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청 랑
1. 낯익은 길고양이가 모퉁이에 앉아 있다. 바로 ‘삐삐’였다. 고개를 곧추세우고 앞발은 가지런히 모은 채. 내 퇴근 시간을 어떻게 알아낸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마당에서 나를 보고는 쪼르르 달려 나왔는데 이젠 내 길목을 턱하니 지키고 있다니.
2. 이웃집은 길고양이들의 합숙소다. 푸른 잔디 마당에는 파라솔 꽂힌 테이블과 고양이 집이 있다. 고양이들은 밥을 먹거나 쉬기 위해 수시로 들락날락한다. 목줄 없는 유랑자이니 어딘들 못 갈까 싶다.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한곳에 얽매이지 않는 그것들의 삶이 영리해 보였다.
3 집사인 아저씨가 아침이면 세 개의 그릇에 밥을 수북이 차려놓는다.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다고. 나는 그 집 앞을 오가며 잠시 멈춰 고양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소문이라도 탔는지 요즘 부쩍 길냥이 숫자가 늘었다. 생김새와 성질이 다른 고양이들이 밥을 먹거나 장난치거나 구석에 웅크리고 있거나 늘어지게 잠자거나 털을 핥거나 제각기 자유롭다. 낮에는 한두 마리만 하릴없이 놀고 그마저도 없을 때가 많다. 돌아올 따뜻한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 된 일인가. 하루 동안 경험했던 일을 나누는 듯 사뭇 바쁘다.
4. 길냥이 ‘삐삐’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앳된 고양이가 퇴근하는 나를 보며 달려 나왔다. 샛노란 눈과 부드러운 흰색 털, 멋 내기로 이마와 꼬리는 회색 무늬다. 어미 품 안에서 고물고물 놀았는데 벌써 이렇게 컸다니. 개나리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주춤주춤 따라온다. 내가 멈추면 따라 멈추고 다가가면 얼른 차 밑으로 숨어버린다. 엉덩이를 치켜 차 밑을 들여다보며 위험하니까 얼른 나오라고 채근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돌아서면 그제야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썸’을 탔다.
5. 추운 겨울을 이겨낸 삐삐가 기특했다. 이제 사춘기 정도 되었으려나. 제법 통통하니 살도 올랐다. 집 앞을 오가는 내가 눈에 익은 걸까. 어느 날부터 퇴근하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집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이렇듯 나와의 인연이 꽤 되었건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간식을 꺼내려고 팔을 움직이면 움찔 달아난다. 인간이란 믿을 게 못 되고 언제나 친절하지 않다는 걸 알아버린 걸까. 간식을 꺼내 놓으면 뜸을 들이다 내가 비켜주면 그제야 안심한 듯 다가왔다. 참 까다로운 종(種)이다. 인간인 나는 사랑을 구애하고 동물인 삐삐는 인연에 구속당하지 않고.
6. 간식 종류는 주로 참치 통조림, 연어, 시중에서 파는 육포 어포, 달걀노른자, 누룽지, 식빵 등 기름기와 간이 배지 않는 음식으로 준비했다. 상추도 좋아한다니까 쌈 종류도 생각 중이다. 그중에 맛있게 먹는 건 참치 통조림과 달걀노른자다. 다른 고양이들도 냄새를 맡았는지 슬금슬금 몰려든다. 그러면 삐삐는 가르릉 거리며 쫓아 버린다. 내가 주는 건 오롯이 자기 몫이라고 생각한 걸까. 삐삐가 간식을 먹는 중에도 자동차는 우리 옆을 수시로 지나다녔다.
7. 햇살이 하르르 하르르 쏟아지던 날, 길고양이들이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였다. 소집령이라도 떨어진 걸까. 한 녀석은 발라당 누워 요가인지 국민체조인지 한쪽 다리를 위로 쭉 뻗는다. 회색 고양이는 긴 꼬리를 늘어트리고 두 발을 앞으로 뻗어 스트레칭을 한다. 흰색 고양이는 어디를 갔다 왔는지 구석구석 그루밍(grooming) 하느라 분주하다. 옆 친구한테 등 내밀면 깨끗하게 해주련만. 혹시 오늘 밤 파티에 초대라도 받은 걸까. 아니면 애인한테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지. 봄은 바야흐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바람나는 계절인가 보다. 그래야 역사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겠지.
8. 퇴근길 고양이들의 집사인 아저씨를 만났다. 길냥이들이 어질러 놓은 정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고양이들은 마당에서 더없이 평화롭게 놀고 있었다. 그때 삐삐가 나무 위를 오르고 있었다. 친구들이 있는 지붕 위로 올라가려는지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젠 제법 컸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걸까. 그날 처음으로 아저씨와 인사를 나눴다.
“길고양이들이 이곳을 참 좋아하네요.”
“그런가요. 싫어하는 이웃들도 많아요. 고양이 좋아하시죠.? 몇 번 간식 주시 는 거 봤습니다. ”
“아, 노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그동안 집 앞을 오가며 관음증 환자처럼 보일까 봐 나름 조심했었다. 이젠 그 부담감에서 해방된듯싶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9. 반려동물과 눈이 마주치면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한다.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할 때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때 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일 게다. 아저씨는 지금 행복할까.
10. 이곳 소도시에서는 길고양이들을 자주 만난다. 바람 불고 어둑해진 어느 날, 골목에 시커먼 물체가 웅크리고 있다. 반짝하고 빛이 난다. 얼룩덜룩 갈색 털을 가진 앙상한 길고양이 한 마리.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얼른 자취를 감췄다. 고양이가 들어간 곳은 하수도 통로 속, 들여다보니 터널 안으로 숨어버렸다. 어둡고 퀴퀴하고 음습하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는 지하세계. 혹시 새끼라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남은 간식을 털어 하수도 구멍 옆에 놓았다. 시간이 흐르고 얼굴을 쏘옥 내밀어 주위를 살핀다. 다시 한번 휘둘러보더니 그제야 안심되었는지 먹이를 먹는다. 그 집사 아저씨 집에 가보라고 일러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11. 삐삐네 옆집엔 백구가 산다. 진돗개 종으로 하얀 털이어서 나는 ‘백구’로 불렀다. 백구는 집 입구 작은 펜스 안에서 늘 갇혀 지냈다. 펜스 안에는 개집과 밥그릇, 물그릇, 더러운 담요 한 장이 놓여있다. 백구가 주로 하는 일은 엎드려 있든지 잠을 자든지 개집 안에 들어가 있든지. 집 앞을 오가며 “백구야, 안녕!’하며 인사를 건네면 그런 나를 싱겁다는 듯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는다. 그동안 서로 눈빛 나눈 시간이면 아는 척 꼬리 흔들어줄 만도 하련만, 참 멋도 없다. 꼭 삶을 달관한 노인이라도 된 듯이…. 겨울 동안 대부분을 개집 안에서 지냈다. 야생의 본능을 상실해가는 백구가 안쓰럽고 집주인이 야속했다. 그 집엔 나무 울타리를 따라 가시철조망을 삥 둘렀다.
12. 어느 날 출근길 먼발치에서 백구를 보았다. 갈맷빛 목줄을 헌 게 틀림없는 백구였다. 도로 쪽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온 걸까. 그날 펜스 문은 열려 있었고 백구는 그곳에 없었다. 나는 마음껏 백구를 응원했다.
13. 나는 개나 고양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영물(靈物)인 고양이는 지레 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솜사탕 같은 강아지를 데려왔다. 졸지에 나는 ‘개맘’이 되었다. 새까만 눈엔 은하수가 들어차 있고, 빨간 혀를 날름 내밀면 웃음이 번졌다. 축 처진 귀와 다리가 긴 사냥견 ‘코커 스패니엘’ 종이었다. 낙천적이고 쾌활하고 다정하고 온순한 종. ‘이오’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라나. 이오는 아플 때나 아들이 여행을 갈 때면 내게 맡겨졌다. 꽃을 좋아하는 이오는 향기를 맡느라 꽃만 보면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산책하러 나가면 신나게 내달렸다. 그런 사랑스러운 이오가 나를 난감하게 하는 게 있었다.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똥오줌을 소파며 거실 바닥 등 가리지 못하고 실례를 했다. 끝도 없는 뒤치다꺼리에 지쳤고 그런 이오를 혼냈다.
14. 이오는 아들네가 출근하면 혼자 남겨져 갇혀 지냈다. 마당 너른 집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더라면 스트레스를 덜 받았을 텐데. 결국, 림프종인 암에 걸려 치료를 받던 중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겨우 사 년을 살고서. 지금도 이오가 생각날 때마다 불쑥불쑥 차오르는 그리움과 미안함이 있다.
15.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엔 누렁이들이 있었다. 쥐약을 먹었거나, 덫에 치여 죽었거나, 동네 어른들의 몸보신으로 때려죽였거나, 집을 나가버렸거나. 병으로 노환으로 죽어간 누렁이들. 우리 집과 인연이 되었던 누렁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지금에서야 참회한다.
16. 시절인연(時節因緣), 한때의 인연이라는 뜻이다.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고 또 좋은 인연, 나쁜 인연도 있지만, 자신이 가꾸기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게으르고 시큰둥한 내 삶에 한 꼭지 설렘을 가져다주는 삐삐가 있어 내 봄날이 환하다.
첫댓글 사랑스런 삐삐와 썸을 타는 청랑님 모습이 그려집니다.
길냥이들에게 관심을 주고 과거까지 들어가
그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시절인연을 생각하는 글 잘 읽었어요.
긴 글 쓰느라 수고 많았어요!
삐삐 이야기~~!!
애완동물 이야기, 재미있네요. 그리고 감성이 녹아있어 더욱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