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 <카르멘>
오페라 [카르멘]은 1875년 3월 초연 당시 무자비한 혹평을 받는 바람에, 3개월 후 한창나이로 세상을 떠난 조르주 비제의 사인 또한 그 충격 때문이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 오페라의 담배 공장 여공들에 대해서 “지옥에서 쏟아져 나온 여자들이여, 저주받아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의 최고 인기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자주 공연되며 프랑스 오페라의 자존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카르멘] 덕분에 프랑스 오페라도 이탈리아, 독일 다음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창단 50주년을 맞은 국립오페라단이 우리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로 선정하여 2012년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혹평에서 격찬으로!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비제의 [카르멘]은 초연 당시에는 혹평을 받았었지만, 어느새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가 되었다.
1어느 집시 여인의 사랑과 죽음
오페라의 배경은 1820년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이다. 바스크 출신의 돈 호세는 모친이 점지해준 미카엘라라는 착한 처녀와 결혼을 생각하는 성실한 경비병이다. 그런데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집시 여인 카르멘은 모든 남자가 그녀 주변으로 몰려드는 가운데 유독 자신에게 무관심한 돈 호세에게 꽃을 던진다.
게다가 여공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체포되자 노골적으로 돈 호세에게 도망치게 해달라고 유혹한다. 결국 돈 호세는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고, 죄수를 놓친 혐의로 영창에 간다.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돈 호세는 카르멘이 알려준 술집을 찾아가 시들어버린 꽃을 여자 앞에 내보이며 사랑을 호소한다. 그러다가 직속상관과 시비가 붙는 바람에 귀대를 포기하고 밀수업에 가담한 카르멘을 따라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하지만 카르멘에게 사랑의 유효 기간은 지극히 짧다. 돈 호세 이전에도 여러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금방 차버리기 일쑤였고 돈 호세에게도 몇 달 만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대신 세비야의 유명 투우사 에스카미요를 새 연인으로 맞아 투우장으로 향한다. 친구들은 돈 호세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지만 카르멘은 피하려 하지 않는다.
모습을 드러낸 돈 호세는 다시 돌아오라고 애걸하지만 카르멘은 그 말을 무시하며 자신을 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격분한 호세는 카르멘을 찌르고, 쓰러진 여인의 시신 위에 몸을 던져 통곡한다.
2팜므 파탈의 재발견으로 프랑스 전통에 도전하다
프랑스 문화의 지향점은 귀족 문화를 넘어선 궁정 문화다. 유럽 최강의 군주였던 프랑스 국왕의 사치가 프랑스 문화의 목표였다. 프랑스 요리가 비싼 것은 궁정 음식이기 때문이고, 프랑스 앤티크 가구를 구입하는 부자들은 당연히 베르사유 스타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전발레의 무용수들이 온갖 예법을 다 해 인사하는 것도 발레를 보호한 프랑스 왕실에 예의를 표하는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프랑스 오페라도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 궁정 오페라의 전통을 잇는 그랑도페라, 그리고 서민들에게도 개방된 오페라 코미크가 그것이다.
여기서 오페라 코미크란 희극 오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코미크’는 ‘코미디’에서 나온 말이고, 불어로 코미디란 연극 전반을 가리킨다. 즉 연극적인 대사를 허용하는 서민적인 오페라였다.
[카르멘]도 처음엔 오페라 코미크였고 초연된 곳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이었다. 그런 서민 오페라인데도 비평가들이 경악한 것은 아무리 남부 스페인이 배경이라지만 경멸의 대상이었던 집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윤리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팜므 파탈(남자를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여인)인데다가, 무대 위에서 칼부림까지 일어나는 오페라를 프랑스 문화의 일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카르멘]은 차이콥스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예찬한 뛰어난 음악, 여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카르멘이 뿜어낸 팜므 파탈의 매력 덕분에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팜므 파탈에 대한 시선이 바뀐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페라 [카르멘]은 팜므 파탈에 대한 금기를 통쾌하게 깸으로써 프랑스의 전통에 정면으로 맞섰다.
첫째, 금기(禁忌)를 통렬하게 깼다는 점이다. 악녀를 매력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터부였지만 [카르멘]에서는 팜므 파탈을 벌 받아야 할 여자로 본 것이 아니라 특별한 매력이 있는 여자로 보았다.
남자를 홀릴 만큼 아름답고, 자기중심적이고 자유분방한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남자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남자를 지배하려는 당당한 여인으로 말이다.
이후 프랑스 오페라로는 생상의 [삼손과 델릴라], 마스네의 [마농], [타이스], 독일 오페라로는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베르크의 [룰루]가 나왔으니, [카르멘]은 근대적 팜므 파탈 오페라의 선구인 것이다.
둘째, 팜므 파탈의 매력을 발견한 것은 비제 이전에 이미 프랑스 특유의 트렌드로 존재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아베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가, 후반기에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가 출판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오페라의 원작인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이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문인 조르주 상드, 배우 셀레스트 베나르(일명 모가도르) 등이 자유연애를 즐긴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되는데, 비제는 이처럼 파리 시민들이 은귾나 매력을 인정한 팜므 파탈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보수적 인사들의 소란은 있었지만 프랑스인들을 이미 사로잡은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성공은 시간문제였다.
셋째, 팜므 파탈에게 비극성을 불어넣었다. 팜므 파탈은 대개 남자를 파멸시키고 자신은 유유자적하게 사라지는 것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카르멘]에서는 목숨을 걸고 돈 호세의 위협에 대적하다가 쓰러지고 만다.
그래서 관객들은 카르멘의 당당한 죽음에 감탄하는 동시에 연민도 느끼게 된다. 비제는 카르멘과 에스카미요가 맺어지는 해피엔딩도 고려했지만 초연 당시 카르멘을 부른 가수가 반대한 바람에 비극으로 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해피엔딩이었다면 이만한 감동을 안겨주지 못했을 것이다.
3알고 보면 교과서적인 주요 캐릭터의 구도
이 오페라의 주요 등장인물은 오페라의 성부 공식에 잘 들어맞는다. 즉 소프라노는 연인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순결한 여인이며, 테너는 소프라노의 젊은 연인이지만 덜 성숙한 인격체다.
반면 바리톤은 테너보다 사회적·육체적으로 강건하고 계략을 꾸밀 줄 안다. 메조소프라노는 강한 여인의 상징이며 프랑스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으면 팜므 파탈이 된다. 그래서 카르멘(메조소프라노)의 노래는 대개 남자를 유혹하거나 유희적인 삶을 예찬하는 반면 돈 호세(테너)의 노래는 순수하지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
반면 미카엘라(소프라노)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해 희생적인 노래를 부른다. 에스카미요(바리톤)의 노래는 늘 자신만만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긴다.
[카르멘]의 등장인물은 오페라의 성부 공식에 잘 들어맞는다.
오페라보다 30년 앞서 발표된 메리메의 원작은 4부 구성인데 오페라는 그중 제3부, 즉 살인죄로 투옥되어 교수형을 기다리는 돈 호세의 회상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원작에는 카르멘에게 건달 남편이 있다. 그가 감옥에서 출소하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돈 호세가 살인을 저지른다. 카르멘의 성격도 오페라보다는 덜 분방하게 그려져 있다.
비제는 평소 친분이 있던 여배우 셀레스트 베라느(모가도르)의 모습에서 카르멘의 캐릭터를 보강했다고 한다. 반면 미카엘라는 없던 역이다. 카르멘이 너무 ‘센’ 여인인 것을 우려한 친구들이 전형적인 여성상도 넣을 것을 조언하여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된 것이다. 투우사 연인도 루카스란 이름으로 잠시 언급되기만 할 뿐인데, 오페라에서는 에스카미요라는 주역급으로 격상되었다.
에스카미요는 투우사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인 마타도르, 즉 피날레에 소의 목에 칼을 꽂는 역이다. 4막의 유명한 합창을 보면 이보다 낮은 등급의 투우사들인 반데리에로, 피카도르의 행진에 이어 마타도르가 입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4다양한 음악의 복합체
[카르멘]은 음악적인 다양성으로 유명하다. 쿠바의 아바나에서 들어온 담뱃잎을 가공하는 세비야의 공장 앞 광장에서 카르멘은 쿠바 풍의 사랑 노래로 남자들을 매혹시키고, 2막의 술집에서는 전형적인 스페인 집시의 멜로디로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가 하면 미카엘라의 노래는 가장 고아한 프랑스 분위기에 물들어 있다. 조역인 밀수꾼, 집시 여인들이 어우러져 부르는 중창들은 절묘한 화음이 일품이다. 이 오페라에 매혹된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오페라[스페이드 퀸]의 첫 부분에 아이들이 군인 흉내를 내는 [카르멘]의 개시부를 모방했다.
그런가 하면 그 유명한 1막 전주곡과 막 사이의 간주곡(또는 각막의 전주곡으로 불리기도 한다)들은 가장 인상적인 관현악 소품들이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오페라의 선율로 기악곡을 작곡하고, 수많은 안무가들이 이 오페라에 의한 발레를 만든 것은 [카르멘]이 그만큼 놀라운 상상력의 원천임을 입증한다.
국립오페라단의 [카르멘]에는 프랑스 남부를 대표하는 야외 공연장인 [오랑주 페스티벌]제작진이 참여한다. 물씬한 지중해적인 냄새를 기대한다. 세계적인 카르멘으로 부상한 미국 메조소프라노 케이트 알드리치의 첫 내한도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명곡] 비제 : 오페라《카르멘》서곡 - https://jsksoft.tistory.com/9579?category=36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