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오원성
꼭두새벽부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떤 탓이지 다소 숨
이 가빠온다.
턱까지 차 오른 듯한 호흡을 추스르고 싶어 잠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한숨을 크게 들어 마시고 나서 후-하고 토해 내니 가슴이 환
히 트이도록 시원하다. 맑은 공기를 나긋나긋 씹으며 주변을 둘러보
니, 어둠이 아직도 여기저기 깔려 있다 짐작컨대 동이 트려면 시계
의 긴바늘이 한두 바퀴 더 돌아야만 할 것 같다.
간간이 부는 바람으로 인하여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손사래를 치며 앞장서간 봄을 쫓고 있는 듯 하다. 엊저녁 비에 촉촉
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불빛이 반짝하고 윙크를 한다. 하늘엔
구름 뒤에 반쯤 숨어서 비죽이 웃는 반달의 모습이 오늘따라 애잔하
게 보인다. 혹시 저 달도 나처럼 고향이 그리워 그런가 보다 생각하
니 마음은 내 어릴 적 뒷동산에서 하모니카로 홍난파가 작곡한 '고
향의 봄'을 즐겨 부르던 시절로 돌아간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이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다 보니 코흘리개 친
구들과 소꿉장난하던 고향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내 고향은 조그만 시골이다.
문의면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청주로 전학을 왔던 나는,
명절날엔 온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 큰집에서 보내곤 하였다. 그러
나 지금은 문명의 이기로 인하여 추억의 터전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
다.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아름드리 나무로 대궐처럼 웅장하게 지어
졌던 문의 초등학교는 마을 전체와 함께 수몰되는 바람에 흔적이 없
어졌고 봄가을로 즐거운 소풍 놀이를 가던 작은용굴은 청남대의 출
입구가 되어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기에 구경조차 서먹하다. 그래도
고향은 고향인지라 조상님들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길이면 내가 태
어났던 시골집 앞을 지나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시절 뛰놀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기도 한다.
삽짝문을 열자마자 졸졸거리며 흐르는 개울물의 바로 옆으로는 우
물이 있었다. 우물터에는 동네 아낙들이 똬리를 머리에 얹고 옹기 질
그릇을 이고 물을 길러 오기도 하였고, 한 겨울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린 손을 비벼가며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기도 했다. 또한 동네
의 갖가지 소문은 이 곳에서 만들어지기 일쑤였으며, 어떤 이야기들
은 시집살이의 설움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도록 웃음꽃을 나누게도
하였다.
봄이면 논두렁에 피어나는 햇나물을 뜯어다 고추장에 비벼 먹고,
여름에는 마을 어귀의 방죽에서 발가벗고 멱을 감거나 피라미를 잡
기도 했고 가을이 되면 허수아비와 함께 참새 떼를 쫓으며 메뚜기를
잡아 볶아 먹기도 했다. 학교 길엔 진달래꽃이나 아카시아 꽃을 따먹
기도 했고 밤에는 날새는 줄 모르고 참외서리와 닭서리를 하다가 때
로는 주인에게 들켜 굴밤을 맞아 이마에 혹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이렇듯 내가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즐겁고 넉넉하기만 하던
하루하루였다. 오늘따라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겹던 그 시절의 기
억들이 화롯불에 군고구마 구워먹던 달콤한 맛이 생각나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하고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땐 그것들이 왜 그리도 맛있었
는지.......
고향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첫 햇살을 마주한 곳이고 그 햇살을
받고 쑥쑥 자라던 어린 동심의 세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안식
처이며, 언제라도 달려가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히 안겨 보고 싶은 곳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행동으로 되살리기
에는 어쩐지 어색하리 만큼 어느새 들어 버린 나이가 미워지기도 한
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도심에서 태어나거나 이국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낭만이 어린 그리운 고향이 없는 듯하여 안타
깝다 내 아들 정훈이와 정선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둘다 성남시의
한 병원에서 태어나 유년을 작은 도시에서 보냈다. 그러다 초등하교
저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가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미국으
로 건너와 공부를 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껏 콘크리크 벽으로 둘러
싸인 아파트에서만 자랐기에 두 아이들의 고향에는 아쉽게도 초가지
붕 위에 피던 하얀 박꽃이나 길옆에서 한들한들 춤을 추던 분홍 코스
모스가 없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흙먼지를 풀풀 날리던 황톳길의
추억도 없다.
이런 저런 고향에 대한 상념에 잠기다 보니, 문득 고향에 돌아가고
픈 그리움이 파도처럼 쏴 하고 밀려와 가슴을 적신다. 이제 몇 개월
이 지나면 두 아이 모두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우리 부부가 하고 있
는 비즈니스도 좀 한가해 지는 철이 돌아와 가족 모두 잠시나마 한국
을 방문할 수 있겠다. 아내와 둘째 아이는 그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나야 1년에 몇 번씩이나 태평양을 건너 왔다 갔다 했고 큰아이
도 두어 번 다녀왔지만 아내와 둘째는 한국을 떠난 지 처음으로 방
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년이란 세월이 지나버린 변화 속에서 맞
이할 이번 고국 방문은 그들에게 있어 정말로 감회가 깊을 것만 같
다.
이번에 가족들과 함께 돌아가 어머니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길에는 고향 어른들을 꼭 찾아 뵈어야 겠다. 그리고 아직까지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막걸리 한잔
따라 드리면서, 그 동안 겪었던 코쟁이들과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 드려야겠다. 그리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간간이 코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고향 냄새에 사무치는 날이 얼마나 많았으며, 어르신
네들이 많이 뵙고 싶었다고 한 마디 더 곁들인다면 '그놈 참, 서양
물을 먹었어도, 그래도 된 놈'이라고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시겠지...
하고 상상도 해 본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이국생활 속에서도 어린 시절의 고향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순환되고 일에 대한 열정도 샘솟기에 활력이
되기도 한다.
오늘밤에는 단꿈에 흠뻑 젖어, 인심이 푸짐하던 내 고향 뒷동산에
올라 하모니카를 다시 한번 애절하게 불어 보아야겠다.
2003 16집
첫댓글 고향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첫 햇살을 마주한 곳이고 그 햇살을 받고 쑥쑥 자라던 어린 동심의 세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안식처이며, 언제라도 달려가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히 안겨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행동으로 되살리기에는 어쩐지 어색하리 만큼 어느새 들어 버린 나이가 미워지기도 한다.
어머니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길에는 고향 어른들을 꼭 찾아 뵈어야 겠다. 그리고 아직까지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막걸리 한잔
따라 드리면서, 그 동안 겪었던 코쟁이들과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 드려야겠다. 그리고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간간이 코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고향 냄새에 사무치는 날이 얼마나 많았으며, 어르신
네들이 많이 뵙고 싶었다고 한 마디 더 곁들인다면 '그놈 참, 서양
물을 먹었어도, 그래도 된 놈'이라고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시겠지...
하고 상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