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繕工監假監役李公墓誌銘 幷序
이만도(李晩燾, 1842~1910)
公諱淵性字舜瑞姓李。始祖茂以唐中郞將伐百濟。仕新羅爲延安侯。仍貫焉。工曹典書文昌公係孫顯麗季。延川君補丁,忠簡公崇元顯我朝。忠簡子九齡。燕山時以奉化縣監。退隱于知禮。四傳至長源號草堂。有孝行贈司宰僉正。又四傳至命權贈司僕正。是公高祖。曰壽觀贈承旨。曰基遂贈戶參。曰源求。其三世也。妣瑞山鄭氏。錫胤女。純祖甲申。公生于上佐院。先公敎之有法度。始訥誦讀耐理會。其著作發遲意遠輒驚人。稍長泛濫百家天文地理律呂筭數朞三百渾天儀。無不通曉。一日喟然ⓟ曰此濟得甚事。遂反之六經四子。以及洛建諸書。尤喜中庸及通書。間治擧業有能聲。甲子赴禮圍。人指示曲逕不從。歲大饑。自畫粥。散米隣里。金徵君洛鉉宰本縣。許以十室忠信。與行鄕飮禮於校中。又議增置學田。癸未除繕工監假監役。修葺先齋。杜門孜孜。著明粹記類。於心性理氣之分。以朱李兩先生說爲宗。又集冠昏喪祭諸禮說爲四冊。以便私閱。公風度凝重。倫理篤厚。父母之居處聲音。有時追思。必泫然流涕。得一美味。與弟共匙。每戒子姪曰讀書法近思錄詳之。今人先學史記。是倒學也。又擧誦庸學曰吾之一生受用在此。爾宜勉之。癸巳正月十一日歿。ⓟ葬縣西外希谷負甲原。配仁同張氏。晦根女。一男明均。三女李圭榮,金馹相,張永驥。明均男鉉澍,鉉墩,鉉久,鉉模。李男壽民,壽寅,壽濱。女安容洙參奉。金男魯璧。張男基植。女辛昌植。餘幼。公從姪璟均甫。扶衰遠來。責以幽誌。義難辭。強病而銘之。銘曰。
魯而得。通而不局。其文其行。篤後昆而光前烈。
공의 휘는 연성(淵性), 자는 순서(舜瑞), 성은 이씨이다. 시조인 무(茂)가 당나라의 중랑장(中郞將)으로서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에서 벼슬하여 연안후(延安侯)가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관적(貫籍)을 삼았다.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문창공(文昌公) 계손(係孫)이 고려 말에 유명하였고, 연천군(延川君) 보정(補丁)과 충간공(忠簡公) 숭원(崇元)은 조선에 들어와서 유명하였다. 충간공의 아들인 구령(九齡)이 연산군 시절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지례(知禮)에 은거하였다. 4대를 내려와 호가 초당(草堂)인 장원(長源)은 효행이 있어서 사재시 첨정(司宰寺僉正)에 추증되었다. 다시 4대를 내려와 명권(命權)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시다.
승지에 추증된 수관(壽觀)과 호조 참판에 추증된 기수(基遂)와 원구(源求)가 그다음 3세이다. 모친 서산 정씨(瑞山鄭氏)는 석윤(錫胤)의 따님이다. 순조 갑신년(1824, 순조24)에 공은 상좌원(上佐院)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의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글을 읽고 외는 것이 어눌하였으나 이해는 잘하였고 문장을 짓는 데에 발상은 더디지만 의미는 심원(深遠)하여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하여 천문, 지리, 음률, 산수, 기삼백(朞三百), 혼천의(渾天儀) 등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루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것들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육경(六經)과 사자(四子) 및 성리학의 여러 책들로 돌아왔는데, 그중에서도 《중용》과 《통서(通書)》를 더욱 좋아하였다. 그 사이에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고, 갑자년(1864, 고종1)에 예조의 시험에 응시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부정한 방법을 쓰라고 가르쳐 주었지만 따르지 않았다.
큰 흉년이 들면 자신은 죽으로 살면서도 이웃집에는 쌀을 나누어 주었다. 징군(徵君) 김낙현(金洛鉉) 공이 본현의 현감(지례현감 1875) 으로 와서는 열 집이 사는 마을에도 존재하는 진실하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였고, 함께 향교에서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였으며, 학전(學田)을 늘리는 것도 의논하였다. 계미년(1883)에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되었다. 선조의 재실을 수리하고는 문을 닫아걸고 부지런히 애써서 《명수기류(明粹記類)》를 저술하였다. 심성(心性)과 이기(理氣)의 구분에 있어서는 주자와 이퇴계 두 선생의 설을 종주로 삼았고, 또 관혼상제(冠昏喪祭)에 관한 여러 예설(禮說)을 모아서 네 책으로 만들어 사사로이 열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공은 풍도가 침착하고 점잖으며 인륜의 도리가 독실하였다. 부모님의 거처와 음성을 추억하며 생각할 때면 반드시 흥건히 눈물이 흘렀고, 한 가지 좋은 음식이 있어도 아우와 함께 먹었다. 언제나 자식과 조카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독서하는 방법은 《근사록(近思錄)》에 자세히 들어 있다. 요새 사람들은 《사기(史記)》를 먼저 배우는데, 이것은 학문의 순서가 뒤집힌 것이다.” 하였고,
또 《중용》과 《대학》을 들어 암송하며 말씀하기를, “내가 일생 동안 받아서 쓴 것이 이 안에 있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여기에 힘쓰라.”하였다.
계사년(1893, 고종30) 1월 11일에 돌아가셨다. 현 서쪽의 외희곡(外希谷) 갑좌(甲坐)를 등진 언덕에 장례 지냈다. 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회근(晦根)의 따님이다.
1남을 두었으니 명균(明均)이고 세 딸은 이규영(李圭榮), 김일상(金馹相), 장영기(張永驥)에게 출가하였다.
명균의 아들은 현주(鉉澍), 현돈(鉉墩), 현구(鉉久), 현모(鉉模)이다. 이규영의 아들은 수민(壽民), 수인(壽寅), 수빈(壽濱)이고 딸은 참봉 안용수(安容洙)에게 출가하였다. 김일상의 아들은 노벽(魯璧)이다. 장영기의 아들은 기식(基植)이고 딸은 신창식(辛昌植)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공의 종질인 영균(璟均) 씨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멀리 찾아와서 유지(幽誌 묘지(墓誌))를 부탁하였다.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병을 무릅쓰고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魯而得 노둔(魯鈍)하였으나 학문을 터득하여 /
通而不局 통달해서 한 방면에 국한되지 않았으니 /
其文其行 그 학문과 그 행실은 /
篤後昆而光前烈 후손을 두터이 하고 선조를 빛내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