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생명줄입니다. (누가복음18:1-8)
세상을 살다보면 영적으로 죽은 것 같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확실한데, 천국 가는 것도 확실한데 지금 내 생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과 단절 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찬송을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되었다고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 즉, 영적인 호흡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속성입니다. 호흡은 세게 강하게 하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기도 역시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대하16:9)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말과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말은 실은 같은 말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낙망치 않고, 낙망치 않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극심한 절망에 빠지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데, 자살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사회적인 이유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결국은 그 심령이 낙망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낙망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방종입니다. 자기 자신을 방탕한 생활에 버려두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고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낙망한다고 하는 것은 삶의 의미와 용기와 희망을 잃은 사람을 말합니다. 낙망을 헬라어로는 “엥카케인”이라고 합니다. 그 뜻이 “지치다” “상심하다” “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not a faint 또는 not give up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즉 “용기를 잃지 말라” “약해지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심하거나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버나드 쇼는 말하기를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은 부정적인 생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안 된다.” “나는 이제 끝났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자살합니까?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왜 파탄에 이릅니까? 역시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이 낙심을 하고, 원망불평하며 살아가는 것도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일어난다”라고 자신을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이 딱딱 떨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즉시 응답이 오기보다 기다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자주 낙망하고 낙망의 결과 기도를 포기합니다. 응답이 더딜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낙망치 마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으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과부는 어떻습니까? 엄격한 가부장적인 유대 사회에서 과부는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더욱이 이민족이 지배하던 식민지 사회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동정과 도움을 받지 않고는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어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부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재물을 탈취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 위선적인 서기관들을 비판하시면서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신 것은 그 시대에도 율법의 해석을 맡은 유대 회당의 서기관들까지도 과부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본문에 예로 든 과부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재판관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인 줄 잘 알지만, 매일 같이 그를 찾아가 원수에 대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억울하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달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재판관은 오랫동안 이를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잘 봐 달라고 바치는 뇌물도 없고, 그런 것을 낼 처지도 못되는 가난한 과부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부가 계속해서 귀찮게 굴자, 후에 그의 뜻을 바꾸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약자를 무시하며 강한 자에게만 유리한 재판을 일삼던 이 재판관이 된 후 처음으로 뇌물을 받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했으며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여기서 ‘번거롭게 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코포스’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막대한 지장을 주어서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할 수 없게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판관이 너무 괴로우니까 들어 준 것입니다. 업무를 볼 수 없으니까 귀찮아서 들어 준 것입니다. 재판관의 인격과 태도로 보아서는, 도저히 과부에게 인정을 베풀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성가시게 여겼든, 혹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했든 간에, 결국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과부의 끈기 있는 요청에 대해 재판관은 귀찮아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는 ‘원한’이 4번 나옵니다(3,5,7,8절). 맺힌 것, 응어리 진 것, 속 터지는 것, 억울한 것, 답답한 것,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을 기도로 풀어야 합니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인생이 평탄하면 기도 안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삶에 다가오는 작고 큰 원한과 아픔과 응어리들을 감사하게 알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학자 바클레이는
“그녀는 하나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집념이라는 무기였다” 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타락한 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심지어 기도하는 어머니를 발로차서 쓰러뜨리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그런 패륜까지 저질렀지만 모니카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니카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한지 30년 만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머니의 기도응답으로 기독교 역사에 남는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암브로스 목사님은 한 때 낙심하여 절망하는 모니카에게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격려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모니카는 본문의 과부처럼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음으로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도의 대가들은 한번 시작한 기도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죠지뮬러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도의 대가입니다. 그는 5만 번이나 기도응답 받았습니다. 그런 죠지뮬러도 모든 기도가 바로 바로 응답 된 것은 아닙니다. 죠지 뮬러가 어릴 적 5명의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죠지 뮬러의 기도가 응답 되어 한 사람, 두 사람 주님에게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친구가 끝까지 안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죠지 뮬러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간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안 믿었습니다. 죠지 뮬러는 이제 노년이 되어서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하던 그날 주님에게로 돌아오지 않은 한 친구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뮬러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그래도 나머지 한 친구는 안
믿었습니다. 뮬러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때까지 안 믿고 있었던 친구가 뮬러의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는 뮬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뮬러가 죽은 그해에 그 친구도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52년간 포기하지 않는 그 기도의 응답이 불신 친구를 주님에게로 돌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이 세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살 수 있다. 기적 같은 건 절대 없다고 믿으며 사는 법,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법.”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낙망치 않고 밤낮 부르짖으며 끝까지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십니다. 시편 7편 11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올바른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도 들어줄 수없고 기도에 응답할 수 없는 우상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간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기도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8절에 보니 주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기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님이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응답하시려고 오실 때 우리의 무엇을 보느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믿음이 약해집니다. 과학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이런 과학시대에 미개하게 기도나 하고 있다니’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더 적습니다. 어느 해에 비가오지 않고 심히 가물었습니다. 시골교회에서는 비가 오는 것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대로 계속 비가 오지 않으면 교인들 농사 다 망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일 예배시간에 목사님께서 광고를 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밤 예배 마친 후에 엘리야처럼 비가 오기를 위해서 합심기도 합시다.
모두가 참석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일 밤 예배를 마친 후에 성도들이 합심하여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마치자 그렇게 가물어 메마른 땅에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주일학교 어린 학생만 우산을 준비해왔습니다. “넌 어떻게 그렇게 미리 우산을 준비해 왔지?”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면 비가 올 테니 비에 맞지 않으려고 우산을 준비했어요.”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믿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습니다.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존 홉킨스 대학의 외과의사이며 교수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켈리 박사의 일화입니다. 그는 늘 그의 양복에 시들지 않은 장미꽃을 꽂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 보아도 금방 꺾은 장미처럼 싱그러웠습니다. 그래서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꽃은 언제 봐도 시드는 법이 없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그 비법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며 양복 앞섶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속주머니에 꽃이 꽂힌 작은 물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꽃이 늘 싱싱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켈리 박사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다니면서 언제나 신선하고 아름답고 항상 향기를 발하는 크리스천이 되려면 우리 삶의 뿌리가 이 장미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수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주님이 주시는 생수로 말미암아 늘 싱싱한 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주를 믿고 행하는 성도는 늘 생수를 공급받는 꽃과 같아서 늘 활기 있고 생동감이 넘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무치신 기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하나님이신 그분이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도 없고 흠도 없으셨지만 당신이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많은 죄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죄성과 고집이 꺾이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문제를 보여주고 문제 극복의 무기를 들려주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우리가 기도할 때 나타나며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줍니다.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성령님이 죄를 이기게 하시고 본성을 바꾸시는 신령한 작용을 전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깊은 밤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깊은 밤입니다. 죄악의 밤, 음란의 밤, 큰 환난의 밤, 재난의 밤, 환난과 시험의 밤, 근심 걱정의 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항상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물맷돌
첫댓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생명줄이다.
사람이 호흡할 때.. 세게 강하게 하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같이 영혼의 호흡인 기도도.. 역시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깊은 밤입니다.
기도하면 살고, 기도 안하면 죽습니다.
기도하면 죄를 이기고, 기도 안하면 죄에 종노릇하고 금새 세속에 물들어 주님과 원수가 됩니다. 기도하면 예수님으로 물들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됩니다.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
저도 기도 생활 열심히 하려고 하고았는데 마귀가 자꾸 교회 사람통해서 방해두네요
자꾸 놀러가자고 어제와 오눌 아침에도 괴롭히고...
5개월넘게 시달렸습니다
마귀가 자꾸 기도 못하개 방해두니 골치아픕니다
이전 경험에 비추어보면요.
기도 열심히 하고싶은 생각이 왔을때
바로 기도해야지 그때를 놓치고 기도 안하면 이상하게 기도의 열기가 식어서 기도하기가 싫어집니다. 항상 기도하고 싶은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은혜주시려 함이니.. 마귀가 미리 알고 방해하는 것이니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놀 때가 아닙니다. 주님 한분 바라보고 주님 말씀 좇아 기도하고 전도하고 삶이 예배되어 아버지뜻대로 살 때입니다.
@감사와 찬송 아멘 맞습니다
전 골방기도 생활 2년넘는데 작년말 우리교회 새로온 부부 신자가 처움부터 집요허게 제게 달라붙어서 여러가지로 기도방해놓고 있습니다
정말 골치 아픈부부입니다 ㅠㅠ
아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