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비밀/유진택-
싸리나무가 빳빳한 잎으로
안개를 쓸어내는 이유를 안다
안개가 슬슬 물러나면
새악시 같은 산의 얼굴이 비치고
엉엉 우는 산의 부끄러운 울음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짐승이 우는 소리다
산이 우는 소리는 바람과 낙엽이 싸리나무 잎새에 쓸려
산속에서 구르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것뿐,
짐승이 우는 소리는 천 갈래 만 갈래
산의 가슴을 찢어놓는다
숨어 지낼 것도 없는 산의 허전함 속에
백년 묵은 박달나무 밑이거나
어둠이 꽉찬 동굴 속에 짐승이 새끼를 치면
누군가가 바람처럼 훔쳐가고
낙엽이 대신 뒹굴며 운다
꽉 막힌 산속에는 뿌리깊은 나무뿐이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 속의 낙엽지는 소리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잃어버린 새끼 찾아 헤매는
고달픈 어미의 걸음걸이
-가리왕산 숲의 비밀/윤준경-
이 쓸쓸한 나이에 비밀 하나쯤 갖는 게
무슨 큰 흉이 될까만
흰 눈 속에서 지금은
휴식의 숨을 고르고 있을 그대
푸른 입을 열어
내 작은 몸을 받아들일 때
천지는 회색에 잠겨 고요한데
알아들을 수 없는 축복의 방언이
수 수 수 온 산을 흔들었지
나는 어느 신선의 딸이 되어
몸은 둥둥 구름 위로 떠올라
그대의 부드러운 숨결 옆에
남은 생의 살림을 차리고 싶었지
인생의 황홀한 순간이 어디 오래 간 적 있던가
마침내 선잠을 깬 산새와 다람쥐와
더듬이 긴 벌레들마저 우리를 반길 때
날이 밝기 전에 나는 떠나야 했어
산 향기 촉촉이 묻은 그대의 손을 놓고
지금도 조금씩 꺼내보는
가리왕산 숲의 비밀, 아무도 모르지
가리왕산이 가려준
그대와 나의 은밀한 사랑이야기
-침묵의 비밀/김자흔-
쉬잇!
우리고양이 입은 비수 두 개로 받쳐져 있고요
그래서 함부로 남의 말을 내뱉지 않고요
비밀 따윈 절대 발설하지 않지요
어떤 이들은 침묵의 틈새로 새 나오는
우리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귀 기울이면 어떤 비밀이
당신의 달팽이관으로 흘러들지도 모를 테지요
우리의 침묵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건
당신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테고요
언어를 끄집어내는 비밀과 그 비밀을 숨기는 과정은
매일 밤 자라나는 흰 수염에 있다는 것도
금방 발견해낼 수 있을 테지요
어쩌다 애꾸눈을 만나기도 할 텐데요
그러면 그 애꾸눈 속에도 어떤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구나 보면 틀림없을 거예요
우리가 언제 무슨 해답을 구한 적이 있던가요
그건 무엇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고요
무해한 말이 주는 오해는 이미 터득했으니
우린 다만 깊은 침묵으로 우리 고양이
언어의 그물망을 즐길 따름이지요
-비밀수첩 2/김명서-
나비族들이 암술에 꽃가루관을 꽂고
분탕질을 한다
1의 봉오리 쓰러지고
2의 봉오리 쓰러지고
3의 봉오리 쓰러지고
(……)
33의 봉오리 쓰러지고
4의 봉오리
간신히 일어나 퉁퉁 불은 다리에 힘을 준다
통나무처럼 감각이 없다
엉금엉금 기어가 위안소 밖을 내다본다
나비族들 바지춤을 잡고 차례를 기다리는데
일몰을 흔드는 뱃고동소리
섬을 한 바퀴 돌아와 적막을 끌고 가는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낭떠러지 저 아래
꽃으로 와
제대로 피지도 못한 시신들
피맺힌 가슴에 박힌
칼날과 총알, 살기를 품고 있다
탈출, 임신, 매독
금기어들
한 뿌리로 연결되어있다
잊혀진 혼백들
바람이 되고
새가 되어
날갯짓을 한다
-비밀공작/김자흔-
공작은 꼬리 깃털에 비밀을 감추고 있다
공작 날개가 우아하다고 쓰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아르고스가 떨어뜨린
백 개의 죽은 눈동자
그러기에 그런 맹목적 충성을 다하는 게 아니었지, 다시는 헤라의 거짓 장난에 놀아나지 않겠다,
다시는 미혹의 피리소리에 잠들지도 않겠다, 귀족 날개로는 더더욱 춤추지 않겠다, 둔 다짐에 거
듭 다짐을 두지만
그러나 슬프게도 우아한 날개로 읽는 오독이
또 한 번 너를 공작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니 빤빤한 비밀을 꽁지깃에 숨긴 공작아
화려한 꽁지 펼쳐 들기 전에 부릅뜬 눈으로 네 날개를 감시하라
어리석은 눈물 내보이기 전에 진실의 깊이로 너를 밝혀내라
아르고스에서 떨어져 죽은
백 개의 눈은 여전히
차가운 광장 바닥을 훑고 있다
-비밀은 아름답다/임 보-
비밀이 없다면
우리들의 생애는 얼마나 쓸쓸할까?
내장이 다 드러나 보이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허탈할까?
보석 같은 비밀들이 있으므로
고된 인생은 문득 영롱하다
다섯 살까지 젖꼭지를 물었다든지
일골 살까지 키를 쓰고 다녔다든지
밤을 새우며 남몰래 쓴 편지며
여름 밤 참외밭을 기던 사건이며
남자들은 새로운 여자 앞에서 늘
당신이 첫 번째라고 고백할 수 있고
바람피운 과부들도 한평생 수절했노라고
세상을 향해 큰 열녀문을 세워도 된다
숨겨둔 사랑이며, 감춰둔 통장이
삭막한 세상을 구원한다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나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부정 같은
무겁고 치사스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비밀은 언제나 우리를 신나게 한다
-모두가 아는 골목의 비밀/류미야-
해가 난 날에도 볕들지 않는
그 골목엔
생각난 듯, 자주 비가 내리고는 하였다
빗물의 뒤꿈치를 타고
그늘이 흘러 다녔다
나기만 하는 그 자리, 새 가게 또 들어선 날
말할 수 없는 나는 말 못할 마음으로
며칠 전 엎어져 있던 막사발을 떠올린다
세상엔 늘 슬픔이 몸을 바꿔 찾아오고
마른날도 여지없이 빗줄기
들이치는데
눈물이 향하는 곳을
우린 말할 수 없다
소리가 지워진 환한 유리창 너머
새로 난 별처럼 젊은 주인은 웃고
문밖엔 까만 어둠이
머뭇대며
서 있다
-비밀 파이/강윤미-
비밀스러운 작당을 한 파이
노릇하게 익은 밀가루 반죽만 보이도록 은폐하고
내용물을 감춘 파이
파이 속에 들어간
파이
파이는 어떤 맛을 사랑할까
방울토마토 체더치즈
블루베리 채 썬 사과
온갖 재료를 그러안은 파이
식욕마저 다독이며 멀리 따돌린,
그렇게 믿고 싶은 식욕의 저녁
당신의 생각은 어떤 냄새가 풍길까
파이를 한 입 베어 물면서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고
당신이 되지 못한 당신의 가능성을 표절할 수도 있지
당신의 말은 어떤 색깔을 입었을까
불어를 하며 턱을 매만지고
일본어를 하며 커피를 마시는
다른 날씨를 가진 당신들의 언어
파이를 파헤치는 포크와 칼
비밀 파이의 비결은
당신이 시인인 줄 몰랐다는 데 있다
-비밀과 거짓말/한고운-
양파껍질을 벗기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벗기면 벗길수록 눈물은 더 흐르는 것이다
양파껍질이 거짓말처럼 그릇 속에 담겨 있다
툭, 껍질인지 혓바닥인지 모를 것이 떨어졌다
오늘도 나는 한 꺼풀 더 작아진다
거짓말로 자신을 겹겹이 둘러싸는 것 같지만 사실
스스로 제 비밀에 한 겹씩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는가 보다
툭, 혓바닥이 땅에 떨어진다
바알간 땅에서 새 양파를 꺼내든다
어머니의 주머니 속으로 아버지 비밀 흘러든다
나는 작은 비밀들로 이루어진 인간
숨기려고 거짓말로 겹겹이 싸다보면
의례 비밀마저 거짓말이 되고 만다
양파를 계속 벗기다 보면
그 속까지 껍질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서러워 자꾸 눈물이 나는가 보다
발자국처럼 껍질이 흩어져 있다
어머니는 그것을 집어 춘창에 찍는다
아식, 그녀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비밀, 아니 거짓말
언제나 나의 부끄러운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비밀들이 넘칠 듯 일렁인다
새빨간 혓바닥이 양파껍질처럼 그릇 속에 담겨 있다
-계단의 비밀/최금진-
추도 명단에 없는 영혼들이 준공식 의자에 앉는다
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그는
머리말도 못 새겨놓고 어느 높이까지 걸어 올라갔을까
밤이면 계단들이 마을로 떼를 지어 내려온다
우르르 몰려와 마을의 모서리와 귀퉁이를 훔쳐간다
사람들은 직각보행을 잃어버리고
그 각진 무르팍에 개망초꽃이 염증처럼 핀다
꽃 피는 계단의 무르팍을 보라
올라가지 않으면 내려오도록 설계된 계단의 힘줄을 보라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은 건 그만의 건축술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 버렸을 때는
처음 걸어온 계단부터 다시 걸어와야 한다, 얘야
머리를 풀어 헤친 노모가 증언하는 그의 가파른 생애는
어느 사찰의 지붕을 잇는 헌금으로 바쳐지고
올봄, 늙은 목련나무는 물관과 체관에 놓인 계단을 버리고
자신의 바깥을 향해 줄행랑쳤다
달에는 어떻게 가는가, 중력을 잃으면 된다
그는 달에 앉아 지구에서 잘못 보낸 우주선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모두 저문 계단을 닫아걸고
지하실 깊이 숨겨놓은 잠을 진탕 마시기 위해 내려간다
그 길은 포르투갈 어느 섬과 이어져 있고
누가 내리다 만 줄 하나가 대롱대롱 자전하고 있다
어미가 보고 싶을 땐 이 줄을 힘껏 당겨라
몸을 접어 계단을 놓아주마, 그리로 오너라, 아가
-비밀 정원/강기원-
더러운 우리 속에서 뒹굴던 그는
그 넉넉한 살집 속에 아무도 모르게
꽃을 피워 놓고
낙엽을 떨구고
갈매기를 기르기도 합니다
불그레한 뺨 옆에 핀 꽃은
덩달아 분홍이요
갈매기 접은 날개는
언제 푸드득거릴지 모를 일이지요
허기진 이들이야 그저
꽃살, 낙엽살, 갈매기살, 항정살……
구워 먹기에 바쁘지만
그게 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비밀 정원이었던 셈입니다
누구나 비밀 한 뙈기쯤 깊은 살 속에 숨겨 놓고 있듯이
-난로의 비밀/이미화-
그 전엔 잘 몰랐다
당신 가까이 닿고 싶다
우리는 몸 안에 난로 하나씩을 갖고 있다
젊은 날 서로를 밀치고 으르렁댄 것도
몸 안의 난로가 뜨거웠기 때문,
물을 끼얹어보면 안다
난로는 차가움을 만나면 하얀 김을 내뿜는다
이내 반응을 한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난로는 따뜻하다
난로는 즐겁다
너와 내가 난롯가에 앉아서 온기를 즐기는 건
몸 안의 것들이 식어가는 게 안타깝기 때문,
난로 냄새가 좋다
사람 냄새가 좋다
군고구마가 먹고 싶다 군밤이 먹고 싶다
난로를 끌어당긴다 너를 끌어당긴다 나를 끌어당긴다
-비밀/손수진-
어느 비 오는 밤 여자가 돌아왔다
오래 떠돌았는지
여자의 아랫배는 비릿한 바람 냄새가 묻어 있었다
여자의 눈빛은 간절했고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여자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듣는 일뿐
그 밤 소쩍새는 밤 깊도록 울었고
기다리지 않아도 아침은 오는 것
남자가 방문을 열자
비릿하게 풍겨 나오는 어린 것의 냄새
여자의 머리카락은
파르스름한 이마 위에 축축하게 흘러내리고
여자는 살굿빛 혓바닥으로
눈도 뜨지 못한 어린 것의 몸을 구석구석 핥고 있었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 것의 등에는
검은 반점이 찍혀 있었다
-비밀번호/김환식-
허공이 흠뻑 젖었습니다
더 서럽게 비를 안아봅니다
허공을 우산 속에 숨겨놓고 싶지만
그만큼 커다란 우산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바람과 일탈을 꿈꿔보는 것입니다
빗소리에도 촉촉하게 젓는 것이 그리움인데
마음이 먼저 몸살을 하고 오한을 느낍니다
함박눈처럼 똘똘 비를 뭉쳐서
오뉴월에도 녹지 않은 눈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
서너 달쯤은 그를 품고 살았으면 합니다
첫눈에 뒤집힌 콩깍지 하나 때문에
무작정 그를 흠모하며 살아온 우리는
늘 사랑이 고파 출출한 민초들로 삽니다
저만큼 비구름도 반가워 마중을 나옵니다
사랑은 늘 빗물보다 명도가 높습니다
추억이란 이름도
참, 비를 좋아하는 명사중의 하나입니다
가만히 손바닥을 펴고 앉았으면
계면쩍게 찾아온 사랑이 눈물처럼 고입니다
가끔은 빗물도 비스듬히 어깨가 기웁니다
한 폭의 추상화에 기대보는 것입니다
뻣뻣했던 그의 어깨도 그리움에 젖으면
쉽게 구겨진 추억처럼 몸살을 앓습니다
소나기 지나간 길바닥 연못에는
구겨진 표정들이 서로를 빤히 쳐다봅니다
또 한 고비 비바람이 지축을 흔들고 나면
잠시 그가 머물렀던 연못에도
운명처럼 손금 몇 개가 각인되고 맙니다
긁고 문질려도
처음부터 지워질 생각은 아주 버린 것입니다
더 오래 간절하게 동행하고 싶지만
지워야 할 사연조차 씻지 못한 우리는
생각의 물음표를 품고 신열을 끓입니다
입으로는 다 버리고 다 버렸다 하면서도
덧칠한 기억들만 끌어안고 바둥거리는 것입니다
함께 우산을 쓰고 걸었던 그 골목길의 사연들도
함께 비를 맞았던 시간의 초췌한 얼룩들도
시든 꽃잎을 비질하듯 쓸어내지 못합니다
그냥 그렇게 감금당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먼 산의 능선보다 더 큰 그림자가
곤궁한 삶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있습니다
이젠 그 비를 그치게 할 비밀번호를 찾아서
우리는 먼 길을 까마득히 떠나야 합니다
-영업 비밀/성명남-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나는
예상한 것보다 더 검정이다
화장한 얼굴을 열면 또 다른 검정이 열렸다
검정을 감추려고 명랑한 립스틱을 발랐다
입꼬리를 올려 의식적으로 표정을 바꿨지만
사소한 말투에서 나를 들킬 때면
없는 엄마로부터 긴 잔소리를 들었다
오래 자랐어도 다 자라지 못한 걸까
흔하게 범하는 거짓 감정을 밟으며 밟으며
도덕적이지 않아도 멀쩡하게 흘러가는 나날들
한 번 쓰고 지우는 뉘우침은
입술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검정의 순간을 묵인했고
여기를 꾸려 가려면 어쩔 수 없어요
없는 엄마한테 변명하곤 별거 아닌 듯 뻔뻔해졌다
달아나는 것은 무엇이든 쫓는 들개처럼
하루가 될 만한 것은 악착같이 쫓았다
반듯한 내일이 오늘을 거부할지도 모르는데
-비밀의 속성/한혜영-
그는 절반으로
쪼갠 비밀을 세상에 없는 검정사과라며 당신에게 건넸습니다
비밀을 공유하게 된 당신은
자꾸 입으로 빠져나오려는
나뭇가지를 당황해하며 툭툭 분질렀지요
그러자 감당 못 하게 뿌리가 나서
당신은 결국 검정사과나무로 붙박였습니다
오가는 이들이 손 타기 쉬운
나지막한 당신은 조마조마한 비밀을 이파리 아래 은밀하게
숨겨놓았지요 검은 손들이 뒤지기 알맞은 높이에
숨겨둔 비밀은 한층 아름답게 익어갔지요
그것을 따간 누군가는 그 기가 막힌 맛을
나하고 나누었고
그것의 대가로 나는
나뭇가지처럼 자라나오는 혀를 분지르기에 급급해졌습니다
-어머니와 비밀번호/한상림-
어머니가 비밀 문을 열어주던 날
비밀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거라고
해마다 생일이면 백설기 시루를 장독대에 올려놓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육남매 뒷바라지에 등허리 굽은 어머니에게
비밀번호는 자식들이고, 나에게는 그냥 어머니다
응급실로 실려 가시던 날 마지막까지
양손에 비밀번호를 꼭 쥐고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
가끔 비밀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
나는 자주 다니던 길도 되돌아온다
길들인 습관처럼 자동으로 숫자를 누르면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뜨는 경고창,
세상이 복잡한 건지 내가 복잡해진 건지
비밀번호를 덕지덕지 달고 살면서
어디 숨겨둘 만한 비밀창고 하나 없다
머릿속 어딘가에 깊이 저장해 놓고 몰래 꺼내 봐도
점점 흐려지고 멀어지는 내 기억력을
나조차 믿을 수 없다저 세상에 가신 어머니 또 비밀번호를 바꾸셨는지
가끔 기억을 클릭해도
어머니는 열리지 않는다
[돌샘 이길옥 모음]