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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 2,6-10.13-16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7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8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
9 그런데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인들을 없애 주었다.
그 아모리인들은 향백나무처럼 키가 크고 참나무처럼 강하였지만 위로는 그 열매를, 아래로는 그 뿌리를 없애 주었다.
10 그리고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13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14 날랜 자도 달아날 길 없고 강한 자도 힘을 쓰지 못하며 용사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5 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 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6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네 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8,18)
곧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서는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 안에서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삶이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임을 밝히십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과 그 생명이 가지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따라라.”
(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곳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마태 8,19)
오늘 율법 학자는 당시 율법 학자들 가운데 보기 드문 존재입니다.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알 수 없지만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입니다.
우선 그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리 주님을 스승으로 삼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이 교사들이기에 늘 주님을 트집 잡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의 저도 훈장 기질이 있어서 늘 남을 가르치려 들었고 지적질하기 바빴으며 교만하기 이를 데 없어, 그 누구를 진심으로 스승 삼은 적도 없고 삼으려고 들지도 않았었지요.
어쨌거나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주님을 스승 삼으려고 든 것만으로도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는 말도 훌륭함을 보여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고 합니다.
의미를 굳이 가르자면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스승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며, 그래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요한 가르침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스승에게 거는 것이며 진정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에 늘 자기를 위치시키는 법이지요.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보이니 주님께서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그렇다. 나를 따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각오하여라.’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 입회하려는 성소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면 상당수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습니다.
수도자의 경우 수도원은 천사들만 살 것 같은 환상이 있고, 연인들의 경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달콤한 꿈만 있지, 같이 살아야 할 고달픈 삶은 생각지 못하고 기대 심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이건 연인이건 풋사랑일 때는 이런 기대 심리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성소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수도원에 들어오고 누가 시집 장가 가겠습니까?
지금 많은 젊은이가 수도원도 들어오지 않고 시집 장가가지도 않는 것이 이런 풋사랑의 낭만이 없고 현실의 어려움을 너무 크게 보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 지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고,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수난의 사랑(Passio)으로 사랑이 성장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길임을 묵상하며 감히 따르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라>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와 편안함을 포기한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라라”는 부름은 지체 없이 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도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 없고,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합니다.
가정의 여러 문제, 자녀의 결혼, 출산, 재물이나 교육 문제, 공동체의 문제 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 출산과 교육의 관심도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 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채워주십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것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2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말을 하는 게 좋은가, 하지 않는 게 좋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에게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편안함이나 돈, 명예 따위를 보고 당신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장례를 먼저 치르게 해 달라는 다른 사람에게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십니다.
세상 애착을 끊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 쉽지 않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기도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며 십일조도 내야 한다고 예비자에게 미리 말을 하면 그들은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차근차근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오늘 복음은 아예 처음부터 말해주는 게 낫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정원 씨의 일가족이 유영철에게 몰살당한 후 고정원 씨는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범인이 잡히면 자살하겠다는 그에게 예비자 교리를 받아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게 쉬울까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 고정원 씨는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고 유영철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체조 유망주였던 이승복 박사가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때 어떤 선교사가 와서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 일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움직일 수 있었으면 주먹이 날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해주었습니다.
이승복 박사는 그 말을 믿고 운동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기로 하여 유명한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용기 있게 주님을 따르는 법을 알려준 은인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자기 힘만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도 어떤 이야기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반대와 비판에 직면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결국엔 말을 합니다.
그때는 욕을 먹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말해주는 편이 더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골목상권 살리기 프로그램을 보면 가끔 전문가로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전문가들 처지에서는 100% 망할 수밖에 없는 가게들입니다.
그리고 백종원 씨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할 거면 장사를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자신이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명확한 기본규정을 알려준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 규정들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백종원 대표는 그들에게서 자기 사진이나 이름을 지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이미지가 그렇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일수록 자신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18세 때 이미 삼국통일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 꿈을 퍼뜨립니다.
어머니는 기생집에 드나들며 무슨 통일을 이루겠느냐고 나무랍니다.
이에 김유신은 다시는 기생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술을 마시고 말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난 곳이 기생집이었을 때 김유신은 자기가 이끼는 말의 목을 칩니다.
‘중간 정도만 해도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중간 정도는 해를 입힙니다.
명화에 일반인이 덧칠하면 명화를 망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광야에서 인간적인 면을 완전히 죽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지려는 이들에게 돈과 육욕과 교만을 끊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예 미리 포기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정쩡하고 이도 저도 아니고 미지근한 신자가 많이 생기는 것보다 적더라도 신자다운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완전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미리부터 알려주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 마지막 대목이 계속 제 마음 안에서 메아리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8,22)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라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궤변이 다 있나?
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죽은 이들은 더 이상 육체도 없는데 염은 누가 하고, 상여는 누가 들고?
조문객 접대는 누가 하고, 음식은 누가 만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은 이 안에는 육체적으로 죽은 이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이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죽은 이도 있고 심리적으로 죽은 이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요 구원의 보루로 오신 예수님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죽은 이들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뒤로 하고 어둠과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이들 역시 죽은 이들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한때 죽은 이처럼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얼굴, 총기가 사라진 눈동자,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던 죽은 이의 나날이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은 붙어 있지만 죽은 이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당신도 죽은 이처럼 존재하던 순간이 있었노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저에게도 대단히 황폐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매우 황폐한 시기, 어둠의 때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해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패배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토록 견디기 쉽지 않았던 시기에 저는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출구를 일러줍니다.”
죽음 전문가셨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께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그리 길지 않은 우리네 삶이기에 매일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 있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으로 죽은 이가 되지 마라.>
1)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인데, ‘어디로 가시든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어떤 어려움이든지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좋은 일’인데, 그는 예수님을 따를 때 겪게 될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 “나를 따르려면 대단히 고달픈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잠시 앉아서 쉴 곳도 없다.”, 즉 안락한 생활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힘든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왜 따르는가? 그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온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고, 더 귀한 것입니다(마태 16,26).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을 차지하려고 작은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고서 따른다면, 금방 실망하고 떠날 것입니다.
희망이 잘못되어 있으면, ‘따르는 일’도 빗나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당연히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만날 수도 있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강요 당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2)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가지 마라.”, 또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마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지 마라.”, 즉 “세속 일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10,4).
이 말씀에 대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 선포를 하려고 떠난 사람은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해야 하고, 세속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한눈 팔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집에 가지 마라.”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마라.”도 아닙니다.
집에 가서도, 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낼 때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제자로서(신앙인으로서) 그런 일들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3)
전승에 의하면, 그 제자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였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마음이, 또는 믿음이 흔들려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는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고, 언제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는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 즉 집에 가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제자의 삶을 포기하지도 말고 중단하지도 말라는 권고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못 가게 해서, 집에 가지 못하고 억지로 예수님 곁에 남아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이 남아 있어도 마음이 떠나 있으면, 그것은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는 분이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가서 장사를 지낸 다음에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와 제자로서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추종의 자세 -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삶은 늘 끝이자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함이 영성생활의 요체입니다.
7월 달력을 펼치는 순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가 떠올랐고 나눕니다.
7월이 되면 늘 떠오르는, 모두가 애송하는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빡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흡사 오매불망 스승을 기다리는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만일 애국시인 이육사(1904-1944)가 주님을 만났더라도 훌륭한 제자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육사 시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옥사한 분입니다.
의열단에 소속된 시인은 갖가지 사건으로 대구와 북경의 감옥에서 무려 17회나 징역을 살았고 마침내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육사와 더불어 떠오르는 ‘서시’의 시인 윤동주(1917-1945)입니다.
시간 되시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신앙시로도 손색이 없는 서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백석을 가장 좋아한 윤동주 시인 역시 일본에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며 항일운동을 펼치다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목숨을 잃었으니 그 나이 29세입니다.
육사가 남성적이라면 윤동주는 여성적이지만, 두 분 공히 치열한 삶이 바탕된 강인한 순수와 열정의 애국 시인입니다.
육사의 시로서는 드물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초인’은, ‘내가 바라는 손님’으로 모습을 달리해 있고, 백마를 타고 오는 대신 ‘청포를 입고’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많은 이들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으로 추론하기도 합니다.
7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시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신선한 감동을 주는 맑고 깨끗한,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주님은 7월 첫날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우리를 죄와 내외적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찾아 오시고,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청포도의 시인처럼 주님을 환대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추종의 자세를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직의 엄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눈부신 치유이적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하면 민중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스타였을 것이며 제자가 되려는 열망도 지녔을 법 합니다.
아마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한 율법학자가 주님을 찾아 제자가 될 것을 청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율법학자의 감상이나 허영을, 환상을 일거에 거둬 버리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소유의 정신과 삶으로 세상과 철저히 결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는지 묻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철저히 모두를 버린 하느님의 제자였음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율법학자가 주님을 따라나섰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독자인 우리에게 주님을 추종하는 자세의 엄중함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살려면 세상 재물 욕심에 초연해야 하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고난은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다.
어른이 단단한 까닭은 겪어온 무수한 고난을 주름에 갈무리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의 길은 꽃길이 아닌 산전수전, 무수한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정화되어가는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자승자강(自勝者强),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입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는 이런 사람이겠습니다.
이어 주님의 제자들 중 하나의 청원과 주님의 답변도 우리에게는 깊은 묵상감입니다.
역시 제자직의 엄중함을 환기시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제자직에 관한 이해하기 힘든 참 난해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앞서 말씀이 소유와의 단절을 말한다면 이 말씀은 세인들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인정이 많으면 도가 성글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학자들은 주님의 말씀임에 동의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는 충격요법의 과장법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엄중한 의무도 참된 제자직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사 지내는 것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제자직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에는 살아있다 하나 죽은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 말씀 후에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주 예전 법정 스님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불자 수도승으로서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참석 못했던 풋열심의 젊은 시절의 행태에 대한 반성입니다.
까짓 수도생활이 뭐라고 사랑했던 할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편협했던 생각을 크게 뉘우치는 스님의 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서 평생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에 온힘을 다했던 분으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요,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해이해진 자세에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참 훌륭한 제자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철저하기로도 예수님과 막상막하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었던 백성이 주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게도 사랑과 정의를 유린한 행태들에 열화와 같은 분노와 더불어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하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그 누구도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기보다는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오늘날도 주변 곳곳에서 무지하고 무절제한 사람들이 자초한 심판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함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중산층화 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경고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초발심의 열정과 순수로 주님을 찾고 따르는 제자로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 제자답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시편 95,7.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만나려고 휴스턴에 다녀왔습니다.
댈러스에서 왕복 10시간 걸립니다.
지난번 꾸르실료 교육 때에 휴스턴 봉사자들이 댈러스로 올라왔고, 꾸르실료 교육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저도 한번 내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 오고 가는 길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불평불만이 많았던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도 너 닮은 자식 한번 낳아서 키워 보아라.”
직접 내려가서 봉사자들을 만나니 모두 좋아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 절대 쉽지만은 않습니다.
발품도 팔아야 하고, 시간도 내야 하고, 장거리 운전에 허리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보람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 있는 일은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보람 있는 일은 하느님께 축복받습니다.
매일 아침 산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는 길에 저를 보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근길에 제가 지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고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신독(愼獨)은 대학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군자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충실하게 가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면 선을 행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악을 행한다면 이는 군자의 길이 아닙니다.
시편 139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를 거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공기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몰라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24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며 7월의 첫날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남들처럼 사는 삶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유명 축구선수가 운영하는 축구교실에 등록시켰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볼을 차는데, 자기 아이는 구석에 쭈그려서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된장찌개도 처음 먹으면 맛이 없잖아.
그런데 자꾸 먹으니까 맛있어지지?
축구도 그래.
자꾸 하다 보면 좋아져.”
이 말에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약 먹으면 쓰지?
그런데 계속 먹으면 달아?
나에게는 축구가 그래.”
그날로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축구는 쓴 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있는 반면,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각자의 몫이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몫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남들처럼 살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즐거운 된장찌개 대신 쓴 약을 힘들어도 선택합니다.
즐겁지 않은 노력만을 기울이면서 말이지요.
고 이어령 선생님께서 생전에 강의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났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예요.
360명이 한 방향으로 경주하면 1등부터 360등까지 있겠지만, 내가 뛰고 싶은 방향으로 각자가 뛰면 360명이 다 1등이 될 수 있어요.
베스트 원이 될 생각을 말고, 온리 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세요.”
하나밖에 없는 ‘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이유는 자기의 삶을 살라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명성 높은 율법 학자를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제자로 사는 것이 그 시대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당신께서 머무시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어떤 이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청을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시지요.
즉 세상의 관습과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길을 살라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사는 삶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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