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奬忠壇]은 1895년(을미사변) 명성황후가 시해될 당시 순국한 시위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를 비롯하여 당시 일제에 의해 희생된 장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고종의 특명으
로 1900년에 설치한 제단인데, 오늘날 국립현충원에 해당한다. 이곳은 한양도성 남쪽을 수비
하던 남소영이 있던 자리로 예로부터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당초 부지 약 21만평)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직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폐사하고 장충단비는 뽑아버
렸다. 1920년대에 일제는 이곳에 놀이시설과 벚꽃 동산을 조성한 다음 [장충단공원]으로 이름
붙였다. 나아가 1930년대에 일제는 이곳 약 5만평 부지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
藤博文)의 혼을 달래는 박문사(博文寺, 일본식 사찰)를 건립하였는데, 그 즉시 식민지배의 정
신적 지주이자 경성의 명물로 자리매김하였다(아래 사진 해설 참조).
주지하듯,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였
는데, 그 30년 후인 1939년 안 의사의 차남 [安俊生(1907년생, 장남은 7세에 독살됨)]은 박문
사를 방문하여 안 의사의 의거(테러행위)를 일제에 사죄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안준생은 일
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사죄행진을 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치욕적 오점을 남겼을 뿐 아니라
안 의사의 얼굴에도 먹칠 하고 말았던 것. 오호, 虎父犬子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던 박문사 건물은 1959년 그 부지 일부(약 2만 8천평)에 국빈용
숙소인 [영빈관]이 착공되면서 철거되었다. 이 영빈관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완공되었
지만, 1973년 삼성그룹에 넘겨저 현재의 신라호텔로 변신하였다. 당초 21만평 부지의 장충단
은 신라호텔 외에도 국립극장, 자유센터, 향군회관, 타워호텔(반얀트리), 중앙공무원교육원(현
동국대 일부) 등으로 갈갈이 찢겨져 현재는 9만평 정도에 불과하다.
요약하면,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영원히 사라져버렸고, [장충단비]는 신라호텔 경내 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있으며, 일제가 조성한 [장충단공원]은 이름과 함께 그대로 승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舊한말 [壇]이란 이름을 갖는 3개의 국립제단 가운 데 천자국의 상징인 [원구단(혹은 환구단)]과 항일의 상징인 [장충단]은 1910년 병탄 직후 폐사 되었고, 현재는 [사직단]만 남아있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의 장충단 장충단은 다른 국립제단과 마찬가지로 신위를 모신 제단 건물(단사, 본전)과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현 위치의 장충단비. 앞면의 비문은 순종(이척)이 황태자 시절 쓴 것이고 뒷면의 찬문은 민영환이 지은 것이다.
1910년 병탄 직후 일제는 이 비석울 뽑아 땅속에 묻어버렸는데, 해방 후 당국은 현 신라호텔 자리에 다시 세웠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박문사 배치도/ 고려대학교 소장 여기서 [총문]이란 사찰에 들어가는 정문을 말하고, 쿠리(庫裏, くり, 고리)란
본당의 부속건물로 주지나 그 가족들의 거실 공간을 말한다.
박문사 총문 경춘문. 당시 일제는 철거된 [경희궁 흥화문]을 이곳으로 옮겨와 정문으로 사용해 왔다.
박문사 총문에서 본당으로 이어지는 108계단의 참도(참배길). 이 계단은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박문사 건립 시 조성한 연못
박문사 전경. 왼쪽 문이 총문(경춘문)이고 오른쪽 언덕 위 건물이 본당이다
당시 관광우편엽서 일제는 박문사가 있는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 이름 붙여 [춘무산 박문사]로 통칭하였는데,
춘무는 바로 이등박문의 호다.
위용을 자랑하던 박문사 본당
기품있게 장식된 박문사 본당 내부 모습
박문사 본당에 본존석가여래상을 바치는 내지(일본)의 정계 거물들 맨 왼쪽이 일본 극우파 초국가단체 玄洋社의 최고지도자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1855-1944년)다.
박문사 부속건물 고리(쿠리). 이 건물은 경복궁 선원전(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보관하던 전각)을 뜯어 옮긴 것이다.
이등박문 시비. 남산 경성신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등박문 추모비
일제가 제작한 장충단 일원 설계도/ 장충단공원박물관 소장
이 도면은 일제가 장충단 권역을 양대 축으로 나누어 개발했음을 보여주는데, 의당 A축이 핵심이다.
이 도면상 A지점이 박문사 본당(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이고, B지점 일대가 장충단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또 왼쪽의 원형 운동장(군사훈련장)은 각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훗날 육군체육관(현 장충체육관)이 들어서는 곳이다.
박문사 권역의 종각(석고각). 이 종각은 원구단의 석고전을 띁어 옮긴 것이다.
일제가 장충단공원 내에 설치한 만주사변(대륙침략의 전초전) 당시의 이른바 육탄삼용사상
일제가 조성한 장충단공원 권역의 벚꽃 동산과 매점 등 편의 시설
1930년대 박문사 전경과 기념 스탬프
1955년 당시 현 태극당 자리에서 바라본 박문사의 위용. 건립 후 경성 시가지를 눈 아래 두고 있는 형세였음을 알 수 있다.
1958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영빈관 건설 장소인 박문사 본당 터를 둘러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자료
해방 이후에도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계속 사용되었던 경희궁 흥화문. 이 문은 1988년 경희궁 복원 때 옮겨가고.
현재의 것은 원 흥화문을 본떠 다시 만든 것이다.
첫댓글 안중근 의사의 외아들 安俊生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지 못함에 따라 그 후손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렸고, 안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한 安椿生(육사 8기, 중장 예편)은 안 의사의 從姪(5촌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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