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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3회 후쿠오카(福岡)③
후쿠오카에서 광포의 조류를
신이치는 1977년 5월 17일부터 사흘간 후쿠오카에서 광포를 지휘했다. 그 모습이 제25권 ‘공전’에 나와 있다.
18일에는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 탄생한 규슈평화회관(현재 하카타평화회관)에서 본부간부회를 개최했다. 신이치는 후쿠오카에 도착한 17일에 규슈 후쿠오카의 간부와 간담할 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드디어 내일은 이곳 규슈평화회관에서 본부간부회가 열립니다. 굉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후쿠오카에서 전국, 전 세계로 광선유포의 조류를 일으켜야 합니다. 앞으로는 각 현이 하나의 창가학회가 될 수 있을 만큼 전반적으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번 본부간부회는 그를 위한 전초전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신이치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이렇게 썼다.
신이치는 도쿄라는 기관차 한 대가 전국을 끌어당기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 차량에 진동기를 장착한 고속철도처럼 각 방면이 더 나아가 각 현과 구가 자력(自力)으로 주행하며 다른 지역을 이끌 수 있는 힘을 지녀야 비로소 광선유포도 각 지역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새롭고 크게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 모든 실력을 갖춰야 비로소 ‘지방시대’가 도래한다.
선생님은 그 선구를 규슈에 맡기셨다.
본부간부회 다음날인 19일, 신이치는 10년 만에 야마구치 지도에 나섰다.
22일에는 기타큐슈에 가서 다시 한번 후쿠오카에서 거듭 격투했다. 제25권 ‘훈풍’은 이 기타큐슈에서 펼친 격려행부터 쓰기 시작했다.
22일 저녁, 기타큐슈문화회관(훗날 기타큐슈평화회관) 정원에서 시비(詩碑) 제막식을 열었다.
규슈가
있기에 2장(章)의
출범이로다
“이 시는 창가학회가 ‘광포 제2장’의 높고 넓은 하늘로 새롭게 비상하기 시작한 1973년 3월, 야마모토 신이치가 기타큐슈시에서 열린 제1회 ‘규슈청년부총회’를 기념해 이 시를 읊었다.
시에는 규슈 동지가 짊어져야 할 광선유포의 ‘선구’라는 사명을 단연코 완수해 창가(創價)의 견인력이 되기 바란다는 신이치의 한없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제25권 ‘훈풍’)
제막식을 마치고 신이치는 회관 안으로 이동해 간담회를 열었다. 참석자는 남자부를 중심으로 한 규슈, 후쿠오카의 간부들이다. 신이치는 여기서 도 온 힘을 쏟아 붓듯 청년을 훈육했다.
신이치는 사회 그리고 근행의 부도사를 맡았을 때 명심해야 할 점을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조언했다. 또 청년 치과의사 세 명이 학회활동에 힘쓰면서 사회에서 실증을 보인 일을 칭찬하고 진정한 불법자(佛法者)로서 창가의 대도(大道)를 끝까지 걸어가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했다.
“치과의사로서 기술을 철저히 연마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인격을 연마해 인간으로서 신뢰를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역에 공헌하기 바랍니다. 또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올바른 길인 학회활동의 영원한 투사이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진정한 인생의 행복도, 승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마모도 신이치는 이튿날 23일, 기타큐슈의 지부결성 17주년을 기념하는 근행회에 참석했다. 24일에는 기타큐슈문화회관에서 개최한 후쿠오카현의 공로자 추선법요에서 도사(導師)를 맡고 이어서 니치렌불법의 생명관을 말했다.
그날 저녁, 규슈의 각부 대표와 가진 간담회를 마치고 신이지는 ‘다베회관(개인회관)’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동지와 함께 근행하고 평소의 헌신에 감사했다.
당시 여자부 멤버로서 활약하던 개인회관 제공자의 장녀 가나가미 에리코 씨(오쿠라기타본진권 권부부인부장)는 그날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이케다 선생님이 오신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창제했습니다. 선생님의 방문 그리고 규슈 지도의 무사고와 대성공을 기원하면서 진지하게 창제를 거듭했습니다.
오후 8시가 되자 모두 ‘이만큼 제목을 올렸으니 흡족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지금 선생님이 그쪽으로 가셨습니다’라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시 개인회관은 논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가나가미 씨가 부모님과 함께 현관에서 선생님이 도착하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논두렁 길 쪽에서 선생님 일행이 걸어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정원에 심은 창포꽃을 바라보며 가나가미 씨에게 “아가씨, 물 좀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컵을 받아 들고 창포꽃에 물을 주었다. 동지의 진심에 격려의 자양분을 주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도 그 창포의 자손이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님이 방문한 뒤에도 동지들은 사랑하는 지역을 위해 분투했다. 불법대화의 꽃을 피우고 정의의 언론전(言論戰)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회관 주변의 길이 넓어지고, 고속도로 나들목이 근처에 생겨 주택지가 넓혀졌다. 가나가미 씨는 지역의 발전에 마음이 흐뭇했다.
“선생님은 소설에서 회관을 방문하신 일을 상세히 써주셨습니다. 오직 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광포를 위해 끝까지 달리겠습니다.”
후쿠오카에 보낸 지도
인생을 즐겁고 가치 있게
(‘규슈의 노래’ 가사에 담긴 마음을 신이치가 말하는 장면)
“규슈에는 허세 따위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던져버리고 투쟁해야 합니다. 2절 4행 가사를 ‘선구 규슈 / 자 즐겁게’로 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광선유포의 활동에는 생명의 환희가 있습니다. 제목을 부르고 신심에 힘쓸수록 더욱더 환희하게 되고, 마음은 신바람이 납니다. 물론 괴로운 일도 분한 일도 있겠지만 신심의 세계에는 그보다 몇 배나 큰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 학회활동입니다. 비장함이 가득한 세계가 결코 아닙니다.
또 모두가 즐거움을 만끽하고 신심에 힘쓰기 위해 선지식(善知識)인 동지의 연대와 창가가족(創價家族)이 있습니다.
가족이므로 괴로워하는 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도 괜찮습니다. 상하관계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서로 이야기하면서 진심 어린 온정으로 감싸고 격려하는 것이 창가가족입니다. 타인을 격려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힘이 납니다. 타인을 감싸 안으며 자신의 경애가 넓어지고 커집니다.
불도수행과 학회활동을 하는 까닭은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시켜 인생을 즐겁게 최고로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격려는 사람을 소생시키고,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사회를 활성화하는 풀뿌리 운동의 힘이 된다.
신이치가 다시 가사를 보았다.
“3절에 있는 ‘무너지지 않는 길’은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아 광선유포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 창가사제(創價師弟)의 길입니다. 규슈 여러분이 학회를 비방하는 승려들 때문에 얼마나 괴롭고 힘들어하는지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의 정법정의를 관철한 단체는 학회입니다. 정의롭기 때문에 마가 여러 모습으로 다투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한 걸음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더욱더 기세당당하게 우리 함께 창가의 정의의 역사를 만듭시다!”(제28권 ‘광선보’)
개인지도의 기본자세
“창가학회의 세계에서는 개인지도는 당연한 일처럼 일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고뇌를 이겨내기 위한 격려의 연대이며 현대사회에서 분단된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되살리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 행동에 학회뿐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무형 재산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윽고 사회가, 세계가 그 사실에 놀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신이치가 1978년 5월 17일, 규슈문화회관(현재 후쿠오카중앙문화회관)에서 개최한 규슈최고회의에서 이러한 확신을 말한 장면이 제27권 ‘격투’에 나와 있다.
‘격투’에서 신이치는 개인지도의 기본자세를 강조했다. 광포를 추진하는 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개인지도이고, 한 사람을 위한 격려다.
어떠한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원동력은 한 사람 한사람이 희망을 불태우며 전진하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이치가 강조하는 개인지도의 포인트를 써두고자 한다.
첫째, 절대 감정적으로 되면 안 된다.
둘째, 개인지도는 어디까지나 신신에 대한 확신이 근본이다.
셋째, 상담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
넷째, 끈기 있고 포용력 있게 그리고 풍부하게 철저히 지도해야 한다.
다섯째, 발고여락(拔苦與樂)의 정신이 바로 개인지도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이치는 자신의 실감한 점을 말했다.
“제가 이제까지 많은 간부를 보며 느낀 점은 개인지도를 끝까지 관철한 분은 퇴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지도는 화려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며 영속적인 인내가 필요한 힘든 작업이기에 그것을 실천하는 속에 진정으로 신심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개인지도를 거듭하면 자신을 응시하고 지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퇴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절복도 중요합니다. 단, 절복만 하고 입회시킨 뒤에 철저히 지도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싸움으로 끝나고 맙니다. 또 절복 성과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기에 주위 동지에게서 상찬도 받습니다. 그것으로 만심에 빠져 신심이 무너지고 만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절복과 함께 개인지도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이 자신의 신심을 단련하고 경애를 높이는 필수 조건입니다.
절복과 개인지도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신의 개척작업입니다. 개척에는 어려움에 도전하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힘든 작업이 사람들의 생명을 일구어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성실하게 대화를 거듭하며 벗의 생명을 개척하는 괭이질을 멈추지 말기바랍니다. 개인지도는 조직에 따뜻한 인간미를 흐르게 해 조직을 강화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규슈최고회의에 이어 신이치는 후쿠오카시 니시구(사와라구)에 있는 규슈기념관(현재 후쿠오카평화회관)에 들렀다. 그곳에서 개최한 체험담대회의 참석자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그의 격투는 멈출 줄 몰랐다.
‘광선유포를 위한 가슴속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신념과 확신을 강하게
규슈의 노래인 ‘불의 나라 노래’가 탄생하는 장면은 제28권 ‘광선보’에 그려져 있다. 신이치는 이동하는 차 안이나 지도와 격려를 하는 속에 짬을 내어 정신을 집중해 작사에 힘썼다.
제30권<상> ‘웅비’에는 신이치가 회장을 사임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려 격려행을 시작한다. 1980년 4월 30일, 5월 1일 그리고 2일에 후쿠오카에서 동지들을 차례로 격려했다.
5월 1일 밤에 규슈평화회관에서 기초한 후쿠오카현 지역장회에서 신이치는 사자(師子)의 혼을 한 사람 한사람에게 불어넣는 심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광선유포를 위한 가슴속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절복이라는 수행의 깃발’을 결코 내리면 안 됩니다!”
“‘일생성불의 신심의 불꽃’을 꺼뜨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1981년 12월 14일, 신이치는 후쿠오카현 남부에 이어서 구루메회관, 야메회관, 지쿠고 시내에 있는 개인회관을 잇따라 방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지도를 거듭했다.(제30권<하> ‘승리의 함성’).
특히 지쿠고에서 가진 간담회에서는 리더의 행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리더 여러분은 어떠한 대난이 일어날지라도 커다란 바위와 같은 신념으로, 반드시 이긴다는 강한 일념으로 유유하게 당당하게 사명의 길을 뚫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을 보고 회원들은 모두 안심하고 용기를 갖기 때문입니다.
리더에게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필요합니다.
‘신념과 확신이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성실하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늘 생기발랄하게 지휘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일에서, 직장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내는 실증이 지도력에 빛을 더하기 때문이다.’ ‘지도할 때는 늘 평등하고 판단이 건전해야 한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종문사건으로 고통 받던 시달린 동지를 위해 반전공세에 나선 신이치의 외침은 후쿠오카의, 규슈의 동지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속에 당시 규슈의 남자부장이었던 다무라 다카오 씨(규슈 총주사)는 멤버와 함께 ‘학회의 진실을, 광포 스승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먼저 규슈평화회관 ‘별관’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외치는 전시를 시작했다.
1980년 5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1981년 5월 2일, 규슈기념회관을 개장한 ‘규슈이케다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학회의 ‘평화·문화·교육’의 철학을 발신하는 전시에는 많은 사람이 관람했다.
“대표 멤버가 감사 인사를 드릴 겸 선생님에게 보고하러 갔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앞으로 광선유포는 절복과 평화·문화·교육이라는 양 수레바퀴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회상하는 다무라 씨의 원점은 1972년 9월, 규슈의 대학부원 대표로 선생님과 간담했을 때, “'규슈에서 일본, 세계 광선유포의 다음 시대의 패턴을 만들기 바랍니다.” “함께 도와야 합니다. 규슈 밖에 없습니다.” 하고 격려했다.
다무라 씨는 이렇게 서원했다.
“선생님의 일념에 감싸이듯 규슈에서 청년부터 일어나 새로운 평화의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어려운 때이기에 차대(次代)를 여는 투쟁을 시작한다. 선생님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듯이, 또 소설에 써주셨듯이 우리 규슈도 앞으로 광선유포의 길을 앞장서겠습니다.”
이처럼 당시 규슈의 많은 리더가 이케다 선생님에게 격려를 받고 일어섰다. 그리고 지금도 후쿠오카의 빗은 광포 스승의 혼을 가슴에 혁혁히 불태우며 정의로운 대화확대를 향해 선구의 투쟁을 펼치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규슈에서 세계광포의 빛을! 창가승리의 돌파구를! 그 광포 서원의 기개가 바로 규슈의 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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