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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은 무관으로 고려 3명, 조선 9명이다.
■ 고려시대 : 지용수, 박병묵, 최필달 등 3명 이다.
□ 지용수(池龍壽 1313년~?)
고려 말기 무신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하성(河聲), 호는 월송(月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충주 지씨 1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시랑(門下侍郞) 지원부(池元夫), 아버지는 시중 평장사(侍中平章事) 지환(池桓)이다. 외손자는 조선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이다.
고려 충목왕 때 현릉직으로 보임됐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하자 안우(安祐)를 도와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이듬해 1등공신(一等功臣)에 이어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됐다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옮겼다.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안우경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 군대를 격퇴한 공으로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더해 하사받았다. 이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임명된 이후 승진을 거듭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제수받았다.
1365년(공민왕 14) 밀직사, 지도첨의(知都僉議), 상원수가 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로 교동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다. 1367년 서북면 도순문사가 됐다.
1369년(공민왕 18) 서북면 상원수 겸 평양윤(平壤尹)이 됐다. 1370년 8월 원나라에서 평장사를 지낸 기새인티무르가 김바얀 등과 함께 동녕부를 거점으로 변경에 침입하자 공민왕이 상원수 지용수, 부원수 양백안, 안주상만호 임견미, 이성계를 보내어 치게했다.
이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에 목교(木橋)를 만들어 3일간을 계속해서 장병들을 도강(渡江)시키니 3년간 계속되는 가뭄으로 찌는 듯한 폭염에 장병들은 비지땀을 흘렸다. 다 건너고 나니 뇌우가 갑자기 일어났다. 모두 두려워하자 병마사 이구(李玖)가 말하기를, “용(龍)이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뇌우(雷雨)가 치는데 상원수가 이름이 용자(龍字)인데 도강일(渡江日)에 뇌우(雷雨)가 있으니 승조(勝兆)다” 라고 하니 모두 안심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 장병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북방(北方)에 이르는 곳마다 적을 닥치는 대로 섬멸하니 공민왕이 예언한 대로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왕은 하늘이 낸 장수라 칭하고 벼슬은 문하시중 찬성사 겸 평장사를 역임하고 충무공(忠武公)에 봉해졌다.
□ 박병욱
나주 박씨 시조로 고려 평장사를 지냈지만 기록이 없다.
□ 최필달
강릉 최씨는 시조를 전주계(全州系), 경주계(慶州系), 강화계(江華系) 등 세 계통으로 기록이 내려온다. 전주계(全州系)는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한다. 경주계(慶州系)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한다. 강화계(江華系)는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한다.
최필달은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 후손인 최승로(崔承老)의 증손이다. 최필달은 고려 건국 시 교육과 도의의 선양에 크게 공헌한 문무를 겸한 학자로 해동부자(海東父子)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정승이 되고 경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자리한 황산사(篁山祠)는 최필달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00년대 초 문중과 유림이 논의 후 지었다.
■ 조선시대
조영무, 이준, 남이, 이순신, 김시민, 이수일, 정충신, 구인후, 김응하 등이다.
□ 조영무(趙英茂 ?~1414)
본관은 한양(漢陽).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趙之壽)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순후(趙珣厚)이고 아버지는 조세진(趙世珍)이다. 개국공신 1등 조인옥(趙仁沃)과 개국공신 2등 조온(趙溫) 등의 출세에 힘입어 한양을 본관으로 정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 무신으로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일조하고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사람이다. 이후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다. 조영무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경기도 광주 퇴촌면 지명은 조영무 호인 퇴촌에서 유래한다.
□ 이준(李浚 1441년 1월 20일 ~ 1479년 1월 28일)
귀성군 또는 구성군(龜城君, 1441년 1월 20일 ~ 1479년 1월 28일)은 조선 전기 왕족이다. 본관은 전주, 자(字)는 자청(子淸), 호(號)는 자준(子濬), 시호(諡號)는 충무(忠懋, 忠武).
1441년 1월 20일, 조선 한성부에서 세종대왕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66년 등준시무과 갑과에 급제한데 이어 도총관으로 1467년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난을 진압한 공로로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제수됐다. 같은 해 남이에게 병조판서 직을 넘기고 1468년 음력 7월 17일 28세 나이로 조선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영의정에 임명됐다. 정치적으로 훈구파에 가까웠지만 신진세력 및 사림파와도 가깝게 지냈다.
1468년 9월 큰아버지 세조가 선위하고 사촌 동생이자 손윗동서인 예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써 잠시 섭정하다가 1469년 1월 아버지 임영대군이 훙서(薨逝)하자 아버지상을 치르기 직전에 영의정 직위에서 물러났다.
1470년 최세호가 귀성군이 왕의 재목이라고 한 것을 정인지가 역모로 엮어 1월 14일에 최세호와 권맹희는 죽임을 당하고 귀성군은 유배를 가게 된다. 9년 후 1479년 1월 28일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남이(南怡)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할머니는 정선공주(貞善公主 : 태종의 4녀),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으며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했다.
1467년 명을 받아 포천(抱川)·영평(永平)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다.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大將)에 임명돼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조석문(曺錫文)·허종(許琮)·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 등과 토벌에 참가했다. 군중에서 당상관에 초계(超階)돼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행호군이 됐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토벌하자 평안도선위사(平安道宣慰使) 윤필상(尹弼商)의 지휘 하에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주장(主將) 강순, 좌상대장(左廂大將) 어유소와 함께 만포(滿浦)로부터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해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은 뒤 공조판서에 임명됐다. 1468년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한데 이어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같은 해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 원상(院相) 세력에 의해 구성군·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 세력이 제거될 때 형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한계희(韓繼禧)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한계희가 예종에게 알리면서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이때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 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다.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국문 끝에 능지처사당했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됐다. 어릴 때 권람(權擥)의 딸이 귀신의 장난으로 죽게 된 것을 남이가 귀신을 물리치고 살려준 것을 인연으로 아내로 맞았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남이 장군 묘는 2군데다. 실제 남이 장군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남이섬의 묘는 가묘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됐다.
□ 이순신
일반적으로 가잔 많이 알려진 충무공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 김시민(金時敏)
김시민(金時敏, 1554년 9월 23일(음력 8월 27일)~ 1592년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들어갔다. 1581년 부평부사가 됐지만 경기어사 서찰로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했다. 그 공으로 훈련원때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했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젊은 혈기에 분개해 사직했다.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목사직을 대리했다. 진주로 돌아와 성 주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했던 주민을 귀향하게 했다.성채를 보수하는 한편 훈련을 통해 군사 체계를 갖췄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했다.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해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000을 이끌고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했다.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1592년 음력 7월 26일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
김시민은 취임 후 염초(焰硝) 5000여 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어 따로 부대를 배정해 숙달시키는 한편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했다.
음력 9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 통정대부로 임명했다. 그 뒤 금산(金山)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했다.
김시민 장군은 1592년 10월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왜군이 3만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략했지만 3800여 명의 병사로 맞섰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성 안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수적으로 많았던 왜군 공세를 물리쳤다.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도중에 일본군의 탄환을 맞아 38세로 전사했다.
□ 이수일(李守一)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로 여진족을 소탕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오른다.
□ 정충신(鄭忠信)
정충신(1576년 ~ 1636년 6월 6일(음력 5월 4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晚雲), 본관은 금성 정씨(錦城)이며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이다.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윤(綸)이고 어머니는 노비 신분이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에 따라 노비가 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했고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됐다.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유배됐다. 시호는 충무공(忠武公), 군호는 금남군(錦南君)이며 고려의 명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정충신 사당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진충사) 소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
정충신묘는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마힐산 소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0호)
□ 구인후(具仁垕)
구인후(1578년 ~ 1658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척신으로 인조의 외사촌 형이다. 휘는 인후(仁垕),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1578년 대사성 구성의 아들이자 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손자로 태어났다. 구굉과 인헌왕후의 조카로 인조에게는 외종형이 된다.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어받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1611년(광해 3) 고원군수(高原郡守), 갑산부사(甲山府使)를 지냈으며 1614년 선전관이 됐다.
1621년 진도군수가 됐지만 광해군 정치에 반감을 품고 이서·신경진 등의 인조반정 모의에 참여했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외지에 있었기 때문에 한양에 도달하지 못해 거사 현장에는 없었으나 처음부터 반정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1624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후금의 군사를 막아 싸웠다. 1628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한성부 판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포도대장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했다. 어영대장, 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의금부판사 등을 지냈다. 어영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음모를 적발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으로 진봉됐다.
훈련대장, 공조 및 병조판서를 거쳐 효종 즉위 후 1653년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사사당한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다 죄를 입고 사형당한 김홍욱을 두둔, 옹호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면서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곧 복관돼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 김응하(金應河)
김응하(金應河, 1580년 ~ 1619년)는 조선의 무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의(景義), 시호는 충무(忠武)다.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출생했다. 25세 때인 1604년(선조 37) 무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주선으로 선전관에 제수됐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했다.
1610년 선전관에 다시 임명됐다. 선천군수,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했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따라 좌영장으로 출정했다. 3월 부차령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 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1619년 40세로 전사했다.
1620년 명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졌다. 광해군도 전사를 가상히 여겨 나중에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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