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안 이야기(외증조할머니)
우리 목사님 집안에 기독교 신앙이 들어오게 된 계기는 나의 외증조할머니이신 노구례 권사님부터 이다. 노구례 권사님은 1885년 영등포에서 태어 나셨다. 1901년 경에 아펜젤러 선교사님께 세례를 받으시고 기독교 신앙을 시작하셨다. 그 당시 여자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는데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세례를 주시면서 그레이스 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고 그레이스 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리는 과정에서 노구례 라는 이름을 얻으셨다고 한다. (외증조 할머니의 원래 이름은 간난이) 그 후 오빠(나중에 서산 감리교회 장로님이 되셨다고 한다.)를 따라 충청남도 서산으로 내려갔고 교회가 없는 서산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전도를 시작하셨다. 처음 서산 옥녀봉 중턱에 임시로 천막을 짓고 시작한 교회가 지금의 서산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한편 그 천막 교회를 출석 하는 성도들 집을 심방하던 전도사님께서 천막 교회 새로 출석한 한 청년의 집을 지나가다가 그 청년이 자기 조상의 위패를 불태우는 것을 보셨다. 그 청년은 그 당시 대단한 신앙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지극 정성으로 조상을 모시고 매 끼니마다 상식(조상의 위패에 음식 바치기)에 3년 시묘 살이를 하며 조상을 섬겼지만 매번 끼니조차 떼우지 못하는 가난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조상의 위패를 태우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전도사님이 ‘아~! 우상(조상신) 타파하는 신청년이구나~!!’ 감동을 받아서 우리 증조 외할머니와 중매를 섰다.
노구례 권사님이 낳으신 5자매 중에 맏딸이셨던 고 최정희 권사님께서 전주 이씨의 둘째 아들 이예교 할아버지와 결혼 하셨고 이 때부터 충남 서산 인지면에 모여 살던 우리 가문에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게 되었다.
2. 우리 아버지 이야기
우리 아버지가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것은 아니고 원래 어릴 적에는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기 좋은 까닭에 할머니 손잡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7남매 중 우리 아버지가 여섯째 우리 작은 아버지가 일곱째, 다른 분들은 이미 커서 교회 안 따라 감. 결국 다른 분들은 그냥 집사님이 되셨지만 우리 아버지는 목사님, 작은 아버지는 장로님이 되셨다.
하지만 어린 아버지의 맘에 할머니의 행동이 참 싫으셨나 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하여간 좀 돈 되는 것은 몽땅 교회에 갖다 바치셨단다. 할머니는 늘 품에 (오늘날 말하면 리본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시다가 고추도 제일 먼저 열리는 것은 줄로 감아 놨다가 이것은 하나님 거 하고 교회에 내고. 좋은 거, 맛있는 거 아무튼 다 교회로 가져가니 아버지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집이 부자여서 모든 게 풍족한 가운데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힘들게 한 것은 우리 큰 아버지, 아래로 여섯 명의 동생이 아버지 없는 자식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엄청 엄하게 교육하셨던 것 같다. 막 결혼해서 여섯 명의 시동생을 거느리시게 된 큰 어머님도 좀 엄하셨던 것 같구. 그 모든 게 뭉쳐서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으셨던 것 같다.
결국 어머니 따라 교회 다니는 것을 17살까지만 하고 ‘내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난다.’ 라고 하시고 일자리를 찾아 인천까지 오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아버지의 오른손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타향에서의 뜻모를 병이 무섭고 외로우셨던 아버지는 결국 다시 쫒기 듯 고향으로 돌아 가셨고 할머니의 권유로 부흥회에 참석하셨다가 마지막 새벽 기도 시간에 "너는 내 것이다." 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으시고 회심하셔서 오늘날 목사님이 되셨다. 그 중간 중간에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 아버지를 연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3. 우리 어머니 이야기
우리 어머님 집안에 기독교 신앙이 들어오게 된 것은 나의 외할머니이신 고 구임경 권사님부터이다. 구임경 권사님은 처녀 적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심방을 하면 죽어 가는 사람도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에서 불신자(지금의 외할아버지)와 결혼 하시고 가난한 살림에 남편의 술주정과 도박(놀음)으로 힘겹게 사시면서 처녀 적의 은혜를 잊고 사시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체험을 하시고 신앙이 살아 나셔서 그 뜨거운 신앙을 배운 것이 우리 엄마하고 작은 외삼촌~!!!(청주에서 목회하심-교회 간다고 일주일인가를 헛간에 가두었더니 그 안에서 성경을 3번이나 통독을 하셨다는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음)
그때 우리 외할머니와 엄마, 외삼촌을 지도해 주신 분이 박광훈 목사님이시고 그 분에 후에 서산 인지성결교회로 부임해 가셔서 우리 아버지과 어머니를 중매하셨다.
4. 내 이야기(고향에서)
나는 충난 서산군 인지면 애정리 1구 359번지의 일명 쑥뎅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시는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의 두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둥벌거숭이로 살았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엄니 등에서 업혀서, 조금 크면서 아버님 자전거에 매달려 갔던 새벽 예배.
난 어릴 적부터 몸이 안좋았다. 혼자서 컴컴한 큰집 다락방에서 놀았는데 폐병 걸린 삼촌이 불던 하모니카를 불다가 각혈(피토하기~!!!)을 했단다. 그때 달려간 병원에서는 두 세달을 못 넘길 것이니 애꿏은 돈 쓰지 마시고 집으로 데려가서 먹고 싶어 하는 것이나 마음껏 사주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그 길로 나를 안고 교회로 가셨고 새벽 기도 때 와서 보고 저녁 기도 때 와서 보시는, 내 입장에서 보면 교회에 얹혀 지내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난 그 날부터 목사님 가족과 함께 자랐고 그 때 나의 첫사랑 목사님 셋째 따님과의 우정??사랑??도 키우고 세 달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피 한번 안토하고 잘 살고 있다.
한 번은 마을 싸움으로 타성받이 아저씨들이 " 전주 이씨 " 다 죽인다고 도끼 들고 난리가 난 적도 있었고, 젓가락으로 찌르기 하다가 감전이 된 적도 있고, 불이 나서 홀랑 탄 적도 있고, 물난리도 만나고, 시골 집이 무너진 적도 있고, 홍역이 돌아서 마을에서 절반 가까이 송장을 친 적도 있고. 그 때 나도 죽은 줄 알고 토방에 뉘여 놓고 일 끝나고 묻으려고 했는데 묻으려고 들어가 보니 어린 것이 배가 고팠는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더란다. 그래 다시 먹을 것을 주어 살렸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홍역 때문에 죽을 뻔한 게 아니라 굶어서 죽을 뻔 했었던 것 같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아서 아버님의 농사가 점점 손해가 커지면서 (농수산물 수입으로 인한 가격 파동으로 300원 주고 산 마늘이 추수하니까 100원도 못 받는 상황이 몇 번 있으니까) 가난한 살림살이는 거의 다 날아가 버렸다.
5. 내 이야기(도시 변두리에서)
결국 우리 가족은 농업을 포기하고 서울 변두리 산동네 마을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한해에 심하면 4번이나 전학을 가는 상황이었다. (살던 집이 가재도구도 못 챙기고 철거되는 상황) 공부는 늘 바닥이었고 학교에서는 왕따가 심했다.
그 사이에 우리가족에게 몇 번의 위기가 왔었는데 모두다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상황까지 가는 것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첫 열매~!!!
아무 것도 없이 반 손으로 시작한 변두리 생활~!!! 시골 나올때 세간 살이 정리한 돈으로 하루하루 먹다가 첫 월급을 받으신 어머님 아버님~!! 아무런 고민도 안하시고~!! 첫 열매는 하나님 것 하시고는 첫 열매를 드리셨다. 집안에 남은 돈도, 쌀도, 팔 만한 돈 될 물건도 없는 상황에서 형은 군소리 없이 견뎌냈지만 난 매일같이 울면서 부모님을 졸랐다.
‘나 너무 배고프다고 남들은 다 밥 먹는데 왜 우리 집만 밥 안먹냐고.’
결국 우리를 살린 것은 이웃 작은 성불사라는 절에서 있는 한 아주머니셨다.
그 분 입장에서야 매일 같이 어린 아이 하나가 왜 우리는 밥 안 주냐고 울어 대는데 그 집이 그 유명한 예수쟁이 집이라 절에서 무엇인가를 갖다 주면 안 받을 것 같더란다. 그래서 당신이 출가하시기 전에 가지고 있던 돈으로 쌀을 사서 쌀을 주면 또 안 받을 것 같아서 떡집 가서 떡을 해 가지고 우리 집에 들러서 이러저러 해서 떡을 가져 왔는데 절대 불자들 헌금 아니고, 불전에 드린 적 없고 하시면서 사정사정 하면서 놓고 가셨단다.
그러나 우리 가족 중 아무도 그 떡을 먹을 생각도 못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 때 오후반 끝나고 오던 내가 그 떡 냄새를 10리 밖에서 맡고 무조건 달려와 누구에게 이 떡이 웬 떡이냐 묻지도 않고 체할 듯 체할 듯 켁켁거리면서 먹어댔다. 나는 맛있게 먹는데 그걸 보는 가족들은 다 울었다. 나도 이유도 모르고 먹다가 울었다. 그냥 슬프고 속상하고 서러워서.
두 번째 사건은 건축 헌금 사건
그 당시 운양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 지붕 공사를 할 돈이 없었다. 그 당시 교회 사찰 집사님이셨던 부모님은 있는 돈 다 털어서 건축 헌금을 하셨다. 그런데 그 후 목사님이 우리 집을 내 쫓으셨다. 알고 보니 본교회 목사님이 1년 정도 미국에 유학을 가셔야 하는데 우리 아버님이 기도 잘한다고 성도들이 많이 따랐단다. 사찰 집사라는 것이 담임 목사님이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가진 것은 모두 헌금한 우리 집으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결국 이리저리 돌고 돌아 인천까지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마지막 사건이 바로 빌려준 돈 사건이다.
그 사이 우리 아버님이 신학공부를 시작하셨고 아는 목사님께서 400만원 정도를 빌려 가셨는데 우리는 빌려 드린 것인데, (우리가 400만원이라는 큰돈이 없어서 실은 이모님께 부탁해서 얻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께 이자를 받으려고 무리했던 우리가 잘못했던 것 같다.)
목사님은 우리가 헌금한 것이란다. 처음 몇 달은 약속한 이자를 보내 주시다 어느 순간 이자가 안 와서 문의했더니 그 말씀을 하셨다. 결국 다시 돌고 돌아 정착한 것이 잔짜 4평도 안되는 구멍가게. 그나마 그때가 거의 유일하게 배고픈 설움을 당하지 않은 시절이지만 콧대 높은 주인집 누나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님은 그동안 안해 보신 것이 없으시다. 당신말대로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것 빼고는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셨다. 난지도 쓰레기 줍기부터 병원, 식당, 공장, 계란장수, 공사장 잡부 등등등
우리 목사님 자랑처럼 말씀하시는 참고서 한권 못 사고, 수학여행 한번 못 가고, 매번 불우 이웃 돕기 행사 때마다 쌀 한말씩 얻어서 집으로 오던 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고등학교에서 기독교 학생회(서인천고 에벤에셀 1기)를 만들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서도 한사랑 선교회를 만나고 밀알 봉사단을 만나고 정신병원 봉사부터 시설 봉사도 하고 군대에서도 미인가 군종병이 되어서 예배를 인도하고 지금은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