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바라밀
(2)자타평등에 대하여
샨띠데바는 숲 속에 머물며 위따르까를 멈추고 신체와 마음이 고독한 상태에 있는 수행자로 하여금 보리심을 수행할 것을 초대한다. 그는 보리심을 수행하는 방법으로 「정진바라밀」장 게송16에서 예고된 대로 먼저 자신과 타인이 평등함을 수행하여 양자 사이의 차별을 멈추어야 한다고 게송90에서 말한다.
"우선 타자는 자기 자신과 동등함을 다음과 같이 주의 깊게 수행해야 한다. 모든 유정에게 있어서 고통과 행복은 같은 것이다. 나는 [타인을] 나와 같이 보호해야 한다."
신체와 마음의 고독을 통하여 욕망을 제어한 후, 자아에 대한 애착(ātma-sneha)을 멀리하기 위하여 자타평등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보는(자타평등, parātma-samatā) 수행은 샨띠데바의 BCA에 의해 널리 알려졌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두 가지 명상 가운데 하나로 티벳에서 널리 행해지지만, 이것은 Śs의 말미 에 기술된 바와 같이 『여래비밀경』(Tathāgataguhya-sūtra)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샨띠데바의 고유한 사상은 아니다. 나가르주나도 『사찬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와 모든 유정들 사이는 무차별이기 때문에, 자신과 타인의 평등함이 당신(붓다)에 의해 설해졌다." 슈미트 하우젠 역시 초기유가행파의 문헌 중에, 특히 『대승장엄경론』에서 자타 평등의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샨띠데바가 그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샨띠데바는 자타평등의 개념을 다른 경전으로부터 차용하여 신체의 고독으로부터 마음의 고독으로, 그리고 신체와 마음의 고독으로부터 자기와 타인의 구별이 없다는 자타평등으로, 계속해서 자기와 타인을 바꾸어보는 자타치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수행 단계를 「선정바라밀」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신체와 마음의 고독(수행 내용)은 사마타(수행 방법)를 통해, 그리고 자타평등과 자타치환(수행 내용)은 위빠사나(수행 방법)를 통해 이루어진다.
A.자타평등
샨띠데바는 게송90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동등함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는 이유로 "모든 유정에게 있어서 고통과 행복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타평등을 수행하는 목적으로 "자신과 같이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실제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별하여 한 몸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무르띠의 말처럼 자기 자신 속에 분열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보리심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자타평등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첫 걸음을 내디딜 것을 강조한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샨띠데바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다.
"그 누구라도 나와 차별이 있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 고통이 불쾌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행복이 좋은 것처럼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모든 유정들에게 고통과 행복은 똑같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유정을 자신과 같이 보호해야 한다. 내가 나자신을 고통과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구제하는 것과 같이 다른 유정도 구제해야만 한다. 내가 모든 면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보호해야만 한다."
a.첫 번째 근거: 세속의 지평
샨띠데바는 게송90에서 자타평등 수행의 이유와 목적을 기술한 다음, 계속해서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하는 근거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크게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 번째 근거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한 몸이라는 사실에 있다. 여섯 가지(六趣)로 구별되는 세간은 고통과 행복을 똑같이 바라고 있다는 점에 의거해서 한 몸이라고 간주되고, 한 몸이기 때문에 보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신체가 손과 발 등의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모두가 보호되어야 할 하나의 몸인 것처럼, 다양한 유정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도 모두가 고통과 행복을 본질로 하는 점에도 똑같기 때문에 한 몸이라고 샨띠데바는 말한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게송114에서 다음과 같이 반복적으로 기술된다.
"신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 의하여 손 등을 보살피는 것처럼, 왜 그와 같이 유정을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보살피지] 않는 것인가."
손과 발이 신체의 한 부분인 것처럼, 다른 유정도 세간의 한 부분이라는 샨띠데바의 사고 방식을 슈미트하우젠은 '유기체로서의 유정의 통일성'이라고 규정한다. 즉 손과 발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한 몸을 이루며 존재하는 것과 같이, 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비록 수많은 개체들로 구별되어 있을지라도 통일체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다른 유정을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샨띠데바의 이러한 비유는 물론 각각의 유정이 각각의 신체부위에 대응하고, 각각의 신체부위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활동한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게송99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발의 고통은 손의 고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발은 손에 의해서 보호되는가."
손은 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부분으로서 통일체이기 때문에 발을 보호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실제로 발을 비롯한 다른 신체 부위에 타격이 가해질 경우, 손은 그것을 막기 위하여 손을 펼친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가 세간에서의 유정들 사이의 관계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통일체인 신체의 경우, 엄밀하게 말해서 발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펼치는 것과 같은 모든 활동의 주체는 각각의 신체부위가 아니고 마음이라는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체부위에 대응하는 유정의 경우, 다른 유정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마음과 같은 다른 부분, 즉 다른 유정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비록 이 비유에서 세간의 유정과 신체의 부위가 비록 정확하게 대응하지는 않을지라도, 자타평등 수행을 통하여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근거로서는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오니시(大西)가 주장하듯이, 샨띠데바의 비유는 신체와 세간과의 구조적인 대응, 즉 신체의 부위와 세간의 유정과의 구조적인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손과 발과 같은 다양한 부위로 구성되어 있고, 세간은 자기와 타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샨띠데바가 첫 번째 근거로 들고 있는 자신과 타인이 한 몸이라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세속적 진리의 지평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승의적 진리에서는 '아(我)'도 '나'도, 그리고 '너'도 '유정'도, 게다가 '마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샨띠데바는 불교 내외의 인아설(人我說)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하면서 '나' 또는 '유정'이라고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존재가 진실에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자기와 타인이라는 것은 유정의 구제를 위하여 승의의 세계로부터 세속의 세계로, 침묵의 세계로부터 언설의 세계로 들어온 시설(prajñapti)된 자타(自他)인 것이고, '목적을 위한 미혹(무명)'(kārya-moha)이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결국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첫 번째 근거를 통한 자타평등의 수행은 세속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b.두 번째 근거: 승의의 지평
샨띠데바는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하는 두 번째 근거를 '무아'라는 승의적 진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는 먼저 '현세의 자기와 현세의 타인의 관계'와 '현세의 자기와 내세의 자기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여, 타인의 고통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샨띠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타인의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보호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신체의 고통은 [지금] 나를 괴롭히지 않는데도 왜 보호하는가."
"'그것(미래의 신체)은 [현재의] 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망분별이다. 왜냐하면 다른 자가 죽고, 또 다른 자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다른 유정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는 무관심한 반면, 자신이 현재에 겪고 있는 고통뿐만 아니라 미래에 받게 될 고통에 대해서는 민감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미래에 받게 될 고통을 예방하기 위하여 현세에서 악을 멀리하고 공덕을 쌓는 등의 노력을 행한다. 하지만 샨띠데바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즉 타인의 고통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현세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에 의해서 장차 자기가 경험하게 될 고통을 예방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로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승의적 지평에서 볼 때, 마치 '세 살짜리 나'와 '쉰 살이 된 나'가 다른 것과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난 자기'는 현세에서 '죽은 자기'와 분명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와 타인이 다르듯이, '다시 태어난 자기'(내세의 자기)와 '죽은 자기'(현세의 자기)는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무관심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반론자가 '다시 태어난 자기'와 '죽은 자기'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세속적 지평에서의 망분별일 뿐이라고 샨띠데바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매순간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 다시 생겼다가 사라지는 상속(saṁtāna)에 불과한 '자기'는 다음 순간에 이미 '타인'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샨띠데바의 이러한 비유는 '현재의 나'와 '현세의 자기 자신'이 정확하게 대응하고, '현재의 타인'과 '내세의 자기 자신'이 정확하게 대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적용된다. 전자의 경우는 당연한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정확하게 대응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샨띠데바의 비유는 이러한 대응관계에다가 '현재의 자기와 현재의 타인'의 관계와 '현세의 자기와 내세의 자기'의 관계까지 겹쳐 실마리를 풀 수 없는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샨띠데바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자의 생각을 비판하기 위하여 위의 두 게송을 기술한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즉 현재의 나와 타인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타인의 고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현세의 자기와 내세의 자기, 즉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난 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기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 두 비판은 모두 무아의 진실에 대한 무지로부터 기인한 오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자타평등을 수행하여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근거로서 자타(自他)를 막론하고 고통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연이어서 진술한다.
"상속과 집합은 행렬과 군대 등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고통이 그것에 속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가 그것(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할 것인가."
"일체의 고통은 어떠한 차별도 없어 소유하는 자가 없다. 고통이기 때문에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여기에 제한되는 것이 있는가."
"[고통의 주체가 없는데도] 왜 고통은 제거되어야만 하는가를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고통이] 제거되어야만 한다면, 모든 고통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기[의 고통]도 유정들[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
요약하면,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여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근거는 고통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고통은 고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 샨띠데바는 고통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하여, 고통을 소유하는 주체를 상속(saṁtāna)과 집합(samudāya)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생의 한 시점으로부터 다른 시점으로, 보다 정확하게는 순간으로부터 순간으로 이행하는 흐름에 불과한 '상속'과 오온이라는 구성요 소들이 모인 것에 불과한 '집합'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샨띠데바의 간결한 주장에 다음과 같은 살을 덧붙인다. 즉 상속은 승의적 진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에 있는 순간들의 부단한 흐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간들의 흐름을 초월한 것은 지각되지 않고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단한 순간들을 언어로 표시하기 위하여 지(知, buddhi)에 의해 동의된 언설로서 상속이라고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집합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집합의 구성요소와 달리 고유한 존재로서의 집합이라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상속과 집합이라는 개념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로서의 상속 또는 집합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속과 집합은 모두 세속적 차원에서 언설로서 표현된 가명일 뿐이다. 마치 행렬을 지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개미들이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결합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수많은 코끼리가 한 곳에 모여 일종의 군대를 형성하고 있더라도 군대라고 하는 고유한 존재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상속과 결합은 승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이다. 따라서 순간의 흐름에 불과하고, 구성요소들의 집합에 불과한 유정은 고통의 주체로서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허망한 존재가 바로 '자기'라고 집착(ātma-sneha)하거나 또는 그것에 자아의식(ahaṃkāra)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고통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고통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인간의 고통과 다른 생명체의 고통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통을 소유한 주체가 없고, 따라서 고통은 다만 고통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을 제거해야만 한다면, 나와 너의 고통을 따로 구별할 근거도 사라지게 되고 마땅히 모든 고통을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타인의 고통이 자기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지한 자들에 의한 어리석은 행위일 따름이라고 샨띠데바는 이해한다.
이와 같이 고통의 주체가 없다는 승의적 차원에서 자타의 차별 없이 모든 고통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샨띠데바는 향상적 방향의 무아의 지혜와 향하적 방향의 자비심을 자타평등의 수행을 통해 연결시킨다. 무아인 자기의 신체를 '사회화의 과정' 등과 같은 경험과 학습의 반복(abhyāsa, 또는 습관)에 의해서 '나'라고 의식하듯이, 무아인 타인의 신체도 반복 수행을 통하여 '나'라고 의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말한다.
"이 무아인 자기의 신체에 반복(습관)에 의해서 자기라는 생각(자아의식)이 [생기는 것]과 같이, 타인에 대해서도 반복 수행에 의해서 자기[라는 생각]이 왜 생기지 않겠는가."
실제로 '나'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신체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정액과 피에 의하여 태어난 것이다. 거기에는 '나'라고 할 만한 아무런 실체적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에 의하여 '나'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반복 수행을 타인의 신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여래비밀경』으로부터 유래한 샨띠데바의 이러한 생각을 슈미트하우젠은 "나를 무한히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나'라고 하는 의식을 자비에 의한 이타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자각적·의도적으로 반복 수행하여 습관화시킴으로써 모든 유정에게로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무아의 진리로부터 자비의 실천이 발생하는 것은 '반복 수행'(abhyāsa)을 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과 슬픔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간에 대한 보호심과 자비심을 반복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c.자비의 고통
샨띠데바는 고통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기초(승의의 지평)위에 자타평등 수행과 타인의 고통 제거(세속의 지평)라는 대승의 보살도를 확립한다. 이러한 대승의 보살도는 '자비의 고통'을 노래한 일련의 게송들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비의 고통이란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비와 이타에 전념할 경우, 수행자 자신에게 많은 고통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샨띠데바는 반론자의 의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자비에 의하여 많은 고통이 생기는데 왜 [자비심을] 애써 일으키는가라고 묻는다면"
반론자는 타인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자기에게 많은 고통이 생긴다면, 굳이 자비심을 일으키려고 애쓸 필요가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슈미트하우젠의 지적처럼 자비로 인해 다른 고통이 생긴다면, 그것은 고통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에 상반되는 것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샨띠데바는 반론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세간의 고통을 생각할 때 이 자비의 고통을 어찌 많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한 사람의 고통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사라진다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그 고통은 생겨야만 한다."
한 사람의 고통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신에게 고통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샨띠데바의 주장에 대하여, 반론자는 이것은 경전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샨띠데바는 Samādhirāja-sūtra에 나오는 선화월(Supuṣpacandra) 보살의 예를 들어 반론자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래서 선화월은 왕에 의한 가해를 예상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고통을 없애지 않았다."
샨띠데바가 인용한 선화월 보살의 예는 승의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의 결합, 무아의 지혜와 자비의 방편의 연결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죽음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에 의하여 타인의 구제를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고통을 포용하는 자세는 무주처열반과 고의수생으로 대표되는 향 하적 방향의 보살도에 다름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스스로 '자비의 고통'을 일으키고, 또한 그 고통을 없애지 않는 적극적인 자비의 행위는 수행자로 하여금 '백조가 연꽃송이에 내려앉듯이 무간지옥까지 내려가게 만든다.' 왜냐하면 타인을 위한 자비의 고통은 수행자의 마음을 '기쁨의 바다'(prāmodya-sāgara)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의 지혜를 바탕으로 자타평등을 수행하여 타인을 보호하는 마음(rakṣā-citta)과 자비의 마음(dayā-citta)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샨띠데바는 고통의 주체의 비존재, 즉 무아를 이타적 윤리의 근거로 삼으면서 공성과 자비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고 있다.
B.자타치환
지금까지 BCA를 살펴본 바와 같이 샨띠데바는 보리심을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으로 구분한 후, 원보리심의 생기를 위해서는 믿음(śraddhā)과 무상공양(anuttara-pūjā) 의례와 같은 준비 단계를, 그리고 본격적인 행보리심의 실천을 위해서는 6바라밀의 수행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기술한다. 이러한 긴 여정의 목적은 보리심을 통하여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믿음을 일으키고 무상공양 의례를 행하며 바라밀의 내용을 실천하여 보리심을 견고히 하는 것은 결국 자타의 구별 없이 자비심에 의해서 모든 유정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샨띠데바는 그 이론적 근거를 무아의 진리에 둔다. 즉 고통의 주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구별되지만, 승의의 입장에서는 자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자타평등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1장부터 지금까지 승의와 세속이라는 두 가지 세계에서 먼 길을 걸어 자타평등의 수행에 도착한 BCA의 보리심 수행은 마침내 자타치환의 수행에서 일단락된다. 이 마무리의 정점에서 자리(svārtha)와 이타(parārtha), 혹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의어가 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타인은 평등하고, 또한 자기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게송90이 자타평등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게송120은 자타치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을 속히 구제하기를 원하는 자는 자타를 바꿔 보는 최고의 비밀을 실천해야 한다."
슈미트하우젠이 말하듯이 '자신과 타인을 바꿔 보는 것'(parātma- parivartana, 자타치환)이란 술어는 샨띠데바 이전의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수행에서 낯선 것이며 그 내용도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진 않다. 하지만 게송136에서 샨띠데바 스스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자타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타치환의 수행을 위하여 샨띠데바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애착이 모든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임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원수(śatru)로 여길 것을 권고한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애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샨띠데바는 자신만을 위하는 어리석은 자와 타인을 이롭게 하는 현명한 자의 차이를 관찰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불행과 행복은 그 둘의 차이에서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샨띠데바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자타치환을 수행할 것을 권고한다.
"자기의 행복을 타인의 고통과 바꾸지 않는 자는 참으로 불성을 이룰 수 없다. 윤회의 세계에서조차도 그 어디에 행복이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불을 버리지 않고는 화상을 입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샨띠데바는 자신과 타인을 치환시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에 의해서 타인을 향한 질투와 자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범부들은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을 향해서는 자만심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향해서는 경쟁심을,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향해서는 질투심을 일으킨다. 이 세 가지 마음은 모든 번뇌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어떠한 분별심도 일으키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여 자신과 타인을 치환시키는 수행을 할 것을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열등한 자 등을 자기 자신이라고 보고, 또 자신을 타인이라고 보며, 그리고 마음에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질투와 자만을 관찰해야만 한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