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지역을 중심으로한 북부지역의 기독교 전파
부루언 선교사의 선교장면
안동 지역의 기독교 전래와 수용은 2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선교사를 만나기 전에 전도서적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선교사에게 학습을 받은 형태와 다음으로 먼 지방을 여행하던 중 선교사들의 전도지를 받고 복음을 영접한 형태이다.
첫 번째로 전도서적을 읽고 예수를 영접한 경우를 살펴보자. 안동 지역에서의 최초 학습자를 말한다면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에 사는 홍재삼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안동 장터에서 구입해 온 전도서적을 읽고 난 후 크게 감동을 받고 기독교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안동 와룡에서 대구까지 두 번이나 왕래하면서 선교사를 만나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안동에서 대구까지는 걸어서 3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의 복음을 선교사들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그 감격을 이웃 주민들과 나누었으며 함께할 신앙의 동지들을 찾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살던 곳에서 3km정도 떨어진 방잠에서 이호명이라는 사람과 김성복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이호명은 평창이씨로서 카톨릭 최초의 영세자로 알려진 이승훈의 후손이다. 그리고 김성복은 광산김씨인데 원래 의성 탑리에 살다가 예수를 미리 믿고 방잠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교회가 방잠교회이다. 이곳 방잠교회는 예안면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예안은 훗날에 안동지역 3.1운동의 출발지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당시 대구 선교지부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살펴보자. 미국 장로교 대구 선교지부사에 의하면 대구 선교지부는 1899년에 미국 개신교 북장로회가 공식적으로 개설하였다. 당시 선교사로는 안의와(J. E. Adams), 어학선생으로 김재수 등이 1897년 11월 1일에 대구에 도착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안의와(J. E. Adams)의 매형인 배위량(W. M. Baird) 선교사가 1893년 밀양, 청도, 대구, 안동을 순회 전도한 사실이 있다. 그는 1896년 1월부터 약 1년간 대구에서 초가 5동과 와가 4동을 구입해서 복음을 전한 후 대구를 떠나 마펫(S. A. Moffett)과 함께 평양신학교에서 교육담당으로 사역하였다.
1902년 3월 안동 지역에도 선교사가 방문하였다. 그는 안의와(J. E. Adams) 선교사이다. 그는 처음으로 안동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안동 지역을 평가했다. “두 차례의 봄철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곧 3차 여행을 시작했다. 1차는 3월과 4월에 경상도 북부지방을 다녔다. 이들 지방은 선교사들이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9명의 관리들을 만나고 많은 전도서적을 팔았으며 장터에서 전도를 했다. 1개월 이상 장터를 돌며 전도하고, 약 1천 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 얼마 후 이 지방에서 두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중 한 사람은 두 차례나 대구에 와서 우리들을 찾았다. 이 사람은 대양반 가문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이며 예수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지방의 중심지인 안동은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이며 여러모로 중요한 도시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곳으로 예상하고 있다.”
위의 글을 본다면 1902년에 안의와(J. E. Adams) 선교사의 안동 방문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실제로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안의와(J. E. Adams) 선교사 안동 방문 후 1903년 봄 대구에서 출발한 방위렴(W. M. Barrett) 목사와 부해리(H. M. Bruen) 목사가 안동을 방문했다. 부해리(H. M. Bruen) 목사는 병이 나서 대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안동에 남은 방위렴(W. M. Barrett) 목사는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에 살고 있는 홍재삼에게 찾아 갔다. 그리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주일이 되어 홍씨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마침내 홍씨에게 안동 지역의 최초로 학습을 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홍씨보다 먼저 예수를 믿은 한 명은 그 해에 돌아가셨다.
이후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의 선교로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연회보고에 의하면 7개 고을에서 12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1904년 보고에는 12개 고을에서 6개교회, 7명의 학습교인, 33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고 1905년 보고에는 20개 고을에 8개 교회 2명의 세례교인, 19명의 학습교인, 79명의 원입교인이 생겨났다.
두 번째로는 먼 지방을 여행하던 중 선교사들의 전도지를 받고 복음을 영접한 형태이다.
첫째는 의성 비봉교회이다. 비봉교회의 창립자는 김수영 영수이다. 그는 의성김씨로 처가 동네가 밀양이다. 무슨 일로 밀양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김수영씨는 밀양 장터에서 배위량(W. M. Baird) 선교사에게서 전도지를 받아 들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배위량(W. M. Baird) 선교사는 부산을 출발하여 밀양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이다. 김수영씨는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였다. 당시 김씨의 고향 비봉 동네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었다. 이 동네는 초기부터 개방된 동네였다. 선교사들은 대구에서 경상북도 북부지방인 안동으로 가려면 의성비봉을 지나야 했다. 조랑말을 타고 선교여행을 떠나는 선교사들은 중간지점에서 쉼터가 필요했고 이곳 비봉은 선교사들이 잠을 자고 가는 쉼의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총회 보고에 의하면 비봉교회는 1902년 김수영의 전도 결과로 교회를 건축하였고 선교사 어도만(Walter C. Erdman)을 설립자로 하고 정치복씨를 영수로 김성삼씨를 조사로 하기로 한다. 이로 볼 때 비봉교회는 1902년 이전에 예배를 드렸음이 분명하다.
둘째는 국곡교회이다. 국곡교회 최초 교인은 권수백 장로이다. 그는 구미장터에서 안의와(J. E. Adams) 선교사가 나누어 주는 전도서적을 받아 들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복음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했다. 어느 날 선교사가 안동 와룡면 지내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 간다.
그는 홍재삼 집에 머물고 있는 선교사를 만나 복음에 대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동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민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문중에서도 반대는 심각했다. 권수백은 기도하면서 전도했다. 그 결과 동네 사람 김병석씨와 김병일씨가 예수를 믿고 그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권수백은 국곡교회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다. 훗날 그는 장로가 된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앞장서서 투쟁을 하였고 옥살이까지 하였다. 특히 권수백은 이웃 지역 풍산에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풍산의 정봉모씨와 김인수씨, 강덕수씨가 예수를 믿게 되어 풍산 고창골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교회가 1902년 2월에 창립된 지금의 풍산교회이다.
위에서 언급한 비봉, 국곡, 방잠, 풍산교회는 지리적으로 안동을 중심으로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 안동교회는 안동읍내에 위치해 있음에도 약 8년이 지난 1909년에 설립되었다. 미국 장로교 한국선교 안동 지부사에 의하면 안동 부근의 선교가 활발해 졌을 때 선교사들은 안동 선교지부의 설립을 간절히 원했다. 1908년 12월 1일 부해리(H. M. Bruen) 선교사와 사우대(C. C. Sawtell) 선교사는 선교부지로 가장 적합한 땅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안동지부의 최초 선교사로 오월번(A. G. Welbon) 선교사가 임명되었다. 1909년 8월 안동에서 선교사들의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될 때 풍산출신 김병우씨와 방잠교회에 다니던 강영복씨 외 5인이 모여 첫예배를 드린 것이 지금의 안동교회가 되었다.
지금까지 안동 지역의 어머니 교회격인 비봉, 국곡, 방잠, 풍산교회를 살펴보았다. 안동 지역의 첫 교회들은 1902년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교회의 설립도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안동지역 교회사가 들려주는 교훈은 첫째 복음이 전해지는 지리적 순서가 외곽지역에서 읍내로 들어갔음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갈릴리 시골동네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당시의 최고 문명인 로마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방에서 낮은 곳, 약한 곳, 힘든 곳, 가난한곳에 관심이 있으셨다. 둘째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혼자만 사유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고 더 나아가 민족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안동 지역에서의 3.1운동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각지역에서 중심 역할을 했음을 지역 역사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2011.2.24. 경북기독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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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전의 안동
安東의 첫 학습교인 홍재삼
유교전통문화의 토양에서 활짝 피어난 기독교! 안동지역 개신교회의 특성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왕성한 교회들, 선교를 위해 세운 병원(성소병원 등), 기독교신앙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교육기관(경안고등학교 등)의 역사를 파고들어 가면 그 뿌리부분에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조선시대에는, 안동 땅이라 함은 지금의 의성·예천·일직·풍산·봉화를 통틀어 일컬었다. 그 시대에 이 고장은 '안동대도호부'라고 불려졌다. 안동 땅에는 본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퇴계 이황선생의 학문적 성취와 제자양성 이래로 걸출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지역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가면서 유림전통을 이어갔다. 이와 관련해서, 이 지역은 선비정신·양반문화로 잘 알려졌다.
안동시내의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께서 '유교의 고장에 기독교가 (왕)성한 까닭'이라는 소책자에서 밝혔듯이, 안동지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안동의 전통문화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지역을 두고서 '편안한 안동(安東)', '공부의 고을' 등으로 표현했다. 선교사 권찬영(權燦永, John Young Crothers)이 한국식 이름을 지을 때에 크로더스(Crothers)의 첫 음인 '크'를 따와서 구(具)씨로 지었다. 그런데, 그가 안동에 와보니 구씨가 별로 없고 권씨가 많으므로 성을 권(權)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안동의 전통문화를 크게 의식하며 '안동 사람'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판단된다. 크게 보아서, 지역의 문화전통을 '존경'한 선교사들의 자세는 안동지역의 기독교가 유교전통문화의 토양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첫 걸음이었다고 본다.
계속해서 김광현 목사의 글에 따르면, 안동에서 일한 선교사들은 특별히 유림(儒林)선교를 위해 크게 애쓰고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예컨대, 1930년대에 선교사 보엘켈(Voelkel)은 하회마을의 류장하(柳長夏)를 안동의 성서학원에서 공부하게 했고, 의료선교사 베르코비츠(Bercovitz) 부부는 도산(陶山) 종가에 자주 방문하면서 선교에 힘썼다. 8·15광복 후에 선교사 모페트(Moffett)는 류장하의 아들 류한상의 협력을 얻어서 하회마을에 교회를 세워 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유생(儒生)들이 자기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신앙서적을 통해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유생들, 이 가운데는 영주의 장수동에 사는 선비 홍재삼의 신앙행적이 선교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대구선교부의 연례선교보고서(1901-1902)'에 근거해서 서술하면 ; 1899년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지부가 대구에 설치되자, 안동지역의 선교를 대구선교부가 맡게 되었다.
1902년 3월에 와서야 비로소 선교사 안의와(J.E. Adams)가 조사 김기원(일명 김재수)과 함께 안동과 경북북부지역으로 세 번에 걸쳐서 선교개척여행을 했다.
이들은 마을을 돌면서 서적을 판매하고 장날을 찾아다니며 시장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이 동안에 신앙서적 약 1천 권 이상이 판매되었다. 이 때 판매된 책 한 권이 우연히 홍재삼의 손에 들어왔다. 동네 이웃이 안의와에게서 사온 책을 그가 빌려보게 되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한 그에게 기독교 진리에 대한 궁금증이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진리를 사모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대구선교부로 찾아갔다. 당시엔 사흘을 꼬박 걸어야 대구에 도착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선교부에 머물러 지내면서 선교사들과 여러 가지 신앙토론을 했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많은 신앙서적을 얻었다.
이듬해(1903) 봄에 선교사 바레트(W.M. Barett)가 안동으로 선교여행을 하는 길에 홍재삼의 집을 방문했다. 그 집에서 이들은 주일을 맞아 예배드리고 홍재삼에게 학습을 베풀었다. 이리해서 홍재삼은 안동의 첫 학습교인이 되었다. 이런 경우를 놓고 따져보면, 안동지역 장로교회의 역사는 -미국선교사들의 선교사역을 앞세우기보다는- 기독교수용사입장(이만열)을 고려하며 살펴볼 수 있다고 본다.
'유교전통문화와 기독교진리의 만남'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에큐메니즘에 입각한 교회사연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안동지역 개신교회(장로교회)의 역사는 '기독교의 지역적 특성과 세계보편성'에 관해 살펴보기에 아주 적합한 '교회사현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던지면서, 우리는 안동의 유생들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 연유와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2002.2.23. 한국기독공보 / 임희국 장신대교수·교회사)
* 바로 잡아야 할 내용이 있어 이를 밝히고자 한다. 안동의 선비 홍재삼이 살았던 장수동은 '영주'에 있는 장수동이라기 보다는 십중팔구 '안동시 와룡면 지내의 장수골'이라는 점이다. 김오동목사(안동·서부교회)가 소장하고 있는 '영가지(永嘉誌)'를 근거로 장수동의 소재지가 안동시 와룡면 임을 제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