형을 집어넣으려 애쓴다. 인형이 너무 커서 안 들어가자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다시피 집어넣는다. 인형은 몸이 반 접혀 겨우 들어간다. 안도의 한숨, 동전을 넣고 문을 잠근다. 씩씩하게 퇴장한다.)
[장] 6장.
(흰 보자기로 정성껏 싼 나무 상자를 목에 걸고 검은 양복 차림이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의 목에 걸린 것은 유골 함이다. 전화를 건다.)
[남자] 어, 나야, 그래 다 끝냈어. 내 할 도리는 다 한 거지. 아니, 형한테 말길 거야. 배는 다르지만 씨는 같으니까. 그 씨를 떨군 아버지가 하늘로 돌아갔는데 나 몰라라 하진 않겠지. 그래. 이제 홀홀 단신이다.--- 니네 부모님이 부모까지 없는 반 거들 충이 나한테 딸자식 내줄 라는 가 모르겠다. 하기야 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니가 더 고생이지만, 아니, 못 쉬어. 거래처에 들려야 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야. 어, 오늘은 못 볼 것 같다. 형 만나야지. 그래도 장자인데, 아버지 유골은 거두겠지. 그래. 보고 싶다. 전화할게. 그래, 끊는다.
(보관함을 열고 유골 함을 집어넣는다. 잠근다. 두어 번 문짝을 흔들어 확인하고는 퇴장한다.)
[장] 7장.
(노파는 돌아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한 여인이 소녀를 끌듯 데려와서 휴게 의자 한 구석에 앉힌다. 소녀는 한 눈에 어딘가 비정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여인] (윽박지르듯) 징징거리지 말고 가만있어! 아유 내 못살아, 못살아! 너 먹여 살리느라고 손금이 다 지워졌다, 이년아! 자꾸 징징대면 엄마, 너 놔두고 손가락에 불댕겨 갖구 하늘로 올라 갈란다. 알았어?
[노파] (졸음에 겨운 눈을 애써 뜨고는 소리나는 쪽을 바라다본다.)
[소녀] 음, 음, 음마! 쪼꼬레, 쪼꼬레!
[페이지] 005
[여인] 으이그, 아귀가 따로 없지! (핸드백에서 쵸컬릿을 꺼내 소녀의 손에 쥐어 준다.)
[소녀] (허겁지겁 받아 입에 넣었다 뺐다 핥아 댄다. 몹시 아껴 먹는 것이다.) 마시쪄, 마시쪄
[노파] 어쩌다 쯧쯧.
[여인] (한숨) 무슨 팔잔지. (배를 가리키며) 요기 이 애물단지가 들어설 때 그날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고, 날이 궂더니만 얘가 이렇게 태어났지 뭐예요. 아유 내 이것을 낳은 뒤로 한 번 얼굴 피고 웃어 본 적이 없답니다.
[노파] 마음 고생이겠수.
[여인] (핸드백에서 콤팩트를 꺼내 화장을 고치면서) 할머니는 어디 다니러 오셨어요?
[노파] 근처에 살아. 영감이 어딜 좀 다니러 갔어. 기다리는 중이라우.
[여인] 의도 좋으셔라. 어딜 가셨는데요.
[노파] (쓸쓸히 웃으며) 저기 고향 가까운 데 집 한 칸 마련하겠다고. 거기서 둘이 의좋게 살자고--- (말꼬리를 감춘다.)
[여인] 좋으시겠어요. 그래도 젊어서 벌어 놓은 돈이라도 있으신가 봐. 늘그막엔 그저 텃밭이라도 딸린 시골집을 한 채 사서--- (소녀의 얼굴이 쵸컬릿으로 뒤범벅된 것을 본다.) 아유, 내 못살아, 못살아! (휴지를 꺼내 주며) 화장실 가서 닦구 와! (소녀의 등짝을 후려치며 내몬다. 소녀, 비칠비칠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