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풍물시장은 원래 청계천이 복원되기 전 황학동을 중심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벼룩시장 또는 만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오래된 풍물 물건이나 상품을 판매하는 점포와 거리로 황학동 벼룩시장이 형성되었다. 청계천 복원 사업과 함께 황학동과 청계천변 노점 상태로 운영 중이던 황학동 벼룩시장은 (구)동대문운동장 내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으로 이전, 영업을 해오던 중 서울시에서 (구)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선행사업으로 관광산업과 연계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물시장 개발을 위해 청계천과 인접한 청계 8가 숭인여중 자리에 세계적인 풍물시장을 목표로 새로운 쇼핑의 명소가 될 서울풍물시장(Seoul Folk Flea Market)을 개장하였다.
교통편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 10번 출구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면적은 186,786 ㎡.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는 종(宗)의 묘(廟)라 했다. 왕들의 잠든 혼을 모시는 사당. 조선의 시작은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종묘는 조상에게, 사직단은 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에 앞서 종묘와 사직단을 지었다.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인
유교 문화의 상징이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왕가의 제의 성전.
유교는 사람이 죽은 후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된다 여겼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에 모셨다. 종묘는 왕과 왕비들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었다. 사계절의 첫날과 섣달에 다섯 차례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냈다.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도 제례를 지냈다. 종묘는 다시 크게 신주를 모시는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제를 준비하는 공간들로 나뉜다. 정전은 태조 때 일곱 칸으로 창건됐다. 네 개의 칸에 태조의 4대조(추존왕)까지 모셨다. 하지만
세종 때 이르러 일곱 칸이 모두 차자, 서쪽에 영녕전을 세웠다.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실 네 칸과 좌우 협실로 지어졌다.
교통편 : 1호선 11번 출구 도보 5분 거리
창경궁 (昌慶宮):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 세운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上王)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 라 하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해했다.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좇아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형식과 재도 면애서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었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 중심부분은 특이하게도 동향으로 배치되어있다. 동쪽애 왕실 동산인 함춘원(含椿苑)과 낙산이 자리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생활 공간들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자연지형을 따르면서도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갖춘 궁궐이 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 때 다시 세운 명전전,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였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여러 대비궁, 후궁과 공주들의 처소, 궐내각사들이 촘촘하게 들어서고 곳곳에 정원시설이 조화를 이룬 당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공원으로 바꾸고 이르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1983년 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 창경궁 연표:
1392년 (태조1): 조선 개국.
< 1400년대 창건 >
1418년 (세종즉위): 상왕전(태종)으로 수강궁 창건.
1483년 (성종14): 수강궁 터에 창경궁 창건.
< 1500년대 임진왜란으로 소실 >
1592년 (선조25): 임진란으로 소실.
< 1600.1700년대 (중건.소실 및 복구) >
1616년 (광해군8): 창경궁 중건.
1623년 (인조즉위): 인조반정으로 동궁인 저승전과 내전 일대 소실.
1624년 (인조2):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등 소실.
1633년 (인조11): 통명전, 양화당 중건.
1777년 (정조1): 자경전 건립.
1790년 (인조14): 통명전 소실.
< 1800년대 화재및 복구 >
1830년 (순조30):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내전 일대 소실.
1834년 (순조34):통명전, 환경전 등 소실된 전각 재건.
1857년 (철종8):선인문, 위장소, 주자소 등 60여칸 소실.
1877년 (고동14): 창경궁 수리.
< 1900년대 민족수난기와 복원 >
1909년 (순종3): 동.식물원 조성으로 궁궐 훼손.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
1983년: 창경궁으로 환원.
왕과 왕비의 숙소 합방은 어느 방에서 왕방에서 합궁 동쪽은 왕의 침실 서쪽은 왕비의 침실
흥복현 한일 합방조약을 체결한 역사의 현장 경술국치라는 치욕적인 곳으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장소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강당이었던 성균관 명륜당은 현재 성균관대 안에 위치하고 있다. 삼강오륜 등 ‘인륜을 밝히는 성균관의 명륜당이 자리’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성균관 대학교 문묘 명륜당 은행나무는 1962년에 1962년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이 400년이 넘는 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문묘가 소실되어 1602년에 다시 건축할 때 이 은행나무를 같이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6m 둘레 12.09m 정도 되는 매우 웅장한 나무로 가지가 많이 발달해 지지대를 많이 설치되어 있다. 명륜당 경내와 대성전 앞 마다에도 비슷한 크기의 은행나무가 여러그루 있어서 단풍이 한창일때 화려한 금빛의 은행 단풍을 만끽할 수 있다.
▼ 혜화역 4번출구에서 성균관 대학교로 가는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