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설레임으로
최복선
나는 기적소리를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눈을 감으면 봉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아지랑이가 너울거리듯 환영
으로 떠오르고 칙칙폭폭 꽥 하고 질러대던 그 소리는 지금도 환청처
럼 들려온다. 어린 시절에 듣고 자랐던 기적소리는 낮잠을 자고 일어
났을 때 해 그림자 길게 이울고 아무도 없는 집안의 정적 속에서 느
꼈었던 그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청주 역 광장에는 승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원두막이
조성되고 있었다. 개찰구 옆에는 역무원들이 농사를 지어 수확한 마
른 수수목과 조 그리고 옥수수가 다발로 묶여서 지게 위에 얹혀 있는
데 가을날의 들녘을 보고 있는 듯 정겨워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개찰구를 나오자 색색의 페츄니아 꽃이 무더기로 피어 화사한 미
소로 지나는 바람 몇 줄기를 잡아끌어 술렁거렸다. 꽃과 바람의 만남
으로 적막했던 한 낮의 역사는 생동감이 넘쳤다.
이별과 상봉 그래서 슬픔과 기쁨이 철길처럼 복선으로 깔려 공존
하는 곳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만 보고 달려야 하는 철로 위를
충북선이 나를 싣고 달리고 있다. 충북선은 조치원에서 제천의 봉양
역까지로 길이가 115.5㎞인데 일제 강점기 때 착취 물을 실어 나르
는 도구로 쓰였다고 한다. 주린 배 채워보지도 못하고 농작물을 약탈
하여 싣고 간 것도, 조선의 사람들을 징역으로 끌고 간 것도 총 칼
옆에 차고 일제가 이 땅에 발 내딛게 했던 것도 기차였으니 기차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공포의 대상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기
차역에 가까이 살았던 우리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쑥떡을 먹이곤 했었다.
몇 해 전 청주공항이 개항되면서 신설된 공항 역이 가까워지자 마
침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공을 나는 비행기를 볼 수 있었다. 저 비행
기는 어디를 향해 날고 있을까. 내륙지방인 충청이 외국으로 진출의
길을 틀 수 있었던 것도 청주공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해
방이 되면서 기차는 우리의 교통수단으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였
다. 세월은 흘러 근대화의 바람이 불고 산업화라는 명분으로 개발의
바람이 빠르게 휩쓸고 지나갔다. 충북선은 고속도로 확장으로 고속
버스와 승용차에 밀려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충북의 산업발전을
위해 충북을 관통하는 중부고속도로에 그 배턴을 넘겨주었다 할 수
있겠다.
떠난다는 것은 상실감에 대한 명분이기도 하지만 설렘이기도 하
다. 가물어 하천의 바닥이 드러나고 논두렁이 쩍쩍 갈라져 농사지을
물 때문에 동기간 같은 이웃과 싸움을 하고 농심을 애끓게 하였던 단
비가 내려 다행이다. 꽃이 지고 난 산은 녹음방초가 아름답고 들에는
들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야가 단비를 머금
어 더욱 싱그럽듯 사람은 고통에 휘둘려봐야 성숙해지나보다. 충주
역을 알리는 구내 방송이 귓가를 스치고 탄금대가 멀리 그림처럼 아
름답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소수의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를 반복
한다. 충주댐 하류 동량천 위를 달리는 충북선은 현재 통일호가 왕복
3회, 무궁화호는 7회, 화물열차도 70회가 하루 동안 운행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승객들이 줄자 기차의 활성화를 위한 방편으로 청주역 자체에서
테마여행을 계획하여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정동진과 강릉행 관광열
차가 운행되는데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는 매일 운행한단다. 편
지는 사라져 가는데 기차의 낭만은 그래도 맥을 이어 다행이다. 차창
밖의 풍경에 빠져 어느새 정차한 역은 강원도의 태백선과 단양을 경
유하여 중앙선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새이며 충북선의 대표 격인 제
천역에 정차하였다.
일상을 벗어 나는 것은 새털과 같은 마음을 갖게 해준다. 주변의
것들을 잠시 접고 홀로 떠나고 싶은 것은 일상으로부터 탈피가 아니
라 더욱 진하고 끈끈하게 삶 자체를 끌어안기 위한 무언의 몸부림인
지도 모르겠다. 문득 유치환의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시가 떠오
르는 것은 왜일까.
달아 나오듯 하여/ 모처럼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새에
자리잡고 앉으면 이렇게 편안함이여/ 의리니 애정이니/ 그 습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 나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나를 싣고 정동진에 내려 줄 기차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파
도소리는 벌써 내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하다.
첫댓글 일상을 벗어 나는 것은 새털과 같은 마음을 갖게 해준다. 주변의 것들을 잠시 접고 홀로 떠나고 싶은 것은 일상으로부터 탈피가 아니라 더욱 진하고 끈끈하게 삶 자체를 끌어안기 위한 무언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떠난다는 것은 상실감에 대한 명분이기도 하지만 설렘이기도 하다.
주변의것들을 잠시 접고 홀로 떠나고 싶은 것은 일상으로부터 탈피가 아니라 더욱 진하고 끈끈하게 삶 자체를 끌어안기 위한 무언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