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江寒 第16章
<16-3>
이경(二更) 무렵, 찬 바람이 몰아치는 화음현(华阴县) 서대가(西大街)-----
밤이 깊어 거리는 더욱 적막하고 스산했지만, 주관(酒馆)인 명월루(明月楼)는 오히려 더욱 흥청거리는 듯,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하고 술 마시고 도박하며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했다.
화음현서(华阴县署)의 포두(捕头) 팽호(彭灏)는 두 노인과 함께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팽로!"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팽호가 옆을 돌아보고 동가(东街)에 있는 포목 상점인 장원포장(长源布庄)의 주인 백춘부(白春富)라는 것을 알자, 급히 몸을 일으키고 웃으며 인사했다.
"백(白) 노판(老板)이 오셨군요! 같이 앉아 술 한잔 함께하는 게 어떻겠소?"
팽호와 함께 앉아 있던 두 노인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백춘부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후 점원에게 술과 안주, 그리고 양잡쇄탕(羊杂碎汤) 한 그릇을 더 가져오라고 명했다.
마주 앉아 연거푸 세 잔을 건배한 후 팽호는 백춘부에게, 장원포장(长源布庄)의 장사가 잘 되어 하루에 금 한 포대만큼의 돈을 벌고 있으며 내년 봄에는 손자를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기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우 무거운 고민이 있는 듯 백춘부는 억지로 웃음을 지을 뿐이었고, 이 모습은 팽호의 날카로운 두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노판, 현명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이다. 분명 어려운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게 말씀해 주시구려."
백춘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카가 큰 사고를 일으켰소이다!"
팽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큰 사고를 쳤다는 거요? 사람이라도 죽였나요?"
백춘부가 어두운 표정로 말했다.
"백모는 원래 화개촌(华盖村) 사람으로 못난 조카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워낙 여색(女色)을 밝히는 성격이라, 어느 날 화개촌에서 한 미모의 소녀를 발견하고는 겁도 없이 두 명의 졸개를 이끌고 미행하여 소녀의 집으로 쳐들어 갔답니다. 뜻밖에도 집안에 강호의 인물이 있어 두 졸개는 현장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조카도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팽호가 냉소했다.
"자업자득일 뿐 누구를 원망하겠소?"
백춘부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를 묻는 것은 원래 지은 사람에게만 그쳐야 하는 것인데, 이 강호의 인물은 온 마을에 책임을 물어 피로 씻겠다고 떠들고 있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소이다."
팽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이 늙은이는 믿기가 어렵구려!"
백춘부가 다급히 말했다.
"팽로(彭老) 앞에서 백모가 어찌 감히 없는 말을 꾸며낼 수 있겠소이까."
백춘부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팽호는 다소 믿는 듯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그 강호 인물이 이미 두 명의 하수인을 살해하고 조카도 온몸에 상처를 입혔는데 왜 아직도 온 마을을 피로 씻어야 한다고 떠벌리는지, 분명히 사리에 맞지 않으니 그 속에 반드시 다른 곡절이 있을 것이오."
백춘부가 말했다.
"그는 조카가 졸개들을 풀어 집안의 하인과 노비들 여러 명을 해치고 진귀한 물건들을 모두 망가뜨리는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덮어씌우더니, 조카의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거액의 배상금을 강요하고 있소이다."
팽호가 "아!" 탄성을 발하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구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팽호는 갑자기 한 가지 일을 떠올린 듯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화개촌이라..."
곧이어 물었다.
"그러면 혹시... 매우 젊고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가 아니던가요?"
백춘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팽호의 안색이 크게 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당금 황제의 내척(内戚)으로 이 늙은이는 힘이 되어 줄 수 없으니, 속히 그가 말한 대로 재물로 배상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멸문지화(灭门之祸)를 면하지 못할 것이오. 어서 서두르시오, 어서!"
백춘부(白春富)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급히 술집을 나갔다.
팽호는 백춘부의 모습이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점원을 불러 소고기 파오모(泡馍)*⑴ 한 그릇을 더 가져오라 한 후, 천천히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후 옆자리에 있던 깡마른 사내가 자리를 떠나 술값을 계산한 후 성큼성큼 주점 밖으로 나갔다.
깡마른 사내는 성 밖으로 나가더니 급히 달리기 시작하여 어느 소나무 숲으로 들어섰는데, 숲 속에는 기와 지붕의 몇 칸 안 되는 작은 묘당(庙堂)이 하나 있었고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가 유령 같이 표홀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음산한 냉소 소리가 들렸다.
"어떤 놈이 기웃거리고 있느냐!"
"척(戚) 현제(贤弟), 나요!"
라고 답하며 깡마른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불이 켜지고 옆방에서 흉악하게 생긴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깡마른 사내를 맞이했다.
깡마른 사내는 눈에 의혹을 드러내며 말했다.
"척현제, 집안의 불을 다 꺼 두고 은밀히 행동하니, 사당 밖에 의심스러운 인물이라도 발견한 것 아니오?"
흉악스런 대한이 냉소하며 말했다.
"소제(小弟) 척수(戚修)는 복구한(伏九寒) 형님과 마찬가지로 천성이 오만하여 누구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지만, 동주(峒主)께서 여러 차례 거듭 당부하시니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고 있소이다. 더욱이 밤이 되자 사당 바깥에서 계속해서 무림 인물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복구한이,
"바람에 낙엽이 쓸려 소리가 난 것이겠지."
하며 말을 더했다.
"웬만한 무림인들은 두려울 게 없지만 자전검(紫电剑)과 백홍검(白虹剑)은 진정 두렵지."
척수는 그 말에 놀라 안색이 급변했다.
"복형이 이미 쌍검의 행방을 알아낸 것 아니오?"
복구한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얻어낸 소식은 화개촌(华盖村)의 장원(庄院)에 있는 사람은 축미화, 그 천한 계집이 아니라 당금 황상의 내척이니, 동주가 강적의 차도살인(借刀杀人) 계략에 넘어간 것이 분명하오."
척수는 멍해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개촌에 갈 필요가 없는 거 아니오?"
복구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형의 생각에는 그래도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우장을 들어 밖을 향해 내질렀고, 곧이어 한 줄기 신영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묘당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척수가 큰 소리로,
"저기 도망갑니다!"
하고 외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고, 보구한은 어느새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밖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밖으로 달아난 신영은 묘당 옆 소나무 숲에 내려앉더니 즉시 몸을 돌려 달려오는 두 사람을 향해 산처럼 우뚝 섰는데,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복(伏), 척(戚) 두 사람이 아직 땅에 내려앉지도 않은 상태에서 각자 쌍장을 휘두르며 빠르게 공격을 시작하자, 네 줄기 장력이 복면인을 향해 휘몰아쳤는데, 겨냥하는 부위도 그렇고 그 기세도 악랄하기 그지 없어 복면인으로서는 도저히 몸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복면인이 돌연 두 손으로 호(弧)를 그리며 분운벽월(分云劈月) 일식을 펼쳐 맞받아치자, 굉음과 함께 거센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복, 척 두 사람의 신형이 모두 3척 가까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복구한이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친구의 무공이 약하지 않은데 복모는 좀더 가르침을 받아야겠소!"
반면 복면인은 자신의 일 초식이 두 사람을 조금도 상하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해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바람을 타고 음산한 냉소가 들려왔다.
"손 늙은이, 그 두 도적놈은 온몸이 동근철골(铜筋铁骨)로 단련되어 있으니, 당신이 그들의 조문(罩门=死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두 사람을 제거할 수 없소."
복면인이 냉소하며 소리쳤다.
"반드시 그렇지만는 않을 것이오!"
복면인은 입으로는 그리 소리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때 음랭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은 호기를 부릴 때가 아니니, 어깨에 맨 자전검(紫电剑)을 사용해 저들을 제거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는 게 좋겠소!"
복구한(伏九寒)과 척수(戚修)는 '자전검' 소리를 듣자마자 간담이 서늘해지고 혼비백산하여 일학충천 수법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유성처럼 빠르게 달아났다.
거대한 몸집의 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복면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복면을 벗으며 땅에 엎드렸다.
"스승님!"
나타난 괴노인은 바로 염라독장(阎罗独掌) 소궁호(邵宫虎)였고, 복면인은 당몽주(唐梦周)였다.
소궁호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너였구나! 자, 묘당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사제 두 사람이 마주 앉자 당몽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사께서는 어떻게 제자인지 아셨습니까?"
소궁호가 대답했다.
"스승은 먼저 네 신법이 마운신조(摩云神爪) 손도원(孙道元)과 매우 비슷한 것을 보며 짐작했고, 나중에 네가 쓴 장법을 보고 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소궁호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당몽주를 바라보았다.
"수개월 동안 영약 한 그루를 채집하기 위해 심산대택(深山大泽)을 헤매다가 우연히 냉비(冷飞)를 만나 네가 이미 강호에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제는 마치 집안 이야기를 하듯 정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소궁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스승과 백의흉사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임을 명심해라. 그리고 네가 그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고, 축미화가 말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을 것이니, 만약 잘못되면 반드시 온 세상을 뒤엎는 대재앙이 일어날 것임을 명심하고, 너는 반드시 자전검을 얻어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겁(杀劫)을 막아야 한다."
말을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당몽주는 스승이 자신에게 중임(重任)을 맡겼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점차 궁중 분쟁에 연루되어 간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전각을 나와 묘문(庙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묘문을 나서려 할 때 숲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거리는 것을 느끼곤 재빨리 몸을 돌려 정전(正殿) 안에 있는 신감(神龛)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밖에서 한 명의 승려와 한 명의 도사가 달려 들어왔는데, 어깨에는 각각 계도(戒刀)와 장검(長剑)을 메고 있었고 옷과 신발에는 두꺼운 먼지가 묻어 있어 먼 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도사가 전각 안을 둘러보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이 맞군."
두 사람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경장대한(劲装大汉)와 두 명의 청의노인(青衣老人)이 뛰어 들어왔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각자 자리를 골라 바닥에 앉았다.
대전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이내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몽주는 마음속으로 의아하고 신기했다.
'저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구나.'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날 무렵, 한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대전으로 들어오며 검은색 도포를 입은 중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도톰한 삼각형 얼굴에 짙은 눈썹은 날카롭게 뻗었고, 매부리코에 짧은 수염 세 가닥을 기르고 표정은 얼음처럼 냉랭했다.
그는 사람들이 앉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여러분 일어날 필요 없으니 그냥 앉아 있으시오. 군주(君主)께서 명하셔서 형제가 밀서를 가지고 왔소."
라고 말하며 손을 품에 넣어 일곱 개의 밀봉된 편지를 꺼내 차례로 일곱 사람의 손에 건네주었다.
당몽주는 신감(神龛) 뒤에 숨어 숨을 죽인 채 대전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군주는 또 누구인가? 강호상의 일들은 정말로 실로 구름과 같이 괴이하고 물결처럼 속을 알 수 없구나! 내가 강호에 몸을 담지 않았으면 어찌 강호가 이처럼 굴곡과 변화가 많은 곳인지 알 수 있었겠는가?'
일곱 사람은 밀서를 뜯자마자 모두 갑자기 안색이 참담하게 변했고, 그 중 승려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계도를 손에 들고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검은 도포를 입은 중년인의 가슴을 향해 내리쳤다.
검은 도포 중년인은 얼굴에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번개처럼 다가오는 칼을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단지 맨손 일장을 내밀었는데, 쨍 하는 금속성이 울려퍼지며 승려는 화살처럼 튕겨나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몸을 두 번 뒤집더니 칠공(七孔)에서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졌다.
이 광경을 목도한 나머지 여섯 사람은 큰 충격에 모두 몸이 흔들거리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그중 도사가 처량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죄를 씌우려고 한다면 무슨 구실을 못 찾겠소(欲加之罪, 何患无辞). 망령되이 남의 속임에 빠졌으니 빈도(贫道)는 실로 불복할 뿐이오."
검은 도포의 중년인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군주께서 원래 너희들에게 무우곡(无忧谷)과 화개촌(华盖村)을 암습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은 너희들이 딴마음을 먹고 외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군주께서는 너희들을 남겨두면 반드시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도 과거의 공로를 생각해서 시신만은 온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으니 그나마 감사해야 한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중년인은 번개처럼 빠르게 전각을 빠져나갔다.
인상이 험악한 대한 하나가 이를 갈며,
"나는 너를 증오한다!"
하고 절규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쓰러지더니 구공(九孔)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고,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하나 둘씩 쓰러졌다.
당몽주는 미끄러지듯 신감 뒤에서 나와 도사를 일으켜 세우고 장심(掌心)을 도사의 등뒤 명문혈(命门穴)에 갖다 댔다.
도사는 두 눈을 뜨고 당몽주를 쳐다보더니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시주는 빈도를... 구할 수 없소이다. 독성이 매우 심해... 오장육부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시주는 속히... 이곳을... 떠나시는 게.. 좋을 거요."
당몽주가 황급히 물었다.
"군주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도사는 말을 지탱할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행화동주(杏花峒主) 방(方)......."
기력이 너무 쇠잔하여 말이 채 이어가지 못했다.
당몽주는 급히 오른손 장심을 통하여 순양진기(纯阳真气)를 주입했다.
도사는 눈을 뜨지 못한 채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시주......만약......그를 제거하려면......자전(紫電)이 없으면......안 되니......."
라고 하더니 결국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며 숨이 끊어졌다.
갑자기 피투성이 얼굴의 청의노인 한 명이 눈을 뜨더니 나약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사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소. 그 노적(老贼)을 제거하지 못하면 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우리처럼 영문도 모르고 죽게 될 것이오."
당몽주가 급히 말했다.
"노영웅께서는 누구신지요? 저는 노영웅의 친구와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해 함께 노적(老贼)을 도모할 방법을 찾겠습니다."
청의노인은 숨을 헐떡이며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사문(师门)에... 누가 되니... 말하지 않겠소..."
당몽주가 급히 다가가 살펴보니 청의노인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죽은 사람들을 정원 구석에 묻어 준 다음 화음현(华阴县) 현서(县署)로 돌아왔다.
돌아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갑자기 창밖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제, 우리가 오랫동안 못 봤는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에서 금포(锦袍)를 걸친 건장하고 키가 큰 중년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당몽주는 한눈에 대내(大内) 일등시위(一等侍卫)인 철장(铁掌) 이정방(李廷芳)임을 알아보았는데, 경성에 있을 때 가장 의기투합했었고, 이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李) 대인(大人)께서는 무슨 일로 경사(京师)를 나오셨습니까?"
이정방은 자리에 앉으며 당몽주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일로 출경(出京)했는지는 노제가 가장 잘 알 텐데, 왜 알면서 묻는 겐가? 세 번왕(藩王)들이 황위를 찬탈하려는 밀모를 언급한 노제의 밀서가 낭낭(娘娘=황후)을 통해 내게 내려왔으니, 내가 풍진(风尘) 속을 전전긍긍하며 침식마저 편히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것이 아니겠나!"
당몽주가 웃으며 말했다.
"이대인께서는 얼마나 알아내셨습니까?"
이정방(李廷芳)이 쓴웃음을 지었다.
"세 번왕(藩王)들이 규정대로 일을 처리하며 조금의 흔적이나 허점을 드러내지 않아 손댈 방법이 없었네. 하지만 황상께서는 세 번왕들이 반드시 보위를 불안하게 할 것이라 깊이 믿고 거듭 비밀리에 조사하도록 엄하게 지시하셨고, 나로서는 아무 단서를 찾을 수 없어 고심하고 있는 형편이네."
"정말로요?"
이정방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어찌 거짓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무림은 난세의 전조를 보이고 있고, 이는 삼번(三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반드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관부에서도 죄를 물을 수 있지 않겠나?"
당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인께서 그 속에 담긴 도리를 이해하고 계시다니 잘 되었고, 황상 역시 모르실 리 없습니다. 지난날의 위태롭던 상황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마땅히 변고가 재발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삼번이 아무리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백 가지 치밀한 계책 중 한 가지 실수는 꼭 있는 법(百密一疏)입니다."
이정방이 비로소 눈살을 펴며 웃었다.
"노제가 말씀해 보시게."
당몽주가 말했다.
"각자 독립적으로 정치를 하는 삼번(三藩)은 지금 서로를 믿지 않고 자체 패거리를 양성하는 데만 진력하며 적을 제거하는 일은 매우 신중하게 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매사 귓속말로 지시를 내릴 뿐 편지 한 장 남기지 않으니, 이 때문에 털끝만큼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비교적 최근의 행동거지이고, 예전에는 그들 사이에 밀찰(密札)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중 일부 중요한 서신들이 분실되었고, 이는 결국 건곤독수(乾坤独叟)와 왕옥맹수(王屋盲叟)의 피살 사건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정방의 안색이 급변했다.
"밀찰들은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당몽주가 대답했다.
"저는 이미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는 감히 자신이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정방이 놀라 물었다.
"왜 그런가?"
당몽주가 말했다.
"이 사람도 당시 밀모(密谋)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들을 취한 다음 숨기며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서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더했다.
"물론 이는 제 자신의 추측일 뿐이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 나중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정방이 손뼉을 쳐 시종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오게 했고, 당몽주는 그동안의 상세한 경과와 알아낸 사실들, 그리고 가슴속의 추측을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이정방이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노제의 생각하는 바가 옳은 것 같군. 백의흉사(白衣凶邪), 자포인(紫袍人) 및 행화동주(杏花峒主)는 모두 삼번(三藩)의 명을 따르는 듯 한데, 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쓸 작정인가?"
당몽주가 눈에서 한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각개격파(各个击破), 자극과 도발 그리고 섬멸입니다."
두 사람은 소리를 낮춰 한동안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윽고 이정방이 희색이 만면하며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지. 나는 즉시 경성으로 돌아가 낭낭(娘娘=황후)께 복명하겠네."
두 사람은 경성의 돌아가는 얘기를 몇 마디 더 나누었고, 술기운이 오르자 이정방은 작별을 고하고 몸을 일으켰다.
당몽주는 잠시 조식(调息)한 후 관아 밖으로 나가 솜씨 좋은 장인(匠人)을 찾아 큰돈을 주고 부영지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철괴(铁拐)를 하나 만들라고 주문하였다.
후한 상이 용사를 만드는 법, 해질녘이 되자 장인은 이미 제작을 마쳐 물건을 건넸고, 당몽주가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는 철괴를 들고 무우곡으로 달려갔다.
백천애(百泉崖)에는 백월하와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이 길은 매우 험해 상승무공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통과할 수 없었다.
자시(子时) 무렵, 백천애 꼭대기에 당몽주의 우뚝 솟은 모습이 나타났다.
당몽주는 갑자기 뒤통수에 바람이 일며 강맹한 암력이 덮쳐옴을 느꼈다.
그는 몸을 빠르게 돌려 다섯 손가락으로 하얀 손목을 낚아챘는데, 앙칼진 비명 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공자셨군요! 소녀가 몰라 뵙고 실수를 저질렀으니 용서해 주세요."
당몽주는 그녀가 백월하의 시녀 소도(小桃)임을 알아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가씨의 비파장(琵琶掌)에 큰 부상을 당했을 거요."
수줍음에 소도의 얼굴이 빨개졌다.
"공자님이 너무 빠른 신법으로 갑자기 나타나셨는데, 달도 없고 어두워 소녀는 흉악한 자객이 몰래 습격하는 줄 알고 손을 썼으니, 어찌 소녀를 탓하실 수 있겠어요?"
당몽주가 웃으며 말했다.
"모르고 한 일이니 죄가 아니고, 농담이니 아가씨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소. 속히 백매(柏妹)에게 와서 만나자고 전해 주시오. 다만 부마마(傅嬷嬷)께는 알리지 마시오."
소도는 총명하여 당몽주의 손에 들린 철괴가 부영지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이 생긴 것을 보고 깨달은 듯,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공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녀가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치곤 놀란 기러기 모양으로 훌쩍 날아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16장 마침)
[註]
*⑴ 泡馍(포막) : 파오모.
중국 서북(西北)지역의 식품으로 빵을 으깨어 양념한 다음 끓는 소고기 국물이나 양고기 국물에 말아서 먹는 음식.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老板의 중국어 발음은 '라오반'이지만 우리 발음은 '노판' 아닌가요?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